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이 부모보다 못산다고 불만인 문재인 씨가 꼭 읽어야 할 手記

<(매춘으로 아이를 기른)그 어머니는 殺母蛇(살모사) 어미다. 살모사는 새끼를 낳으면 자기 몸을 자양분 삼아 새끼를 먹여 살리고 자신은 죽는다고 했다. 강한 우리 어머니들은 살모사 어미처럼 전쟁통에도 자식을 업고 뛰었고 가슴에 품고 살았다.>
*아래 글은 조갑제닷컴과 국민행동본부가 공동 주최한 現代史 체험 手記 공모에서 가작으로 당선된 高永淑 씨의 작품에서 뽑았다.


<중학교에 진학 못 하는 아이는 목 놓아 울어

1959년 초등학교 졸업식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친구들과 이별도 아쉽지만, 중학교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은 목 놓아 울었다. 가난해서도 진학을 못 했지만 男兒(남아) 선호사상이 남아 있어 여자아이는 한글만 깨우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상급학교 진학은 남자 수가 많았다. 초등학교 때 校門(교문) 청소를 하다가 하얀 칼라에 검은 교복 입은 언니들이 지나가면 빗자루를 세워두고 넋을 잃고 부럽게 쳐다봤다. 그 멋진 언니들을 매일 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학교에 입학했다. 하복 준비하기 전 3개월 정도는 하얀 저고리 검은 치마를 입었는데 학교에 못 간 아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 후 뜻있는 청년 언니들이 夜學(야학)을 세워 진학 못한 친구들을 공부할 수 있게 도와줬다. 산업화되면서 그 친구들은 도회지(도시)로 하나 둘 떠났다.

태어난 곳에서 편히 사는 사람도, 피란민으로 사는 우리도 늘 배고픈 ‘보릿고개’를 힘들게 넘겨야 했다. ‘춘궁기’엔 쌀이 귀해 보리가 한 되면 쌀은 두 홉 넣고 밥을 지어 아버지와 남동생은 밥에 쌀이 좀 들어가고 나머지 식구들은 보리밥을 많이 섞어 먹었다. 여동생은 유난히 보리밥을 싫어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창피해서 꽁보리 점심 도시락을 안 가져들 왔다. 점심시간에 책도 보고 수돗물도 마시고 놀면서 점심시간을 때웠다.

젊은 아빠들은 생산적인 일거리가 없으니 원정 도박꾼이 돼 각지를 돌아다니며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예쁜 부인들은 아이를 업고 빈둥빈둥 놀면서 동네 참견하고 말을 만들어 내며 그냥 놀았다. 농한기엔 낮이나 밤이나 술, 담배, 화투로 날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시절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새까만 증기기관차를 진종일 타고 친인척을 만나러 서울에 올라왔다. 사람도 많고 차도 많아 놀랐다. 효자동, 필동, 혜화동, 명륜동을 두루 돌아다니며 인사를 드렸다. 그때까지도 韓屋들이 많이 있었다. 창경원에 구경하러 가서 아이스케키도 사 먹고 용두동을 돌아 밤엔 언니들과 자하문 성곽도 올라가 보았다. 지금은 ‘갤러리’가 많아졌다. 학교 마당에서는 미국에서 만든 위생 계몽 만화를 보여줬고, 조미령 씨가 주연한 ‘시집가는 날’도 상영했다. 내가 투박한 사투리로 말을 하면 신기하게 쳐다보며 ‘박장대소’를 했다. 친척들은 ‘오라버니, 언제까지 여자아이를 시골에 둘 것이냐’고 되묻기도 했다. 서울은 낯설고 불편했다.

‘안네의 일기’에서 안네가 갇혀 살면서도 꿈이 있는 소녀였듯 우리도 가난했지만, 배우들 사진을 벽에 붙여 두고 그들과 동일시도 해보고 도시를 동경하고 꿈도 키웠다.

나라에 재난이 있을 때나 계몽할 때는 상부의 지시가 학교까지 내려오면 학생들을 동원했다. 나라를 위해서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비행기 기름으로 사용한다고 풀씨를 따기 위해 산과 들로 몰려다니며 각자 할당량을 채워 제출했다.

위안부였던 영자네 새엄마

내가 살아가는 마을은 작지만 해방부터 6·25전쟁까지 별별 사연이 모여 있어 어린 눈으로 가까이서 봤다. 우리 가족은 피난 와서 기차역에서 제일 가까운 영자네 집에 세 들어 살았다. 영자의 새엄마는 일본 전쟁의 희생자인 위안부였다고 한다. 자그마한 키에 예쁘고 조용하고 단정한 옷매무새에 알뜰한 살림 솜씨는 물론이고 친절하기까지 했다. 설탕이 귀한 시절 물엿을 집에서 고아 우리에게 주셨고 영자의 옷도 언제나 깔끔했다.

해방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젊은 여인인 그는 비만 오면 빗물이 떨어지는 처마 밑을 돌아다니며 중얼거렸고 아들은 창피하다고 말리고 먼 산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이 없지만, 아들의 밥은 꼭 챙겼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남매는 언제나 자기 남동생 손을 꼭 잡고 늘 밖에 나와 있었다. 남매 엄마의 모습은 행주치마 두르고 알뜰살뜰 살림만 했을 평범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매춘’을 하며 두 남매를 먹이고 학교 보내고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어느 날 훌쩍 떠나고 없었다. 흔히들 3일만 굶으면 남의 담장을 넘는다고 했다.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도덕의 잣대냐 먹고 사는 것이 먼저냐? ‘병아리와 닭의 논리’일 것이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이 70이 되어 세상이 조금 보이니 어딘가에 나이 들어 살아가는 남매를 생각하면 슬픈 눈물이 난다. 그 어머니는 殺母蛇(살모사) 어미다. 살모사는 새끼를 낳으면 자기 몸을 자양분 삼아 새끼를 먹여 살리고 자신은 죽는다고 했다. 강한 우리 어머니들은 살모사 어미처럼 전쟁통에도 자식을 업고 뛰었고 가슴에 품고 살았다. 장터 피난민촌에는 선하고 정다운 이모 같은 꽃다운 여인들이 아이를 데리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갔다. 개울 건너 외딴곳에 사는 자매는 姓(성)도 모르는 아이를 키우며 동네와 단절된 생활을 했고 소문만 무성했다.

먼 친척은 늦은 나이에 업둥이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에게 줄 쌀죽이 식을까 봐 끓인 쌀죽을 가슴에 넣고 장사해 가면서 길렀다. 그 업둥이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돼 엄마에게 효도했다.

전쟁터에서 남자들은 팔다리가 잘려 고향으로 돌아왔고, 여자들은 가난을 이기며 가정을 이끌어야 했다. 장터 장날에는 어김없이 술에 취한 상이(부상자)군인들이 몰려다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나 병신 돼서 왔다 어쩔래! 어쩌란 말이냐!”고 하며 허탈하게 울고 웃었다. 동서남북 시비를 걸어 싸우고, 義手(의수)가 없어 ‘쇠갈고리’ 팔을 휘두르며 물건을 찍고, 깨고 행패를 부리면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욕을 했다. 사람들은 놀라 달아났을 뿐 절망하고 절규하는 그들을 위로하는 ‘賢者(현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을 위로하고 감싸기엔 너도나도 지치고 고달팠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가 창피하고 부끄러워 학교도 결석하고 기가 죽어 다니고 희망의 끈을 놓아 버리면서 가난의 악순환이 대물림됐다. 바라보는 가족들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나라가 폐허가 됐으니 누가 무엇으로 그들을 달래주고 따뜻하게 안아주겠는가?

부모의 애정에 굶주린 수많은 전쟁고아의 애절한 눈빛들을 보며 꽁보리밥을 먹어도 부모님 울타리 속에 산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세상을 원망하는 남자들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인들은 슬픈 나날의 연속이었다.


전쟁이 남긴 슬픔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죽고, 팔자 고치라고 친정으로 돌려보내 떠밀려 떠난 엄마와 조부모 밑에서 아빠 엄마를 그리워하며 기죽어 살아가는 遺腹子(유복자)들…. 교문 모퉁이에 숨어서 먼발치에서 자기 아들을 훔쳐봐야 하는 그림자 엄마! 살아있는 비극 중의 비극이다. 결혼 풍습에 처가에서 식을 올리고 1년 묵는 풍습이 있었는데, 전쟁터에서 새신랑이 전사해 시댁에 신행도 가지 못하고 아이와 친정에 살아가는 가련한 새색시뿐인가! 어릴 적 북에서 남쪽으로 외갓집에 왔다가 38선이 생겨 집에 못 돌아가고 살아가는 동갑내기 매점 아가씨. 눈물 흘리며 나에게 꿈같은 이야기를 한다.

부자들은 4代가 조부모 밑에서 살던 대가족이 많았다. 결혼하고도 分家(분가)하지 않고 부인과 자식을 두고 서울로 유학을 갔던 친구의 아버지가 북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큰집 눈칫밥을 먹으며 공부하던 친구는 공무원이 돼 어머니를 모시고 分家하려고 했다. 하지만 ‘연좌제’에 묶여 절망했던 친구였다. 이산가족 찾기에도 끝내 안 나타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도 원망했었다. 운전기사를 하며 엄마를 모시고 살았다. 어떤 말로도 그 친구를 위로할 수 없었다.
기예를 닦은 기생들도 큰 기와집에서 세상 변화에 힘겹게 살아갔다. 이름도 예쁜 매화 도화 아주머니들이 있었는데, 남의 집 소실(작은 부인)로 들어가 자식에게 희망을 걸며 큰집, 작은집 사이좋게 살아갔다.

산속 마을에서 내려온 깽깽이 할아버지는 시끄럽다고 면박을 해도 동냥을 얻고는 말없이 돌아갔다. 깽깽이는 우리 고유 악기 ‘해금’이었다. 배고픈 시절이니 ‘해금’도 무시를 당했다.

장독 속에 쥐가 빠져 죽어 있어도 건져내고 본인이 먼저 마시고 장터에 내다 팔아서 먹을 것을 장만했다고 한다. 잘생긴 움막집 거지 패거리는 매일 이 동네 저 동네 옮겨 다니면서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하며 대문이 큰 부잣집이나 잔칫집을 돌며 밥 달라고 소리치며 구걸했다.

지금은 ‘품바’로 인기도 있고 향수도 달래지만 그땐 밥을 얻어먹기 위한 최소한의 재주였다. 그것이 예술로 승화된 것이다. 부엌 칼소리(난타)가 예술 속으로 들어왔듯이….

장터 끝자락 청소를 도와주며 밥을 얻어먹는 삼팔따라지(거지)는 술 한잔 걸치면 연극배우처럼 어머니! 부르며 신세 한탄을 땅이 꺼지도록 하며 울어댔다.

일본징용에 끌려갔다가 살아온 ‘지게꾼’ 아저씨는 술에 취해 저녁나절 집에 들어가면서 구슬프게 ‘아리랑’을 부르는데 다음날 비가 온다고들 했다. 어딜 가나 日帝잔재와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애처롭게 했다.

고아원 제도권 안에도 못 들어간 아이들은 밥 얻어먹다가 여자아이는 식모로, 남자아이는 머슴으로 들어가 노예처럼 일만 해도 두들겨 맞곤 했다. 부모가 없다는 것이 그렇게 불행했다. 법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인권의 死角지대였다. 그땐 비일비재한 日常(일상)이었다. 그들은 친구도 없고 자기 이름 석 자도 모르고 살았다. 옷은 남루하고 손은 언제나 퉁퉁 부어 있었다. 너무 불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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