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보통학교 부임
박정희가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1937∼1940년) 교사로 근무하다가 군인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교사로서의 박정희는 불만에 차있어 불성실한 근무 자세를 보였을 것이라는 선입감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오해다. 교사 박정희는 대구사범에서 배운 全人 교육을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실천하려고 했고, 김영기 등 조선인 교사들로부터 배운 민족혼의 중요성을 학생들에게 심어주려고 했던 이였다. 한 제자(주영배)는 그를 ‘方定煥(방정환) 선생을 연상시키는 선생님’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1962년에 작성된《이낙선(작고·전 상공부장관·당시 최고회의 의장 비서) 비망록》 중에서 박정희 선생의 제자 鄭順玉(정순옥)의 회상기를 싣는다.
<글이라 하기엔 부끄럽습니다만, 20년 전 은사로 모셨던 선생님을 지금 이 나라 영도자로 모시게 되니 기쁨과 두려움을 금할 길 없어 어린 시절 제자로 돌아가서 기쁘고 슬펐던 추억을 몇 가지 더듬어 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의 학교에 부임하셨을 때 저는 소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동무들 몇 명이 저의 집을 찾아와 새로 오신 선생님께 가보자고 하기에 선생님 하숙집을 찾아갔습니다. 어린 호기심에 선생님 방 안은 얼마나 장치가 잘 되어 있나 하고 방 안을 살펴보았습니다. 선생님 책상 위에 커다란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 사진에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주룩 달려 있는 외국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이라면서 그의 傳記를 자세히 이야기하여 주셨습니다. 4월 어느 날 봄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고운 옷으로 갈아 입고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여 가지고 학교에 모여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출발하였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등산복에 어깨에는 나팔을 메고 길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장난을 하거나 줄이 삐뚤어지면 한 대씩 맞아가면서 목적지인 문경 남쪽 鎭南橋(진남교)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는 선생님과 점심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즐겁게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물에 빠져 죽는다고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순간 박 선생님은 깊은 물 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저희들은 선생님이 죽는다고 고함을 치며 다른 5, 6명의 선생님들과 함께 둑에서 벌벌 떨고 있는데 한참 만에 박 선생님이 다 죽은 아이를 물 속에서 건져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인공호흡을 시켜 물을 토하게 하니 그제서야 깨어나는 아이를 보니 선생님이 하느님 같이 고마웠습니다.
어느 일요일 저희들은 박 선생님과 일본 선생 두 분이 노는 자리에 갔습니다. 일본 선생 한 분이 말하기를 조선 여성은 예의가 없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물동이를 이고 다니느니 하고 우리나라 여성들의 흉을 보고 있었습니다. 박 선생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우리말로 “너희들 저 말 잘 새겨들어라”고 하셨습니다. 박 선생님은 우리끼리 있을 때는 꼭 우리말을 쓰자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철 없는 우리들은 아무 의미도 모르고 “선생님 조선말하면 퇴학당하는데, 왜 그래요”하고 반박을 한 기억이 납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어느덧 우리들은 6학년이 되었습니다. 그해 봄 소풍은 5, 6년생이 우리 학교에서 70리나 되는 산고개를 넘어 金龍寺(금용사)라는 데에 가서 하룻밤을 쉬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소낙비를 만났습니다. 우리 어린 것들이 70리 산고개를 다 넘도록 비는 그치지 않아 미끄러져 웃는 아이, 넘어져 우는 아이, 고인 물 속에 일부러 들어가 첨벙대는 아이… 웃으며 울면서 넘어가고 있는데, 먼 행길이 보이면서 트럭이 한 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인솔하는 선생님께 저 차를 잡아가지고 우리들을 태워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 트럭은 우리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차는 바로 박 선생님이 우리를 마중하려고 몰고 오신 차였습니다. 저희들은 물귀신처럼 되었지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은 우리들을 차에 태워 주시면서 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들에게 노래를 부르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가지고 오신 나팔을 부시면서 우리들에게 용기를 나게 하셨습니다. 서글펐던 소풍이 웃음과 즐거움으로 변하여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합니다.
저희들이 졸업한 후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동생 편에 박 선생님께서 학교를 그만두시고 떠나신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섭섭하여 선생님을 뵈러 학교로 갔습니다. 선생님은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은 안 하시고 가서 편지를 해주겠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또 “너희들에게 꼭 마지막으로 부탁할 말은 공부 잘하여 씩씩하고 굳센 조선 여성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선생님을 다시는 못 뵈올 줄 알고 울었습니다. 얼마 후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에게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봉투에 만주군관학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편지 구절에는 언제나 “공부 잘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다오. 올해도 풍년이 들어 잘 살 수 있도록 기원한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貧富貴賤을 가리지 않는 선생님
박정희 교사에 대한 제자들과 주민들의 증언들을 종합하면 이런 이미지이다. 아침마다 나팔 불고 청소에 철저한 사람, 운동과 병정 놀이를 좋아하고 학생들과 잘 놀아 주는 선생, 일본사람들에게 얕보여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투지를 불어넣어주던 분,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제자들을 사랑한 사람, 일본인들도 어려워한 대담한 배짱, 술을 좋아하는 교사, 가정 방문을 많이 하고 학부형들과 잘 어울렸던 선생, 나팔·스파이크 달린 운동화·목검으로 기억되는 사람, 그리고 교사로 만족할 분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 선생.
周永培(주영배·전 초등학교장)는 자신이 3학년일 때 막 부임해 와서 담임이 되었던 박정희를 이렇게 묘사했다(《이낙선 비망록》에 있는 증언록 발췌).
<박정희 선생님은 “건강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청소시간에는 마스크를 하고 나와서 총채를 휘두르면서 학생들과 같이 청소를 했다. 깔끔한 성격의 그분은 청소에는 매우 까다로웠다. 청소 당번이 가서 “청소 다 했습니다”라고 보고하면 꼭 와서 확인을 하는 것이었다. 꼼꼼히 살펴보고 부족한 점이 발견 되면 두 번 세 번 “다시!” 하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 내거나 유리창을 닦는 청소를 할 때는 키가 작은 어린이들이 할 수 없으므로 박 선생이 직접 해주기도 했다. 방과 후에는 어김없이 운동장에 나가 철봉 체조를 하고 달리기를 했다. 박 선생은 5학년에게는 조선어를 가르쳤다. 한글을 배워야 민족혼을 이어갈 수 있다고 암시했다. 나는 5학년 상급생들이 “박 선생은 사상가야”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상급생들이 “왜 우리나라가 망했지”, “우리나라의 국기는 어떻게 생겼나”라고 소곤대는 것을 듣고는 박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박 선생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은 분이었다. 모든 학급원을 똑같이 대우해주시면서 개성을 살려주셨다.> 
주영배는 박정희가 자신의 집을 찾아준 일을 평생 잊지 못하겠다고 썼다.
<가정실습지도 시 문경에서 12km나 떨어진 벽촌에 있는 저희 집에까지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기뻐서 부모님에게 여쭈었더니 “이렇게 먼 곳까지 오시겠니”라고 하셨지만 선생님은 자전거를 타고 정말 오셨습니다. 농촌이라 별다른 접대는 없었지만 만족하시고 가셨습니다. 선생님의 모습이 산 모롱이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어요.>
立哨(입초) 배치 후 우리 역사 강의
제자 全慶俊(전경준)은 “선생님은 열등아나 사고아 등의 가정을 자주 방문했다”고 기억했다. 월사금을 내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월급을 떼내어 도와주었다고도 한다. 박 선생은 또 학교에서 가까운 제자 咸成伯(함성백)의 집에 종종 찾아와서는 그의 형과 농업 진흥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다. 학교에선 農繁期(농번기)인 봄·가을에 학생들에게 4∼5일씩의 휴가를 주어 농사와 가사를 돕도록 했다. 이 기간에 박정희는 학급원들의 가정을 찾아가서 농업과 家事 실태를 조사했다. 제자 김경운은 자기 집을 찾아온 박 선생이 보리밥과 살구를 맛있게 먹고 가던 기억을 오래 간직했다.
“나는 대장이 될란다”
박정희가 담임했던 5학년의 급장이었던 申現均(신현균)은 박 선생이 특히 우리말의 지도에 열성을 보였다고 기억했다. 박 선생은 운동회 때 100m 달리기에서 일본인 교사 쓰루다에게 졌는데, 연습을 많이 하여 다음 시합에서는 그를 물리쳐 문경에선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박 선생은 제자들을 모아서 나팔조를 만들고 지도했다. 박 선생은 새벽 4∼5시만 되면 학교 운동장에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나팔을 불었다. 마을사람들은 “야, 박 선생 나팔소리다. 일어나서 소여물을 끓여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잠든 민족을 깨워 일으키는 연습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대구사범 동창생들에게 ‘박정희’하면 즉각 ‘나팔수’란 말이 떠오르듯이 문경사람들에게 ‘박 선생’ 하면 ‘새벽 나팔소리’가 연상된다. 제자 신현균은 1962년에 “지금도 아침 6시 서울제일방송에서 기상 나팔소리가 들릴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간절합니다”라고 썼다(《이낙선 비망록》).
박정희는 마을청년들을 모아서 악단을 만든 뒤 출장공연도 했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에 “산으로 둘러싸인 문경이 답답하게 느껴졌다”고 회고했었다. 답답한 것은 지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혼자 있기를 좋아한 박 선생에게 있어서 나팔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였다. 소년기에 이순신과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으면서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고 대구사범 시절에 그런 소질을 확인한 박정희는 교사가 되어서는 그 꿈을 구체화 시키게 된다. 박 선생이 부임한 첫 해, 그가 담임했던 3학년 반의 급장이었던 주영배(전 초등학교 교장)는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박 선생이 심심하면 자신에게 “니는 임마,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물어서 되받은 것이었다 .
“선생님은 그러면 이 담에 뭐가 될낍니꺼.”
“나. 나중에 봐라. 나는 대장이 될란다. 전장에 나가서 용감히 싸워 이기는 대장이 될란다.”
문경의 박 선생은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는 아이들을 불러모아서 학교 앞산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편을 갈라서 전쟁놀이를 시켰다. 나무 막대기를 주워 와서 총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박 선생은 목검을 들고 ‘얏, 얏’하면서 검도도 가르쳐 주었다. 제자 朴命來(박명래·전 점촌초등학교 교장)는 가을운동회 때 박 선생이 지도하여 전쟁놀이를 단체 경기로 보여준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목총을 만들게 하여 실을 잡아당기면 화약이 터져서 폭음이 들리도록 했다. 박 선생은 재빠른 아이들은 일본군으로, 동작이 굼뜨는 아이들은 중국군으로 편성하여 고지전을 벌이는 연출을 했다. 물론 중국군이 패퇴하는 것으로 끝났다. 6학년생 박명래는 중대장이 되어 “돌격!”하면서 달려가니 많은 부하들이 따라 주어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1939년에 1학년 담임이었던 박 선생은 숙직실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숙직하는 날에는 학생들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1학년 학생들은 집에서 저녁을 먹고 놀러갔다. 박 선생은 귀한 과자를 어디서 구했는지 아이들에게 나눠준다는 소문이 돌아서 과자를 얻어 먹으러 오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종기는 숙직실에서 들은 박 선생의 구수한 이야기를, 입안에서 녹아들던 과자 맛과 함께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사람이다, 우리 글과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순신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일본의 영웅들이 이순신 장군에게 패주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거북선 그림을 그려가면서 실감 있게 전투장면을 묘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왜놈들이 배 지붕으로 올라오면 송곳으로 찌르게 만들었다느니 물속으로 잠수까지 했다느니 하시면서 몸짓을 해가며 연기를 하시는데 흥분 그 자체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