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렇게 비참하게 살았던 민족이다.








1653년 동인도 회사 소속의 네덜란드 선박(스뻬르베르)이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출발하여 대만을 거쳐 일본의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제주도 남쪽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破船(파선)했다. 36명이 해안에 표착했다. 그 중 한 사람이 헨드릭 하멜이었다. 13년 뒤인 1666년 하멜은 일본 나가사키항으로 탈출했다. 이들을 조사한 일본 당국은 朝鮮(조선)정부에 나머지 선원의 송환을 요청했다. 조선은 생존자 7명을 일본으로 보내주었다.

하멜 일행은 1667년10월 나가사키를 출항하여 바타비아로 돌아갔다. 하멜은 바타비아에 남았고 다른 7명은 하멜이 작성한 「하멜 보고서」 한 통을 갖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1668년 이 보고서는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되었다. 이어서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판으로 출판되었다. 유럽에 한국을 가장 소상히 알리는 책이 된 것이다.

하멜은 조선 땅에 도착한 최초의 네덜란드인은 아니었다. 1627년에 얀 얀스 벨떠프레이라는 네덜란드인이 동료 두 명과 함께 표착했다. 그는 이름을 바꾸어 朴淵(박연), 朴燕(박연)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武科(무과)에 합격하여 훈련도감에서 관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 朝鮮女人(조선여인)과 결혼, 조선땅에서 생을 마쳤다. 훈련도감에서 서양식 무기-홍이포와 조총을 개발하기도 했다. 하멜 보고서는 조선에 머물던 13년간의 밀린 봉급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쓴 것이다. 나가사키에 돌아간 직후 그곳에서 썼다고 한다.

이 보고서는 일기체인데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다. 하멜이 표류할 때부터 기록을 했고, 그 기록을 갖고 탈출하여 정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地名도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考證(고증)되었다. 하멜 보고서는 제주도에 표착하던 1663년8월15일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노를 내린 다음 즉시 닻도 내렸다. 그러나 파도와 수심 그리고 강한 바람으로 인해 닻을 바닥에 고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갑자기 배가 해안가에 세 번 정도 부딪히더니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下갑판 船室(선실)에 있던 사람들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갑판 위로 올라올 시간도 없었다. 갑판에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은 배에서 뛰어내렸고 다른 몇몇은 파도 때문에 사방으로 휩쓸려 갔다. 해안에 닿은 사람은 15명뿐이었지만 대부분 알몸이었고 부상을 심하게 입었다. 바위 위에 앉아 있다 보니 난파선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차츰 들렸다. 그러나 너무 어두워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고 도울 수도 없었다.>(「하멜 보고서」-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기획, 유동익 옮김, 중앙M&B 발간).

하멜 일행중 생존자는 36명이었다. 그들은 우선 제주목사의 관할로 넘어갔다. 그해 10월 조정은 朴燕을 통역으로 파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대 후반이었다. 하멜은, 네덜란드 사람인 朴燕이 처음에는 네덜란드 말을 잘 하지 못했으나 함께 여러 날 있는 동안 모국어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朴燕은 하멜 일행에게 『귀하들은 이 땅에서 일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는 암울한 충고를 했다. 하멜은 『우리는 통역을 구했다는 기쁨이 곧바로 슬픔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하멜 일행은 서울로 불려 올라가 왕의 호위부대에 배속되었다. 2년 뒤 두 네덜란드 선원이 사고를 친다. 凊(청)의 사신이 서울에 왔다가 떠나던 날 헨드릭 얀스, 헨드릭 얀스 보스라는 두 선원이 凊의 사신이 지나가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뛰어들었다. 두 사람은, 凊 사신의 말머리를 붙들고 본국으로 송환시켜줄 것을 간청했다. 조선 관리들에게 넘어간 하멜 일행은 곤장 50대씩을 맞았다. 시위를 한 두 선원은 투옥되었다가 獄死(옥사)했다. 나머지는 전라도로 유배되었다.

하멜이 관찰한 조선인의 사는 모습과 관청의 하는 일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하멜은 가난에 찌든 조선인의 생활상을 개탄하듯 서술하면서도 높은 學究熱(학구열)에는 혀를 내두른다.

<양반과 평민은 자식을 아주 잘 교육시키려고 한다. 그들은 밤낮없이 앉아서 글을 읽는다. 어린 소년들이 賢人(현인)들의 저서를 읽고 깨닫고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승진의 證書(증서)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많은 젊은 양반들이 늙었을 때는 가난해진다. 그들은 승진의 증서를 받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는데, 그들이 지불해야만 하는 기부금 마련에 때로는 재산이 부족하고, 그 비용은 지불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하멜은 조선인들에 비판적인 관찰기도 더러 남겼다.

<그들은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그들은 온순하고 신앙심이 두텁다. 네덜란드 사람 벨떠프레이가 우리들에게 말하기를, 청나라가 얼음 위를 건너와서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숲속에 들어가 목 매달아 죽은 것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수가 적군에 맞아죽은 것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싸우다가 누군가가 발 아래로 넘어지면 즉시 도망간다.>

2003년은 하멜이 제주도에 기착한 지 350년이 되는 해였다. 2002년 한국이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사람 히딩크 감독 덕분에 세계적으로 새삼 유명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코리아를 세계에 알리는 데 네덜란드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맺은 것 같다. 물론 하멜의 조선과 히딩크의 한국은 완전히 딴 나라이다. 17세기는 네덜란드의 세기라고 부를 정도로 해외 진출이 왕성했다. 16세기에 시작된 스페인에 대한 독립전쟁에서 이긴 이후 놀라운 에너지가 폭발했던 것이다. 하멜과 朴燕의 한국 상륙은 그런 시대적 흐름의 한 사례였다.

2004년 3월에 나는 헨드릭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컴市를 찾아갔다. 로테르담에 가까운 이곳은 강의 河口(하구)에 발달한 인구 약3만 명의 古都(고도). 하멜의 동상도 있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하멜은 고향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동양학자들 사이에 그의 표류기가 유명해지니 고향에서도 뒤늦게 그를 기념하게 된 것이다. 나를 안내해준 시청 사람은 '작년은 하멜이 한국에 상륙한 350년이 되는 해여서 행사도 많았고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와 주었다'고 했다. 한글로 인쇄된 안내 책자도 있었다. 2003년 하멜 일행이 도착했던 제주도와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은 하멜과 관련된 행사를 많이 했다.

선박 사무장이었던 하멜은 탈출한 뒤 나가사키에서 2년간 머물었다. 그는 네덜란드 식민지이던 인도네시아로 돌아가 활동하다가 1670년에 고향 호르컴에 일시 귀국했다. 그는 다시 인도네시아로 가서 살다가 돌아와 62세에 죽었다. 세계를 무대로 하여 떠돌며 살아가던 17세기 네덜란드人의 한 표본이다.

하멜의 고향 도시도 사연이 많다. 1572년 네덜란드 독립군(신교도)은 지배자인 스페인 군대로부터 이 도시를 빼앗자말자 19명의 신부와 수도승을 목 매달아죽였다. 이들이 背敎(배교)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1574년 독립군은 水攻(수공)작전을 펴서 호르컴을 지켜냈다. 海面(해면)보다 낮은 네덜란드에선 둑을 터뜨려서 물바다를 만들어 침입군을 막아내곤 했었다.

1629년부터 네덜란드는 水攻을 위한 둑을 전국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호르컴에는 그 둑이 좋은 산책로로 변해 있었다. 水攻 둑을 이용한 작전은 1672년 프랑스 군대를 무찌를 때는 효과가 있었으나 1794년 프랑스 군의 침공 때는 실패했다. 혹한으로 강물이 얼었다. 1940년 5월 나치 독일군은 이 水攻 둑 뒤로 낙하산 부대를 투하하고 폭격기를 보냈다. 水攻 둑은 산업화 시대엔 맞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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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업인이 선물로 준 책 ‘조선, 1894년 여름’을 읽었다. ‘책과 함께’라는 출판사에서 낸 책인데 오스트리아 여행가 헤세-바르택의 조선 여행기이다. 정현규 번역. 부산, 제물포, 서울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단숨에 읽었다. 청일전쟁이 난 해의 조선과 조선인들 이야기이다. 우리 선조들이 개화기의 초입 때 이렇게 살았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책을 다 읽으면 이런 이미지가 남는다.

<가난하고 더럽다, 남자는 일을 안 한다. 노름엔 열심이다. 일은 여자의 몫이다. 그들은 너무나 희생적이고 부지런하다. 관리들이 부패하고 착취만 일삼으니 일할 動機가 없다. 사람들의 체격이 좋고 타고난 건강 체질이다. 본성이 착하므로 좋은 정부를 만나면 단기간에 발전할 것이다.>

저자는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항으로 들어올 때의 느낌을 이렇게 썼다.

<조선의 살벌한 바위 해안이 정면에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그렇게 보고 있자니 최악의 야만국가라는 평판을 받고 있는 이 반도국에 대한 경악과 일본과 조선 양국 사이에 있었던 참혹한 전쟁들과, 이전 수 세기 동안의 유혈전투, 그리고 조선의 통치자가 불과 10여 년 전에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한 피바다에 대한 상념들이 찾아왔다. 바다 한 가운데 우뚝 솟은 다섯 개의 바위를 가리키는 선장의 손짓이 나의 상념을 깨웠다. 그 옆을 지나가며 우리는 멀리서 일본인 거주지의 하얀 가옥들을 보았다, 곧 그곳에 정박하였다.>

저자는 농촌이 아니라 부산, 서울, 제물포 등 도시만 보았으므로 失業 상태에 경악한다.

<이들이 절대 하지 않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일이다. 아마도 죽어버린 이 나라에 일자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일할 기회가 좀 더 많은 항구의 조선인은 부지런하고 끈기가 있다. 중국인처럼 인내력 있고 만주인처럼 힘이 좋다. 여자들이 일하는 마을은 깨끗하다. 여자들은 감동적인 부지런함과 감탄할 만한 인내력으로 그 의무를 다한다.>

일본인에 대한 호평이 대조적이다.

<일본은 제물포를 점령하였고, 이미 수도마저 점거했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조선군보다 행동거지가 낫다. 그들은 모든 물품을 현금으로 구입하였고, 예의바르게 행동하였으며 술에 취한 채 다니지 않고 규율이 잡혀 있다. 일본 장교들은 예의바르고 교양이 있다.>

바르텍은 서울의 초라함에 놀란다.

<서울은 아마도 호텔이나 찻집, 그 밖에 유럽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를 볼 수 없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수도이자 왕의 거주지일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도시 중에서도 서울은 확실히 가장 기묘한 도시다. 25만 명가량이 거주하는 대도시 중에서 5만 여 채의 집이 초가지붕의 흙집인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가장 큰 도로로 하수가 흘러들어 도랑이 되어버린 도시, 산업도, 굴뚝도, 유리창도, 계단도 없는 도시, 극장과 커피숍이나 찻집, 공원과 정원, 이발소도 없는 도시, 집에는 가구나 침대도 없으며, 변소는 직접 거리로 통해 있다.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주민들이 흰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다른 곳보다 더 더럽고 분뇨 천지인 도시, 종교도, 사원도 가로등도 상수도도 마차도 보도도 없는 나라가 또 있을까?>

그럼에도 서울은 결코 건강에 해로운 곳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겨울의 혹한과 여름의 소나기가 전염병을 막고 오물을 씻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남자의 게으름과 여자의 부지런함을 여러 번 대조시킨다.

<나는 남자들이 일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집 안이나 집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조그만 중국식 파이프를 입에 물고 빈둥거리거나 골목길 한 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앉아 놀거나 잠을 잤다. 반면에 작고 추하며 고생 때문에 여윈 여자들이 살림을 도맡으며 요리하고 빨래를 했다. 모든 노동은 여자들의 몫이다. 바로 여기서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민족일수록 문화수준이 낮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조선의 여성들은 짐 싣는 동물보다 나은 존재가 아니다. 남자들은 노예를 갖기 위하여 결혼하는 것 같다.>

왜 조선 남자들은 일을 하지 않고 게으른가. 저자의 관찰이 날카롭다.

남자들은 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욕심이 적기 때문이다. 집은 스스로 짓고, 살림 도구는 소박하다. 아내가 채소밭을 가꾸고 담배나 약간의 고기를 살 돈이 필요하면 들판에서 고용살이를 하거나 아내를 고용살이 시킨다.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한 이유는 <생계 유지비보다 많은 돈을 벌면 관리들에게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착취형 관리들이 조선의 몰락과 이곳에 만연한 비참함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라고 강조하였다. 관리들의 탐욕은 이윤 획득과 소유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와 노동의지, 그리하여 모든 산업의 가능성을 질식시켰다는 것이다. 아마도 서울보다 일을 적게 하는 도시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인도, 중국, 일본을 여행하면 상인들이 몰려와 물건을 팔려고 하는데 서울에서는 오히려 상인들을 불러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물건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물건을 만들어도 살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기술자들이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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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답과오답 2018-08-04 오후 6:00

    인세의 지옥 이었군요
    이런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일본을 그토록 저주 한다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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