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늘 교사였다

키가 작고 바싹 마른 사람이 앞으로 나오더니 “나 박정희라고 하오”라고 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 바쁜 상황에서도 박정희는 박종세에게 군사혁명의 필연성에 대해서 간략한 설명을 한 뒤 혁명공약이 적힌 전단을 건네주었다. 그 절박한 순간에도 박정희는 교사의 모습을 보였다.

  5.16 의 현장, 교사적 혁명가의 모습

 1961년 5월16일 아침, 남산 KBS 방송국에 박정희가 도착했을 때 공수부대원들은 아나운서와 방송 기술자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당직 아나운서인 박종세는 1층 보도계실로 피했다가 다시 텔레타이프실로 옮겨 웅크리고 있었다. 연초에 이런 일을 예상하여 방송국 내부를 염탐해 둔 적이 있었던 김종필이 “박 아나운서 있소, 나오시오.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오”라고 외치면서 들어왔다.
  
  박종세가 김종필을 따라 바깥으로 나오니 별을 단 장성들이 여러 명 서 있었다. 키가 작고 바싹 마른 사람이 앞으로 나오더니 “나 박정희라고 하오”라고 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 바쁜 상황에서도 박정희는 박종세에게 군사혁명의 필연성에 대해서 간략한 설명을 한 뒤 혁명공약이 적힌 전단을 건네주었다. 그 절박한 순간에도 박정희는 교사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평생 교사, 군인, 혁명가, 행정가의 삶을 살았지만 기본은 교사였다. 박정희 일행은 박종세를 앞세워 2층 主방송실로 올라갔다. 박종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저 혼자서는 방송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거짓말 말어. 썩었구나 이놈도. 너 따윈 죽여 버려야 돼.”
  
  한 공수단 장교가 철거덕 권총을 장전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한웅진 준장이 “자넨 참아”라고 말리고는 “지금 다섯 명이나 되는데도 더 있어야 한단 말이오”라고 했다. 방송기계를 다룰 줄 아는 엔지니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공수단원들에게 이끌려 기술직원들이 나타났다. 이윽고 主조정실에 빨간불, 파란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웅진은 “형님, 직접 방송하십시오”라고 권했다. 한웅진은 간밤 차중에서 “방송이라도 하고 죽읍시다”라고 농담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박정희는 예의 그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가만히 있었다. 행진곡이 울리고 박종세가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今朝未明(금조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 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첫째, 反共(반공)을 國是(국시)의 제1義(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舊惡(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淸新(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各人(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 중장 장도영>
  
  대한민국 성인 남녀들이 달달 외우게 되는 이 혁명 공약은 김종필이 초안을 잡고 박정희가 교열을 본 것이다. 이 문장엔 한 시대의 대명제, 또는 유행어가 될 단어들이 들어 있었다. 舊惡, 기성 정치인, 청신한 기풍, 기아선상, 참신한 등등. 이 혁명 공약문은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관념적인 용어가 적은 대신에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표현들이 많다. 언어가 사상을 표현하고 사상이 시대를 만들어 간다면 이 혁명 공약문은 實事求是(실사구시), 즉 현실과 사실에서 논리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행동윤리로 삼고 있는 새로운 국가 지도층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박종세 아나운서는 이 방송문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꼿꼿이 서서 방송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박정희는 부하들이 “각하, 한 번만 꼭 직접 방송을 하십시오”라고 권해도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석제 중령은 혁명 방송이 나간 뒤 안도감과 함께 허탈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 사무실이나 문을 열고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맞은편 여직원에게 “물 한 잔 주시오”라고 했다. 여직원이 끙끙대면서 말했다.
  
  “저… 저… 다리가 움직이질 않아요.”
  
  공포감 때문에 ‘허리가 빠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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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朴正熙의 모습

문경보통학교 부임

박정희가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1937∼1940년) 교사로 근무하다가 군인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교사로서의 박정희는 불만에 차있어 불성실한 근무 자세를 보였을 것이라는 선입감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오해다. 교사 박정희는 대구사범에서 배운 전인 교육을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실천하려고 했고, 김영기 등 조선인 교사들로부터 배운 민족혼의 중요성을 학생들에게 심어주려고 했던 이였다. 한 제자(주영배)는 그를 ‘方定煥(방정환) 선생을 연상시키는 선생님’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1962년에 작성된《이낙선(작고·전 상공부장관·당시 최고회의 의장 비서) 비망록》 중에서 박정희 선생의 제자 鄭順玉(정순옥)의 회상기를 싣는다.
「글이라 하기엔 부끄럽습니다만, 20년 전 은사로 모셨던 선생님을 지금 이 나라 영도자로 모시게 되니 기쁨과 두려움을 금할 길 없어 어린 시절 제자로 돌아가서 기쁘고 슬펐던 추억을 몇 가지 더듬어 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의 학교에 부임하셨을 때 저는 소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동무들 몇 명이 저의 집을 찾아와 새로 오신 선생님께 가보자고 하기에 선생님 하숙집을 찾아갔습니다. 어린 호기심에 선생님 방 안은 얼마나 장치가 잘 되어 있나 하고 방 안을 살펴보았습니다. 선생님 책상 위에 커다란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 사진에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주룩 달려 있는 외국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이라면서 그의 전기를 자세히 이야기하여 주셨습니다. 4월 어느 날 봄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고운 옷으로 갈아 입고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여 가지고 학교에 모여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출발하였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등산복에 어깨에는 나팔을 메고 길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장난을 하거나 줄이 삐뚤어지면 한 대씩 맞아가면서 목적지인 문경 남쪽 鎭南橋(진남교)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는 선생님과 점심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즐겁게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물에 빠져 죽는다고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순간 박 선생님은 깊은 물 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저희들은 선생님이 죽는다고 고함을 치며 다른 5, 6명의 선생님들과 함께 둑에서 벌벌 떨고 있는데 한참 만에 박 선생님이 다 죽은 아이를 물 속에서 건져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인공호흡을 시켜 물을 토하게 하니 그제서야 깨어나는 아이를 보니 선생님이 하느님 같이 고마웠습니다.
어느 일요일 저희들은 박 선생님과 일본 선생 두 분이 노는 자리에 갔습니다. 일본 선생 한 분이 말하기를 조선 여성은 예의가 없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물동이를 이고 다니느니 하고 우리나라 여성들의 흉을 보고 있었습니다. 박 선생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우리말로 “너희들 저 말 잘 새겨들어라”고 하셨습니다. 박 선생님은 우리끼리 있을 때는 꼭 우리말을 쓰자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철 없는 우리들은 아무 의미도 모르고 “선생님 조선말하면 퇴학당하는데, 왜 그래요”하고 반박을 한 기억이 납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어느덧 우리들은 6학년이 되었습니다. 그해 봄 소풍은 5, 6년생이 우리 학교에서 70리나 되는 산고개를 넘어 金龍寺(금용사)라는 데에 가서 하룻밤을 쉬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소낙비를 만났습니다. 우리 어린 것들이 70리 산고개를 다 넘도록 비는 그치지 않아 미끄러져 웃는 아이, 넘어져 우는 아이, 고인 물 속에 일부러 들어가 첨벙대는 아이… 웃으며 울면서 넘어가고 있는데, 먼 행길이 보이면서 트럭이 한 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인솔하는 선생님께 저 차를 잡아가지고 우리들을 태워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 트럭은 우리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차는 바로 박 선생님이 우리를 마중하려고 몰고 오신 차였습니다. 저희들은 물귀신처럼 되었지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은 우리들을 차에 태워 주시면서 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들에게 노래를 부르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가지고 오신 나팔을 부시면서 우리들에게 용기를 나게 하셨습니다. 서글펐던 소풍이 웃음과 즐거움으로 변하여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합니다.
저희들이 졸업한 후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동생 편에 박 선생님께서 학교를 그만두시고 떠나신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섭섭하여 선생님을 뵈러 학교로 갔습니다. 선생님은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은 안 하시고 가서 편지를 해주겠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또 “너희들에게 꼭 마지막으로 부탁할 말은 공부 잘하여 씩씩하고 굳센 조선 여성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선생님을 다시는 못 뵈올 줄 알고 울었습니다. 얼마 후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에게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봉투에 만주군관학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편지 구절에는 언제나 “공부 잘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다오. 올해도 풍년이 들어 잘 살 수 있도록 기원한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매력 있는 男선생

지금 서울 강동구 고덕동 아파트에 살고 있는 정순옥 할머니는 “박 선생이 구해 낸 물에 빠진 아이는 정극모였는데, 결혼도 않고 있다가 6 · 25 직전에 죽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의 이 용감한 행동은 그 목격자가 많이 살아 있어 ‘과장된 신화’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사고 현장인 문경 남쪽 진남교에 가보았더니 그 밑을 흐르는 강은 폭이 약 100m이고 물살이 셌다. 상당한 수영 실력과 용기가 없으면 뛰어들기가 어려운 곳이다.
박정희는 정순옥의 아버지 鄭漢洙(정한수)와 친했다. 당시 마흔 살을 갓 넘었던 정한수는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지낸 적도 있었다. 두 사람이 술자리에서 농담하는 것을 정순옥은 엿들은 적이 있다. 정한수는 박정희에게 “내 사위하라”면서 “앞으로는 나를 아버지라 불러라”고 했다. 박정희는 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누구한테도 알리지 않고 있었다. 혼자 하숙하고 있는 박정희를 모두들 총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한수는 서울에 가서 살고 있던 정순옥의 언니에게 장가 들라면서 그런 농담을 했다. 박정희는 정한수가 자꾸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자 웃으면서 “저의 형님이시지요”라고 했다. 박정희는 정순옥을 만나면 가끔 “너의 언니도 너를 닮았니” 라고 물었다.
박정희가 사실은 결혼하여 딸(박재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박정희가 문경에 부임한 지 3년째 되는 1939년 어느 날이었다. 박정희의 셋째 형 상희가 동생을 보러 왔다가 정한수를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박상희가 동생이 결혼한 사실을 말했던 것이다. 며칠 뒤 정한수는 정순옥에게 들으라는 듯이 “야, 그 박 선생은 결혼하셨단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뒤로는 婚談(혼담)이 사라졌다.
정순옥이 6학년 때, 박정희는 식사만 林昌發(임창발)의 집에서 하고 기거는 학교 숙직실에서 하고 있었다. 자연히 박정희는 숙직도 자원해서 하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면 나이가 찬 정순옥 등 다 큰 처녀들이 숙직실로 우 몰려가서 놀다오곤 했다. 숙직실 바로 아래 교장 사택이 있어 이런 모습이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하루는 일본인 담임교사 스즈키가 정순옥과 여학생들에게 넌지시 “일본에서는 다 큰 처녀들은 저녁에는 외출을 하지 않는단다. 너희들도 조심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눈치 빠른 정순옥은 이 말이 박정희 선생님을 겨냥해서 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저는 예사롭지 않은 가정 환경 때문에 눈치도 빠르고 조숙한 편이었습니다. 그런 저의 눈에 비친 박 선생님은 절대로 교사로 평생을 보낼 분이 아니었습니다. 못 다루는 악기도 없었고 못 하시는 운동도 없었고… 하여튼 매력있는 남자였습니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선생님

박정희 교사에 대한 제자들과 주민들의 증언들을 종합하면 이런 이미지이다. 아침마다 나팔 불고 청소에 철저한 사람, 운동과 병정 놀이를 좋아하고 학생들과 잘 놀아 주는 선생, 일본사람들에게 얕보여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투지를 불어넣어주던 분,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제자들을 사랑한 사람, 일본인들도 어려워한 대담한 배짱, 술을 좋아하는 교사, 가정 방문을 많이 하고 학부형들과 잘 어울렸던 선생, 나팔·스파이크 달린 운동화·목검으로 기억되는 사람, 그리고 교사로 만족할 분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 선생. 周永培(주영배·전 초등학교장)는 자신이 3학년일 때 막 부임해 와서 담임이 되었던 박정희를 이렇게 묘사했다(《이낙선 비망록》에 있는 증언록 발췌).
「박정희 선생님은 “건강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청소시간에는 마스크를 하고 나와서 총채를 휘두르면서 학생들과 같이 청소를 했다. 깔끔한 성격의 그분은 청소에는 매우 까다로 웠다. 청소 당번이 가서 “청소 다 했습니다”라고 보고하면 꼭 와서 확인을 하는 것이었다. 꼼꼼히 살펴보고 부족한 점이 발견 되면 두 번 세 번 “다시!” 하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 내거나 유리창을 닦는 청소를 할 때는 키가 작은 어린이들이 할 수 없으므로 박 선생이 직접 해주기도 했다. 방과 후에는 어김없이 운동장에 나가 철봉 체조를 하고 달리기를 했다. 박 선생은 5학년에게는 조선어를 가르쳤다. 한글을 배워야 민족혼을 이어갈 수 있다고 암시했다. 나는 5학년 상급생들이 “박 선생은 사상가야”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상급생들이 “왜 우리나라가 망했지”, “우리나라의 국기는 어떻게 생겼나”라고 소곤대는 것을 듣고는 박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박 선생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은 분이었다. 모든 학급원을 똑같이 대우해주시면서 개성을 살려주셨다.」
주영배는 박정희가 자신의 집을 찾아준 일을 평생 잊지 못하겠다고 썼다.
「가정실습지도 시 문경에서 12km나 떨어진 벽촌에 있는 저희 집에까지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기뻐서 부모님에게 여쭈었더니 “이렇게 먼 곳까지 오시겠니”라고 하셨지만 선생님은 자전거를 타고 정말 오셨습니다. 농촌이라 별다른 접대는 없었지만 만족하시고 가셨습니다. 선생님의 모습이 산 모롱이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어요.」


立哨(입초) 배치 후 우리 역사 강의

제자 全慶俊(전경준)은 “선생님은 열등아나 사고아 등의 가정을 자주 방문했다”고 기억했다. 월사금을 내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월급을 떼내어 도와주었다고도 한다. 박 선생은 또 학교에서 가까운 제자 咸成伯(함성백)의 집에 종종 찾아와서는 그의 형과 농업 진흥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다. 학교에선 農繁期(농번기)인 봄·가을에 학생들에게 4∼5일씩의 휴가를 주어 농사와 가사를 돕도록 했다. 이 기간에 박정희는 학급원들의 가정을 찾아가서 농업과 가사 실태를 조사했다. 제자 김경운은 자기 집을 찾아온 박 선생이 보리밥과 살구를 맛있게 먹고 가던 기억을 오래 간직했다.
박정희가 문경공립보통학교에 부임했을 때 조선총독부는 전임 우가키 총독의 시책을 이어받아 농촌진흥정책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 정책의 하나로 문경공립보통학교는 문경갱생농원(문경면 하리)과 신북갱생농원(신북면 갈평리)을 경영하는 지정학교가 되어 있었다.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있던 이런 지정 학교 제도는 교사들이 농촌 마을의 지도를 맡고 학교는 농촌개발운동을 이끌어갈 마을의 중견 인물들을 양성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1937년 당시 경북에는 이런 지정 학교가 31개 교, 장래에는 180개 교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문경보통학교가 경영 주체로 되어 있었던 이 두 농원의 원장은 아리마(有馬近芳) 교장, 園監(원감) 1명, 지도원 1명, 강사 약간 명으로 되어 있었다. 이 농원에서는 농촌개혁의 지도자감인 젊은이들을 합숙시켜 9개월 과정의 교육을 시켰다. 농장에서 농사도 짓고 강의도 들었다. 근로체험에 의한 농민 정신의 도야와 自治自營(자치자영) 의 농민정신함양, 그리고 ‘황국 농민’으로서의 자각이 교육 목표였다. 농촌진흥정책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농촌진흥가’란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박정희 교사도 이 농원에 나가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일본 시모노세키 대학교 교수이던 崔吉城(최길성)이 현장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박정희는 문경보통학교 부설 신북 간이학교에 대리 출강을 40일 정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2년제 보통학교인 이 신북 간이학교에는 姜光乙(강광을) 선생 한 사람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분이 40일 간 출장을 간 사이 박정희가 대리 강의를 하면서 신북농장에도 나가서 지도를 했다는 것이다. 지금 문경에는 그때 박정희로부터 지도를 받았던 농민들 중 金成煥(김성환) 등 세 사람이 살아있다.
최길성 교수는 박정희의 농촌진흥정책 현장체험이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많은 발상을 제공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崔(최) 교수는 새마을운동과 농촌진흥정책의 유사성을 비교하는 표도 만들었다. 운동의 이념은,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이 ‘자조, 자립, 협동, 충효애국’이고 그것의 집약적 표현이 국민교육헌장이었던 데 대해서 우가키 총독의 농촌 진흥은 ‘자립, 근검, 협동공영, 충군애국’과 교육칙어였다. 박정희, 우가키 두 사람 다 농촌 출신 군인이었다. 두 운동의 현장지도자들은 새마을 연수원과 農道(농도) 강습소에 의해 각각 양성되었다. 새마을노래와 농촌진흥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농가경제 5개년 계획, 育林日(육림일)과 愛林日(애림일), 모범 마을의 선정 등 공통점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제자 李永泰(이영태)는 박정희 선생이 조선어 시간에 태극기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는 복도를 향해서 立哨(입초)를 배치한 뒤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대구사범 때 김영기 선생이 쓰던 방법이었다. 박 선생은 또 음악시간엔 ‘황성옛터’와 ‘심청의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이영태는 박 선생을 통해서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영태는 박 선생이 경찰지서의 사찰주임인 오가와 순사부장하고 자주 논쟁하는 것을 보았다. 제자 朴俊福(박준복)의 증언에 따르면 박 선생은 일본인 교사들하고도 사이가 좋았는데, 아리마 교장과 야나자와(柳澤) 교사와는 말다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나는 대장이 될란다”

박정희가 담임했던 5학년의 급장이었던 申現均(신현균)은 박 선생이 특히 우리말의 지도에 열성을 보였다고 기억했다. 박 선생은 운동회 때 100m 달리기에서 일본인 교사 쓰루다에게 졌는데, 연습을 많이 하여 다음 시합에서는 그를 물리쳐 문경에선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박 선생은 제자들을 모아서 나팔조를 만들고 지도했다. 박 선생은 새벽 4∼5시만 되면 학교 운동장에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나팔을 불었다. 마을사람들은 “야, 박 선생 나팔소리다. 일어나서 소여물을 끓여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잠든 민족을 깨워 일으키는 연습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대구사범 동창생들에게 ‘박정희’하면 즉각 ‘나팔수’란 말이 떠오르듯이 문경사람들에게 ‘박 선생’ 하면 ‘새벽 나팔소리’가 연상된다. 제자 신현균은 1962년에 “지금도 아침 6시 서울제일방송에서 기상 나팔소리가 들릴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간절합니다”라고 썼다(《이낙선 비망록》). 문경 어린이들은 귀에 못이 박인 박 선생의 나팔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黃實光(황실광) 할머니가 지금도 기억하는 가사.
“데데쿠루 데키와 미나미나 고로세(튀어나오는 적들은 모두모두 죽여라).”
박정희는 마을청년들을 모아서 악단을 만든 뒤 출장공연도 했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에 “산으로 둘러싸인 문경이 답답하게 느껴졌다”고 회고했었다. 답답한 것은 지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혼자 있기를 좋아한 박 선생에게 있어서 나팔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였다. 소년기에 이순신과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으면서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고 대구사범 시절에 그런 소질을 확인한 박정희는 교사가 되어서는 그 꿈을 구체화 시키게 된다. 박 선생이 부임한 첫 해, 그가 담임했던 3학년 반의 급장이었던 주영배(전 초등학교 교장)는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박 선생이 심심하면 자신에게 “니는 임마,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물어서 되받은 것이었다 .
“선생님은 그러면 이 담에 뭐가 될낍니꺼.”
“나. 나중에 봐라. 나는 대장이 될란다. 전장에 나가서 용감히 싸워 이기는 대장이 될란다.”
문경의 박 선생은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는 아이들을 불러모아서 학교 앞산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편을 갈라서 전쟁놀이를 시켰다. 나무 막대기를 주워 와서 총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박 선생은 목검을 들고 ‘얏, 얏’하면서 검도도 가르쳐 주었다. 제자 朴命來(박명래·전 점촌초등학교 교장)는 가을운동회 때 박 선생이 지도하여 전쟁놀이를 단체 경기로 보여준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목총을 만들게 하여 실을 잡아당기면 화약이 터져서 폭음이 들리도록 했다. 박 선생은 재빠른 아이들은 일본군으로, 동작이 굼뜨는 아이들은 중국군으로 편성하여 고지전을 벌이는 연출을 했다. 물론 중국군이 패퇴하는 것으로 끝났다.
6학년생 박명래는 중대장이 되어 “돌격!”하면서 달려가니 많은 부하들이 따라 주어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학예회 때도 박 선생의 학급에서는 ‘지원병 출정’이란 제목의 연극을 했다. 각본은 박정희가 썼다. 당시 군국주의 분위기에 호응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일본군은 중일전쟁을 확대시켜 대륙의 심장부로 뛰어들고 있었다. 난징(南京)과 쉬저우(徐州)가 함락되자 일제는 보통학교까지도 학생들을 모아서 축하대회를 열도록 했다.
1939년에 1학년 담임이었던 박 선생은 숙직실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숙직하는 날에는 학생들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1학년 학생들은 집에서 저녁을 먹고 놀러갔다. 박 선생은 귀한 과자를 어디서 구했는지 아이들에게 나눠준다는 소문이 돌아서 과자를 얻어 먹으러 오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종기는 숙직실에서 들은 박 선생의 구수한 이야기를, 입안에서 녹아들던 과자 맛과 함께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사람이다, 우리 글과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순신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일본의 영웅들이 이순신 장군에게 패주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거북선 그림을 그려가면서 실감 있게 전투장면을 묘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왜놈들이 배 지붕으로 올라오면 송곳으로 찌르게 만들었다느니 물속으로 잠수까지 했다느니 하시면서 몸짓을 해가며 연기를 하시는데 흥분 그 자체였습니다.”
박정희는 아리마 교장을 설득하여 나팔 네 개를 구입했다. 그리고는 박영래·조영호·전세호·홍봉출을 나팔수로 뽑아 지도했다. 이들은 한 달 후부터는 조회 시간에 등장하여 학생들이 조회를 끝내고 교실로 들어갈 때 나팔 소리에 발을 맞추도록 했다. 운동회나 遠足(원족, 소풍의 일본식 표현·편집자 注) 때도 나팔수들이 행진곡을 불어 분위기를 돋우었다. 박정희는 1938년에는 이미 만주군관학교에 시험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김순아 여인의 하숙집을 나와서 학교 숙직실에서 기거하기 시작하면서 시험공부를 할 시간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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