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부산에서 민간 방송으로 출발한 KNN 방송국에서 인터뷰한 내용이다. 지능적 탈북이란 무엇일까. 개신교에서 유명한 김진홍 목사는 자유민주주의 보수우익 인사이지만 본래는 자생적 사회주의자였다. 막말하여 외부의 포섭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알아서 빨갱이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뜻에서 지능적 탈북을 자생적 탈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한류가 퍼진 북한에서 자생적 탈북자가 여러 명 있음을 확인한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잘 생긴 배우를 만나보고 싶어 탈북했다는 탈북녀도 있다. 또 한국 드라마를 보고 남한과 먼 함경도에서 도보로 분계선을 넘어온 탈북 청년도 있다.
하지만 내가 탈북할 때에는 한류란 말조차 없을 때이므로 자생적 탈북이란 생각하기 어려울 때이다. 그런 속에 나의 탈북은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자생적 탈북이라고 인텨뷰 기자는 말한다.
엄밀히 따지면 자생적 탈북이라고 해도 외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수는 없다. 나에게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남조선 삐라였고 그 내용은 6·25전쟁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삐라 내용이 믿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물론 삐라 내용은 근거 위주로 되어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어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북한은 폐쇄되었고 또 편견으로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례로 소련 공산당 총비서 흐루시초프 회고록에 써있고 또 귀순 인민군 이학구 대좌가 증언했다고 하지만 그게 사실로 믿어질 리 없었다. 소련 공산당 총비서가 어떻게 자유세계에 회고록을 발표할 수 있는지? 또 귀순했다는 이학구 대좌가 살려면 별 소리 다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북한이 선전한 6·25전쟁 <진실>이 더 믿음직스러웠다. 남한의 국방장관 신성모가 <아침은 해주,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며 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 근거는 북한 신문 자료가 아니라 남조선 신문 자료를 제시하며 북한은 선전하였기에 믿어질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은 북한이 일으켰다는 이 <황당한 남조선 삐라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자생 탈북자가 될 물꼬를 터 주었다. 어느 순간 생각해보니 침략을 당한 북한이 침략한 남한의 수도를 3일 만에 점령했다는 것이 이상하였다. 이것이 자생적인 탈북자가 되기 시작한 것으로 된다.
라디오 인터넷 없는 유일한 곳으로 완벽하게 폐쇄해 놓고 일방적인 선전만 하는 북한에서 자료들은 왜곡된 사실밖에 없기에 진실을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진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을 간단히 연구해 냈다. KNN 방송 측에서는 제가 과학자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누구나 간단히 연구해 낼 만큼 물꼬를 터 주는 것이 중요한 것뿐이다.
북한 철학에도 진리의 기준은 실천이라고 되어 있다. 6·25 진실은 전쟁 초기 참전자를 만나보면 알 수가 있는 것이었다. 주변에는 6·25 전쟁 초기 참전자는 수두룩했다. 그럼에도 왜 이들은 진실을 함구하고 있을 까. <짧은 혀 때문에 긴 목이 날아난다>는 속담이 북한에 새로 생겼을 정도로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함구를 자연스럽게 열게 하는 것이 어렵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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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물자 부족의 나라 북한에서 술, 담배는 사람을 삶는 데 특효이다. 이 특효 물자를 가지고 6·25 초기 참전자를 만났다. 이 참전자는 저의 연구소 산하에 있는 화부 아바이였다. 상급 연구원으로서 평시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화부에게 살갑게 대하면서 전쟁 영웅담을 들려 달라고 했다. 그 귀한 술 담배를 권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속심을 말하게 유도한 것이다.
이 화부 아바이는 본래 조선족으로서 중국 팔로군의 백전노장이었다. 어느날 조선족만 뽑아 이동하였는데 그게 압록강 넘어 신의주였고 배치된 것은 38선 동해안의 속초 양양이었다. 38선 맞은편에는 백골 부대라는 남조선 군대가 있었다고 한다. 백골이 되도록 싸우는 군대라기에 아주 긴장하였다고 한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대포를 쏘고 공격하였는데 백골부대는 빤쯔바람에 죽거나 도망하였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속으로 <아차! 우리가 쳤구나>.
너무나 엄청한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6·25 전쟁 당시 38선 주민에게도 식량을 좀 드리고 조용히 물어 보았다. 역시 인민군이 땅크를 몰고 남으로 쳐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또 확인하였다. 이번에는 6·25 전쟁 때 가장 비극적인 대명사인 <신천 대학살>이었다. 미군이 군민의 3분의 1을 악랄하게 학살하였다는 곳이다. 이곳 신천에서 시집 온 아낙네에게 또 식량을 좀 드리면서 자연스럽게 유도하였다. 미군이 여자 젖가슴을 도려내고 머리에 못 박아 죽이고 어린이에게 젖이 아니라 휘발유를 먹여 죽였다는 선전대로인 가고 물었다. 답은 주 전선 길이 아닌 신천이었기에 미국 놈 코빼기도 본 적 없으며 대학살은 좌우익 동족상잔이라는 것이다.
이런 세 차례의 절차를 거쳐 6·25 전범이 누구인가를 확인하게 되었다. 한편 엄청난 사기꾼이고 전범자가 김일성임에 육두문자가 저절로 날 정도였다. 이 진실을 거꾸로 알고 미국과 남한을 증오하는 북한 사람들을 깨우쳐 평화 통일에 이바지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북한에서는 말할 수가 없다.마침 한 해 전인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밀입국하였던 임수경 학생의 자유분망을 보고 남한에 가서는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이 진실을 내가 깨달은 것처럼 대북삐라로 보내고 싶었다. 실제로 현재 민간인으로서 탈북자로서 처음 대북 풍선을 개발하여 보내고 있다.
하지만 밤낮 선전 받은 헐벗고 굶주리고 거리에는 깡패가 득실대는 남조선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지 않으면 목숨을 걸고 감히 갈 수가 없었다. 북한에서 남조선 자료란 전부 욕밖에 없다. 이 욕 자료를 가지고 분석할 수밖에 없었다. 남조선 욕의 대표적 자료는 <남조선 문제>라는 잡지이다.
이 잡지에서 남조선은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가장 못 산다고 했다. 그냥 못 산다고 하면 믿어지지 않을까 봐서인지 월급을 비교하여 욕하였다. 남조선은 캐나다에 비해 11분의 1, 미국에 비해 10분의 1, 일본에 비해 8분의 1, 대만에 비해 5분에 1밖에 월급이 안된다고 했다. 비교한 나라 중에서 그 실정을 다 모르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있었다. 북한에 10만 가까운 재일동포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말에 의하면 일본은 한 달 번 돈으로 자그마한 차를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 일본에 비해 8분의 1밖에 안 준다는 남조선은 8개월만 일하면 자그마한 차를 산다는 뜻으로 된다. 이것은 엄청 놀라운 발견이고 충격이었다. 왜냐면 북한에서는 8개월이 아니라 일생을 벌어도 자전거 하나 사기도 힘들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사실이 너무도 믿어지지 않아 확인 작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구체적인 남조선 월급의 가치를 알고 북한 월급과 비교하고 싶어졌다. 역시 탐구 자료는 남조선 욕 투성이인 <남조선 문제> 잡지에서 찾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 잡지는 1982년경 잡지였는데 기록된 남조선 월급은 15만 원이었다. 이 15만원의 가치를 알려면 달러로 환산해야 했다.
남조선 욕한 자료에는 인플레에 대한 것이 있었다. 남조선 돈은 날개를 달고 가치가 떨어진다면서 믿어지지 않을까 봐서인지 구체적 숫자를 열거하였다. 1달러당 300원 하던 것이 어느 순간 500원, 600원 하다가 현재는 700원까지 치솟아 올랐다는 것이다.
이 욕 자료이지만 1달러당 700원이란 자료를 가지고 15만 원 월급에 대한 가치를 환산해 낼 수 있었다. 즉 15만 원에 700원을 나누어 보니 213달러가 넘었다. 계산한 순간 너무 놀라 자빠질 뻔했다. 왜냐면 북한의 월급이 1달러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헐벗고 굶주린 남조선 월급이 북한보다 213배라니 그것도 욕한 자료를 가지고 분석해 놓은 숫자로 말이다. 거짓 선전의 달인인 북한 노동당 선전부가 이렇게 분석해 낼 줄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 이런 지혜를 현재 대북 전단에 담아 보내고 있으니 죽을 맛일 것이다.
이런 확인 절차를 거쳐 이번에는 남조선에 직접 갔다 온 이들을 통해 확인하였다. 남조선에 갔다 온 이들은 의외로 북한에 수십만이있다. 이들은 보따리 장사나 친척 방문으로 오는 중국 조선족들이다. 이들에게 남조선을 물으니 중국보다 30년 이상 앞서있고 남조선에 시집가고 싶거나 돈벌이 막노동하러 가려 줄을 서 있다는 것이다. 직접 가본 사람의 말들이니 믿어졌다.
탈북 결심은 이제 확고히 굳어졌다. 문제는 떠난 후 대책이었다. 가족뿐만 아니라 나를 담당한 당 비서, 정치보위원 등이 목이 달아날 수 있었다. 이들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묘책을 세웠다. 실종이 최고의 대책이었다. 그냥 실종이 아니라 누구도 책임지지 않게 하는 실종이었다. 즉 A라는 연구 기관에서 적을 떼고 B라는 연구소에 가기 위해 채용증을 떼었다. 그리고 압록강에 신발 두 짝 놓고 사라진다. 그러면 문제가 났을 때 당국에서 A라는 연구기관에 추궁하면 아! 그 사람은 B 연구소에 간다고 문건을 떼 갔기에 우리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B 연구소에 추궁하면 아! 그 사람 온다고 하더니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도 나 때문에 추궁받을 이들이 없을 것이었다.
아마도 어느 곳으로 탈북한 것을 알아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왜냐면 안다고 하면 책임 추궁을 당하기 때문에 모른다는 것이 제일인 것이다. 모두 핑계 대기도 좋게 압록강에 신발 두 짝도 놓고 사라졌으니…훗날 알아본 데 의하면 압록강에 시체가 나타나면 나인가 확인차 친지를 끌고 다녔다고 한다.
이런 거의 완벽한 탈북 계획을 세우고 했기에 언론사에서는 찾기 힘든 지능적 탈북자라고 하였다.
나는 어떻게 지능적 탈북자가 되었나
- 이민복(대북풍선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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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2, 2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