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비탈에 쏟아부은 한 여인의 집념
곽영화(경북 청도군 각남면 옥산1동 부녀지도자)
불의의 사고로 남편 사망
저는 1942년 4월 서울에서 태어나 오남매의 맏이로 곱게만 자랐습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비교적 규모 있고 짜임새 있는 생활이었습니다. 특별한 기대와 관심을 쏟으시는 양친의 사랑을 받으면서 부푼 꿈을 가지고 법학과를 나온 무녀독남 외아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신혼의 단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겁기만 했고 장차 법관이 되겠다고 하는 남편의 뒷바라지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면서 편안한 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안일하고 영원한 꿈은 잠시뿐이었고 충격과 긴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경의 과정을 밟게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일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은 부산에 내려가 근무를 하게 되었고 항상 신병으로 고생하시는 시부모님과 그리고 저와 어린 아이는 서울 약수동 시댁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부산에 간 지 채 한 달도 못되어 남편은 불의의 변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닷물에 던져졌고 4부두 뱃사공들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뜻밖의 전보를 받은 우리 가족들은 허겁지겁 관리국을 찾아갔지요 마음속에 요행을 바라면서 부둣가에 가서 확인한 결과 틀림없이 나의 사랑하던 남편이었습니다. 얼굴은 깨어져 피투성이가 되고 오른쪽 눈알은 튀어 나왔더군요. 그리고 손과 발에는 핏자국이 맺힌 채 정말 어처구니 없는 형상이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절망이 앞을 가로막으면서 현기증까지 났습니다. 수사기관에서 아무리 수사를 해보았지만 이렇다 할 아무런 단서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연애 과정을 통해서 오직 사랑으로만 얽혀진 우리 부부 사이에 이별이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내 가슴속 깊이 박혀 있는 모든 꿈은 산산이 깨어져 버렸고 인간 대열에서 패배자가 되어버린 초라한 몰골과 남편의 보기 흉한 시체 덩어리만이 내 차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경찰은 여러 날이 지나서야 익사라는 석연치 않은 판명을 내렸고 할 수 없이 관리국측의 주선으로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던 남편을 화장터 불구덩이에 집어넣고 두 살 난 어린 것을 안고 허탈한 마음으로 나의 전부를 보냈던 서울 생활을 청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시부모님을 따라서 시조부 양위분이 계시는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희망이 없는 남편의 고향
남편의 고향집이라고 처음 와서 보니까 논 1백 평뿐이고 이것도 농사를 제대로 지을 줄 몰라서 벌레가 다 먹어 버리고 남는 것은 싸라기 한두 말 정도뿐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시조부님께서는 술로만 살아 가시고 시조모님 역시 중병을 앓고 계셨으니 말이 좋아 고향이지 나에게는 전연 낯도 설고 물도 선 곳이었습니다. 정말 답답한 마음은 풀 길이 없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슬픔보다는 환자를 보살피는 데 신경을 써야 했고 마음에 안정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생활의 위협이 엄습해 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묵묵히 가난과 고독 속에서 체념적으로 살아야만 했지요. 야속하기 짝이 없는 가난 때문에 면사포마저 써보지 못한 채 시련의 나날만이 연속되는 가정을 지켜야 했고 시아버님과 시조모님 두 분 환자를 간호해야 했지만 그게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온갖 상념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지만 불쌍한 어린 것의 장래를 위해서는 굳은 결심과 각오를 새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몰라 내가 직장이라도 가질까 하였으나 시아버님께서는 절대 반대하시면서 집에서 어린 것이나 잘 키우라고 하시니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생활을 이어가야 하니 시어머님께서 서울 가서 장사라도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씻으면서 마지막 소망을 어린 손자한테 걸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서울 약수동 시장으로 떠나셨습니다. 고무다라로 채소 등을 사가지고 시장거리에서 파노라면 단속 나온 구청직원들에게 발길로 차이고 내동댕이쳐지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탄식하며 슬프게 우시는 시어머님의 마음은 또 어땠겠습니까.
시어머님께서 보내주시는 적은 수입으로 그날그날의 생활을 이어가던 중에 시조모님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서 결국은 자리에 누운 채 대소변을 받아 내게 되었습니다. 매일같이 환자를 씻겨 드려야 하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대소변이 묻은 바지를 빨아야만 했고 미음을 쑤어서 끼니마다 환자의 입에 떠 넣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쉴사이 없이 환자의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환자의 옆에 앉아서 밤을 새워야만 했습니다. 삶이 이토록 어렵고 고되다는 것은 꿈에 부풀었던 학창 시절에는 전혀 상상도 못했고 인생을 단지 아름답게만 보아왔던 과거의 철없는 시절을 다시 한번 뉘우치며 배고파 보채는 어린 것을 껴안고 구석구석 다니면서 한없이 울기도 했습니다.
1970년 1월 시조모님께서는 결국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나는 마지막 가는 영혼을 위해서 있는 정성을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봅니다. 장례는 大小家(대소가) 친척들의 주선으로 무사히 치렀고 나는 남은 가족을 위해서 희생할 것을 결심했으며 내 가정에 더 이상의 비극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 문제는 내 스스로 해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버려진 산을 개간하기 시작
강한 자존심을 무기로 인생의 낙오를 벗어버리기 위해 일복을 차려 입었습니다. 며느리로서의 책임과 어머니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종갓집 종손부로서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진정 무엇인가 해야만 했습니다. 재산이라고 해봐야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황무지 같은 돌산이 하나 있을 뿐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산이 하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반가웠습니다. 만약에 그 산이 토질이 좋고 평지에 있는 좋은 것이었더라면 오래 전에 팔아 쓰셨지 내 차례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산을 개간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나의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지는 처참한 꼴이 된다 할지라도 죽음을 각오하고서 완전히 「나」라고 하는 것을 잊어버리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마음가짐을 정리하고 보니까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것만 같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려서 앞자락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서 손에 연장을 찾아 들고 산을 찾아갔습니다. 아카시아 나무와 고목이 된 아름드리 밤나무가 여기저기 수없이 많았으며 특히 가시덤불 우거진 잡초는 말할 수 없이 엉키어 있었습니다. 평생을 통해 연장이라고는 처음 만져보는 나로서는 너무도 서툰 솜씨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저앉지 않고 먼저 가시덤불과 아카시아를 베어 버렸으며 밤나무도 베어냈습니다. 연장을 잘못 만져 얼굴을 찍힌 적도 있고 가시덤불을 베어 낼 적에는 손가락도 수없이 베었으며 많은 가시가 손에 박혀 굳은살이 되기도 했습니다. 모진 풍파에 시달려 보기조차 앙상한 몰골에 신경은 말할 수 없이 날카로워졌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해서 뜬눈으로 새우게 되니 몸은 자연히 쇠약해져만 갔습니다.
1970년 3월 봄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땅을 팠습니다. 몇 달을 계속하는 동안에 육신은 뒤틀리는 것 같고 손바닥은 부풀고 아파서 세수를 하지 못하는 때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특히 산까지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어 매일같이 다니기가 힘이 들었으며, 다리는 말을 듣지 않고 발바닥은 아파서 땅을 디딜 수가 없는 상태였지요. 이러한 나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며칠이나 하는가, 두고 보자고 며칠 안 있어서 가버릴 거라고 하면서 제 시아버님한테 며느리를 믿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보면 겉으로는 무척 생각해주는 것같이 하지만 내가 돌아서면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을 할 때는 정말 얼굴에 불덩이가 쏟아지는 것 같았으며 내 전신의 피가 거꾸로 곤두박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역겨운 수모를 참고 견디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괭이 자루에 다시 한번 강하게 힘을 주었지요. 사회의 냉혹성을 뼈져리게 느끼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들었습니다. 저를 괴롭히고 조롱한다 할지라도 결국 나는 가치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 정상적인 방법을 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죽기로 매달리다
부모를 위하고 가정을 살리는 길이라면 내 또한 죽기까지 각오했습니다. 마지막 쓰러져 가는 가정을 안고 죽으면 죽으리라 생각하고 담대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어린 것을 우산으로 받쳐놓고 비를 맞으면서도 땅을 파기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인간의 생명이란 참으로 모질고 질긴 것이지요. 무심하고 야속하게 흘러가는 광음 속에서 조급하고 목말라 했던 내 생의 존재를 나의 것으로 끌어들이기까지 정말 과감하고 철저하게 일을 했습니다. 말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눈물을 흘렸고 성공을 애타게 갈망하며 죽기까지 매달렸습니다.
아침에 일하러 갈 적에는 어린 것이 걸어가지 않으려고 울며 보채니 그럴 적마다 어린 것을 지게로 짊어지고 산에까지 갔습니다. 아카시아 아름이 넘는 큰 뿌리를 캐노라면 전신에 땀은 비오듯하고 배는 고프고 힘은 빠집니다. 손바닥은 터져서 물이 나오고 양쪽 팔은 아파서 들 수조차도 없으며 몸통은 아프다 못해서 두루뭉수리가 되는 것이고 몸이 부었는지 살이 쪘는지조차도 모를 정도로 감각조차 잊어 버렸습니다.
다시 한번 허리끈을 힘 있게 졸라매고서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땅을 파노라면 어린 것은 배고파 밥달라고 울어 대지요. 그럴 적마다 어린 것을 달래기 위해 『정욱아 여기 오줌을 누어라. 엄마가 흙으로 떡을 만들어 줄게』하면서 어린 것의 오줌에 흙을 뭉쳐 『떡 맛있다. 냠냠』하면서 달래면 어린 것은 신기한 듯이 배고픔을 잊고 울음을 그칩니다.
3, 4월 긴긴 해에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어린 것을 달래노라면 눈물은 앞을 가리고 짜증은 끓어 올라 참을 길이 없으니 애매한 괭이자루만 땅에 팽개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짜증은 잠시뿐이었고, 죽어도 하고, 죽을 힘을 다해 일을 계속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던 일을 모두 마쳐야만 집에 오는 것이었고 해는 서산에 기울어지니 저녁을 하기에 바쁩니다. 저녁 식사라야 面(면)에서 주는 구호 밀가루로 죽을 쑤어 먹는 것이지요. 밀가루 죽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면 도저히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싫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나의 피로와 궁색함을 보이지 않으려고 무엇이든지 힘을 내서 했습니다. 내 육체는 점점 시들어가지만 내가 뿌린 씨는 결코 옥토에 떨어져 좋은 결실을 이룰 것이라고 믿고 정말 진실하게 살아왔습니다.
하루가 천년 같던 세월
끼니마다 밀가루 죽으로 연명을 하면서도 한 줌 한 줌 절약하여 모은 쌀 30말로 남의 논 도지를 사서 농사를 지으며 못자리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을 추수가 되기까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세심한 주위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농사를 짓게 되니 그런대로 식생활 유지는 해 나갔습니다만 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평생에 밥 한 그릇 배불리 먹을 수가 없으니 기어코 잘 살아 보겠다는 의욕만으로 살을 부수고 뼈를 갈아야만 했습니다.
세상에 동반자가 없는 나로서는 너무도 어렵고 고달픈 생활이었으며 매일같이 쉬지 않고 산에 일하러 다니자니 하루가 천년 같은 생활이었습니다. 나의 소지품으로는 헌 누더기의 옷보따리 한 개와 다 떨어진 몸뻬 그리고 나를 증명해 주는 어린 것이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속 옷 한 가지라도 사 주어야만 입었고 고무신 한 켤레라도 사다 주어야만 신었으며 이것마저도 아끼고 간수하다가 철이 지나서 못 입고 못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한푼이라도 절약하기 위해서 세탁 비누로 잿물을 사다가 녹여서 쌀겨를 버무려서 만들어 썼습니다. 그리고 시조부님을 비롯해서 시아버님과 어린애의 머리는 집에서 기계를 사다 놓고 빡빡 깎아드리며 헌옷 한 가지라도 알뜰히 기워서 입혔습니다. 그 며느리 잘못 얻어서 내 아들 죽었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몸으로 수고하며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 많은 나무 뿌리들이 하나하나 줄어들고 개간지가 눈에 드러나도록 넓어져 가는 것을 본 어느 심술궂은 사람은 비가 오면 산사태가 나서 잘못하면 마을 사람들이 다 죽는다고 집에까지 쫓아와 법석을 떨며 사람을 못살게 괴롭혔습니다. 내가 피로에 지쳐 쓰러질 때 나를 도와 주기는커녕 그러면 그렇지 하고 짓밟아 버리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 웃어른들의 마음을 맞추기란 죽기를 각오한 자 아니면 도저히 어려운 일이고 남몰래 피눈물 나는 수고와 땀을 흘려야만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 개간을 하던 날 나는 괭이를 든 채 쓰러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아랫마을 먼 곳에서 이를 지켜 보다 놀라서 뛰어 올라온 성씨 아주머니의 부르는 소리에 가물가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습니다.
남이 먹을 때 먹지 않고 남이 쉴 때 나는 일했으며, 좋은 옷을 입을 때 나는 찢어진 옷을 입어야만 했습니다. 고비고비 눈물이요, 한숨과 괴로움이었습니다만 그러나 끝까지 참고 견디었기에 4천 평이라는 땅을 손에 쥐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대견하겠습니까.
포도·복숭아 새 싹 나오자 너무 기뻐 엉엉 울었다
나는 이곳에 수입이 빠르다는 포도나무 6백 주와 복숭아 나무 5백 주를 심었습니다. 남은 자리는 간작으로 수박과 토마토를 했지요. 포도와 복숭아가 어떻게 열리는 것인지 궁금하게 여기던 중에 새 싹이 나왔습니다. 나는 너무도 기쁘고 반가워서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생의 보람, 그것은 정말 진주 같은 것이었지요. 피와 땀이 아니고서는 인생의 보람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허다한 고생 끝에 오히려 값진 것을 찾아낸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 침묵과 고독만을 지키면서 감각없이 살아온 나는 생애 최대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새로운 용기가 솟았습니다. 과수나 원예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초등학교 1학년생이 되어서 세밀하게 배우고 관찰을 했습니다. 수박을 온상에서 키워 본답에 옮기기까지는 그 과정이 정말 조심스러웠으며 알맞은 온도와 보온 관계로 여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됐고, 아침 저녁 물을 주는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온상에서 키운 수박을 본답에 옮기고 나니 날씨가 가물어서 물을 주어야만 했기에 나는 물지게를 지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면서 일일이 물을 지어 날라야만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린 것은 물지게를 붙잡고 기를 쓰며 보채니 견디다 못해서 뺨을 때려주고는 나도 같이 울었습니다. 일주일 간격으로 분무기를 등에 지고 30통 이상 약을 뿌리자면 양쪽 어깨는 새파랗게 멍이 들고 등에는 약물이 쏟아져 옷을 버린 때도 수없이 많았으며, 목줄기가 뻣뻣하고 머리가 무거워서 한참씩 정신을 차리지 못한 때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포도밭을 지키기 위해 비가 오는 날에는 거적을 쓰고 앉아 밤을 새워야만 했고 울타리 없는 밭에 몰래 들어와 수박 포기를 뽑아갈 적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으며 수박밭에서 죽어버릴까도 생각했습니다. 일일이 물을 주어서 정성스럽게 키우던 중 하루는 비가 많이 와서 어찌나 반갑던지 단숨에 뛰어올라가 보았더니 그중에서 제일 크고 좋은 것으로만 일곱 포기나 도둑을 맞았습니다.
나는 너무나도 분해서 기어코 찾을 욕심으로 인근 촌락을 샅샅이 뒤져보았더니 어떤 염치 없는 친구가 자기밭에 나란히 심어 놓았더군요. 오랫동안 내 가슴속 깊이에 쌓이고 쌓인 분노의 불길이 그 친구한테 폭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친구는 손이 발이 되게 빌면서 살려 달라고 애걸 하더군요. 무지와 허영에 눌려서 한 여인의 부르짖는 절규를 외면한 채 심혈을 기울여 가꾸어 놓은 수박 포기를 뽑아 갔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뿐이겠습니까. 3백 포기의 수박이 자꾸만 죽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몸이 달아서 면사무소의 지소로 달려가 문의를 해 보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실망을 안고 나와서 농약사에 문의를 해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3백 개에서 꼭 1백 포기가 죽었더군요. 죽은 것을 뽑아서 조사를 해보았더니 벌레가 뿌리를 잘라 먹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박이 열릴 때는 정말 혼자 보기가 아까웠습니다. 내 평생 처음 보았거든요. 그리고 포도밭에 우거진 잡초를 뽑아 줄 적에는 풀잎에 황충이라는 벌레가 붙어 있어서 내 손에 무서운 독이 올라서 내 손 전체가 붓고 가려워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지게를 지고 베어논 풀을 한 짐 잔뜩 지고 집에까지 와야 했으며 리어카에 많은 퇴비를 싣고 가서 또한 져 올려야만 했습니다. 나락논에 엎드려서 논을 매주기도 하고 변소의 인분을 퍼서 퇴비를 뒤적이기도 했으며 똥장구를 등에 지고 수박구덩이나 감자밭에 인분을 떠서 넣어 주기도 했습니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된다는 옛속담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남자지, 여자냐』
나는 이왕 하는 일이기 때문에 완전히 그 속에 젖어 버리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내가 남자지 여자냐』고 대꾸합니다. 사실 나는 그동안 도로자갈 부역이나 못물 내려오는 도랑 치우는 부역 등 남자들만이 하는 틈바구니에 끼어서 가장 힘들고 하기 싫어 하는 일들만을 골라서 해왔습니다.
남성들에 대한 일종의 분노를 느끼면서, 여자의 연약함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남자들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지요. 산에서 골라낸 돌멩이를 일일이 지게로 져다 버려야만 했고 비료를 구하지 못해서 지게를 지고 산골짜기에 다니면서 산초를 베어다가 퇴비를 만들어야만 했으니 나의 조그마한 육체는 말이 아니었고 내 어깨에 깊이 들은 멍은 풀릴 사이가 없었습니다.
겨울에는 산에 다니면서 땔나무를 해야 했으니 손은 터지고 입술은 갈라졌으며 발은 얼어서 동상에 걸리고 했습니다. 미끄러운 골짜기에서 나무지게를 지고 내려 오느라면 아랫도리는 휘청거리고 눈이 캄캄하면서 정신이 어지럽습니다. 전에는 손이 예쁜 것을 자랑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마디가 커지고 억세게 생긴 손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1973년도에는 포도가 3년생으로서 15만원이 나왔으며 1974년도에는 28만원이 나왔습니다. 1980년대에는 1백만원 이상의 소득 목표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1백50원도 구하기 힘들고 만져만 보고 준다고 해도 거절을 당했던 내 가정에 15만원이나 28만원이란 돈은 너무도 엄청나고 큰 것이었습니다. 피와 눈물이 아니고서는 맛보기 어려운 사연들이었습니다. 한 줌의 흙과 한 그루의 나무에도 피와 눈물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가정은 차차로 안정이 되고 병든 시아버님께서도 몸이 좋아지셨고 서울에서 혼자 고생하시던 시어머님도 집에 오셔셔 좋아하시며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시조부님께서는 매일같이 술만 잡숫고 돈타령만 하시더니 이제는 정신이 드셨는지 술도 줄이고 용돈도 안 쓰십니다.
몸과 마음들이 한데 뭉쳐서 열심히 하게 되니 가정은 화목해지고 웃음이 떠나질 않습니다. 이래서 마을 사람들은 우리 가정을 보고서 문화 가정이라고 하면서 여간 칭찬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집에는 아들도 많고 며느리도 많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간 또는 시누이와 올케 간에 싸움 떠날 날이 없다고 합니다.
저는 효부 대통령상을 비롯해서 도지사 보화상 등 효부열녀에게 주는 이름 붙은 상은 모조리 다 받았습니다. 삶에 보람을 찾기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성공을 하느냐 못하느냐 심각한 갈래길에서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며 개척해 나갈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내 일생을 바치는 희생적인 정신으로 힘쓰고 애쓰며 기필코 내 청춘의 보상을 찾아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렵니다.
특히 어린 것이 아빠를 찾을 적에는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아빠는 미국에 공부하러 가셨다고, 정욱이도 공부 잘하고 튼튼하게 자라서 비행기를 타고서 미국에 가라고 하면 비행기를 타려면 돈은 얼마가 있어야 되느냐고 묻습니다. 아빠도 모르는 어린 것을 소망으로 삼고 먹을 것도 없는 궁색한 생활을 지탱해 나간다고 나물밥과 밀가루 죽으로 끼니를 이으면서 눈물의 어머니, 희생의 어머니가 되겠다고 백 번 천 번 다짐해 봅니다. 이와 같이 많은 상처를 안고 무서운 집념에 사로잡힌 채 오직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일념, 그 성공이란 먼 훗날 남의 것이 아니고 내 눈에 보이며 내가 가질 수 있는 그것이기에 연간 1백만원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강한 정신력을 끝까지 발휘하여 용감하게 달려 가렵니다.
개같이 벌어 벼락부자가 되기보다는 피와 땀으로 진실하게 벌어서 헐벗고 굶주리며 문전 걸식하는 불쌍한 고아들을 위해서 도와 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저를 비웃고 헐뜯는 사람들이 지금은 태산 꼭대기에 올려 놓아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면서 곽영화를 지도자로 세워 가지고 새마을 사업을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는 80호가 살고 있으면서 他姓(타성)은 불과 몇 집 안되고 전주 李씨가 집단으로 살고 있으면서 양반만을 철저하게 내세우는 아주 깊은 산꼴짜기의 답답한 고을입니다.
항상 일가끼리만 뭉쳐서 살아온 탓인지 남에게는 지극히 배타적이고 집안 간에는 절로 의뢰심이 지배해 왔으면서 自助(자조)란 전혀 모르고, 협동을 잊은 채 살아왔습니다. 그중에서도 공부를 해서 사회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전부 도시로 나가 버렸고 남은 사람들은 시끄러운 사람들뿐이었으니 도저히 그 속에서는 나의 체통이 서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다가 항렬이 제일 낮고 보니까 전부 나한테는 아저씨 할아버지뻘이 되고 심지어 뱃속에 들어 있는 아주머니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동네에서는 가끔씩 회의를 하고 특히 부인회를 한다고 하면서도 나한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만 생각을 하면서 부인회란 원래가 남편들 있는 사람만이 하는 것이구나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마을 일에는 전혀 캄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새마을이란 전혀 생각도 못하고 남자들이란 사랑방에 들어앉아서 술이나 마시고 화투 노름이나 했습니다. 전기나 전화는 물론 시설을 갖추지 못해서 호롱불을 켜야 했고 환자나 급한 일이 생겨도 일일이 사람이 다녀야만 했으며 비가 오는 날에는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많은 물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를 못가는 실정이었습니다.
節米로 모은 돈으로 교량 건설
그런데도 누구 한 사람 바꿔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없었고 생각조차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마을 사람들이 늦게야 잠에서 깨어난 듯이 새마을 사업을 하자고 하니 어찌 반갑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날로 간부급을 뽑고 기존 어머니회를 바탕으로 해서 회원을 모아 보았습니다. 전체 회원은 36명이 되었습니다.
節米(절미) 저축으로 하루에 쌀 세 주먹씩을 저축한 것 가지고 1년 통계를 해보니 4만3천원이었습니다. 1970년도까지 계속한 것을 보니까 25만8천원이며 백미가 31말 9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염원이자 어머니들의 보람인 교량 공사를 하자고 의논을 했지요.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이 속히 하자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날로부터 어머니 회원들은 리어카에 자갈을 실어 나르면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시작한 지 한 달도 못가서 완전 개통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니까 어머니 회원들은 자신이 생겼는지 이동구판장 사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풍각 시장에까지 가려면 십리길을 가야 하고 장에 다녀오면 그 날은 일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소비조합 회원 60명을 모집하게 되었습니다. 회원 1인당 1백원씩을 출자해서 6천원을 모아 가지고 생활필수품 중 비누, 미원, 성냥 등 손쉬운 것을 사다가 회원의 가정으로 돌려가면서 팔기로 했지요. 1년 동안을 팔아 통계를 내보니 원리금 2만4천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원들은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물건도 더욱 많이 사다가 팔게 되니 이익금도 많이 남게 되더군요. 1974년도까지 원리금 통계를 내보니 15만5천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니깐 우리 마을에도 본격적으로 새마을 운동을 하게 되었어요. 나는 회의 때마다 내 가정에서 몸소 실천하고 체험했던 것을 이야기도 해주고 협동과 단결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라는 것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작은 일 하나라도 충실하게 하고 한 푼이라도 아끼고 절약해서 1인 1통장 갖기 운동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節米저축금 10만원과 부락 자체부담 95만원을 들여서 도합 백1백5만원으로 전기가설 공사를 시작해서 한 달 만에 전깃불을 켜게 되었고, 전화도 동시에 끌어들였습니다. 지금은 전화 있는 집이 일곱 집이나 되고 텔레비전 안테나가 집집마다 우뚝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리고 불량건물 7동을 헐어버리고 새 집으로 다시 지었으며 초가 지붕도 전부 슬레이트나 기와로 단장을 했습니다. 안 길을 넓히는 데에는 서로가 자기 골목부터 해야 한다고 하면서 아우성을 치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고 있는 골목에는 한 아저씨가 반대를 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못 고치고 있습니다만 머지 않아서 그분도 뉘우치고 깨달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술집 색시의 눈물
또 마을 창고와 구판장을 짓는 데는 군청으로부터 시멘트와 철근을 보조받고 나머지는 자체부담에, 어머니회 기금을 보태서 했습니다. 그리고 공동 작업장으로 사용하던 동답 4백 평을 개간해서 뽕나무 1천2백 본을 심어서 누에 소득 15만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면서 당산제를 지내느라고 많은 물질을 허비했는데 지금은 당산제를 철폐했습니다. 감히 기초 자립마을도 생각을 못했었는데 지금은 우수 자립마을로 선정이 되었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고 뿌듯했습니다. 그리고 1백60만원의 자부담으로 폭 5m 길이가 1천2백m인 산업도로 공사도 했습니다.
가을에는 고추 건조실과 도정공장, 또 마을회관 상수도 설치 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마을 근처에 타지에서 술집 색시가 들어와서 술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들이 자꾸만 그 집에 가서 술을 마시면서 집에 와 술주정을 하면서 아내들을 못살게 한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남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타일렀지요.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내 돈 가지고 술 먹는데 무슨 참견이냐고 하면서 자기 남편 없으면 그만 아니냐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날 저녁에 어머니 회의를 열었어요. 그리고 다음에는 근처에 있는 다섯 마을 어머니들을 찾아서 의견을 이야기했더니 협조해 준다고 하면서 쾌히 응낙을 하더군요. 그래서 다섯 마을 어머니들과 함께 술집에 갔습니다. 색시되는 사람한테 좋은 말로 타이르면서 우리 새마을에 협조 좀 해 달라고 어머니들의 뜻을 이야기했더니 색시는 눈물을 흘리면서 곧 떠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앞으로 잘 사는 마을, 거짓과 허영이 없는 마을로서 협동하고 단합하여 알찬 마을 다듬기에 더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새마을 여성 지도자로서 성실하게 일해 왔으며 푸른 녹색의 장원이 되기 위해서 내 전체를 바치며 힘 있게 살아 왔습니다. 마을에 아무리 좋은 것을 만들어 놓아도 정신이 바로 서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되고 아무것도 없어도 정신만 바로 살면 다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 하고 싶습니다.
한 여성 새마을 운동 지도자의 手記
- 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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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9-24, 17:30












이런 정신을 심어준 박정희가 진정 지도자
김일성도 천리마운동을 새마을보다 먼저 했지만
결국 자신을 우상화하는 길로 끌고가 오늘에 꼴이 되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