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삼환기업 회장으로서 중동 건설시장을 맨 처음 개척하여 1970년대 한국 경제의 活路를 열었던 崔鍾煥씨의 회고록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共感社)의 일부를 뽑은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과 金載圭에 대한 추억
  
   내가 박정희 대통령을 가까이서 처음 대한 것은 1966년 가을 삼환의 계열사인 경동산업의 영등포 공장에서였다.
   당시 경동산업은 삼환이 월남에서 건설 중인 보세창고에 쓸 철골재를 조립하고 있었다. 이 보세창고는 韓-越 간에 무역 증진의 교두보가 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앞의 월남 진출 편에서 밝힌 대로 건설공사 현황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朴대통령이 직접 철골재 조립 현장을 찾아왔던 것이다.
   몇 번인가 먼 발치에서만 보았단 朴대통령을 가까이서 마주했을 때의 인상은 한 마디로 강직하다는 표현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날도 쏘는 듯한 눈빛을 검은 선글래스에 감추고 공사 진척현황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있던 朴대통령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도록 노력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 후로 1967년 11월에 석탑산업춘장을 받는 자리에서 박대통령과 악수하며 잠시 대화를 나누었던 일이 있었고, 그리고 박대통령과의 세 번째 만남은 조선호텔 신축공사 현장에서 뜻하지 않게 이루어졌다.
   1968년 1월부터 1969년 2월까지 1년간의 공기로 건립한 조선호텔은 삼환이 현대건설과 조인트 벤처로 시공했다. 지하 2층, 지상 19층, 옥탑 1층의 연건평 1만 1천 2백 평에 건물의 높이만도 69.85m에 이르는 객실 504개의 이 초호화 호텔 신축공사에는 건설업계는 물론 수많은 일반인들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세워지고 있는 이 공사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삼환은 이 공사를 시공하면서 1주일에 1층씩 골조하는 작업 일정 계획을 아예 지나가는 사람들이 확연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마치 플래카드처럼 흰 천에 써 붙여 놓고 공사를 진행해 나갔던 것이다.
   그것은 공사를 工期 내에 마치겠으며, 또 일정에 맞춰 틀림없이 하고 있다는 대내외적인 약속과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다.
   그러던 여름 어느 날이었다. 시청앞을 지나던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작업 일정을 적어 놓은 현수막을 눈에 띄게 걸어 놓고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공사 현장을 불쑥 찾아들었던 것이다.
   마침 현장에서 작업 지시를 하고 있던 나는 아무 예고도 없이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현장에 들이닥친 박대통령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하, 여기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놀란 표정으로 묻자 박대통령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역시 최사장다운 발상이구만. 그래, 저기 써 있는 대로 공사는 빈틈없이 진척되고 있는 거요?”
   “그렇습니다, 각하.”
   “骨組가 올라간 데까지 내가 직접 올라가 봅시다.”
   순간, 경호원들이 朴대통령을 말렸다.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처럼 리프트 카가 운행되지 않고 지그재그로 나무판을 깔아 공사 인부들이 올라다니고 있었는데, 그 위로 올라가겠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朴대통령은 경호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어서며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최사장이 앞장서시오.”
   하는 수 없이 朴대통령에게 화이바를 쓰시게 하고 내가 앞장서서 현장을 안내하였다. 한편 경호원들은 朴대통령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안절부절, 나에게 더 이상 올라가지 말도록 눈치를 보냈다. 그래도 박대통령은 막무가내로 7층까지 올라갔다 내려와서 현장 직원들을 격려하고 떠나가셨다. 실로 졸지에 겪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후, 1970년대에 들어 삼환기업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청와대에서 財界 인사들을 초청할 때에 나도 朴대통령을 만나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특히 1975년 12월 6일에 있었던 중동 진출관계 대표들(건설업계, 금융계, 항공회사 등)이 모인 합동회의에서 朴대통령은 나에게 유난히 치하의 말을 했었다.
   “최사장, 도대체 거긴 어떻게 알고 나가 개척했소? 참 용감한 일이오.”
   그날, 나는 중동 진출의 선봉 개척자로서, 또한 대한건설협회 회장 자격으로 그 자리에 참석하여 금융의 해외건설 쿼터 설정, 초기 투자의 지원, 외화 표시 차입금의 장기 상환, 기능공 진출과 자재 구입 등 제반문제들을 보고하였다.
    그런데 한창 브리핑을 듣고 있던 박대통령이 갑자기 비서실장을 부르더니 “그거 어딨어?”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지 비서실장이 얼른 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머뭇거리고 있노라니까 “어젠가 그젠가 포항에서 올라온 그 까만 거 말이야” 하고 재차 다그쳤다.
   그제서야 비서실장이 뛰어가서 유리병에 담긴 시커먼 액체를 가지고 왔는데, 대통령이 그것을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보이며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포항 앞바다에서 나온 기름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이것만 쏟아지면 우리도 중동이 부러울 게 없다면서 나에게 냄새를 맡아 보라고 내밀었다. 내가 중동에 자주 드나드니까 그곳에서 생산되는 原油를 보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중동에서 한 번도 원유를 본 적이 없었다. 중동에 석유가 지천으로 매장되어 있다고는 해도 그것을 뽑아 올리는 곳은 우리의 건설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시중에는 정제되어 나온 제품뿐이기 때문에 원유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냄새를 맡아 보는 척하며 어물어물 넘어가긴 했지만, 그 물건이 과연 포항 앞바다에서 캐낸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무렵 영일만 근처에서 기름이 나올 확률이 있다고 紙上에 자주 보도되었고 박대통령 자신도 그 가능성을 믿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날 회의석상에서 있었던 원유 샘플 사건을 보고 누군가가 대통령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일만의 부푼 꿈은 한낱 허망한 백일몽에 불과했지만 원유가 들어 있다는 유리병을 들고 천진난만하게 웃던 박대통령의 모습은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 선연히 남아 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평가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그것은 역사가들의 몫이고 다만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그 분과 가끔 스쳐 지나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지극히 단편적인 것들뿐이다. 이를테면 차갑고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裏面에 따뜻하고 섬세한 감성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분이었다라든가, 국가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모습이라든가, 탁월한 기억력과 상대방의 심중을 꿰뚫어 보는 놀라운 안목을 가졌다라든가 등등.
    그분의 운명은 결국 자기의 사랑하는 부하 김재규가 쏜 총탄에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었지만, 김재규와 나와의 관계 또한 얽혀 있었으니 실로 인생살이의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재규와 내가 처음 얼굴을 대한 것은 그가 육군사령부(육관구) 사령관으로 있을 때였다. 하루는 김재규의 부관이 나를 찾아와 사령관께서 모셔 오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부관은 자기도 알지 못하겠다고 했다. 서슬이 시퍼렇던 군사정권 시절이라 감히 거절할 수도 없었다. 내가 부관을 따라 사령관실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문형태, 이희성 등 두 어깨에 별을 단 여러 명의 장군들이 앉아 있었다.
   “이렇게 오시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저희가 최사장님께 어려운 공사를 하나 부탁하려고 모셨습니다.”
    김재규 사령관의 정중한 말씨에 나는 일단 안도감을 가지고 그들 앞에 앉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문형태 장군이 봉투 하나를 내 앞에 내놓으며 말했다.
   “육군사관학교 사열대가 초라해서 새로 지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국가 예산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육사 2기생 이름으로 공사를 하려고 하니 최사장이 맡아서 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김재규 사령관을 비롯하여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별들이 모두 2기생들이었으며, 그들이 자기네들 개인 호주머니에서 염출하여 육사의 사열대를 다시 세우겠다고 대통령께 보고하자 특별 하사금을 주셨다며 그 예산에 맞춰 공사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문형태 장군의 설명을 듣고 난 나는 웬만하면 공사를 맡지 않을 요량으로 회사에 돌아가 기술자들과 의논하여 연락을 하겠다고 말하며 우선 그 자리를 피해 보려 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구상하고 있는 사열대를 세우는 데 다행히 예산이 넉넉하면 별 문제가 없겠으나 만약 턱없이 부족하다면 적자공사를 해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기 대문이었다. 예산에 맞춰 공사를 한답시고 형편없이 초라한 작품을 만들려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도 못할 것이 뻔할 것이었다.
   그러나 공사를 하고 안 하고는 이미 내 뜻이 아니었다. 그들은 삼환이 그 공사를 해야 한다고 이미 결정해 놓고 나에게 정중하게 통보를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삼환이 그 공사를 해야 할 업체로 선정된 동기는 이러했다. 육군사관학교에 새로 세우게 될 사열대는 한국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만들고자 하는데 이런 공사를 할 수 있는 업체를 찾아보았으나 없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워커 힐의 명월관(당시 아리랑 하우스)이 자신들이 구상하고 있는 양식과 비슷한 사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은 업체만이 가능할 것이라 믿고 맡기는 것이라 했다.
   일이 이즘 되고 보니 공사를 하기 싫다고 내 마음대로 고개를 가로 저을 입장이 못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공사를 맡아야 했고, 예상한 대로 공사대금은 훨씬 모자랐지만 더 요구할 형편이 못 되었다.
   비록 적자를 본 공사였지만 우리는 정성을 다해서 완공을 보았다. 그 공로로 나는 사열대 준공식 대 초청을 받아 귀빈석에 앉아 있기도 했었다.
    아무튼 그때 만났던 김재규와는 그가 군복을 벗고 건설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새로운 관계를 맺어 잦은 교류를 갖게 되었다 특히 1976년 그가 중동 순방길에 올랐을 때 내가 건설협회 회장 자격으로 수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사우디 아라비아에 들른 김재규 장관은 공식 일정을 마치고 우리 삼환의 시공현장에 들러 임직원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그 후, 나는 김재규 장관과 자주 접촉해 오면서 지금까지 만나 온 정부 관리들에 비해 비교적 정직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당시 상당수의 관리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급급하고 있었음에 반해 김재규 장관은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펴는 소신파로 보였다.
    사실 김재규 장관이 건설부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만 해도 건설부는 힘이 없는 부처로 통했다. 이를테면 정부 부처의 같은 관리라 해도 건설부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을 경제기획실이나 재무부에 있는 관리들보다 비하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재규 건설부장관이 취임하면서 부서에 힘이 실어졌고, 여기에 중동시장에 우리의 건설업체들이 진출하면서 건설부는 한결 활기찬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김재규 건설부장관이 그렇게 자신만만한 자세로 정책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박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는 든든한 배경이 뒷받침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김재규 장관 자신의 정직하고 우직한 성격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재규 장관의 그러한 성격은 나와 통하는 점이 있었다. 김장관 역시 굽히지 않고 바른말 잘 하는 나를 싫어하는 기색 없이 받아 주곤 했다.
   김재규 장관이 건설부에서 물러나 중앙정보부장으로 갔을 때에도 내가 먼저 전화를 하지 않았었다. 물론 개인적인 친분으로야 가까운 사이가 되었지만 내가 부탁을 하러 찾아간다는 주위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가급적 만나기를 꺼렸던 것이다. 그런데도 김장관은 나를 불러 중앙정보부의 공사를 맡겼다. 별실 신축공사로서 이런 정보 특명공사를 지명받으려면 ‘언더테이블 머니’가 이루어져야 가능한 법인데, 나는 공사가 끝난 후에도 결코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김재규 부장도 내가 돈을 건네지 않은 데 대해 전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감어린 말로 나를 걱정해 주었다.
   “최사장, 나는 최사장의 그 곧은 성품을 알고 좋아하지만 세상은 다 나나 최사장 같은 사람들만이 살고 있지 않는 게 현실이오. 최사장을 시기하고 모략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 알아 두시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한 최사장이 억울하게 모략당하는 걸 막아 줄 터이니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찾아오시오.”
   실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기업인들처럼 돈봉투 한번 건넨 적이 없는 나에게 그는 변함없는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김재규 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거의 신처럼 모시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만난 자리에서도 기회만 있으면 박대통령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털어놓았었다. 자기 부모보다 더 큰 은혜를 주신 분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가 박대통령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건이었다.
   이제 그 두 사람은 가고 없지만 그분들의 얼굴은 문득문득 떠오르는 옛날의 추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로 남아 있다.












아마 김정은도 ㄱ렇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