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日전쟁을 지도하였던 蔣介石(장개석)은 1945년 8월15일 戰勝(전승) 연설에서 수백 만 명의 중국인을 죽인(중국 측 軍民 사상자는 1000만 명으로 추계) 일본인들에 대한 보복을 금지시켰다.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 중국 동포는 '舊惡(구악)을 기억에서 지우고 사람들에게 善을 행한다'는 것이 우리 민족 전통의 고귀한 덕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관되게 일본국민을 敵으로 삼지 않았고, 다만 橫暴非道(횡포비도)한 武力을 행사한 軍閥(군벌)만을 敵으로 생각한다고 明言하여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동맹국과 함께 敵軍을 타도하였습니다. 그들이 투항의 조건을 전부 충실하게 실행하도록 엄격하게 독려하여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우리는 보복하여선 안 됩니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모욕을 가해선 안 됩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과 죄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이 나치스적 軍閥에 의하여 우롱을 당하고 선동당한 점에 대하여 우리는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대할 뿐입니다. 만약 과거 敵이 행한 폭행에 대하여 똑같은 폭행으로 대하고, 그들의 우월감에 대하여 노예적 굴욕을 가한다고 한다면 원한은 또다른 원한을 부르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수행해온 仁義의 전쟁이 목적한 바가 아닙니다. 이 점을 우리 국민 동포 일동은 오늘에 즈음하여 특별히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蔣介石의 이런 태도를, 「以徳報怨(이덕보원)」, 德으로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蔣介石은 일본에 대한 피해 보상 요구도 하지 않았다. 1972년 일본과 國交를 열 때 毛澤東도 보상 요구를 하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안에서도 최근 장개석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1. 中日전쟁을 지도한 사람은 毛澤東이 아니고 蔣介石이다. 모택동은 抗日戰(항일전)보다는 장개석의 抗日戰을 방해하는 데 더 신경을 썼다.
  2. 장개석은 늘 도덕적 성찰에 노력한 사람이었다.
  4. 장개석은 후계자를 잘 두었다. 蔣經國(장경국)이 대만을 성공적으로 민주화시켰다.
  5. 중국의 미래도 장개석 모델(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이 아닐까?
  6. 장개석에 대한 잘못된 평가는 당시의 미군 사령관 스틸웰과 좌파적 미국 기자의 험담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7. 淸朝가 무너진 이후 최초의 근대 국가 틀을 만든 이는 장개석이다. 오늘의 중국도 그 틀 위에 있다.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약속하도록 하고, 임시정부를 보호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도록 한 점에 대하여는 한국인들이 따로 크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다.
  
  
  ,,,,,,,,,,,,,,,,,,,,,,,,,,,,,,,,,,,,,,,,,,,,,,,,,,,,,
  * 일본인들이 잊지 못하는 安在鴻의 광복 연설
  
   1984년 여름 나는 도쿄 부근 가와사키驛에서 모리타 요시오씨(森田芳夫)를 만났다. 당시 72세의 이 노인은 서울 성신대학교 일본어학과 교수로 있었다. 여름방학을 틈타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그가 우방협회의 지원을 받아 쓴 「조선終戰의 기록」(1964년 출판)은 1038쪽에 달하는 大作이다. 한국에 살던 일본인들이 1945년 패전 뒤 철수할 때까지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뺄 수 없는 자료로 현대사 연구에 이미 古典이 돼 있다. 그 몇 년 전에는 이 책을 쓸 때 모은 자료를 세 권의 자료집으로 내기도 했었다. 아주 얌전한 인상을 주는 모리타씨는 京城世話會(한국에 살던 일본인들 모임) 호즈미 회장의 한마디 말이 그를 이 필생의 작업에 몰두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모리타군, 장래를 위해서라도 철수관계 자료를 모아 두게.』
   북새통 속의 서울에서 이 말을 듣고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감동이 있었다는 거다. 모리타씨는 그 뒤 19년 동안 1000여명의 증인들을 면담, 이 책을 냈다.
  
   『저 혼자 힘으로 된 책이 아닙니다. 수많은 철수민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기록을 해 놓았기 때문에 정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사망자, 受刑者(수형자) 명단을 깨알같이 적어 훈도시 속에, 또는 구두 밑창 속에 감추어 갖고 왔습니다. 가족에게, 이웃에게, 정부에게 무엇인가 알리고 싶었기 때문에 그 혼란 속에서도 그렇게 한 게 아니겠습니까?』
  
   모리타씨는 군산에서 났다. 合倂(합병) 전에 벌써 한국에 건너왔던 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京城帝大를 나왔으며 그의 부인도 한국에서 난 일본인이다. 경성세화회에서 철수 사무를 보다가 귀환, 日韓 협회에서 잠시 일하다가 외무성에 들어가 패전 뒤의 철수관계 조사원으로 일했다. 그 뒤엔 極東아세아과에서 일하다가 韓日국교 정상화 1년 전부터 駐韓 일본대사관에서 근무하기 시작, 1975년에 참사관으로 퇴직할 때까지 줄곧 한국 생활을 했다. 퇴직 뒤 바로 성신대 교수가 되었으니 그의 한국 생활기간은 일본 생활의 세배나 된다.
  
   『책을 쓰면서 저의 생각도 많이 정리되었습니다. 역시 힘에 의한 지배는 좋지 않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억지로 합쳐졌지만 헤어지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할린에 있는 한국인 문제, 한국에 남은 일본 여자들의 문제 등등 결별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일본의 가장 큰 책임은 한반도의 분단입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만, 항복을 결정한 御前(어전)회의가 8월9일이 아니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진 8월6일에 열렸다면 소련은 참전의 시기를 놓치고 38선도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8월9일 御前회의에서 決死抗戰의 주장이 이겼다면 소련 기갑부대는 부산까지 남하했을 것이고, 미군은 人命손실을 막으려고 상륙을 포기, 한반도는 赤化되었을 것입니다.』
  
   모리타씨는 『우리 같은 식민지 세대는 패전으로 발판을 잃고 큰 손해를 보았다』면서 『그래도 한국이 좋다』고 했다. 한국에 가면 50년 전 친구가 있는데, 일본에는 어딜 가도 50년 전 친구끼리의 모임은 없다는 것이다. 모리타씨는 일본에서 잃은 근거지를 戰後의 한국에서 다시 찾은 예이다. 모리타씨는 나에게 『왜 한국에는 귀환의 기록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추궁같기도 했다. 나는 도쿄 근방 사이타마현에서 1945년 10월에 났고 다음해 부모를 따라 귀국했다. 敗戰 철수의 기록은 있으되 해방 귀환의 기록은 없다―유행가는 있지만.
  
   모리타씨는 이것만은 꼭 기사에 써달라면서 설명했다.
  
   『책을 쓰면서 제가 감격에 못이겨 눈물을 흘린 자료가 있습니다. 천황의 종전 방송 직후 경성방송국을 통해 安在鴻(안재홍) 선생(建準 부위원장)이 한 연설 대목입니다.
  
   <끝으로 국민 여러분께서는 각별히 유의하여 일본 거주민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40년간의 총독 통치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조선·일본 양 민족의 정치 형태가 어떻게 변천하더라도 두 나라 국민은 같은 아시아 민족으로서 엮이어 있는 국제 조건 아래서 自主 互讓(호양)으로 각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일본에 있는 500만의 조선동포가 일본에서 꼭같이 수난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조선에 있는 백수십만 일본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총명한 국민 여러분께서는 잘 이해해 주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격앙된 그 순간에도 이런 차분하고, 이성적인 연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연설 덕분으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수난을 면했습니다.』
  
   안재홍의 연설은 지금도 유효할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들과 언론은 일본에 대하여 보도할 때 일본에서 생활하는 在日동포의 입장을 한 번쯤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언론과 정치인도 마찬가지이다. 兩國 관계가 정부 對 정부의 갈등으로 진행되는 것은 회복할 수 있지만 국민 對 국민 감정의 악화로 가면 서로 손해를 본다.  
  
  .......................................................
   *김구에게 이승만과 협력할 것을 권고한 장개석
  
   金九에게 매우 불리한 자료: 劉馭萬(유어만) 公使와 나눈 대화록
  
   金九는 북한군이 반드시 남침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趙甲濟
  
  
   金九-劉馭萬 대화 비망록
  
   유엔한국위원회의 중국대표인 劉馭萬(유어만) 公使(공사)는 1948년 7월11일 오전 11시 金九를 자택으로 방문,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劉 공사는 대화의 내용을 英文으로 요약하여 국회의장 李承晩(이승만)에게 전달하였다. 이 문서는 梨花莊(이화장)에 보존되어 있다. 이 대화는 대한민국 建國에 반대하는 일에 공산주의자들과 손잡은 金九의 심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劉馭萬: 나는 선생님의 어떤 면보다도 정직한 분이란 점에서 존경하여 왔습니다. 나도 비록 외교관이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서울에 부임하게 된 것은 나로선 최초의 외교관 임무입니다. 오늘 선생님을 화나게 만들지 모르지만 정직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 사이의 대화를 하기 위하여 방문한 것입니다.
   金九: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떡일 뿐)
  
   劉: 유엔 위원단의 한 사람으로 上海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며느님과 아드님께서 중국에 체류중인 것으로 알고 있고 엄씨도 선생님과 같이 살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어 나를 통역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래서 자주 여기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金: 귀하가 말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 없어도 귀하를 위하여 통역할 사람은 있어요.
  
   劉: 나는 오철성이 보내는 편지를 갖고 있는데 공사관에 두고 왔습니다. 중국 외무장관 왕시굴도 직접 편지를 보낼 것입니다. 蔣介石(장개석) 총통께서도 편지를 직접 쓰려고 하였는데, 외무장관이 오늘 대화에 대한 보고를 받고 나서 쓰시도록 건의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 세 통의 편지가 같은 메시지를 선생께 전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李 박사와 협력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李 박사와 선생과 金奎植(김규식) 박사가 남한 정권을 수호하는 데 협조해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런 중국 格言(격언)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형제들이 다툴 순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自招(자초)해선 안된다.” 선생들 사이에서 이견이 많다고 해도 소련이 지배하는 세계 공산주의라는 공통의 위협 앞에선 다 형제들입니다. 나는 선생의 아들 김신을 나의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듣기 거북하시더라도 아들이 자신의 아버님에게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만약 선생께서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가담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그렇게는 믿지 않습니다만, 제발 그렇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적 敵手(적수)로서 서로 헤어지고 다시는 만나지 않으면 됩니다.
   金: (심각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나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어요. 사실은 내가 마음에 준비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내 최측근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라 당신에게 털어놓는다는 게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로만 말씀드리지요. 머지않은 장래에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귀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이 좋아하든 않든 간에. 귀하는 기다려주실거죠?
  
   劉: 지금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시지 않도록 권하고 싶어요. 저에게 부과된 메시지 전달은 끝났으므로 허락해 주신다면 선생님께서 고민하고 계시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실 때 도움이 될 만한 저의 개인적 생각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金: (찬성은 아니지만 예의상 승낙한다는 표정을 지음)
  
   劉: 내가 李 박사에게 선생과의 협조 가능성을 타진할 때마다 그분의 대답은 변함없이 “만약 그가 나와 함께 일할 생각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다가가 환영하겠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李 박사께서 부통령직을 선생에게 제의하실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갖고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나는 귀하께서 그런 자리를 초월하신 분이라 그런 점에 대하여 제가 언급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선생님께선, “부통령 같은 것은 집어치워! 어떤 공직도 맡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생께서 李 박사와 협력하시고 싶다면 새롭게 구성되는 정부에서 그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적어도, 많은 사람들과 당황하고 있는 선생의 지지자들에게 右翼(우익)진영의 단결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께선 애국활동의 찬란한 기록을 갖고 계십니다. 선생께서 최근 평양에서 열린 소위 남북한 지도자 협의회에 관계하신 일은 그런 기록에 타격이 되었습니다. 북중국에서 조선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포로가 되면, 목숨이 아까워서 그러겠지만, “우리는 김구 지지자들입니다. 그분이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아시시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선생의 모든 동지들은 선생의 찬란한 과거 업적이 이런 식으로 허물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金: 나도 알 알고 있는 일입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자신들의 협력자로 간주합니다. 내가 귀하께 이야기했듯이, 모든 사람들이 내 입장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남한 정부에 참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귀하도 알다시피 李 박사는 한민당의 포로가 되어 , 말하자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신세입니다. 내가 만약 정부로 들어가면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나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내가 바깥에 머무는 게 낫습니다. 나는 그 더러운 정치싸움에 연관되는 게 싫습니다.
  
   劉: 선생님의 말씀은 오히려 바깥에서 계시는 것보다는 정부에 들어가셔야 한다는 논리를 갖게 합니다. 李 박사께서는 한때 선생님의 동지이셨던 신익희, 이범석, 이청천씨 같은 분들을 麾下(휘하)에 두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참여하셔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시지 않으신다면 모든 게 한민당 뜻대로 되고 말 것입니다. 李 박사께서 國益(국익)을 위하여 그렇게 하고 싶으셔도 혼자서 그 정당을 제어하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께서 정부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견제하면 李 박사를 강화시켜줄 것이고 만약 버리신다면 李 박사를 한민당의 수중에 떨어지게 할 것인데, 선생께서도 한민당이 국가의 운명을 견제 없이 함부로 농단하여선 안 된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金: (정치싸움 등 이미 말한 것을 되풀이한 다음) 더구나 나는 한 특정 정당의 비방전에 의하여 反美주의자로 광범위하게 색칠당하였습니다. 나는 중국과 미국만이 한국에 도움이 되는 이웃나라라고 생각하는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한데 내가 정부를 구성할 때 그 안에 있으면 미국인의 동정심에 찬물을 끼얹어 국가이익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劉: 선생님 말씀은 틀렸습니다. 李 박사도 한때 반미주의자로 惡評(악평)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미국 사람들이 태도를 바꿔 그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결국 한국인의 고유한 일입니다. 한국에 있는 미국인이 선생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들은 결국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 장군도 명예롭게, 창피를 당하지 않고 소환될 것입니다. 가도 괜찮습니다. 귀측이 단결하고 유엔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되면 미국측이 떠나가는 일도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金: 귀하는 중국이 한국을 인정하는 첫 번째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劉: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국, 미국, 영국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렇게 할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金: 미국이 (지금 입장을) 물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劉: 불가능합니다. 왜냐 하면 미국인들이 한국의 독립을 확고하게 지지하니까요.
   金: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주-북한군)을 南進(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劉: 러시아가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과거에 러시아는 두 번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한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한국으로부터, 또 한 번은 요동반도로부터 물러났습니다. 유엔을 통하여 세계 여론이 일어나면 러시아는 그 충격 앞에서 다시 굴복할 것입니다. 여기서 만들려고 하는 정부가, 북한정권이 러시아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미국의 꼭두각시라면 나는 선생께서 어느 쪽과도 협력하지 않으려 하는 입장을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유엔의 지지 덕분에 한국 정부는 主權(주권)국가가 될 것이고, 통일을 성취할 基地(기지)가 될 것입니다. 선생께서 한국이 약하게 보일수록 선생께선 조건 없이 (建國을 위하여) 투신하셔야 합니다(끝).
  
  
   金九-劉 공사의 대화를 읽으면 金九가 보인 행동의 모순점이 드러난다. 金九는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주-북한군)을 南進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즉,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의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평양에서 김일성과 함께 발표한 4·30 성명서 중 '외군이 철수해도 內戰(내전)은 없다'는 대목은 완전한 속임수가 된다.
  
   金九는 북한군이 반드시 남침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였다는 의구심이 생긴다.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할 유일한 수단은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이었다. 金九는 이 안전판의 제거를 요구한 것이 된다. 즉, 북한군의 남침에 대한 장애물을 치우는 일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서울주재 중화민국 공사이던 劉馭萬은 장개석 총통의 뜻을 받들어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화합, 대한민국 건국에 협조하도록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劉馭萬은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물러난 뒤 유엔주재 중화민국 대표부 처장, 駐韓 대사 등을 역임, 1966년에 별세하였다
以徳報怨! 일본인이 고마워하는 두 사람-장개석과 안재홍
- 趙甲濟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15-12-28, 23:53












얼핏님...
대만을 높이 평가하시며 한국의 성과를 대단치 않게 생각하시는데..
한국은 전쟁으로 폭삭 다 부서진 나라였다는 것을 모르시는지....??
혹시 얼핏님은 역사공부를 안한 외국인 ..?
그리고
왜 전 세계인들이 대한민국을 배우려고 하는지...??
심지어 중국대륙에서까지....
중국사람들 하는 걸 가만히 보니까
우리나라 박정희의 시월유신을 그대로 베꼈습디다
우리나라 60-70년대의 경제개발 방식은
인류사에 유례가 없는 방식이라서
일종의 '박정희지문'이 묻어 있습니다
.
조갑제대표는 소위 보수를 대변하는 논객이다.
아마도 어느 누구보다도 종북좌파를 비판을 하는 선두에 서 있다. 심지어는 우파신문의 "사소한" 오류도 하나하나 가장 비판을 많이 하는 논객일 것이며, 다른 어떤 논객도 이러지는 않는다. 그래서 하는 말인 바,
문제는 ...조갑제 대표 자기의 과거논거와 비교해 보면 너무도 정반대로 왔다갔다하는것도 많고, 억지성이 많다. ..
너무도 많다....거의 습관적이다. ( 이것은 조갑제대표가 보수를 대표한다는 는 상징성 때문에... 종북좌파에게 결정적인 공격거리를 제공하며 , 선거즈음에는 고스란히 보수전체에 치명상을 입힐 가능성이 크다. 좌파의 명계남/문성근/정청래같은 이의 억지가 오히려 선거에서 보수츧 득표에 도움이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 .)
이글에서 보면, 전반적으로는 일리가 있을 법한 글이고 좋은글인데도, 중간중간에 " 조갑제 특유의" 아주 고질적인 묻지마 편견/억지/궤변성 논거가 ....역시나 포함되어 있다. 이건 실수/우연이 아니라 거의 습관적이다.
예를 들면, 이글에서 "...4. 장개석은 후계자를 잘 두었다. 蔣經國(장경국)이 대만을 성공적으로 민주화시켰다. .." 단정문구를 보면, 잘 모르는 사람은 장경국이 정말 민주화를 이룬사람으로 이해하고 때때로 다른사람에게도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배경 설명도 없이.. 이건 팩트와는 완전 정반대의 왜곡이며 궤변성 억지가 아닐 수 없다. 장개석총통/1인자/장경국총리급 2인자로 통치하다가, 결국 장경국/자식으로 승계하고, 장경국이 죽은 이후에야 민주화가 진전된 대만 상황을 ...이런식으로 서술/단정하다니...
총통제가 무엇인지..38년간의 계엄령유지 세계기록이 무엇인지..,이런것과 민주주의와의 관계를 모른다면 무식의 극치이고, 알면서 이런식으로 표현하면 ...소피스트와 김대중을 능가하는 궤변론자라는 것이다. 아닌가?
한국의 민주주의 공헌자에 1위에 이승만대통령. 2위에 박정희대통령이라는 조갑제대표의 '묻지마/나홀로 주장'과 정확하게 맥이 닿아 있다. 장경국이 경제성장뿐만 아니라 동시에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만들어야, 박정희대통령을 그렇게 평가할 수 있다는 속셈이 보인다는 것.
( 산업화와 민주화의 양대축을 동시에 이룩했다는 조갑제대표의 꿈/신격화/과대망상이 ...대한민국의 산업화초석을 쌓은 공로/한쪽축 만해도 충분하게 넘치는 ...박정희대통령의 영웅성평가까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면서 오히려 훼손한다고 볼 수 있으며.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기위해 '일부러' 유신을 했다는 주장과 같다는 것. 얼마전에는 박정희대통령이 일본군장교 근무를 ...'일본에 협조하는척 '하려 했다고 기술하기도 했다....이런 사례는 많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러다가 얼마 안있으면 공산주의를 알기위해 남로당 가입했다고 주장할 판. )
참고로, 대만이 유일하게 우리나라를 부러워한 것은 , 민주주의 체제를 앞서 나가면서 정권교체까지 이루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였지...조갑제대표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한국의 경제기적이 아니었다. 왜냐면 대만 자기들이 경제적으로는 한국에 뒤진 적이 없었기때문에...
대만은 한국과 거의 동시에 경제개발정책을 시도한 후로, 엄청난 경제기적을 이루었으며, 조갑제대표가 아쉬워하겠지만, 박정희대통령은 물론이고 같이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전두환/노태우까지도 대만의 경제 성과/수치에 가까이 하지 못했다. 경제의 모든 수치는 감히 비교가 불가할 정도이었고, 그래서 미 언론에서 아시아4룡이란 것을 언급하는것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언론도 대만과의 경제비교수치를 언론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 그래서 이미 70년대말-80년초에, 나 스스로 이를 확인하기 전까지도 한국이 대만을 이미 추월했거나 대만과는 거의 대동소이한 것으로 오해했으며, 그 당시 /지금까지 많은 중/장년/노년츧이 그렇게 믿었을 것으로 보인다. )
대만은 늘 한국보다는 잘 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런 자부심에 충격을 가한적이 있었다.....좌파라는 노무현정권시절에 처음으로 GDP가 추월당할 때였으며, 대만언론에 보도되었던 것.....이런 보도를 보고는 역으로 한국사람들이 오히려 더 놀랐을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 대만이 그동안 그 정도 였나 ? " 였을 것이며, 그 보도는 그동안 통제된 한국언론에 무언가 속힌 기분이었을 것이며, 한국인의 대만에 대한 경제우월성/왜곡을 바로잡아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요컨데, 입만열면...늘 논거/진리/팩트만이 승리한다고 다른사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조갑제 대표의 기자정신은 ?..
입으로는 경제에 대한 온갖수치를 내세우며 대한민국을 극찬한 조갑제기자는 올해 이전까지는 대만을 몰라서 언급하지 았았나 일부러 언급을 피했나? ( 십수년동안 한번도 언급조차 않다가, 올해 처음으로 대만과의 경제를 비교하면서, 삼성/LG//현대등 대표선수들의 브랜드우위로 결국에는 대만을 능가한다는 논거를 내 놓았다. )
이 사람이 보수의 대표라면, 선거에서 종북좌파에 필패이며, 하다못해 보수에 마땅한 다른 사람/투사가 없으면, 조갑제대표/이사람이라도 고쳐야 할 것 아닌가?
(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경제/성장율 1위'라는 표현은 , ;대만과 함께 경제기적 공동1위'와는 약간의 표현차이같지만...실상은 엄청난 과장/왜곡표현이며,.... '유신체제가 민주화에는 역행했지만 경제성장을 이루는 바람에 ..결국은 민주주의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역설적인 상황'이라는 표현과 '유신/박정희대통령이 민주화의 공로자2위라는 주장/기술'하는 것은 ...궤변론자 김대중도 미안케하는 궤변 그 이상/이하도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