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언론인 손세일, 필생의 작업 《이승만과 김구》(全 7권) 완간
14년 만에 2만3000장 분량 출간(200자 원고지 기준)
前無後無할 한국 현대사 두 巨頭의 앞뒤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비교 評傳
⊙ 李承晩은 참다운 독립운동가였는가, 金九는 테러리스트였는가
⊙ 국가주의자 對 민족주의자. 그들의 神話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孫世一
⊙ 80세.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美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도쿄대 법학부 대학원 修學.
⊙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위원. 11·14·15대 국회의원,
민추협 상임운영위원, 국민회의 정책위의장, 원내총무, 한일의원연맹 부회장 등 역임.
⊙ 저서: 《이승만과 김구》 《인권과 민족주의》 《한국논쟁사(편)》 등. 역서로는
《트루먼 회고록(상, 하)》 《현대정치의 다섯 가지 사상》 등이 있음.
⊙ 李承晩은 참다운 독립운동가였는가, 金九는 테러리스트였는가
⊙ 국가주의자 對 민족주의자. 그들의 神話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孫世一
⊙ 80세.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美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도쿄대 법학부 대학원 修學.
⊙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위원. 11·14·15대 국회의원,
민추협 상임운영위원, 국민회의 정책위의장, 원내총무, 한일의원연맹 부회장 등 역임.
⊙ 저서: 《이승만과 김구》 《인권과 민족주의》 《한국논쟁사(편)》 등. 역서로는
《트루먼 회고록(상, 하)》 《현대정치의 다섯 가지 사상》 등이 있음.
글 | 김성동 월간조선기자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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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종료 후 2년여 동안 새로운 자료 보강 등 수정작업을 거쳐 전(全) 7권짜리 《이승만과 김구》 완간본을 최근에 냈으니 집필에서 완성까지 14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숫자에 밝은 독자라면 연재 횟수가 연재 기간 총 개월 수와 비교해 모자란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인데, 그 모자람은 바로 이 연재에 대한 필자의 헌신과 열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 스스로 자료가 미비하다고 생각하거나 좋은 자료가 해외에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연재를 멈추고라도 해외로 직접 나가서 그 자료들을 입수해 연재를 이어가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해외 현지까지 찾아가서 자료를 수집하는 비용은 필자 스스로 부담했다. 이 연재에 필자가 얼마나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열정을 쏟아부었나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60대 중반에 연재를 시작한 손세일씨의 지금 나이는 만 80이다. 애초 장기간에 걸친 연재를 각오하고 시작한 그는 자주 “이 일은 내 라이프 워크(필생의 작업)이고 목숨 걸고 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가끔은 나이를 의식해서인지 “이 책의 완간은 보고 죽어야 할 텐데”하는 농담을 던지곤 했다. 그러면서 그는 “문장 하나하나는 물론 글자 하나하나에도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는 말을 곁들이곤 했다.

원래 손세일씨는 이 연재를 《월간조선》이 아니라 《동아일보》가 발행하고 있는 시사월간지 《신동아》에 연재하려고 했다. 《신동아》는 그가 편집장까지 지낸 ‘친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재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자신의 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글을 다루는 데 깐깐하기 그지없는 ‘까다로운’ 필자였던 그의 연재는 《신동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글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나를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한다.
‘친정’이 아닌 《月刊朝鮮》에서 연재하게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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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후 군정기간 동안 한국 정치를 움직인 3인. 왼쪽부터 이승만 박사, 김구 선생, 하지 중장. |
해서 기자는 처음 그의 원고를 받아들고는 몇몇 문장에 조심스럽게 손을 댔다. 《사상계》와 《신동아》의 편집장까지 지낸 대선배의 글이기에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고작 200장이 넘는 원고 중 10개도 안 되는 문장을 ‘내 식’으로 바꿔보았다.
제작 과정상 손세일씨의 연재물은 초고를 받은 후 담당 기자의 손을 거쳐 편집 작업이 끝나면 다시 손세일씨에게 편집한 상태의 원고를 보낸다. 다른 필자들의 원고는 대부분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사달이 났다. 편집한 상태에서 글을 읽던 손세일씨 눈에 자신의 글에 손을 댄 흔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손세일씨는 담당자인 기자에게 “내 원고는 오탈(誤脫)자 말고는 고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손을 댔느냐”며 야단을 쳤다. 다른 필자들의 글을 수없이 고쳐서 편집 작업에 넘겨도 아무 탈을 겪지 않았던 기자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그때 선배 기자 한 명이 귀띔했다.
“손 의원(당시 우리는 3선 국회의원 출신인 손세일씨를 보통 ‘의원’이라고 호칭했다)이 연재 시작 때부터 내건 조건이 ‘원고가 아무리 길어도 자르지 말고 오탈자 외에는 고치지 말라’는 것이었어.”
그 사건 이후로 기자는 손세일씨의 글은 토씨 하나도 고치지 않고 편집팀에 넘겼다. 원고를 줄이는 일은 애초부터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신동아》가 손세일씨의 연재를 주저하다가 결국 못 싣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시사잡지 기사에 각주까지 붙여야 한다는 조건이었으니 아무리 친정이라도 그런 조건을 들어주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수용한 곳이 《월간조선》이었고 이후 연재물 ‘이승만과 김구’는 《월간조선》의 무게와 깊이와 권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연재물이 되었다. 훗날 이런 사정을 알게 된 당시 《동아일보》 김학준 사장은 ‘이승만과 김구’가 《신동아》가 아닌 《월간조선》이 연재하고 있는 것에 대해 상당히 아쉬워했다고 한다.
다시 펜을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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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11월 귀국 도중 상해 비행장에서 내려 포즈를 취한 임정 요인들. 두 번째 줄 왼쪽부터 김규식, 조완구, 김구. |
손세일씨는 자신이 경험한 20여 년 동안의 정치인 생활을 “외도(外道)였다”고 말한다.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언론인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미 1970년에 한 권짜리 《이승만과 김구》를 펴냈다. 그는 이 책에 대해 “두 사람의 생애를 총괄해 정치적 패배라고 평가한 것은 젊은 저널리스트의 오만과 시대적 에토스의 소산”이라고 겸양을 보이지만 당시 이 책은 출간 이후 ‘한국 헌정사 연구의 선구적 성과’(노재봉 전 국무총리), ‘한국 최초의 정치전기학 저서’(김학준)라는 평가를 받았다. 역사학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구의 본격적인 출발점의 하나’로 평가했다.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월간조선》에 ‘이승만과 김구’가 연재 중일 때 ‘우리나라 전기문학의 큰 업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손세일씨는 정치라는 외도를 하면서 오히려 이승만과 김구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정치 현실을 몸소 체험하게 되면서 이승만-김구 두 사람이야말로 정치적 패배자가 아닌 한국 정치의 위대한 거인들이라는 각성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마침 냉전체제의 붕괴로 공산권 국가 등에서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새로운 자료들이 속속 공개되는 등 1970년 이전에는 구할 수 없는 많은 자료를 접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에서 두 사람에 대한 방대한 기초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국내 학계에서도 그가 처음 《이승만과 김구》를 펴낸 1970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새롭고도 다양한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그에게 다시 펜을 잡게 했다. 그렇게 해서 정치를 접은 직후인 2001년부터 《월간조선》에 ‘이승만과 김구’를 새로운 시각으로 새롭게 연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 중 한 명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저자 손세일씨의 시각이 ‘편향적’으로 비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세일씨가 ‘이승만과 김구’를 쓰면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 흔적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드러난다.
〈이승만과 김구는 이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 국민국가를 창건한 대표적인 두 정치 지도자이다. 그런 뜻으로 한 나라에 국부(國父)는 한 사람뿐이며 우리나라의 국부는 이승만이라면서 자신이 국부로 불리기를 단호히 거부한 김구의 겸양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구는 대한민국의 두 국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은 전체 7권짜리 《이승만과 김구》의 1권 첫 본문인 〈서설-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의 시작 글이다. 이 시작 글에 담긴 손세일씨의 두 사람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은 마지막 7권이 끝날 때까지 유지된다.
원고지 2만3000장에 담겨 두 사람의 성향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몇몇 일화를 간단한 설명과 함께 소개한다. 저자인 손세일씨에게 중요한 일화 몇 가지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모든 이야기가 다 소중하고 귀중해 대표적 일화를 저자인 내가 추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사양했다.
김구는 정말 일본군 장교를 죽였는가
전체 3부로 구성된 이 책 1부의 제목은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이다. 두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3·1운동 때까지의 시기를 다룬 내용으로, 두 사람이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았다.
궁핍한 가정에서 각각 독자로 태어난 이승만과 김구. 이승만은 ‘왕족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김구는 심한 ‘상놈 콤플렉스’라는 상반된 생각을 갖고 성장한다. 같은 점은 두 사람 다 청년 시절에 감옥 생활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25세부터 30세까지 5년7개월 동안, 김구는 20대 초반에 1년10개월, 30대 중반에 4년 반이 넘게 감옥 생활을 했다. 이승만은 이 감옥 생활 동안 상상을 초월하는 학문 습득과 저술 활동 등을 벌였다. 김구는 첫 번째 감옥 생활에서 개화파로 변신했고 두 번째 감옥 생활을 통해서는 저항적 민족주의자가 됐다. 이후 두 사람은 105인 사건 등 3·1운동 때까지 우리나라 현대사의 핵심적 사건이나 운동에 직접 참여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1부에서 소개한 일화 중 독자들의 흥미를 자아낼 수 있는 일화는 김구의 ‘치하포 사건’이다. 치하포는 황해도 안악에서 동북쪽으로 40리쯤 떨어진 작은 포구다. 김구의 치하포 사건은 1896년 3월에 벌어지는데 김구 자신이 《백범일지》에 다른 어떤 행적보다도 생생하게 묘사해 놓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김구의 항일투쟁에서 훈장과 같은 상징성을 지닌 사건이었다. 김구는 자신이 죽인 일본인의 소지품을 조사해 본 결과 그의 이름은 쓰치다 조스케이고 신분은 육군 중위였다고 《백범일지》에 적고 있다.
김구는 사건이 발생한 지 3개월이 지나 체포돼 해주감옥에 수감됐다.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범인임을 자백하지 않은 김구는 인천으로 압송된다. 그곳에서 3번의 신문이 있었고 일본 영사관 소속의 오타나베 다카지로 순사도 참여했다.
저자는 여러 고증 자료를 소개하며 김구가 살해했다는 일본인 장교 쓰치다의 신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쓰치다의 소지품을 조사해 보니까 그가 일본군 육군 중위였다고 한 대목이다. 그러나 쓰치다가 일본군 육군 중위였음을 증명하는 소지품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백범일지》에도 언급이 없다. 해주부에서나 인천감리서에서의 세 차례에 걸친 신문에서도 쓰치다의 신분과 관련한 이야기는 없었다. …(중략)…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하여 쓰치다의 소지품을 챙긴 일본 경찰은 쓰치다가 나가사키현 쓰시마의 이즈하라항 사람으로서 조선에 장사하러 온 상인이라고 보고했다.〉
김구가 죽인 사람은 일본군 장교가 아니라 상인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구가 죽인 대상이 일본군 장교이든 상인이든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일본인을 죽이게 된 김구의 동기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데 대한 일본인에 대한 분노의 결과임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무렵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일본 상인들은 쓰치다뿐만이 아니다. 일본공사관은 당시 일본인 상인들의 피해를 본국에 보고하는데 그 무렵 피해를 입은 일본 상인이 피살 43명, 부상 19명 등 총 62명으로 보고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 정부에 지속적으로 이 피해와 관련해 배상을 요구했는데 한국 정부는 사건 발생 9년이 지난 후인 1905년 2월 배상금을 지급했다. 이때 대한제국 황실이 배상한 액수는 18만3750원이었고 쓰치다의 가족은 이 가운데 3778원59전의 배상금을 받았다.
아무 직위 없이 미국 대통령을 만난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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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외교관 예복을 입은 청년 이승만. |
〈루스벨트는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외교정책의 기본사상도 강한 나라는 번영하고 약한 나라는 멸망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1900년 8월에 뉴욕지사로서 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에 “나는 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가 될 것이고, 지금까지 한 것으로 보아 그런 보답을 받을 만하다”라고 했을 만큼 일찍부터 일본에 편향적이었다. 그 뒤의 동아시아의 세력관계는 루스벨트로 하여금 더욱 일본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루스벨트를 상대로 조미수호통상조약상의 의무를 이행할 것을 촉구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중략)…
이승만은 루스벨트와의 면담을 계기로 제국주의적 국제정치 질서의 냉엄한 현실을 한결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그것도 아무런 공식 직함이 없는 신분으로 미국의 대통령과 국무장관을 만났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경험이 되었다. 사실 이승만은 이때 이후로는 독립운동 기간 내내 미국의 어떤 대통령이나 국무장관도 만날 수 없었다.〉
저자는 그러면서 이승만과 루스벨트의 만남과 김구의 치하포 사건을 대비되는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때에 이승만이 헤이 국무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고, 또 그것에 대한 미국 신문의 반응을 통하여 깨달은 것은 뒷날 그가 독립운동 방략으로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되풀이하는 청원외교와 여론환기 작업의 원형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구가 국모보수(國母報讎)의 의분에서 변복한 일본상인 쓰치다 조스케를 살해했던 치하포 사건과 대비되는 상징성을 가지면서, 그 자신의 명성과 권위를 넓혀주는 근거가 되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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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1월 25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받은 이승만은 1925년에 탄핵을 당한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문지기 역할을 자임하면서 경무국장으로서 한 살 위의 이승만을 깍듯이 모신다. 알력 때문에 임시정부가 좌초 위기에 빠질 때도 김구는 이를 지켜내면서 1932년의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영도자가 된다. 거대 악에 대항하는 조직에서 지위가 높아진다는 것은 더 많은 고난과 수난이 다가온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 고난의 시기에 평생의 반려자가 된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난다. 이 방대한 책에서 소개하는 일화 중 유일한 로맨스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시기에 ‘외교독립론’을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삼았던 이승만은 1933년 1월부터 8월까지 만주사변 문제를 다루는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한다. 그 제네바에서 여러 나라 대표들을 만나는 한편 〈만주의 한국인〉이라는 팸플릿을 만들어서 배포하고 방송과 신문을 통해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한다. 이런 활동을 위해 제네바에 머물던 시기에 이승만은 프란체스카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국제연맹총회가 개막된 1933년 2월 21일 저녁식사 때였다. 손세일씨는 두 사람이 만날 때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호텔 드 뤼시의 식당은 만원이었다. 식당 지배인은 4인용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두 여성에게 가서 동양에서 온 귀빈과 합석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파리를 거쳐 스위스를 여행하는 오스트리아인 모녀였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모녀가 앉아 있는 식탁으로 간 이승만은 프랑스말로 “합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점잖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메뉴판을 가지고 온 웨이터에게 샤워크라프트와 작은 소시지 하나, 감자 두 개를 주문했다. 이승만은 시큼한 샤워크라프트를 김치 대신으로 곧잘 먹었다. 당시 유럽을 여행하는 동양 귀빈들의 화려한 식사와는 달리 이승만의 소박한 식사 주문을 보고 프란체스카는 적이 놀랐다. 숙녀들에게 예의로 먼저 말을 거는 서양 인사들과는 달리 이승만은 온화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다가 음식이 오자 들기 전에 “본아페티(맛있게 드십시오)!”하고 인사를 한 다음에는 조용히 식사만 했다. 프란체스카는 자기도 모르게 이승만의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만 그와 눈이 마주쳤다. 무안해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동양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하고 물었다. 이승만은 “코리아”라고 대답했다. 프란체스카는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독서클럽에서 보내주어 읽고 있던 《코리아》라는 책에서 본 ‘금강산’과 ‘양반’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코리아에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이 산다지요?”
이승만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렇게 대화가 오가고 있을 때에 지배인이 이승만에게 다가와서 베른에서 온 기자가 찾는다고 말했다.
“덕택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실례합니다.”
이승만은 점잖게 인사를 하고 급히 자리를 떴다.〉
그렇게 만난 동서양의 두 남녀는 결국 결혼을 했다. 물론 그 사이에는 프란체스카 어머니의 반대 등 곡절이 있었지만 관계에서 더 적극적이었던 프란체스카의 바람대로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의 평생의 반려가 됐다.
광복군의 직접적인 참전을 꿈꿨지만
임시정부는 본질적으로 위기정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위기의 임시정부에서 이승만과 김구는 대통령과 경무국장이라는 관계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국무위원회주석(김구)과 주미외교위원장(이승만)이라는 역전된 직위로 광복을 맞게 된다. 그렇다면 김구는 언제 광복 소식을 들었을까. 이 책에 따르면 1945년 8월 10일인 것 같다.
한국 독립을 위해 전쟁에 참여시킬 OSS(한국독립군 전략첩보부대) 훈련생들의 시찰을 마친 후 김구는 중국 서안에 있는 주요 인사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해 8월 9일에 제1전구 대리사령관 호종남을 찾아갔지만 출장 중이었다. 대신 섬서성 정부를 방문해 이 성의 주석인 축소주를 만났다. 축소주는 이튿날인 10일 저녁 초대를 했다. 축소주는 김구가 홍구공원 폭파사건 뒤에 장개석과 회담하고 한국 청년들의 군사교육을 위탁했던 낙양군관학교 분교 교장이었다.
8월 10일 저녁 김구는 이범석 등 광복군 간부들과 함께 축소주의 집을 방문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수박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축소주는 전화를 받은 후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축소주는 뛸 듯이 기뻐하며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지만 김구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김구는 그때의 소회를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고 있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전기(電器)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민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을 미국 윤군부와 긴밀히 합작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이렇게 대한민국 광복을 위해서는 ‘무력(武力)’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김구와 달리 이승만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이미지는 어쩐지 무력과는 동떨어져 있는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이승만도 ‘냅코작전’이라고 명명됐던 국내 진공작전을 추진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제2차 대전 말기에 진행된 이 비밀공작에는 유한양행 창업자인 유일한 등도 참여했다. 다음은 관련 대목이다.
〈‘냅코작전’이 장석윤의 보고서를 근거로 하여 작성된 2월 26일자 보고서와 달라진 점은 한국에 침투시킬 공작요원으로 한인 포로들뿐만 아니라 이미 미군에 입대해 있는 한인 청년들과 유학생 등 일반인들도 선발하기로 한 점이었다. 그리하여 유일한을 비롯하여 김강, 변준호, 이근성 등 40대가 넘은 재미 한인 사회의 지도적 인물들도 자원하여 ‘냅코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냅코작전’의 목적은 이들이 오키나와에서 잠수함으로 한반도에 침투하여 그곳에 첩보망을 조직하고, 한반도에 추락하는 미공군 조종사들을 구출하며, 앞으로 한반도 안에서 파괴공작과 게릴라 공작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중략)… 한국 침투조를 총괄하던 장석윤의 OSS에 등록된 주소가 주미외교위원회의 주소인 워싱턴 D.C. 16가 4700번지인 것을 보면, 이승만은 장석윤을 통하여 ‘냅코작전’의 진척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두 巨人, 서로 다른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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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8월 15일 오전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 기념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장군, 하지 장군(오른쪽부터). |
한때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좌익세력으로부터도 주석으로 추대받았던 이승만은 이남에서만이라도 독립된 자유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김구는 김일성의 북한 공산당과 통일을 논의하는 남북협상에 참여하고 만다. 국가를 중시한 이승만과 민족을 중시했던 김구의 노선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손세일씨는 1948년 7월 11일 경교장을 방문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의장인 유어만 중국공사와의 긴 대화록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 남북관계와 현실 정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유어만 공사는 김구의 아들 김신의 친구였기도 하다. 다음은 김구와 유어만의 대화다.
〈유어만은 자기가 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 김구로서는 못마땅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새로 수립되는 정부에서 그런 자리를 맡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우익 진영의 단결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유어만은 또 김구가 평양에 다녀온 것은 잘못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자기네의 협력자로 봐요. 내가 영사에게 말했듯이 모든 사람들이 내 입장을 곧 알게 될 겁니다. 그렇다고 내가 남한정부에 참여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사도 알다시피 이 박사는 한민당의 포로가 되어, 말하자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입장이에요. 내가 만약 정부에 들어가면 피치 못할 갈등이 일어나서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내가 바깥에 있는 것이 나아요. 나는 더러운 정치싸움에 말려들기 싫습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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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반공주의자였던 김구는 건국 직전에 남북협상을 선택, 이승만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
“더구나 나는 특정 정당의 비방 캠페인에 의하여 반미주의자로 알려졌어요. 나는 중국과 미국만이 한국을 확실히 도와줄 수 있는 이웃나라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요. 우리의 국가건설을 위해서는 미국의 원조가 필요한데, 내가 정부 안에 있으면 미국인들의 동정심에 찬물을 끼얹어 국가이익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유어만은 이승만도 한때 반미주의자로 비난받았다고 말하면서 김구의 말을 부정했다.〉
이 책 마지막 장의 제목은 〈경교장의 총성〉이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지던 날의 기록이 이 책의 마지막인 것이다. 한국 현대 정치사의 두 거인 중 한 명이었던 이승만은 또 다른 거인의 죽음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같은 달 30일 이승만은 김구 사망 사건과 관련해 외국 기자들을 위한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은 그 내용 중 일부다.
〈그리고 김구씨를 살해한 동기에 관하여서도 공표하고 싶은데, 그것은 발표할 만한 때가 되면 반드시 공표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때에 모든 사실을 일반 앞에 공개해 놓는다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그 생애를 조국 독립에 바친 한국의 한 애국자에 대한 추억에 불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의 법정에서 용의 깊게 검토될 이들 사실은 김구씨의 살해가 순수히 여하한 행동노선이 조국을 위하여 가장 유리할 것인가에 관한 당내 의견 차이의 직접적 결과임을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견 불합치는 결코 당 자체 밖에는 알려진 일이 없으며 김구씨의 추종자가 동 논쟁을 결말짓고자 취한 격렬한 수단은 우리 전국에 비애를 초래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승만은 김구 암살사건의 원인을 당내 노선투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사는 14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大作) 《이승만과 김구》를 요약한 것도 축약한 것도 아니다. 그 방대한 양을 요약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조선실록》을 요약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이 책은 이승만-김구라는 우리 현대사의 거인을 중심에 두고 쓴 한국 현대사이다.
출처 | 월간조선 10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