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 우리의 조상들은 삶이 극도로 고통스러우면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 자신을 구원해 줄 어떤 超人(초인)이 나타나기를 바랬다.
그 전형적인 것이 조선 중기 이후, 세상이 어지러워질 때 마다 민중의 입을 타고 들불처럼 번져가던 ‘鄭道令(정도령)’에 관한 것이다. 鷄龍山(계룡산) 어딘가에 雄據(웅거)하고 있는 鄭道令이 나와, 李氏王朝(이씨왕조)를 처 멸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할 것이라는 이야기다.《鄭鑑錄(정감록)》에서 나왔다는, 이 이야기는 세상이 어지러워질때면 어디선가 흘러 나와 무서운 속도로 민간에 퍼져갔다.
민중이 고대한 鄭道令과 같은 사람을 ‘眞人(진인)’이라고 부른다. 眞人이란 天命(천명)을 받고 태어난 신비의 인물로, 용맹한 군사를 거느리고 어딘가에 은거해 있다가 백성이 극도의 고통에 시달리면 홀연히 나타나 어떤 적이라도 물리치고 새 세상을 연다고 한다.
眞人 이야기는 옛날에만 떠돈 것이 아니다. 바로 62년 전 6ㆍ25사변 당시, 낙동강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공산군을 맞아 싸워 나라의 내일을 알 수 없던 그때에도 흘러나왔다. 불안하기 짝이 없던 당시 열 살 소년이던 필자는 주로 50대 初老(초로)의 여인들이 둘러앉아 쑤군쑤군 하던 鄭道令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 이후 4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眞人이 나타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나타난 적도 없었을 뿐더러 그 도깨비 같은 존재는 번번이 민중을 속이고 때로는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배신을 일삼아 왔다.
‘眞人 출현설’의 몇 가지 예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眞人 이야기가 제일 크게 떠돈 것은 17세기 말 조선 肅宗(숙종) 때였다. 당시는 백성이 지옥과 같은 고통에 시달린 시기였다. 肅宗 19년부터 25년 사이에 계속 흉년이 들어 쌀값이 네 배로 뛰고 굶어 죽는 사람의 수는 셀 수조차 없었다. 당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도적이 되어 張吉山(장길산) 같은 賊徒(적도)들이 곳곳에서 출몰했다. 거기다 전염병까지 창궐, 5~6년 사이에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46만 여명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었다.
그러자 민중들 사이에서 예의 ‘眞人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때 雲浮(운부)등 44명의 중이 조선왕조를 뒤엎을 역모를 꾀했다. 그들은 고려 말의 충신 鄭夢周(정몽주)의 환생이라는 ‘鄭眞人(정진인)’을 옹립하기로 하고 난을 일으키려 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誅殺(주살)되고 말았다. 그 ‘鄭眞人’이 겨우 아홉 살 난 소년이었다니 냉정하게 보아 그는 세상을 구할 超人이라기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코흘리개 소년에 불과했던 것 같다.
다음으로 유명한 것은 19세기 초 洪景來(홍경래)의 亂(난) 때의 소문이다. 洪景來는 西北人(서북인)들에 대한 차별에 불만을 품고 잘못된 체제를 뒤엎고자 農民軍(농민군) 1천 명을 모아 蜂起(봉기)했다. 眞人이 鐵騎(철기=철갑으로 무장하고 말을 탄 무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데 洪景來 자신이 그 선봉이라고 해 점차 勢(세)를 불려 나갔다. 그러나 끝내 그런 인물도, 군사도 오지 않았다. 그 말에 따라 나섰던 사람들은 叛軍(반군)이 관군에 패하는 바람에 모두 대역죄인의 汚名(오명)을 쓰고 생목숨을 잃고 말았다.
眞人과 관련해서는 상당히 개운하지 못한 사건도 있었다. 그것이 조선조의 악폐, 당쟁에서 政敵(정적)을 제거하는 술수로 이용된 것이다. 임진왜란 직전, 1589년에 鄭汝立(정여립)의 역모사건이 있었다. 주모자 鄭은 그 음모가 탄로나자 자살해 버렸다. 義禁府(의금부)에서는 남은 사람들을 상대로 鞠問(국문)을 해, 鄭이 吉三峰(길삼봉)을 眞人으로 삼아 거사하려 했다고 고했다. 그 吉三峰이 東人(동인) 崔永慶(최영경)이라고 했는데, 崔永慶을 비롯한 東人 쪽 인사 1천 여 명을 처형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사람들은 西人(서인)의 領袖(영수) 鄭澈(정철)이 적대관계에 있던 東人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崔永慶 등에게 역모혐의를 뒤집어 씌운 것이라고 여겼다. 당시 宣祖(선조) 임금마저 ‘악독한 鄭澈이 나의 어진 신하 崔永慶을 죽였다’고 했다니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나 한다.
위에서 보았듯, 지난 날 민중이 그렇게 출현을 갈망한 眞人이란 인물은 없었다. 한민족 최대의 國難(국난), 6ㆍ25사변 때 이 나라, 이 민족을 구한 것은 眞人도 아니었고 적과 피흘려 싸운 내 나이 보다 7~8세가 많았던 우리의 형들이었다. 유엔군이 도와주었다지만 결정적인 것은 목숨을 던져 나라를 지키려 한 그들의 결연한 의지였다. 越南戰(월남전) 당시, 프랑스와 미국, 대한민국까지 뛰어들어 함께 死鬪(사투)를 벌였으나 越南 국민들의 의지가 우리처럼 굳건하지 못해 결국 패하고 말았다.
우리는 眞人과 같은 존재가 나타나기를 기대해서도 안 되고, 누구에게 메시아가 되라고 요구해서도 안 되며, 누군가 그런 사람이 못 된다고 원망해서도 안된다. 萬疊(만첩)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구하고 지킬 사람은 결국 나 자신밖에 없다. 어떤 患難(환난)을 만나든, 우리의 살 길은 오직 자기구원의 노력과 투쟁 뿐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노병사와 각종재해에 시달리며 불의와 왜곡의 어두운 세대에서 고통과 한탄속에 사는 인생들에 대한 연민을 품고 영원을 갈망하며 영혼의 순수를 위해 구도자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참진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