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국을 만든 朴正熙의 대전략: 중화학공업 건설

민주와 복지와 안보는 이 거대한 기초가 있어 가능하다.

朴正熙의 대전략: 중화학공업 건설
-중화학공업 건설은 한국을 선진국 대열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경제규모가 달라졌다. 일자리가 많아지고 질이 높아져 월급이 올랐다.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대기업은 세계적 기업으로 승격하였다. 국가와 사회의 개방을 촉진하였다. 이게 1980년대의 민주화를 뒷받침하였다. 중화학공업이 벌어들인 國富의 축적으로 삶의 질이 서구 수준으로 높아지고 평균수명이 길어져 세계최장수국 반열에 올랐다. 1997년, 2008년의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한 저력이었고, 자유통일을 주도할 수 있게  하는 國力 건설이었다. 

 

*수출 100억 불!

1977년 12월 22일, 드디어 한국은 연간 100억 불(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했다. 목표연도는 1980년이었는데 3년을 앞당겼다. 朴正熙 대통령은 이날의 일기를 신문기사처럼 적었다.
<백억 불 수출의 날. 백억 불 수출목표 달성 기념행사 거행. 오전 10시 장충체육관에서 각계 인사 7,000여 명이 참석, 성대한 행사를 거행하였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던 해 연간 수출액이 5,000여만 불이었다. 그 후 1964년 11월 말에 1억 불이 달성되었다고 거국적인 축제가 있었고, 11월 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했다. 1970년에는 10억 불, 7년 후인 금년에 드디어 100억 불 목표를 달성했다. 서독은 1961년에, 일본과 프랑스는 1967년에, 네덜란드는 1970년에 100억 불을 돌파했다고 한다.
10억 불에서 100억 불이 되는 데 서독은 11년, 일본은 16년(1951~ 1967)이 걸렸다. 우리 한국은 불과 7년이 걸렸다. 1981년에 가면 200억 불이 훨씬 넘을 것이다. 1986년경에 가면 500억~600억 불이 될 것이다. 100억 불,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자. 새로운 각오와 의욕과 자신을 가지고 힘차게 새 전진을 다짐하자.>
朴 대통령은 이날 무엇보다도 100억 달러 수출전선에서 일한 한국 근로자들의 勞苦(노고)에 감사했다. 그는 이해 4월 13일 일기에서 창원공단을 시찰한 소감을 썼는데 이런 대목이 보인다.
<모든 산업전사들이 땀 흘리며 일하고 있는 모습이 거룩하게만 보였다. 눈에서 사라지지를 않는다.>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

1970년대 한국의 국가적 목표는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이란 구호로 표현되었다. 국민들의 개인적 목표는 ‘마이 카’와 ‘아파트 입주’로 상징되었다. 朴 대통령은 목표를 수치로 정해야 안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관념적 말장난보다는 누구도 속일 수 없는 수치를 신봉했다. 100억 달러란 수치를 맨 먼저 꺼낸 것도 朴 대통령이었다.
1972년 5월 30일 중앙청 홀에서 무역진흥확대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끝난 뒤 朴 대통령은 전시된 수출상품들을 둘러보았다. 이날 오후 朴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로 吳源哲 경제제2수석비서관을 불렀다. 朴 대통령은 집무용 의자에 앉아 있다가 “吳 수석, 차 한잔 들지” 하면서 방 한가운데에 있는 소파 쪽으로 가서 앉았다. 보통은 회의용 탁자 쪽 의자에 가서 앉는데 소파에 앉는 일은 드물었다. 吳 수석은 긴장했다.
“임자, 100억 불 수출을 하자면 무슨 공업을 육성하지?”
吳 수석은 ‘지난 2월에 1980년도 수출목표를 50억 달러로 확정지었는데, 왜 갑자기 100억 불 이야기를 할까’ 하고 의아해했다. 吳 수석은 이런 때를 대비한 복안은 갖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한 뒤 외치듯 말했다.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다고 봅니다.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경제를 소생시키기 위한 첫 단계로 경공업 위주의 수출산업에 치중했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와 사정이 같습니다. 그 후 일본의 수출액이 20억 달러에 달할 때 중화학공업 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때가 1957년입니다. 그 후 10년이 지난 1967년에 일본은 100억 달러의 수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기계제품과 철강제품이 일본 수출의 主力(주력)상품이 되었습니다.”
朴 대통령은 생각에 잠기더니 “자료를 갖고 와서 다시 설명해”라고 말했다. 吳 수석은 사무실로 돌아와 우선 朴 대통령의 국가운영에 대한 철학과 전략을 먼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朴 대통령의 저서와 연설문을 다시 읽어 보고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朴 대통령은 우리의 역사적 과업을 민족의 중흥과 평화통일로 설정하고 있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은 富國强兵, 즉 국력증강이다. 국력의 바로미터는 수출이다.>
吳 수석은 며칠 뒤 金正濂(김정렴) 비서실장과 함께 朴 대통령에게 100억 달러 수출을 위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보고했다.
“일본은 1957년 중화학공업 선언을 하고 10년 만에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습니다. 1957년에 일본은 산업구조상 중화학공업 비율이 지금의 우리나라와 같은 43%였습니다만 10년 뒤엔 78%가 되었습니다. 수출품목에서 차지한 중화학공업 제품의 비중도 1955년엔 41%였는데, 1967년엔 67%로 늘었습니다. 중화학공업 유치에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동남아 국가들보다 먼저 출발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현 시점이 중화학공업 진입의 마지막 버스를 탈 수 있는 기회입니다. 단순조립 공업은 임금이 올라가면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한국의 임금상승률은 대만을 앞지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만보다 더 빨리 중화학공업을 이룩해야 합니다.”
옆에서 金正濂 실장은 “각하, 자금 문제는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내자 동원은 별 문제가 없고, 외자는 수출이 증가하는 한 차관이 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심각하게 듣고 있던 朴 대통령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吳 수석, 우선 중화학기획단 같은 것을 구성해서 계획을 짜도록 해보지.”
朴 대통령은 金 실장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중화학기획단 구성에 대해서 내각에 지시하시오.”
朴 대통령은 초인종을 누르더니 비로소 커피를 시켰다. 기분이 대단히 좋을 때 하는 행동이다. 吳 수석은 설명을 덧붙였다.
“중화학공업을 건설하게 되면 남성 기능공이 主役이 됩니다. 일자리가 많아지고, 급료도 여성 기능공보다 많아집니다. 그래서 국민생활이 윤택해지고 국민소득도 급상승합니다.”
吳 수석의 이날 보고가 1970년대 한국의 가장 중요한 발전 테마가 되는 중화학공업 건설의 시작이었다. 이 大사업이 朴 대통령이 던진 ‘수출 100억 불’이라는 화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중화학공업 건설을 뒷받침한 것이 유신체제

1972년 상반기 朴 대통령은 남북회담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방위산업 건설 계획, 100억 달러 수출 계획, 그리고 중화학공업 건설 계획을 준비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朴 대통령이 그해 10월 17일 유신조치를 통해서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고 국회를 해산한 뒤 유신체제를 발족시킨 배경을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된다.
朴 대통령은 유신체제 수립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7·4 남북공동 성명을 만들어 낸 남북회담과 국제정세 변화에 대응한 체제정비를 거론하였지만, 유신체제의 실질적 목표는 중화학공업을 건설해 한국을 선진국 문턱으로 밀어 올린다는 것이었다. 吳 수석 같은 이는 “중화학공업 건설을 위해서 유신체제를 선포해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金鍾泌 前 총리도 “朴 대통령으로부터 ‘삼선개헌과 유신체제의 목적은 중화학공업 건설에 있다’는 취지의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즉 권력의 집중은 수단이고, 목표는 중화학공업 건설이었다는 이야기이다.
吳源哲 수석은 혁신적 발상을 잘 하는 엔지니어 출신으로서 독창적인 방법으로 중화학공업 건설을 밀고 나갔다. 그 핵심은 이러했다.
<朴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받은 ‘방위산업 건설 계획’, ‘100억 달러 수출 계획’, ‘중화학공업 건설 계획’의 3개 과제를 한 시스템으로 통합한다. 즉 兵器(병기)를 생산하는 중화학공업, 수출을 하는 중화학공업을 건설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복투자 방지, 건설비 감축, 작업량 확보와 가동량 증가, 평시 防産(방산)시설 활용과 戰時 병기 증산, 그리고 수출이 가능해진다.>(吳源哲, 《한국형경제건설》 제7권)
유신선포 직후인 1972년 12월 28일에 상공부는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100억 달러 수출계획을 보고했다. 1980년에 100억 달러를 수출한다는 계획이었다. 朴 대통령은 이 보고를 듣고는 “10월 유신에 대한 중간평가는 수출 100억 달러를 기한 내에 달성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행정, 생산양식, 농민생활, 국민의 사고방식, 외교, 문교, 과학기술 등 정부의 모든 정책초점을 100억 달러 수출목표에 맞추어 총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스템 운영의 鬼才(귀재)’라고 불리는 朴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수치화하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각 부서의 역할을 명백히 한 다음에 適材適所(적재적소)의 인사를 통해서 각각의 역량을 이 방향으로 집중시켜 놓고는 그 집행과정을 제도적으로 확인하고 점검하며 수정과 독려를 되풀이했다.
朴 대통령은 100억 달러 수출목표를 3년이나 단축해 1977년에 달성함으로써 이제는 1980년대의 國政 목표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 무렵 朴 대통령은 1980년대의 비전으로서 國土改造(국토개조)를 구상하고 있었다.

*김용환, 오원철

朴대통령식 국정운영의 핵심은 큰일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추진력과 일을 야무지게 매듭짓는 능력의 소유자를 찾아서 適所(적소)에 배치한 뒤 전폭적으로 부하들을 밀어주되 일의 진행과정을 정기적으로 점검 확인한 점이다. 朴대통령은 군 지휘관 시절부터 '지시는 5%, 확인이 95%이다'는 말을 할 만큼 중간 점검을 중시했다.
<대통령은 직, 간접적인 검증을 거친 후에야 행정부에 인재를 등용했다. 정치인이나 군출신자들을 입각시킬 경우에도 일단 공기업, 또는 관련 연구기관, 정치권 등에서 행정경험을 쌓는 과정을 눈여겨보면서 능력과 적성을 평가한 후, 즉 어느 정도 검증 절차를 거친 후 중용하곤 하였다(金龍煥 당시 재무장관 회고록-'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
吳源哲 제2경제수석이 기획한 중화학-방위산업 동시건설안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한 朴대통령은 1973년 5월53일 金龍煥 재무차관을 대통령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하여 중화학공업 건설의 정책적 뒷받침을 지시했다. 金보좌관은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의 기획단장도 겸임했다. 金龍煥 씨는 김정렴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일하던 그 전해에 '8·3 사채동결 조치'의 비밀 계획을 전담하여 성공시킴으로써 대통령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8·3 조치 발표 6일 전에 金龍煥씨를 불러 '발표와 함께 임자를 재무부 차관으로 발령을 낼테니 私債동결 정책을 반드시 성공시켜 우리 경제를 살리도록 하라'고 말했다. 당시 재무장관 南悳祐씨도 金차관에게 8·3 조치의 집행을 일임하였다. 朴대통령은 국가중대사에 대해서는 그 분야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앉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朴대통령은 방위산업을 민간주도-정부뒷받침의 시스템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나라에서는 무기생산을 국방예산과 직결된 공기업 형태의 국가주도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방부는 국가주도형 방위산업 건설을, 청와대와 경제부처는 민간주도를 주장했는데, 朴대통령은 민간주도쪽에 손을 들어주었다.

*국민투자기금으로 財源 확보

朴대통령은 '방위산업은 중화학공업과 연계되어 있는데, 무기생산만 전담하는 공기업형으로 육성했다가 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르면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될 수 있다. 따라서 민간기업이 무기와 일반상품을 함께 생산하도록 해놓아야 불황에 따른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정부는 이 업체들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중화학공업기획단장이 된 金龍煥씨는 경제기확원 물가국장 徐錫俊씨(나중에 경제부총리, 아웅산 테러로 사망)를 부단장으로 데리고 왔다. 金龍煥 팀은 첫 작품으로서 '중화학공업육성계획'을 내어놓았다.
이 보고서는 1980년대를 복지사회 고도산업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화에 따른 공업구조의 고도화 없이는 불가능하고 지적했다. 대통령은 1973년 8월에 金龍煥 특별보좌관을 경제제1수석으로 승진켰다. 金수석은 화공 엔지니어 출신인 吳源哲 제2경제수석(중화학공업기획단장 겸임)을 도와 중화학공업화의 자금동원과 산업기지 건설을 해냈다. 중화학공업단지의 건설은 산업기지개발공사를 설립하여 하기로 했다. 수자원개발공사 사장으로서 뛰어난 추진력이 검증된 安京模씨가 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74년 4월1일부터 1979년12월14일까지 창원, 여천, 온산, 안정, 구미, 포항, 북평, 아산의 8개 산업기지가 만들어졌다.
중화학공업건설에는 자금이 많이 들고 투자회수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국내 저축률이 25% 이상 되어야 추진할 수 있는 대사업이었다. 당시 국내 저축률은 15% 정도였다. 吳수석의 비교법에 따르면 수출이 연간 18억 달러 하던 때 중화학공업 건설에 100억 달러를 넣어야 한다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는 7000억 달러를 조달하는 것과 같은 자원 집중이었다. 金龍煥 경제제1수석은 중화학공업 자원확보를 위해 국민투자기금을 만들기로 했다. 1973년12월14일에 국민투자기금법이 제정되었다.
이 기금의 대부분은 국민투자채권을 금융기관이 매입하는 방법으로 출연했다. 기금설립 초기엔 은행의 경우 예금증가액의 10~39%, 보험회사의 경우 수입보험료의 40~50%, 공공기금의 경우 여유자금의 약90%를 이 기금에 출연했다. 시중은행의 예금까지 국민투자기금에 편입시킴으로써 1978년 무렵부터 중화학공업 중복투자 및 과잉투자의 부담이 금융부문에 전가되자 제5공화국 출범 직후 중화학투자 조정이 이뤄지게 되었다.
중화학공업 건설의 사령관인 朴대통령은 기술에 밝고 창조적 발상을 많이 하는 吳源哲 제2경제수석을 참모장으로 쓰되 재정에 밝고 꼼꼼한 金龍煥 제1경제수석을 통해서 보완과 견제를 해가면서 그의 마지막 대도박을 밀고나간다. 吳, 金 두 수석 다 패기만만한 40代였다.     

*기능공들의 중산층화


1970년대 97개 工高의 연간 졸업생은 5만 명에 달했다. 1973~1979년 사이 배출된 고졸 기능공은 80만~1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은 현재 50대 중후반이다.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건설의 현장에서 뛰었던 이들은, 1997년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의 칼바람도 피해갔다. 他人(타인)이 갖추지 못한 고유의 기술을 보유한 덕분이었다.
이 기능공들의 삶이 그 뒤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분석한 <1970~80년대 양성된 중화학공업 부문 기능공의 계층이동에 관한 생애사적 연구>(柳光浩 著)란 논문이 2013년 12월에 발표되었다.

柳光浩(유광호) 씨는 1973~1986년 풍산금속 안강공장에 入社(입사)했던 기능공 20명의 30여 년 뒤 생활 상태를 조사했다. 이들 20명의 청소년기 경제사정을 확인했더니 15명(75%)은 ‘객관적 가정형편’ 상 대학진학을 꿈꿀 수 없었다고 한다. 2013년 무렵 이들의 평균 현금성 임금(연봉)은 6400여 만 원에 달했다. 글로벌 대기업群(군)에 속한 현대자동차의 경우, 연 1억 원에 연봉을 받는 근로자들이 많은 데, 이를 기준으로 하면 이들의 연봉은 中上 정도에 해당한다. 중소기업 연봉이 평균 3000만~4000만 원 정도임을 감안하면 풍산 소속 근로자들의 연봉이 상대적으로 높음을 알 수 있다(注: 2012년 기준 국내 제조업 평균 연봉은 3625만 원).
20명의 기능공을 아버지로 둔 자녀 모두가 전문대 이상의 학교에 진학했다. 저자는 “그들 자녀의 100% 대학 졸업률(4년제 대학 재학 및 졸업자가 94.3%, 전문대 졸업자가 5.7%)은 기능공들이 중산층이 되었음을 웅변해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저자는 “농촌 중하층 출신의 청소년을 중화학 공업화에 필요한 숙련노동자로 변신시키지 않았다면 농촌의 잠재적 실업자인 농촌과잉인구로 퇴적되거나, 잘해야 경공업 부문의 半(반)숙련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大변화는 발전국가가 萬難(만난)을 무릅쓰고 공업화, 그것도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한 결과”라고 진단했다.

*중화학공업 건설이 만든 한국의 글로벌 기업은 금메달감

루치 샤르마(Ruchir Sharma)씨는 모건 스탠리의 Emerging Markets and Global Macro 부서 책임자이다. 그가 쓴 ‘Breakout Nations'(Norton, 2012)는 한국, 대만, 중국, 인도, 브라질, 멕시코 등, 선진 경제권에 도전하는 나라들의 장단점을 분석한 책이다. 흥미 있는 章 제목, ‘The Gold Medalist'가 있어 그 부분부터 읽었다. 금메달감의 나라가 어디인가 궁금해서였다. 샤르마 씨는 한국을 도전 국가群(군)의 1등으로 꼽았다. 그는 한국의 라이벌이 대만이었는데 지난 10여년 사이에 한국이 선두에 나섰다면서 極讚(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은 제조업 重視 풍조가 계속되는 점에서 ’아시아의 독일‘이란 표현도 썼다.
 
  1. 대만과 한국은 지난 50년간 연평균 5% 이상의 경제성장을 지속한 세계의 唯二(유이)한 나라이다.
  2. 한국 경제는 1997년과 2008년의 세계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창조적인 파괴를 통하여 체질을 개선, 더욱 강해졌다. 守勢的(수세적)으로 위기를 넘기려 하였던 일본과 대조된다.
  3. 한국 경제기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제조업 重視(중시) 노선이 경제구조의 선진화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5년 전과 비교하면 제조업 비중이 26%에서 31%로 늘었다. 제조업 비중이 25%를 넘기면 서비스 重視로 바뀌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은 반대이다. 한국의 제조업은 또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다각화되어 있다. 한국을 ‘아시아의 독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유이다.  
  4. 대만은 주문생산 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였지만 한국의 대기업은 무모하게 보일 정도의 모험을 통하여 ‘글로벌 브랜드’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삼성, 현대, LG는 한국 GDP(국내총생산)의 16%를 차지한다. 이에 힘입어 수출이 汎지구적으로 확대되었다. 2003년에 한국 수출액의 3분의 2는 先進경제권에 판 것인데, 2011년엔 3분의 2가 중국 등 개발도상국으로 나갔다. 한국의 수출액은 GDP의 53%이고, 무역액은 GDP와 거의 맞먹어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경제구조이다.
  5. 이런 성공의 중심엔 재벌 기업이 있다. 한국의 재벌 기업은 장기적, 모험적 투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데 이는 오너가 결정권을 가진 덕분이다. 현대 자동차가 세계 제5위의 판매량을 기록한 데는 鄭周永 회장의 미국 시장 진출 결단(1986년), 鄭夢九 회장이 결정한 新車 판매에 대한 10년 보증 및 알라바마 현지 공장 건설에 힘입은 바 크다. 이런 모험은 재벌 출신 경영자이니까 가능하였다.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가 退潮(퇴조)하는 마당에 어떻게 미국에서 자동차 공장을 짓느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지금 현대의 알라바마 공장은 미국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다. 
  6. 한국의 성공사례는 가장 강한 기업 모델(the strongest corporate model)은 ‘가족이 소유하면서도 주식은 공개되어 있고, 전문가들이 관리하는 회사’임을 보여준다. 공개된 기업은 경리를 투명하게 할 수밖에 없다. 매킨리의 조사에 의하면 가족이 경영하는 회사는 2008년의 금융위기를, 非가족 회사보다 더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다. 가족 회사는 이 기간에 빚을 줄였고 기술 개발 투자는 늘렸다.
  7. 대만은 한국보다 쉬운 길을 가다가 뒤처졌다. 가장 큰 敗因(패인)은 삼성, 현대, LG와 같은 독자적인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지 못한 점이다. 대만은 일본의 하청업체로 안주하려 하였지만 한국의 대기업은 일본을 이기려 하였다. 대만 기업은 중국, 인도 등에 주로 투자하여 매달 20억 달러씩 해외로 빠져나갔다. 대기업이 기술개발에 집중한 한국은 특허 出願(출원) 건수에서 세계 5위 안에 드는데, 대만은 20등 안에도 들지 못한다. 대만은 부품을 자체 개발하기보다는 일본으로부터 사들이는 방식을 選好(선호)하다가 2011년 쓰나미 사태로 큰 타격을 받았으나 한국은 끄떡없었다.  
  8. 세계의 금융인들은 서울의 KOSPI를 세계 경제 동향의 중요 변수로 여기는데, 대만 주식시장엔 관심이 적다. KOSPI에 등록된 회사들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이는 한국 제조업의 다각화를 반영한다.
  9. 한국 기업은 해외의 다른 회사를 매입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회사에 투자하거나 공장을 새로 짓는 쪽을 選好한다. 2010년 한국 기업은 해외에서 1400억 달러를 투자하였다.
  10. 한국 제조업은 세계에서 로봇을 가장 많이 쓰는 축에 들고 省力化(성력화)로 대만보다 생산성이 높다.  
  11. 한국은 교육수준이 세계 최고이고 중산층이 강하여 富의 분배 문제에 민감하다. 한국의 富者들은 조심하는 사람들이다. 우선 10억 달러 이상의 순자산을 가진 부자가 적다. 러시아는 100명인데 한국은 16명이다. 대만은 25명, 터키는 38명이다. 한국의 10억 불 이상 부자 16명이 소유한 富의 총액은 국내총생산의 4%에 불과하다. 러시아는 29.2%, 인도는 17%, 말레이시아는 20%, 대만은 14.6%인데 한국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같은 수준으로 가장 낮다. 부자들이 정치적 연줄을 이용, 치부하고 호화판 생활을 하는 나라에선 정치 불안이 생기는데 한국의 부자들은 사생활에 신경을 쓴다.
  12. 한국 재벌 기업의 2, 3세들은 대체로 좋은 자질을 가졌다. 워렌 버핏은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이 서로 싸우지만 않는다면 좋다.”
  13. 대만은 중국을 흡수 통일할 수 없지만 한국은 북한을 흡수, 지하자원과 훈련된 노동력을 얻어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不動(부동)의 금메달감’이다.
 
  '아시아의 독일'이 되다

  샤르마 씨의 분석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한국 재벌기업에 대한 好評(호평)이다. 물론 조건이 있다. 재벌 총수가 소유권을 장악, 장기적 전략의 투자와 의사결정을 하고, 기업을 공개, 투명한 經理를 하며, 전문가들이 회사를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 같은 회사가 그렇게 하고 있다. 확고한 장기 전략, 투명성, 전문적 관리가 결합되면 最强의 기업이 된다. 단기 목표 달성에 치중하는 월급장이 사장보다는 재벌 오너가 그런 기업을 만드는 데 유리하다는 것이다. 한국엔 재벌세습을 권력세습과 동일시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세습 자체가 합법적이라면 善惡 是非의 대상이 아니다. 합법성과 투명성이 확보된다면 營利(영리)가 평가의 기준이다. 기업은 돈을 많이 벌어 세금을 많이 내고, 일자리를 많이 만들면 되는 것이다. 누가 주인이냐의 與否는 부차적이다. 꿩 잡는 게 매이다.  
  한국이 제조업 전반에 걸친 세계적 경쟁체제를 구축한 것은 1973~79년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건설 덕분이다. 이 시기는 유신체제와 겹친다. 朴 대통령은 낭비적 정치 투쟁을 '한국적 민주주의'로 극복하여 얻은 國力을 중공업 건설에 집중 투자하였다. 이 시기는 두 차례의 석유파동이 몰려와 세계적 경제위기가 휩쓸던 때였다. 위기를 오히려 好機로 이용한 것이 박정희의 선진국 進入 전략이었다. '아시아의 아이리쉬'로 통하던 한국인이 '아시아의 독일인'으로 불리게 된 것도 거대한 중화학공업의 기반이 국가의 운명과 국민성까지 바꿔놓은 덕분이다. 이런 대전환의 두 주인공은 강력한 지도자와 창의적인 기업인이었다.  
   생전에 李秉喆 회장을 가까이서 모셨던 한 전직 언론인은, '늘 회사 일만 생각하는 분이었다. 한번도 편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늘 걱정하고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부자가 행복하다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李健熙 회장 역시 아무리 삼성전자가 기록적인 수익을 올려도 自祝 분위기를 허용하지 않고 배전의 노력을 주문하였다. 기업은 시장경제의 무한경쟁 속에서 생존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숙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기업인들의 밤낮 없는 수고 덕분에 많은 보통사람들은 행복을 누린다. 이런 기업인들이 민주투사들처럼 우대 받게 될 때 한국의 자본주의는 더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통계는 말한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最下位圈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당시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필자의 가족은 이 무렵 파라과이로 이민을 가기 위한 수속을 밟았는데 다행히 잘 되지 않아 모두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나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캄보디아도 116달러로 78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2016년 현재 세계 GDP(구매력 기준) 국가별 랭킹은 다음과 같다(미국 CIA 통계). 
 1. 중국 19조3900억 달러
 2. 유럽연합 19조1800억 달러
 3. 미국 17조9500억 달러
 4. 인도 7조9650억 달러
 5. 일본 4조8300억 달러
 6. 독일 3조8410억 달러
 7. 러시아 3조7180억 달러
 8. 브라질 3조1920억 달러
 9. 인도네시아 2조8420억 달러
 10. 영국 2조6790억 달러
 11. 프랑스 2조6470억 달러
 12. 멕시코 2조2270억 달러
 13. 이탈리아 2조1710억 달러
 14. 한국 1조8490억 달러
 15. 사우디아라비아 1조6830억 달러
 16. 캐나다 1조6320억 달러
 17. 스페인 1조6150억 달러
 18. 터키 1조5890억 달러
 19. 호주 1조4890억 달러
 20. 이란 1조3710억 달러

 2016년의 한국은 세계 5대 공업국, 세계 7대 무역국(세계 5대 수출국), 세계 13위 경제대국이다. GDP에서 북한의 거의 50배이다. 여성 평균 수명 세계 3위, 삶의 질 세계 17위. 18년의 통치기간에 이런 대도약의 구조를 만든 박정희는 수치로 증명할 수 있는 업적 면에서 20세기의 10대 정치 지도자 반열에 들 것이다.

 *2030년의 최장수국

 영국 런던의 임페리얼 칼리지 소속 공공 건강 연구팀(팀장 Majid Ezzati)이 35개 선진국의 평균 수명 추세를 조사하였더니 2030년에 최장수국은 남녀 공히 한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최근 발표된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30년에 태어나는 한국 여성은 90세를 넘겨서 살 것으로 계산되었다. 남자 기대수명은 84세. 모두 일본을 젖히고 세계 1위가 된다. 세계보건기구 통계와 21개의 다른 통계치를 입력하여 예측한 것이다. 1985년 평균 수명 조사에서 한국 여성은 세계에서 29등이었다. 요사이 통계에선 한국 여성이 세계에서 5위권이다.  
 영국의 조사팀은 한국인의 장수 비결로, 경제수준의 향상, 어린이 영양 상태의 양호, 의료 기관 접근성이 평등한 점, 서양에 비교하여 혈압이 낮은 점, 그리고 여성에서 흡연율이 낮다는 점 등을 들었다. 미국은 평균수명이 별로 늘지 않을 나라로 꼽혔다. 2030년에 가도 2년 정도 늘어 선진국 중 말석을 차지할 것이다. 남자가 80, 여자가 83세. 사회적 불평등, 보편적 의료의 결핍, 높은 영아 사망률과 많은 살인사건 등이 지적되었다. 최근 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오래 사는 다섯 나라’라는 기사를 실었다. 린지 갤로웨이 기자가 쓴 글인데, 일본, 싱가포르, 스페인, 스위스, 한국이 소개되었다.  
 일본인의 長壽 비결은 노인들 사이에서 교제가 왕성한 점, 두부, 감자, 생선 요리, 인간적 갈등이 적은 사회 분위기 등이 꼽혔다. 스페인은 심장에 좋은 올리브 기름과 채소 및 포도주, 그리고 낮잠 습관이 평가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오후 2~5시 사이에 시에스타를 갖는데 이때 식사를 하고 낮잠을 잔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음식을 천천히 제대로 먹는다. 스페인 사람들은 도시에서 자가용 대신에 걷든지 자전거를 이용하는 습관이 있다. 싱가포르는 의료 제도가 완비되어 있고, 사람들이 운동을 좋아하며, 담배와 술에 대한 세금과 규제가 심하다. BBC 기자는 스위스 사람들의 장수 비결로 치즈, 낙농(酪農)식품, 알프스를 들었다. 알프스가 휴가와 운동의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인의 장수 비결은 발표식품, 찜질방, 사회적 교류가 높은 점, 불교에서 유래한 정신적 안정 등.  

2016년 미국 CIA가 집계한 長壽 랭킹은 이렇다.  

1. 모나코 89.5(남85.6 여93.5)
2. 일본 85(81.7/88.5)
3. 싱가포르 85(82.3/87.8)
4. 마카오 84.5(81.6/87.6)
5. 산마리노 83.3(80.7/86.1)
6. 아이슬란드 83(80.9/85.3)
7. 홍콩 82.9(80.3/85.8)
8. 안도라 82.8(80.6/85.1)
9. 스위스 82.6(80.3/85)
10. 건지(영불 해협에 있는 섬) 82.5(79.9/85.4)
11. 이스라엘 82.4(79.3/85.8)
12. 한국 82.4(79.3/85.8) 

모나코, 마카오, 홍콩, 건지, 안도라, 산마리노 같은 극소 도시 국가나 국가가 아닌 지역 등을 빼면 한국인 평균수명은 8등이다. 여성은 3등이다.  

101. 중국 75.5
156. 러시아 70.3(64.3/76.4)
158. 북한 70.4(66.6/74.5)
161. 필리핀 69.2
163. 인도 68.5
223, 차드 50.2(49/51.3) 

남한 사람은 북한 사람들보다 1인당 12년을 더 산다. 러시아는 여성이 남성보다 12년을 더 산다. 이런 장수국화를 물질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박정희가 욕을 먹어가면서 추진하였던 중화학공업 건설이었다. 최단시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업적을 이룬 것이다. 5000만 한국인을 행복하게 만든 민족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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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학산 2017-09-08 오전 9:45

    본문은 말할 것도 없고 유정님의 말씀에도 격하게 공감한다

  • 유정 2017-09-07 오후 6:25

    박정희가 이루어 놓은 업적의 열매를 5천만 전국민이 고루 누려야 하는데, 세상이 뒤바뀌어 붉은 무리들이 모든 것을 독점하고, 대한민국의 훌륭한 시스템을 김정은의 수령독재 체제로 바꾸고자 하는 작금에, 이들 붉은 무리들로부터 자유민주 시장경제를 지키고 또 더욱 발전시켜, 중국 러시아 등의 가치관이 다른 국가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 국가가 되도록, 대한민국 정통 세력이 대동 단결하여 무언가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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