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일본 장교단의 젊은 엘리트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보병대위가 大本營(대본영) 육군부 작전과로 발령된 것은 1939년 12월 초순이었다. 대본영은 戰時(전시)에 만드는 임시 지휘체제였다. 당시 대본영 참모총장은 皇族(황족)인 閑院宮載仁親王 元帥(원수)였다. 75세였다. 그는 세지마 대위가 신고하러 가니 “君(군)은 나이가 얼마인가”라고 물었다. 27세라고 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君은 아직 젊으니 먼저 상황의 전반을 잘 공부하세요. 그리고 항상 大局(대국)을 놓치지 않도록 하면서 자신의 見識(견식)을 함양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
 세지마는 작전부 作戰課 작전반의 소속이 되었다. 그는 먼저 國防用兵(국방용병) 전반에 대한 연구 및 作戰課 전체의 총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대본영 육군부는 네 가지 문제로 苦心(고심)하고 있었다. 노몬한 사건의 뒤처리, 中日전쟁의 장기화, 육군군비 증강 계획의 재검토, 그해 독일이 시작한 유럽 전쟁에의 대응.
특히 1937년에 시작된 中日전쟁이 골칫거리였다. 일본군은 중국 대륙의 점과 선을 확보하고 있을 뿐 蔣介石(장개석)이 지휘하는 중경의 국민당 정부는 철저한 抗戰(항전)을 선언, 미국 등 국제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세지마는 자신의 回想錄(회상록) ‘幾山河’에서 일본이 태평양 전쟁으로 끌려가는 계기는 中日전쟁이었다고 반성하였다. 세지마는 기밀서류를 관리하고 있었으므로 중일전쟁 시작 1년 전 일본 육군의 천재로 불리던 이시하라 간지 작전과장이 작성한 문서를 읽을 수 있었다.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 만주국을 만드는 데 主役(주역)이었던 이시하라 대좌는 이렇게 썼다.
<일본은 모든 노력을 만주국 건설에 집중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육군은 소련의 위협에, 해군은 미국의 武力간섭에 대처하여야 한다. 다른 방면에서 우리의 國力(국력)을 소모하는 것을 절대로 피해야 한다.>
이시하라는 만주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이해하였으나 중국까지 침략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모험노선을 선택, 그 1년 뒤 中日전쟁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1939년 12월, 세지마가 대본영 육군부 작전과에 배속되었을 때 작전과는 1940년도 육군작전계획안을 만들고 있었다. 세지마는 육군과 해군 사이의 협력 부문을 맡았다. 해군 작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서태평양을 침공하는 미국 함대에 대한 요격 작전’이었다. 세지마는 <태평양 전쟁의 주체는 해군이고, 육군은 해군의 작전을 지원한다>는 입장에서 <유사시 육군은 일부 병력으로 라바울을 점령한다>는 항목을 추가하였다. 해군과의 이런 인연으로 하여 세지마는 나중에 연합함대 참모를 겸하게 된다.
당시 일본군의 통수권자는 昭和천황이었다. 대본영은 참모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천황의 재가를 얻어 작전을 사실상 주도하였다. 대본영의 참모총장은 육군을, 군령부총장은 해군을 관장하였다. 통수권 운용의 핵심은 ‘국방용병작전’이었고 이와 관련하여 천황에게 上奏(상주)하는 일을 作戰課(작전과)에서 담당하였다. 전문가가 아닌 天皇(천황)이 독창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었으니 사실상 作戰課가 전쟁 지도 업무를 주도한 셈이다.
1940년 7월27일 대본영과 정부의 협의체인 ‘대본영정부연락회의’는 ‘세계정세의 推移(추이)에 따른 時局處理要綱(시국처리요강)’을 결정하였다. 그때 독일은 유럽에서 전격전으로 프랑스군을 6주 만에 궤멸시키고 영국군 40만 명은 덩켈크에서 九死一生(구사일생)으로 철수하여 돌아갔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아 유럽을 장악, 영국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런 정세 변화 속에서 결정된 ‘時局처리요강’은 그 뒤 일본의 進路(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요강의 핵심은 유리해진 정세를 이용하여 中日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기회를 봐서 東南亞(동남아)를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하여 독일 및 이탈리아와 정치적 결속을 강화하고 미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對美(대미) 교섭을 추진한다. 동시에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武力(무력)사용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이 요강에 따라 1940년 9월 일본은 독일 및 이탈리아와 함께 ‘三國(삼국)동맹 조약’을 체결한다. 이로써 일본은 영국과 미국을 敵(적)으로 돌린 셈이다. 일본의 국가 지도부는 승승장구하는 독일의 國力(국력)과 戰力(전력)을 과대평가하고 영국과 미국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세지마는 回想錄(회상록)에서 적고 있다.
이 무렵 히틀러는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에 대하여 “우리 편에 서서 영국을 치자”는 제안을 한다. 프랑스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그러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프랑코는 독일 및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 內戰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인 공화파에 이겼지만 영국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였다. 영국이 비록 고립되었지만 절대로 항복하지 않고 정부를 캐나다로 옮기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히틀러를 만나러 오면서 고의로 두 시간이나 늦게 도착하였다.
히틀러를 驛(역)에서 기다리게 함으로써 그를 화나게 하여 회담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프랑코는 參戰(참전)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해놓고는 독일이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전제조건을 제시하였다. 프랑코의 교묘한 修辭(수사)에 질린 히틀러는 “그 자와 만나 이야기하는 것은 생이빨을 빼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만약 이때 프랑코가 일본처럼 오판하여 독일에 협력하였다면 2차 대전 이후 패전국 대우를 받아 스페인 사람들이 고생하였을 것이고, 그의 정치적-육체적 생명은 끝났을 것이다. 일본의 誤判(오판)은, 급변하는 상황에서 戰時(전시) 외교에 실패하면 국가와 국민이 불행해진다는 좋은 사례이다. 일본은 러일 전쟁에선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아 겨우 이겼는데, 그 恩人(은인)을 敵(적)으로 돌린 것이다. 더구나 일본은 석유 등 중요한 戰略(전략)물자의 수입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事物(사물)을 좁고 깊게 보는 데는 능하지만 넓게 종합적으로 보는 데 약한 일본인들은 경제와 전술에선 잘 하지만 외교와 戰略(전략)에서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임진왜란도 그런 사례이다.
 세지마의 회상록에 의하면 作戰課(작전과)는 동남아 확보 작전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작전과장 오카다 대좌는 “우리가 연합함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無言(무언)의, 위대한 發言力(발언력)이다”고 말하였다.
 세지마는 남방작전의 육군측 主務(주무) 참모로서 홍콩에 密派(밀파)되었다. 미쓰비시 상사원으로 위장한 그는 상륙작전을 위한 地形 조사를 하였다. 작전과는 싱가포르-말레이시아 작전, 인도네시아 작전, 홍콩 작전, 필리핀 작전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모두가 상륙작전이므로 戰略(전략)급습, 制空權(제공권) 확보, 작전부대의 기계화가 필요하였다. 세지마는 작전반장의 지시에 따라 남방작전의 전반적인 종합계획 작성을 책임졌다. 세지마는 “미국과의 결전은 피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계획을 짰다고 한다.
대본영 작전과는 中日(중일)전쟁을 끝내기 위하여서는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지나 반도의 북부, 즉 지금의 하노이 일대를 확보하여 비행장을 건설할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일본 군부가 ‘援蔣(장개석 지원)루트’라고 불렀던 ‘佛印루트’와 ‘버마-昆明루트’를 봉쇄하기 위하여서는 하노이 근방에 비행기지를 두고 이 루트를 폭격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프랑스 식민통치당국을 상대로 외교 교섭에 들어가 군대를 평화적으로 進駐(진주)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武力(무력)점령이 되었다. 1940년 9월26일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즉각적으로 반발하였다. 미국은 철강 제품의 對日(대일)수출을 금지시켰다. 영국은 잠시 닫아놓았던 ‘버마 援蔣 루트’의 再開(재개)를 통보해왔다. 美英(미영)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모두가 무리한 中日전쟁 때문이었다.
1941년 봄 세지마 대위는 작전반장의 보좌로서 작전의 전반, 특히 全軍(전군)의 병력 운용을 맡는 한편 북방반에 소속하여 만주 주둔 關東軍(관동군)을 시찰하였다. 그해 4월 일본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인 중립조약을 맺었다. 일본 육군은 전통적으로 소련을 主敵(주적)으로 보고 관동군을 重視(중시)하여 왔는데, 어느 새 미국을 主敵으로 돌려놓은 셈이다. 이런 방향선회의 가장 큰 판단 근거는 독일군이 유럽을 장악하고 영국을 제압할 것이란 전망이었다.
그 독일군이 1941년 6월22일 소련을 기습 침공하였다. 5월부터 대본영에는 獨蘇開戰(독소개전) 가능성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6월6일 駐獨(주독) 일본 대사 오시마는 히틀러를 면담하고 독일이 소련을 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일본군 상층부에선 이 기회를 이용하여 宿敵(숙적) 소련을 칠 것인가 동남아로 나갈 것인가, 즉 北進(북진)이냐 南進(남진)이냐의 격론이 벌어졌다. 육군성, 해군, 작전과장은 “이 기회에 북방의 부담을 줄이고 남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육군의 작전부장은 “다년간의 현안인 북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북진해야 한다”고 반박하였다. 세지마의 회상록에 따르면 독일의 소련 침공 소식에 접한 한 작전장교는 “히틀러가 오판했어!”라고 소리 질렀다고 한다.
대본영 陸海軍部는 獨蘇전쟁이란 새로운 상황에 대한 지침을 마련, 御殿(어전)회의를 통하여 천황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받았다. 만주의 병력을 증강하여 사태의 추이를 관찰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소련군도 병력을 증강하였다가 일본군의 北進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곤 獨蘇전선으로 다시 보냈다. 소련은 조르게 등 간첩망을 통하여 일본군의 방침을 알았다고 한다.
일본 대본영은 남방작전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점령작전을 위하여서는 인도지나 반도의 남쪽을 확보하여 항공기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당시 인도지나는 프랑스의 남쪽에 세워진 비시 정부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엇다. 비시 정부는 독일의 압력을 받아 일본군의 進駐(진주)를 허용하였다. 7월 말 일본 제25군이 월남지역에 無血(무혈) 상륙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 영국, 네덜란드는 일본의 資産(자산)동결 및 석유 禁輸(금수)조치를 취하였다. 당시 일본의 석유재고량은 1년분 남짓이었다. 독일을 믿고 달렸던 일본은 코너에 몰렸다. 對美(대미 협상을 통하여 難局(난국)을 타개하려는 노력을 하는 한편 對美전쟁 준비에 들어간다.
일본 고노에 총리는 미국측에 대하여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지나 이외의 지역으로는 진출하지 않는다, 필리핀의 독립을 존중한다, 미국은 일본과 정상적인 무역관계를 회복시킨다는 3개항을 제의하였다. 미국은 전제조건을 제시하여 사실상 이 제의를 거부하였다.
일본은 9월6일 御殿회의를 통하여 “10월까지 우리의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으면 미국, 영국, 네덜란드에 開戰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0월2일 미국은 일본에 대하여 회답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중국과 인도지나에서 완전 撤兵(철병), 삼국동맹의 사실상 무효화 요구였다. 대본영은 1941년 10월 말까지 작전계획을 완성하였다. 중국에서 철병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엔 일본이 너무 나가 있었다. 일본 지도부는 “경제봉쇄를 당하여 미국에 굴복하느니 스스로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는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難局 타개의 핵심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油田(유전)지대를 점령, 석유자원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은 그 본질이 석유전쟁이었다. 
고노에 내각이 美日(미일) 교섭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辭職(사직)하고 일본 陸軍相 도조 히데키 대장이 1941년 10월18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天皇은 도조 총리에게 “9월6일 御前회의 결정에 구애받지 말고 內外 정세를 재검토하여 신중하게 대처하라”고 지시하였다.
 정부와 대본영은 11월2일 “武力발동 시기를 12월 상순으로 정하고 마지막 對美(대미)교섭을 시도하며 독일 및 이탈리아와 제휴를 강화한다”고 결정하였다. 이 사흘 뒤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3시 넘어까지 진행된 御殿회의는 육군과 해군의 작전계획을 통과시키고 천황의 재가를 받았다.
도조 내각은 11월7일 노무라 미국 주재 대사를 통하여 “日中간에 평화가 성립하면 2년 내로 일본군을 중국과 인도지나에서 대부분 철병한다”는 약속이 포함된 안을 제시하였다. 11월 초순 駐美(주미)대사 노무라는 헐 국무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이것이 일본의 최대 양보안이다”고 설명하였다. 미국측의 반응은 차가왔다. 헐 장관은 “일본이 독일과 제휴하고 있는 한 美日관계의 조정은 불가능하다. 먼저 이 근본적인 장애물을 제거하지 않으면 협상할 수 없다. 미국의 평화정책과 히틀러는 相容(상용)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11월20일 일본정부는 대사에게 “우리의 최종안으로서 남부 인도지나 進駐 이전으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을 담은 乙안을 제시하라”고 훈령하였다. 헐 장관은 이틀 뒤 ‘인도지나 철병만으로써는 국면타개가 불가능하다” 답변하였다. 11월26일 헐 장관은 미국의 새로운 제안을 내어놓았다.
‘헐 노트’로 알려진 이 제안은 “중국과 인도지나로부터 전면 철수, 중국에서 중경정권 이외의 정부는 인정하지 않는다, 삼국동맹의 死文化”를 요구하였다. 일본은 이 문서를 최후통첩으로 간주하고 기습작전 시행에 돌입하였다. 12월1일 오후 御前회의는 開戰을 결정하였다.
세지마는 進攻(진공)명령, 開戰日에 관한 명령 등 作戰사무에 종사하였다.
 남방군 총사령관 데라우치(寺內壽一) 대장에게 '히노데와 야마가타'라는 開戰 암호문을 打電(타전)한 것도 세지마 대위였다. 그는 이 開戰(개전)명령서를 새 붓과 먹으로 썼는데, 손이 떨렸다고 한다.
昭和천황은 전쟁으로 나아가는 데 대하여 주저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많다. 세지마는 戰後(전후), 후배인 아라이 기미오(제2차임시행정조사위원회에 참여)씨에게 “천황은 內戰을 걱정하여 開戰을 결단하였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천황이 군부를 누르고 외교적인 방법만 모색하였다면, 그리하여 中日전쟁에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군의 강경파가 2·26 사건과 같은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세지마는 일본의 전쟁 지도 기능이 정부와 군으로 兩分되어 있었고 통합 기능이 미비된 점을 여러 군데서 비판한다. 그는 또 육군과 해군 사이의 정보 교류가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인정하였다. 1942년 6월 일본 연합함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해군에 大敗(대패)하였는데, 해군은 육군측에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고 육군 측도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사이 뒤돌아 본다면 미드웨이 해전 직후 서태평양에 있어서 금후의 작전 전반에 대하여 兩軍 사이에 솔직한 토의를 했어야 했다. 당시 해군은 미드웨이의 실패를 회의에 올리는 것을 싫어하였고, 육군도 해군과 충돌하는 것을 꺼렸다.>
세지마는 회상록에서 이렇게 반성한다.
 <첫째, 中日전쟁을 일으키지 말았어야 했다. 둘째, 三國동맹 체결과 프랑스령 남부 인도지나 진주를 하지 않았어야 했다. 1939년 가을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난 시기를 이용하여 중일전쟁의 대승적 해결, 즉 점령지로부터의 철병을 단행하였어야 했다. 1941년 10월 도조 내각 성립 때 萬難(만난)을 무릅쓰고 對美교섭을 통하여 三國동맹을 파기하고, 만주 이외의 지역으로부터 철병하였어야 했다. 물론 이 대결단은 국내적으론 군과 관련되는 일이고 미국이 응락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지만...국가는 생존과 발전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 발전에 치중하여 절도와 한계를 잃으면 생존이 위험해진다. 당시 우리나라는 지도원리가 확립되지 않았다. 무리하게 발전을 추구하여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일으키다가 보니 생존이 어렵게 되었다. 필수적인 자원인 석유 등을 미국과 영국에 의존하면서 두 나라를 敵對視(적대시)하다가 전쟁으로 가서 지고 말았다. 만주를 제외한 중국 및 滿蒙(만몽)지역으로 세력권을 확대한 것은 발전의 한계를 넘는 暴走(폭주)였다>
 세지마는 정보 판단의 실수도 지적한다.
 < 一元的인 국가통합정보기구가 없었다. 육군은 주로 對蘇, 對獨 정보 수집에 주력하였다. 해군은 對美英 정보수집에 열중하였다. 육해군이 다 군사적 정보수집에 치중하였다. 정치적, 경제적 정보를 포함한 국력의 종합적 판단을 소홀히 하였다. 이런 정보 부족으로 우리 민족의 성격상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보다는 심정적이고, 희망적인 판단으로 흘렀다.
 명치헌법에 의하여 국가의 통치는 천황이 총람하고 정부와 군통수부는 천황을 보필하게 되어 있었다. 정부, 육군, 해군이 國策 추진기관이었다. 총리, 외무장관, 육군 해군 장관, 육해군의 통수부장의 여섯 명이 합의하게 되어 있었다. 시간을 다투는 문제를 결정하는 데는 너무 복잡하였다. 통수권의 독립과 現役(현역)무관제가 더욱 사태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가운데서는 국가지도원리에 입각한 大英斷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옛날 사람이 이야기하였다.
 “이 세상에 不變(불변)하는 것은 없다. 다만 하나 不變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항상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
한국인들 중 '이제 미국의 시대는 지나고 중국이 떠오른다. 중국과 협력,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일본의 誤判이 생각난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를 도운 영국과 미국을 멀리하고 독일과 친해지다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독일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代價이다. 프랑코는 영국의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 독일의 참전 요구를 거절, 國體를 보존하였다. 
중국이 종합 國力에서 미국을 능가하는 것은 200년 내로는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중국에 대한 과대평가를 경계할 때이다. 조선의 인조 조정은 쇠망하는 明과 일어서는 淸 사이에서 줄을 잘못 섰다가 병자호란을 불렀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세계제국으로 커가는 唐을 과소평가하였다가 망국의 길을 열었고, 신라의 김춘추는 唐과 동맹, 삼국통일의 길을 열었다. 지도자의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은 민족과 국가의 興亡을 좌우한다.    
독일을 과대평가, 줄을 잘못 섰다가 망한 일본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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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07, 00:47












3, 시바. 전쟁결과 일본은 수백만명의 희생과 영토를 뺏기고 몰락했지만, 그래도 전쟁 덕분에 남은 것은 독일로 부터 얻은 첨단 기술이었다.
정밀화학과 광학기술. 히틀러가 동맹의 댓가로 준 이 기술들은 전후 일본이 부흥하고, 지금도 세계를 호령할 수 있는 핵심자산이 되었다.
전쟁은 참혹하지만, 남는 것은 있다. 그것이 전쟁의 본질이다.
2. 그러나, 원래 국가의 탄생의 배경에는 전설이나 설화형태의 비현실적, 환상적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친일파 유진오가 1951년 한일협상을 준비하면서 한일협약(안)으로 41년전 한일합방 무효를 넣기로 한것은 무엇이고, 일본육사출신으로 일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인 출신의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 한일협약에서 이 한일합방조약 무효를 관철시키려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수치스런 역사를 무효로 만들려고 하는 아이러니? 웃기는 짬뽕 같은 대한민국의 역사.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당성에는 그런 정도의 억지,떼를 써야햤다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두가지, 즉 당시의 객관적 국제질서상의 한국의 위상과 한국탄생의 주관적인 떼를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1. 일본이 1937년 중국과 중일전쟁을 시작한후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지작하기 직전까지 미국이 일본에 요구한 것이 만주까지 철수 였다.(이원복 먼나라이웃나라).
즉 중일전쟁을 시작했어도 휴전을 하고 일본 자신의 힘을 만주까지 지키는 선에서만 머물렀다면, 미국이 더 이상 일본을 압박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조선은 해방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인들이 객관적으로 반성하는 역사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이점을 뼛속 깊이 새겨야 한다. 냉정한 평가인 것이다.
중국이 조선의 희망? 꿈깨라 인간들아. 중국은 한국을 지옥으로 인도할 것. 중국을 한국의 희망으로 호도한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
"....한국인들 중 '이제 미국의 시대는 지나고 중국이 떠오른다. 중국과 협력,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 는 것을 "사시"로만 볼 것만은 아니고...
얼핏 경제적으로 중국이 떠 오르는것으로 보이지만 미국이 경제적.군사적으로 최고의 국가인 상황에서...
중국이 최소한의 경제적 지원을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적더라도) 김씨왕조의 체제 유지는 충분히 가능하고, 한미동맹/ 미일동맹을 대적하기 위해 유사시 북한을 도울것이라는 희망/환상이라도 가지지 않게해야...핵무기를 믿고 전면전/남침하겠다는 의도를 제거하는 효과가 있다.
적어도 지금의 대한민국/중국과의 관계는 북한으로서는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일 것이며 , 자력으로 회생기미가 없고 중국과 경제적지원 가능성이 미미한 러시아등에 극히 편향된 상황에서, 중국의 의도가 어떠한지는 아무리 그 의미를 축소하더라도 너무도 명약관화 . 이러한 대한민국/중국과의 협력과 중국의 외교적신호/의도마저 없다면,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이라는 마음으로, 무조건적인 남침통일전쟁으로 시도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소 과장되어 말하자면, 현재의 한미동맹보다는, 미우나고우나 자기를 도울것 같았던 '중국의 대한민국접근/배신'때문에 ,북한의 착각( 미래의 남침의도) 을 저지하는 효과가 더 크게(?) 보인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 역설적으로 현재의 미국과의 동맹과 친밀도에서 더 나아가 일본과의 동맹추진등 .."한미일" 동맹의 외교적행보가 있으면 있을수록 , 중국이 북한과의 동맹과 경제적지원을 절대적으로 더 강화했으면 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며, .....어차피 미국에 겨우 의지한 우리가, 자력으로 북한을 군사적우위하에 흡수하기는 너무도 요원한 상황이라면 , 북한자체가 거의 고립된 상황에서 스스로 망하게 하여 흡수하는 방법이 유일해 보이는데....이럴수록 한미동맹에만 의지하지 않고 중국과의 관계증진도 병행하고 스스로 망하는 북한을 , 중국이 용인하는 상황을 위해 노력해야, 유사시 흡수통일의 가능성이 더 큰 것 아닌가 ?
요컨데,조갑제대표가 주장하고픈 '한일동맹' 수준으로 격상한 '한미일동맹'으로 견고해지고 강화되면 될수록 , 이것은 소련처럼 "스스로 소멸되고 망해가는" 대북한 압박/고립이 아닌 , 대중국 고립/압박인것은 삼척동자도 알만한 상황인데...이것이야말로 현상황을 유지하는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대한민국으로의 통일로의 가는 방향이 맞는가 ? 똑똑하고 혜안을 가진 조갑제대표 만큼이나, 정말로 바보같은 중국이라면 맞는말. ( 이는 지금같은 G2 경제적수준이 아닌, 90년대의 중국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마찬가지. )
만약에 이러한 대중국접근이, 드러나는 공식적 외교발언이 아니라, 미국과의 사전/사후 소통/교감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면 너무도 충분하고도 최상의 상황이며, 먼미래(?)를 보고 대중국수교를 하면서도, 노태우 정부가 이런 사전소통을 안하는 상황에서, 철수하는 대만대사를 눈물흘리게 만드는 바람에, 처지도 비슷하고 자유체제도 같은 대만/대만국민이 자기들은 현재 대중국과의 경제적으로 친밀도를 높이면서도 ...배신감이 해소되지 않고 ,대한민국을 아직까지도( 앞으로도 )심정적으로 미워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을 만면교사로 삼아야 될 것.
그런데 조갑제 대표는 왜 '한일동맹'은 바라면서도 왜 '한.대만동맹'에 대해서는 언급조차도 안하는지?
대만은 우리와는 다른 자유민주주의 체제인가?? 대만이 군사적으로 약해서 ? 대만과 동맹하면 중국에 눈치보여서( 겁이 나서)? 대만은 미국이 유사시 포기한 나라라서? 미국은 한미동맹-미일동맹만 있고 미.대만동맹은 없어서?..아무런 생각이 없으신지?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인지?
일본의 대한민국 협한정도와 대만의 대한민국 협한정도를 비교해보면 어느 것이 심할것 같은가 ?....대만이 노태우/중국과의 수교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비공식경로로라도 양해를 구하지 않았던 노태우정부의 사소하면서도/결정적인 한순간의 태도로 인한 결과가 ...오늘의 대만과의 정치적관계를 시사하는것을 .... 조갑제대표가 틈만나면 , 부정적인 비판도 없이 오로지 칭찬하는 논거를 찾아내고픈 부지런한(?)대통령인 노태우의 업적에 누가 될까바 일부러 모른체한다는 말들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광복 /625이후까지 대한민국과 최고의 협력관계를 유지한 대만보다....., 625때 경제적 이익만을 취한 일본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한미일 동맹"이라고, 합성조어에 가까운 말은 수백번 쓰면서도, 대만과의 동맹은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
그래야 조갑대표의 의견에 공감/동참하는 보수층들로 하여금, 미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너무 일본쪽으로 편향되었다는 종북이들의 비평에도 코웃음치게 만들 것 아닌가?......
참고로, 한마디로 언급되는 박정희대통령의 업적인 중화학기업 중시 정책에 결정적 역할을 한 LG ( 럭키금성 )...
화학업종과 전자산업에 선구자적 업적을 이룬 공로임에도,다른면은 몰라도 이 말과는 별 관련도 없는 삼성은 일년에 수백번 칭찬함에도, LG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칭찬/언급하지 않는 이유도 궁금하기도 했고....( 사실 마침내 최근 몇개월전에야 비로소 LG언급을 처음으로 단 한번 지나가면서 언급한 적은 있음 )..아마도 이병철회장처럼 일본칭찬을 하지않았던 구인회/구자경회장이라서 그런다는 우스개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겠지만, 아무리보아도 LG보다도 경제적 기여도가 적어면 적었을...SK.대우까지도 일년에 수십번 칭찬을 하면서도 롯떼의 이름 근거까지도 극찬하는 조갑제 대표가...정작 LG언급은 이상하리만큼 피하고....경제를 몰라서인지/ LG와 무슨 악연이 있는지 몰라도....논객으로서의 논거 편향성은 줄여야 , 보수 언론에서도 /더 많은 국민들이 조갑제대표의 말 한마디에 귀를 더 기울이고 조갑제대표의 바람대로 여론이 형성되어 동참할 것으로 본다
한없이 부럽다. 우리 대한민국은 언제나 저들의 열강 대열에 끼어 들 수 있을까.
방법은 딱 하나. 첫째도 힘, 둘째도 힘, 셋째도 힘(국력)을 키우는 것이다. -끝-
핵심을 찌르는 말씀은 참으로 돋보입니다.
근데, 일본군이 만주만 차지하고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확대하지 않았다면
조선인은 전부 일본인이 됐을 가능성도 있었겠네요?
참으로 역사는 아리숭?
2차대전의 역사를 단숨에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중국 열병식에 참석한 것은두고두고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