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園(낙원)- 여기(此岸, 차안)가 바로 거기(彼岸, 피안)
東西洋을 막론하고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은 樂園(낙원)에 대한 꿈을 꾸어 왔던 것 같다.
서양의 대표적인 것은 그리스의 플라톤이 그의 著書 《대화편》에서 언급한 아틀란티스다. 1만 여 년 전에 있었다는 이 전설의 섬은 맛있고 아름다운 과일이 풍성하고 건물에는 金과 銀을 입힌,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작스런 재난을 만나 大洋(대양) 저 아래로 깊이 가라앉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동양의 것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晉(진)-宋(송) 대의 중국인 陶淵明(도연명)의 글, 《桃花源記(도화원기)》에 나오는 <武陵桃源(무릉도원)>을 들 수 있다. 한 어부가 배를 저어가다가 복숭아 꽃잎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 가,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모든 사람들이 편하고 즐겁게 살고 있는 별천지였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類(류)의 낙원 이야기가 세계 어느 민족 못지않게 많다. 필자가 우리 문헌들을 대강 살펴본 바에 따르면 우리의 옛 전설에는 <尙州五福洞(상주오복동)> 등 모두 19편이나 되는 낙원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高麗(고려)시대에 李仁老(이인로)가 쓴 《破閑集(파한집)》에 실려 있는 <靑鶴洞記(청학동기)>이다. 李仁老(이인로)는 옛 노인이 전하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지리산 깊은 계곡 속에 靑鶴洞(청학동)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에는 푸른 학이 날고 있고 논밭이 기름져 사람들이 아무 부족함도, 근심 걱정도 없이 살고 있었다 한다.
그러다 근세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런 낙원은 없다는 데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세계적인 소설이 1872년 영국의 새뮤얼 버틀러가 쓴 《에레혼(Erehwon)》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양치기 소년은 높은 산을 넘고 넘어 ‘에레혼’이라는 未知(미지)의 나라에 도착하는데, 그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자기가 살던 영국과 반대로 되어 있다. 그 곳에서는 病(병) 자체가 범죄라 해 처벌하고, 죄를 지은 사람은 그것이 병이라 해 정성을 다해 치료를 해준다. 사실상 ‘反樂園(반낙원)’인 셈이다. 작가는 여기서 우리가 꿈꾸는 理想(이상)의 낙원은 없다고 하고 있다. ‘Erehwon(에레혼)’이라는 이름 자체도 그 綴字(철자)를 뒤집었을 때의 ‘nowhere’, 곧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우리 쪽에도 그런 類의 소설이 있으니 1687년 安瑞羽(안서우)가 쓴 한문소설 《金剛誕游錄(금강탄유록)》이 그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金生(김생)은 神仙(신선)세계가 실제로 있다고 믿고 자신이 그 세계로 가 신선이 되려 한다. 친구들이 그를 놀려 주고자, 금강산으로 유인해 사람들을 시켜 신선을 가장하게 한 뒤 金生에게 신선을 만들어 주겠다고 속인다. 그들은 金生을, 仙界(선계)를 침범한 벌이라며 발가벗겨 매질을 하고, 신선이 되는 약이라며 소 오줌에 탄 人糞(인분)을 먹이는 등 욕을 보인다.
그들은 金生에게 ‘이제 신선이 되었다.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라’고 한다. 자신이 정말 신선이 된 줄 안 그는 산에서 내려와 신선 행세를 하고 다니다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신선 이야기 같은 것은 이 세상의 고달픔을 잠깐 동안 잊기 위한 심심파적의 閑談(한담)거리일 뿐 낙원이니 仙界니 하는 것은 없다고 하고 있다. 이 소설이 《에레혼》보다 근 200년이나 앞서 나왔다는 것은 그 방면에서의 우리 조상들의 깨달음이 얼마나 빨랐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현대에 들어서면서 어디에도 없다던 樂園이 이번에는 있다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Erehwon(에레혼)’이라는 낙원이, 그 綴字가 뒤집어져서 어디에도 없다는 의미의 ‘nowhere’가 되었다가 또 다시 그 단어가 나뉘어져 이번에는 낙원은 ‘지금 여기’라는 의미의 ‘now here’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작품이 1908년 벨기에의 마테를링크가 발표한 동화, 《파랑새》다. 이 동화의 주인공, 가난한 나무꾼의 아들 치르치르와 그의 누이 미치르는 온 세계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파랑새를 찾아다니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오는데, 집에 와 보니 자기 집에서 기르고 있는 비둘기가 바로 그 파랑새였다는 것이 주된 줄거리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우리 소설은 바로 李淸俊(이청준)의 中篇(중편) 《이어도》다. 주인공 千南石(천남석)은 제주도의 천리 남쪽 바다 밖에 파도를 뚫고 꿈처럼 하얗게 솟아 있다는 彼岸(피안)의 섬 ‘이어도’, 이승의 고된 삶이 끝나고 나면 그곳으로 가 영원한 福樂(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그 섬을 찾아 나서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런데 그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배 위에서, 뒤집어지는 밤바다를 보고 있던 중 문득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그가 苦樂(고락) 속에 살아가는 곳, 고통스럽지만 그 속에 또한 애정이 있고 기쁨이 있는 곳, 現世(현세)가 곧 ‘이어도’요, 彼岸(피안)의 낙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그 깨달음이 주는 주체할 수 없는 喜悅(희열) 속에 밤바다를 통해 영원의 세계로 들어간다.
확실히 그렇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 이상의 別有天地(별유천지)는 없다. 더욱,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원, 누가 가져다주는 낙원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우리 손으로 개선하고 개혁해야 한다. 그 과정에 싸울 일이 있으면 싸워서라도 사람이 살 만한, 인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 가야 하고 그렇게 하여 만든 세상이 곧 유토피아요, 樂園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