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9월 16일.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몇몇 비서관과 이야기하다가 얼마 전에 있었던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모국 방문에 대해 만족감을 표현했다.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모국 방문은 성과가 큽니다. 딴 곳에도 이 정책을 넓혀야 되겠어. 이 사업을 창안하여 추진한 趙一濟(조일제) 오사카 총영사에게 고생 많았다는 치하의 말을 전해 줘요. 모처럼 고국을 방문해 친척들이 서로 껴안고 울면서 같이 성묘하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이렇게 마음씨 좋은 겨레가 왜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헐뜯고 살게 되었는가’ 하고 우리 역사를 한탄한 적도 있어요. 우리 국민은 사촌이 논을 사면 배아프다는 말도 있는데, 이것을 빨리 고쳐서 동포끼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될 것입니다.”
조일제 공사는 조총련의 사주를 받은 문세광에 의하여 대통령의 부인이 살해되었는데도 조총련 母國방문 사업을 건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
(朴正熙 傳記에서 발췌)
이틀 전에 별세한 중앙정보부 전 차장보 趙一濟 씨(국회의원 두 번 역임)는 북한노동당의 일본내 공작 기지인 조총련에 결정적 타격을 준 인물이다.
1975년부터 시작된 조총련 모국방문사업은 남북대결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승리중 하나이다. 이 사업의 창안자라고 朴正熙 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적이 있는 趙一濟 오사카 총영사(뒤에 국회의원 역임)는 부임하기 전에는 정보부 보안차장보로서 국내정치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18세 때 오사카에서 해방을 맞았던 재일동포 출신이었다. 동포사회의 생리를 잘 아는 그는 조총련이라고 해도 골수 공산주의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北送교포가 9만3000명이나 되기 때문에 조총련이든 民團이든 在北동포와 인연이 없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이런 사정을 무시하고 조총련가입자 30만 명을 전부 敵으로 돌리는 수사식 접근법에 의문을 가졌던 이가 趙총영사였다.
당시 對共수사기관들은 간첩수사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공항에서 그물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북한측과 연락이 있는 在日동포들을 사소한 건으로 연행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걸어 무리한 수사를 하곤 했다.
趙차장보는 관련 수사기관에 대해서 '앞으로 재일동포를 연행할 때는 반드시 나의 허가를 받으라'는 지시를 해두기도 했다. 그는 1975년3월 오사카 총영사관으로 부임차 가는 新幹線 열차안에서 성명서를 초안하여 취임식 때 발표했다. 그 요지는 '내 직책을 걸고서 조총련 동포들에게 고한다. 조총련 가입자들이 조국을 방문하여 고향에 다녀오고 싶다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趙총영사는 '이런 일은 계통을 밟아서 하면 되지 않으니 일단 저질러 보자는 심정으로 발표부터 먼저 했다'고 한다.
외무부와 정보부에서는 경고장이 날아왔으나 조총련 사회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본의 지방에 나가 있던 한국 대사관의 영사들도 이 사업의 적극적인 추진을 건의했다. 조총련 동포들이 대거 모국방문을 신청하기 시작했다. 이러는 사이에 정보부 본부에서도 金永光 판단기획국장이 朴대통령에게 모국방문사업의 국가적 추진을 건의하기에 이른다. 朴대통령은 아내를 죽음으로 몰고간 조총련에 대한 감정을 극복하고 이 사업의 추진을 허가했다.
정보부가 뒤에서 기획하고 연출한 조총련의 추석성묘단 사업은 한국적십자사가 주관했다.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조총련 방문단 환영대회에서 朴順天 여사는 감동적 연설을 했다.
'여러분들이 일본으로 돌아가실 때는 조국의 흙 한 줌씩을 싸가지고 가셔서 조국이 그리울 때 이 흙냄새를 맡아보고 만져도 보세요.'
희극배우 김희갑씨가 부른 '불효자는 웁니다'도 대유행했다. 首丘初心(수구초심: 여우가 죽을 때 제가 살던 굴쪽으로 머리를 향한다는 뜻. 즉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호소한 이 사업은 거짓과 공포의 결사체인 조총련을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뜨려갔다. 이런 역사적 사업이 한 재일동포 출신 공무원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현재 조총련은, 한때 수십 만의 구성원을 보유하였지만 3만 명 대로 줄었다.












알게모르게 대한민국을 위해 또 인류를 위해 일했던 훌륭하신 분들이군요. 그저 감사드릴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