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를 예고하였다. 긴급 성명을 통해 “영국은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면서 “향후 3개월간 총리직을 수행한 후 10월까지 새 총리로 내각을 구성하겠다”고 말했다.
영국 유권자들이 EU 탈퇴를 결정한 것은 영국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아마도, 1066년 프랑스어를 하는 바이킹 후손들(노르만)이 잉글랜드를 점령, 유럽 문화권 속으로 편입시킨 이후 가장 중요한 文明史的 사건이 될 것이다. 영국은 유럽의 일원인가, 아니면 유럽과 구별되는 독자적 세력인가? 과거처럼 '고립 속의 영광'인가, 아니면 '고립 속의 소외'인가? 영국의 국가 정체성이 시험대에 올랐다.
윌리엄 정복왕이 떠난 항구에서
 
프랑스 노르망디의 디브 수 메르 항구는 ,1066년 9월, 노르만 公國의 윌리엄 공이 이끄는, 약 7000 명의 프랑스 어를 쓰는 騎士들과 약 2000 마리의 말이 약 700 척의 배를 타고 출항한 곳이다. 필자는 노르망디를 여행하면서 해안 휴양지 도빌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뒤 베이유로 가는 길에 이 항구를 찾았다. 디브 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평온한 모습의 작은 항구엔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 그 흔적은 없었다. 주민에게 이곳이 그곳이냐고 물었더니 '아니 외국인이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1066년 윌리엄 공은 해롤드 왕이 잉글랜든 왕으로 즉위한 직후 원정을 결심한다. 자신이 王位(왕위) 계승권이 있다면서 교황청에 로비하여 지원을 약속 받고 기사들을 모집하였다. 자신의 휘하 기사들뿐 아니라 이웃한 브리타뉴, 프랑다스를 넘어 全유럽의 모험가들이 몰려 왔다. 모험심이 강한 유럽의 戰士들에게 잉글랜드 원정은 일종의 벤처 투자 사업이었다. 윌리엄 공은 원정에 참여하는 기사들에게 성공하면 잉글랜드의 땅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원정군을 편성, 유지하는 데는 대단한 軍需(군수)지원이 있어야 했다. 마크 모리스라는 학자의 계산에 의하면 디브 수 메르 항구에 집결한 7000명의 병력과 2000 마리의 말을 먹이는 데는 하루 28t의 밀가루와 하루 3만 갤런의 물이 필요하였다고 한다. 이들에게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중세엔 상비군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다가 필요할 때 대규모 병력을 모집하는 식으로 하지 않으면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8월 초 노르만 군은 출항 준비를 끝냈지만, 날씨와 풍향이 맞지 않아 한 달 정도 기다려야 했다. 윌리엄 공은 속이 타 들어갔을 것이다. 700척의 대함대가 디브 항을 떠난 것은 9월12, 13일 중 하루로 추정된다. 바다는 거칠었다. 함대는 잉글랜드로 곧 바로 향하지 못하고 노르망디 연안을 따라 동쪽으로 약160km를 항해, 생벨러리 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보름 정도 날씨의 好轉(호전)을 기다리다가 9월27일 저녁 잉글랜드를 향해 출항하였다.
노르만 군의 잉글랜드 점령 과정은 중세에서 가장 정확하게 기록된 사건이다. 베이유 刺繡(자수)에선 시각적으로 기록했고 여러 권의 從軍記(종군기)가 있어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윌리엄 공이 탄 旗艦(기함)은 너무 빨리 나갔다. 28일 아침 잉글랜드 해안으로 다가가는 데도 後續 (후속)함대가 보이지 않았다. 윌리엄 공은 그래도 태연하게 아침 식사를 맛있게 했다고 전한다. 곧 뒤따르던 함대가 나타나, 페븐시에 상륙했다. ![]()
노르망디 대평원이 바다와 맞닿는 곳에 몽셍미셀이 나타난다.
영국의 운명을 하루에 결정한 해이스팅스 전투
 
윌리엄 공은 배에서 바닷가에 내릴 때, 다리를 헛놓아 엎어졌다. 불길한 징조였다. 그는 두 팔을 뻗으면서 외쳤다고 한다. '내가 잉글랜드를 잡았다.'
잉글랜드 왕 해롤드는 그때 북쪽 요크셔 지방에 있었다. 윌리엄 공의 상륙 사흘 전 이곳에서 決戰(결전)이 있었다. 노르웨이의 바이킹 왕이 수백 척의 원정군을 데리고, 동해안에 상륙했다. 그 또한 잉글랜드 왕좌를 노렸다. 남쪽에서 노르만 군의 상륙을 기다리던 해롤드 왕은 군대를 급히 北上시켜 스탬포드 다리에서 노르웨이 침략군을 만났다.
‘스탬포드 다리의 전투’로 알려진 이 싸움에서 노르웨이의 바이킹 군대는 전멸하고 왕도 죽었다. 대승을 거둔 해롤드 왕에게 노르만 군의 상륙 소식이 전해진 것은 10월1일 전후였다. 해롤드 왕은 강행군을 하면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10월14일 아침 해롤드 왕이 지휘하는 앵글로-색슨 군대와 윌리엄 공이 지휘하는 노르만 군대는 해이스팅스에서 마주 섰다.  해롤드 왕이 언덕의 능선을 차지했다. 노르만 군은 敵을 올려 다 보는 위치여서 불리하였다. 특히 노르만 군의 자랑인 기병 돌격이 어렵게 되었다.
노르만 군은 3열로 섰다. 첫째 列은 弓手(궁수), 둘째 열은 중무장 보병, 셋째 열은 기병. 윌리엄 공은 이 기병 열의 한복판에서 지휘하였다. 잉글랜드의 기병은 말에서 내려 보병처럼 싸웠다. 이날 잉글랜드 군은 활 부대를 동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패를 이어 붙여 방벽을 만들고 수비 자세를 취하였다.
노르만 군은 먼저 활로 집중 사격을 시작했다. 잉글랜드 군은 방패로 화살의 폭우를 피했으나 사상자가 났다. 이어서 노르만의 중보병이 앞으로 나와 잉글랜드 군을 덮쳤다. 방패와 방패,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 함성, 비명이 戰場(전장)을 진동했다. 잉글랜드 군은 물러나지 않았다. 창과 도끼, 돌을 매단 몽둥이를 던지며 저항하였다. 노르만은, 중보병의 공격이 효과를 보지 못하자 기병을 보냈다. 기병돌격은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는 형국이라 큰 충격을 주지 못하였다.
7000명의 戰士가 200만을 손에 넣다
 
일진일퇴하는 백병전이 수 시간 계속되었으나 승부는 나지 않았다. 오후에 들어 공격하던 노르만 군의 左翼(좌익)이 철통같은 잉글랜드 군의 수비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윌리엄 공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노르만 군의 좌익이 무너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수비만 하던 잉글랜드 군이 추격에 나섰다. 이 위기를 逆轉(역전)시킨 것은 윌리엄 공이었다. 그는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준 다음 후퇴하는 노르만 군을 수습, 반격에 나섰다. 잉글랜드 군은 유리한 高地(고지)를 버리고 추격에 나섰다가 노르만의 반격에 걸려 많은 전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다시 소강 상태.
노르만 기병 전술은 몽골군과 닮은 점이 있었다. 전투 중 달아나는 시늉을 한다. 적은 추격하느라고 戰列(전열)이 흩어진다. 이때를 틈타 재집결, 반격을 감행, 흩어진 敵軍을 섬멸한다는 공식이었다.
윌리엄 공은 해이스팅스 전투 막판에 이 기만전술을 썼다. 이런 전술은 고도로 훈련된 부대만 할 수 있다. 윌리엄의 직할 부대가 유인에 동원되었다. 접전중 갑자기 등을 돌려 아래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잉글랜드 군은 수비전만 하다가 비로소 찬스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수비대열에서 이탈, 달아나는 노르만 군을 좇기 시작하였다. 수비하기 좋은 고지를 버리고 흩어지면서 내려왔다. 달아나던 노르만 보병과 기병이 집결하더니 갑자기 유턴했다. 반격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군이 몰리기 시작하였다. 이 순간 잉글랜드 해롤드 왕이 전사하였다. 베이유 자수의 그림에 따르면 그는 화살을 눈에 맞고 죽었다. 왕이 죽으면 졸병들은 버틸 수가 없다. 잉글랜드 군은 무너졌다.
쌍방의 병력은 각 7000명 쯤 되었을 것이다. 그날 반 정도는 죽거나 다쳤을 것이다. 특히 잉글랜드 군의  피해가 컸다. 잉글랜드 지배층을 대표한 기사단은 이 전투와 이어진 여러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국가의 지배층이 전면적으로 교체되어 버린 희귀한 사례이다. 윌리엄 공은 1066년 런던으로 입성, 영국 왕으로 즉위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어를 하는 노르만 戰士들의 지배 하로 들어간 것이다. 7000명의 戰士(전사)들이 전투에서 이기자, 200만(당시 영국 인구)의 잉글랜드 人과 국토, 그리고 한 문명이 수중으로 들어온 셈이다.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성공적 벤처 투자였다.
   
‘베이유 刺繡’ 앞에서
 
프랑스 노르망디의 베이유를 찾았다. 이 古都(고도)의 옛 교수신학교 건물 내 박물관엔 '베이유 刺繡(자수)'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公이 잉글랜드에 상륙, 해이스팅스 결전에서 해롤드 왕의 군대를 무찌르는 이야기를 담은 자수 그림이다. 50여개 장면의 사실적 그림인데, 길이 약 70m, 너비 약 50cm이다. 유리 안에 넣어 暗室에서 전시하고 있었다.
이 보물에 대한 연구는 방대한데, 지금까지 확정된 사실은, 베이유 성당의 再建式(재건식)에 奉納(봉납)할 목적으로 정복왕 윌리엄의 이복 동생인 베이유의 오도 主敎가 지휘하여 만든 것이란 점이다. 장군이기도 했던 오도는 윌리엄 왕이 고향인 노르망디로 돌아가면 잉글랜드를 대리 통치 한 사람이다. 그가 자수 제작을 지시한 것은 1070년대로 보인다. 같은 시기 그는 베이유 성당의 건축도 시작하였다. 잉글랜드 기술자들이 자수의 제작에 참여, 7년 만에 완성한 뒤엔 베이유 성당으로 가져와 보관하였다.
이 자수에는 626명의 인물, 202마리의 말, 41척의 선박, 37동의 건물이 등장한다. 바이킹을 유명하게 만든 선박의 구조를 아는 데 좋은 자료이고 당시의 무기와 전술 연구에도 소중하다. 자수엔 밝은 별과 몽셍미셀 요새도 나온다. 나중에 천문학자들은 핼리 혜성임을 확인하였다. 해이스팅스 전투가 있은 지 10년 정도 흐른 다음에 제작되었으므로 사실에 매우 가까운 그림이라는 평가이다.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은 이 베이유 자수로 해서 아주 실감 있게 다가온다. 일종의 동영상이다.
이 자수 기록화의 마지막 장면은 영국의 해롤드 왕이 눈에 화살을 맞고 죽는 모습이다. 해이스팅 전투에선 앵글로 색슨 족의 귀족들이 왕과 함께 전멸하였다. 이는 발전적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운명이 바뀌다
 
프랑스 말을 하는 노르만 정복자들이 잉글랜드 지배층을 일거에 제거하고 앵글로 색슨족이 발전시킨 제도와 전통을 타고 앉아 새롭고 능률적인 국가를 만든다. 그때까지 영국은 유럽 문화권에선 멀어져 北海(북해)를 놓고 스칸디나비아의 후진 문화권에서 놀았다. 노르만 지배층에 의하여 프랑스-유럽 문화권과 연결되고 프랑스語 단어가 영어로 많이 들어와 세계적 언어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066년 이전에 영국은 로마-게르만-바이킹족의 침공만 받아왔는데 노르만 귀족이 통치 집단으로 들어앉은 다음엔 國力이 강해져 한 번도 침공을 허용하지 않고, 오히려 외국을 침략하는 나라로 달라졌다. 이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이 베이유 자수는 2차 대전 때 독일이 눈독을 들였으나 베이유가 노르망디 상륙 직후에 연합군에 의하여 해방됨으로써 위기를 벗어났다. 지금 베이유는 인구가 1만4600명에 불과한 조용한 시골이지만 베이유 자수로 해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잘 알려진 地名(지명)이다.
이 자수를 보존하여 온 베이유 성당은 1070년에 起工되어 수백 년에 걸쳐 완성된, 그리하여 노르만 로마네스크 양식과 노르만 고딕 양식이 융합된 단정한 인상의 건축물이다. 건축학도가 관찰하면 로마네스크 식(서울 정동의 성공회 건물이 로마네스크 식이다)이 고딕 식(명동 성당)으로 변화해간 과정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노르망디 상륙전의 와중에서 파괴되지 않아 1000년 전의 원형을 온전하게 알 수 있다. 벽화 중엔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지시로 살해된 뒤 聖人(성인)으로 추존된 토마스 베켓의 이야기가 있다.
베이유 자수와 성당은 노르만 문화의 우수성을 상징한다. 11~13세기 유럽의 최고 문명은 프랑스에 있었다. 군사, 경제, 학문, 예술 모든 면에서 최고였다. 1300년에 프랑스 인구는 2000만, 영국은 600만 명이었다.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프랑스 왕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파리는 인구 20만의 매력적인 도시로 성장, 유럽의 인재들을 끌어 모았다(특히 파리 대학). 노르만은 바이킹의 야성 위에 전성기의 프랑스 문화를 흡수, 보다 높은 수준의 새로운 문화를 재창조한 것이다. 노르만이 노르망디, 영국, 시실리 및 남이탈리아에 남긴 수많은 성당, 궁전, 성, 모자이크는 비잔틴과 아랍 양식까지 수용한 것도 많다. 위대한 戰士(전사) 집단이 위대한 포용자가 되어 위대한 文藝창조자가 된 경우이다.
<영국인들이 주변국의 만류와 우려에도 EU(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이민자 유입을 억제하고 ‘영국만의’ 정체성을 되찾길 바라는 영국인이 더 많았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전통적으로 대영제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영국은 전통적으로 유럽 통합에 회의적인 국민정서가 존재했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 유로존 경제가 침체하고 대규모 이민자 유입에 따른 위기의식이 확산하면서 브렉시트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브렉시트 찬반 투표를 하루 앞둔 지난 22일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과 사디크 칸 현 런던시장 등 찬반 진영 측 인사 6명이 나와 벌인 BBC 방송 공개 대토론회의 주요 화두도 ‘이민 문제’였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가 EU에 가입하면 영국이 '이민자 천국'이 될 것이라는 문제에 대해 토론이 격렬하게 벌어졌다.>(조선닷컴).
지금 엘리자베스 2세의 血統도 노르망 윌리엄 공으로 이어진다. 넓게 보면 노르망 王家이다. 왕가의 문장에 새겨진 모토가 佛語이다. 영국의 국가적 정체성은 앵글로 색슨과 노르만(바이킹+프랑스))이 융합한 것이다. 끈질기며 용맹하고 법을 잘 지키며 국가 지도층이 솔선수범하고 전통과 역사를 소중하게 여기고 자존심이 강하다. 이런 영국 기질은 1000년 이상 지배층이 된 노르만과 그 후예들의 성격이기도 하다.
1066년 이전 유럽으로부터 여러 번 침략을 받았던 영국은 이후엔 유럽에서 절대 强者가 나오는 것을 항상 견제하면서 國體를 보존하였다. 스페인(펠리페 2세), 프랑스(루이 14세, 나폴레옹), 독일(빌헤름 1세, 히틀러)의 유럽 制覇 꿈은 영국에 의하여 제동이 걸렸다.  영국은 항상 마지막 전투에서 이긴다는 말이 있다. 20여년에 걸친 나폴레옹 전쟁을 마감하고 팍스 브리타니카 시대를 연 1815년 6월18일의 워털루 전투가 그런 경우이다.
17~19세기 영국은 의회민주주의와 산업혁명의 힘으로 식민지를 개척, 자유무역과 자본주의 체제를 세계로 확산시켰다. 이런 나라가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유럽 국가들은 늘 超越的인 위치에 있으려는 영국을 경계하게 되었고, 영국 또한 유럽의 일원이란 의식이 강하지 않았다. 이번 유럽연합 탈퇴 결정은 그런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역사는 현재에 의하여 늘 재해석될 뿐 아니라 현실적 힘으로 되살아난다.
베이유 성당은 로마네스크 및 고딕식을 함께 보여준다.![]()












자유 시장 시장 경제 논리자 보이지 않는 손( 애덤 스미스) 가 울고 싶것네여
작동이 잘 안되는 갑소 , 동양의 철학적 보이지 않는 손? 이 작동 하는 시대 임돠
해가지든 별이뜨든 시대가 변하니 , 드디어 혼란의 도가니?
표플리즘 으로 한탕 해보려는 꼼수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습니다 요 .
국가의 중대사를 대중의 뜻을 따라
영국의 정치인들이 책임을 회피한 것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같은 유능한 지도자의
결단력이 필요한 부분
어리석은 대중에 결정권을??????
영국인의 본성은 “신사주의(Gentlemanship)” “세계주의” 이전에 철저한 “상인주의(Mercantilism)” “이익우선주의”이다 그래서 돈이라면 아편도 팔고, 상권 탈취를 위해서라면 해적도 끌어들여 상대방을 이기고 본다. 16세기에는 인신매매 즉 노예무역으로 부를 쌓았다. 대표적 노예상인 존 호킨스는 영국왕실의 비호를 받았다.
이번 투표 며칠 전에 탈퇴 반대 캠페인을 벌이던 조 콕스 노동당 의원이 피습 사망했다. 찬반 백중세 중에 벌어진 일이라 다른 나라 같았으면 찬성 진영 상당수가 반대로 돌아서서 EU 탈퇴 의견은 쏙 들어 갔을 만하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다르다. 이익 앞에는 피도 눈물도 의리도 없다.
이런 영국인의 천민근성은 지도자가 걸출하면 그 모습을 감춘다. 윈스톤 처칠, 마가렛 대처 수상 등이 지도자라면 일어날 수 없지만, 기회를 틈탄 선동선전가들이 불을 질러대면 여지없이 본색이 들어난다.
원래 민주주의는 항상 중우정치(衆愚政治)로 급속 추락할 위험이 상존하기에 막말정치군, 선동가들을 조심해야 한다.
EU탈퇴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려들면 약간, 지나치다고 봅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부딧친 영국인들의 비명소리로 이해하는건 어떨런지요.
이민자들로 부터 일자리를 빼앗기는것에 대한 본토인들의 아우성, 그리스나 스페인같이
무분별하게 자신들의 부를 흥청망청 써버린 사람들의 뒷치닥거리를 영국인들의 세금으로 메꾸는것이 싫다는 아우성정도...
성격상,미국의 트럼프현상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있겠는지요?
나는 영국인들의 결단이 부럽다. 한국은 왜 NPT 탈퇴안 국민 투표를 못 하는가.
해가지지 않는 다던 대영제국이 세계적 공동선의 가치를 모르는 가 ?
EU가 미국을 이겨 먹으려다가 잠자는 사자의 코수염이라도 건드린건가 ?
사악한 이기주의 적 인간들이 판을 치니 ,제정신으로 상황 파악하기 힘드네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