尙美會 - 삼국통일의 발자취를 찾아서
[利見臺, 신문왕릉, 선덕여왕]
이재호 향토사학자: 利見臺(이견대). 이 곳은 조선시대에 亭子(정자)가 있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옛날의 그 이견대라는 것은 저 산 정상에 가면 그 흔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보면 감은사도 보이고 大王岩(대왕암)도 보입니다. 지금 우리가 온 이견대는 우리 시대의 관광을 위해서 만든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견대는 신라 시대에 주역에서 ‘飛龍在天 利見大人(비룡재천 이견대인)’을 따서 만들었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뭘 봤느냐 이거 아닙니까. 당시 죽어서 海龍(해룡)이 된 문무왕과 天神(천신)이 된 金庾信(김유신)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습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신문왕이 배를 타고 가서 대나무를 잘라 왔습니다. 그것으로 萬波息笛(만파식적)을 만듭니다.
기록을 보면 이런 게 나옵니다. 가뭄에는 만파식적을 불면 비가 오고 적병이 침입했을 때 불면 적병이 물러가는 등 국가통치의 만병통치약과 같은 거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국가를 깊이 사랑했을 때 나오는 거죠.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국가가 개인에게 최선을 다할 때 국민들도 누가 먼저 뭘 해달라 그러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한민국도 좋은 게 있고 미국도 좋은 게 있고 그렇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미국은 전쟁에 나가서 전사했다든지 하면 30년이 지나도 끝까지 추적해서 잊지 않고 유해를 찾아냅니다. 대한민국은 그게 좀 안되는 거 같더라구요. 그러다보니까 전쟁이 일어났을 때 과연 내가 정말 내 목숨을 바쳐가면서 싸울 수 있냐 그런 문제에 봉착할 때 항상 국가와 개인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게 되는데 신라에서는 상하가 一心同體(일심동체)였다는 거죠.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역사에 가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신라가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통일을 했다면 우리 땅이 더 컸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옛날에는 그 말을 그럴 듯하게 생각했다가 십몇 년 전에 만주에 가본 다음에 생각을 바꿨습니다. ‘아니다, 만약에 고구려가 통일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주에 가보니까 하루 종일 달려가도 산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고구려가 어떻게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몽고도 마찬가지인데 침입할 때, 힘이 강할 때는 그런 벌판이 좋아요. 그런데 지킬 때는 어렵습니다.
장수왕이 광개토대왕 때 평양으로 환도를 했잖아요. 저는 그걸 기가 막히게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계를 깨달았구나. 저는 그런 생각을 일찍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힘이 약해졌을 때 만주를 어떻게 지킬 겁니까. 항상 강하다면 지킬 수 있겠지만 그걸 어떻게 영원히 지킵니까.
우리나라가 900여 번 외침을 당했고 한 번도 침입하지 않았다 그러는데 저는 우리나라가 중국을 침입하지 않고 점령하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중국역사를 나름대로 공부해보니까 중국을 침략한 민족은 모두 중국에 同化(동화)됐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큰 문화가 있는 나라를 점령하면 처음에는 이길 것 같아도 결국에는 그 안에서 지내게 돼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중국을 점령했다 그러면 인구가 적은데 통치하려면 한자를 모르면 안되죠. 그러면 결국 우리 민족은 사라졌지 않겠나. 과거의 청나라도 그렇게 군림했어도 지금은 사라졌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중국을 우리가 점령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조갑제 선생님 말씀을 듣겠습니다.
조갑제: 김은정 여사님 여기로 오십시오. 오늘 무슨 의미가 있는 날인 거 같습니다. 여기가 이견대라고 아까 설명서 보셨죠. 신라에 三寶(삼보)가 있었다고 합니다. 萬波息笛(만파식적), 天賜玉帶(천사옥대), 丈六尊像(장육존상)입니다.
차 안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신라에 대해서 제일 문학적으로 많이 쓰신 분이 경주 사람인 김동리 선생, 소설 쓴 서정주 선생, 그 다음 김은정 여사의 부친 되시는 시조시인 김상옥 선생이십니다. 김상옥 선생의 시조 중에서 ‘玉笛(옥저)’라고 있습니다. 가곡으로도 만들어졌고 교과서에도 나왔습니다. 시조가 정말 좋습니다. 한 번 낭독 해주시겠습니까. 제가 마침 복사를 해왔습니다.
「지긋이 눈을 감고 입술을 축이시며
뚫린 구멍마다 님의 손이 움직일 때
그 소리 은하 흐르듯 서라벌에 퍼지다.
끝없이 맑은 소리 천년을 머금은 채
따스이 서린 입김 상기도 남았거니
차라리 외로울망정 뜻을 달리 하리오」
감사합니다. 저는 이 마지막이 제일 좋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뜻을 달리 하리오.’
아마 이 노래가 윤이상 작곡, 김상옥 작사로 됐었을 겁니다. 이 옥저는 틀림없이 이 자리에서 불었을 거 같아요. 우리 이재호 선생한테 연주를 한 번 청해보겠습니다.
이거 여러 가지로 맞아떨어지죠. 만파식적이라는 게 한 번 불면 모든 것을 다 잠재우고 나라의 어려움이 있어도 이 피리만 불면 편안해지고 평화가 찾아온다는 그런 것인데 우리가 온 이 자리에서 불어야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표현한 우리나라 문학사의 아주 클래식한 시조를 그 작가의 따님께서 읽어주시고 또 신라를 제일 사랑하시는 이재호 선생께서 연주를 해주니까 이런 행사를 할 수 있는 건 우리 尙美會밖에 없을 겁니다. 다른 모임에는 김은정 여사께서 안계시지 않습니까. 오늘 이재호 선생님을 하루 종일 따라다녀 보니까 아름다움을 보는 위치를 정말 잘 잡아주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과 여행을 하다보면 아주 근사한 곳을 잘 찾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위기 좋은 곳도 잘 찾아주고. 저도 경주에 자주 왔지만 이 자리에서 대왕암을 보는 건 처음입니다. 바닷가에서 보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거기에다 해거름에 이 모습을 보는 게 바로 행복이라고 봅니다. 또 이 선생님은 모습도 과거 신라 사람 같으세요. 실제로 신라 사람들이 저 모습 비슷했을 겁니다. 북방 계통이라 얼굴이 남성적이고 각이 좀 져 있습니다.
아까 이 선생께서 고구려가 통일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말이 정확합니다. 우리가 한반도라고 하지만 압록강, 두만강 때문에 하나의 섬과 같습니다. 외적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산으로 도망가면 됩니다.
몽고군이 일곱 번이나 쳐들어와도 끝까지 버틴 유일한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보통 몽고군이 쳐들어오면 한 달을 버틴 나라가 없습니다. 우리는 40년을 버텼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항복을 했네 해도 끝까지 버티면서 싸우니까 고려를 사위의 나라로 삼은 거 아닙니까. 고려의 왕이 쿠빌라이의 사위가 되서 큰 소리 쳤지 않습니까. 식민지이긴 했어도 말이죠.
신라 통일이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면 중국 漢族(한족)과 우리 민족 간의 영원한 우호 관계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모택동이 쳐들어 올 때까지 신라 통일 이후 1300년 동안 중국의 한족은 한 번도 한반도에 쳐들어 온 적이 없습니다. 그 뒤에 쳐들어 온 것은 금나라, 요나라 등 유목민족과 일본이 쳐들어 왔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당나라와 신라가 손을 잡고 삼국통일을 했고 신라한테 당나라가 쫓겨갔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 머리에는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저건 작은 나라지만 건드렸다가는 우리가 혼난다-거기다 고구려한테도 당해놓으니까-하지만 저 나라가 우리에게 도전할 나라도 아니다. 그러니까 저 나라는 가만히 놔두고 문화적으로 친하게 지내면 된다’
이렇게 ‘삼국통일은 중국 민족과 한민족의 영원한 평화공존을 만든 것이다’ 하는 주장을 손진태라는 사람이 하고 있는데 저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나중에 모택동이 쳐들어와 우리의 통일을 막은 것이 하나의 흠으로 지금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통일 과정에서 중국이 방해를 안하도록 만드는 게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 삼국통일을 주제로 한 여행에서 여기가 제1장이 끝나는 곳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그 원인을 하나씩 분석하고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짚어서 재구성하면 남북통일을 하는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신라가 당나라하고 동맹을 맺은 거죠. 가장 강한 나라이면서도 가장 너그러운 나라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미국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미국이라는 가장 강한 나라,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영토적 야심이 없는 나라입니다. 6·25사변 때 50만 명 보내서 그 중 5만 명이 죽고 10만 명이 다쳐도 우리에게 뭘 달라고 한 게 없습니다. 미국이 우리한테 제주도를 달라고 했습니까. 오히려 그때 우리를 도와주고 물건 만들면 사주고 했습니다. 바로 이 한미 동맹이 무너지면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삼국통일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이 反證(반증)하는 겁니다.
그 이외에 문무왕, 文과 武의 합치, 그 다음에 나라 전체가 一致團結(일치단결)했다는 소정방의 이야기처럼 官, 民, 軍의 단결,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상으로 여기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이재호 향토 사학자: 간단하게 신문왕릉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삼국 중에서 首都(수고)를 한 번도 옮기지 않은 나라가 신라입니다. 고구려는 집안(국내성)에 있다 평양으로 옮기는 등 변화가 있었습니다. 백제도 위례성, 한성에 있다가 공주, 공주에서 부여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통일 전부터 통일 후까지 끝까지 경주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천도하려고 했습니다. 그때는 달구벌(현재의 대구)로 천도를 하려다 실패했습니다. 그 당시 수도가 좀 커졌으니까 옮겨야 하는 거 아니냐 그랬었습니다.
그리고 신문왕 때 들어서 고대사가 정립됐다고 조갑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는데 國子監(국자감)이 아마 그때 들어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 들어왔다는 것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는거죠. 다만 공식적으로 가령 불교같은 경우에는 고구려 327년, 백제 384년 신라 527년 이러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공인됐다는 것이고 그 이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고 이해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신문왕릉은 분위기가 좋습니다만 지금 산업도로를 짓고 있어서 자동차 소음이 좀 심합니다. 능 자체는 참 좋습니다. 12지신상을 두른 것은 아니고 받침석 마흔네 개를 둘러 놨습니다. 현장에 가서 한 번 보시죠.
여기가 신문왕릉입니다. 왕릉으로써의 위엄은 가지고 있습니다. 받침석은 마흔네 개가 무너지지 않게 받치고 있습니다. 이 왕릉같은 경우에도 산업도로 공사현장 옆이고 기차가 옆으로 다녀 보존에 불리한 환경에 있습니다.
저기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곳이 낭산입니다. 저기에 왕궁인 반월성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성 중심입니다. 평지의 읍성은 중국에서 들어왔습니다. 고려 말에 주로 등장하는데 기득권이 생기고부터입니다. 없는 사람은 전쟁이 나면 그냥 산으로 도망가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기득권이 많은 사람은 갈등이 생기죠. 그래서 신라도 힘이 약할 때는 매월산성에 주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488년 소지왕 때 평지로 내려옵니다.
저 앞으로 보이는 곳이 四天王寺(사천왕사)입니다. 이 라인이 신라의 가장 핵심 라인입니다. 아까 잠시 말씀드렸던 四天王寺(사천왕사)같은 경우 일단 신라가 반도를 통일하고 당나라가 침략해 들어올 때 文豆婁(문두루) 비법을 저기서 외웠다고 합니다. 절을 지을 틈도 없어 벽을 쌓지도 못하고 비단으로 주변을 가리고는 밀교 비법을 외웠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다를 건너던 당나라군이 풍랑을 만나 전멸했다고 하죠. 그후 당나라에서는 사람을 보냅니다. ‘너네가 어떻게 했길래 우리가 실패했나를 보러 왔다’ 하니까 신라에서는 ‘당신네의 실패를 빈 게 아니라 당나라 황제를 위해 빌었다’며 望德寺(망덕사)로 데려 갑니다.
이 좋은 왕릉에 와서 소음 때문에 제대로 감상도 못하고 가서 안타깝습니다. 다음에 인연이 되면 선덕여왕 쪽으로 해서 다 보여드리겠습니다. 저기 보이는 조그만 산에 효공왕릉이 있고 그 뒤로 진평왕릉이 있고 보문리 사지 등 저 라인이 가장 신라적인 분위기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일단 오늘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조갑제: 불교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는 제일 처음 소수림왕 때 고구려를 통해 들어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백제로 들어왔습니다. 신라에는 상당히 늦게 들어왔습니다. 150년 뒤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공인된 시기입니다. 불교는 그 이전에 민간에서는 이미 퍼지고 있었습니다. 승인은 법흥왕 때 이차돈의 殉敎(순교)에 의한 겁니다.
백제, 고구려는 무조건 불교를 공인했는데 왜 신라에서는 저항이 있었느냐 하는 게 중요한 거 같습니다. 즉, 신라에서는 불교보다도 더 나은 무슨 신앙같은 게 있었다는 거겠죠.
외국 게 더 좋은 것이라면 받아들이겠지만 우리 것이 좋은 게 있는데 왜 받아들이느냐 했다는 거죠. 더 좋은 게 뭐냐. 儒彿仙 중에서 仙에 해당하는 것, 샤머니즘이라고도 볼 수 있고 토속신앙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걸 가지고 있다가 외래 신앙이 들어오니까 충돌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러다가 이차돈이 순교를 하게 됩니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이 적극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여서 백제, 고구려보다도 신라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불교로 발전시킵니다. 그러니까 여과 과정을 거친 거죠. 무조건 받아들인 것과 저항을 한 것은 다릅니다.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때 민주주의를 받아들였는데 해보니까 잘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박정희가 나와가지고 한국적 민주주의, 이건 한국적 현실에 맞춰야 한다고 하면서 維新도 일어나고 결국 총에 맞아 죽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에 맞게 민주주의가 바뀐 거죠.
반면 필리핀은 민주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필리핀은 민주주의를 먼저 하다보니까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고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됐습니다. 우리는 박정희가 ‘민주주의도 좋지만 우선 경제를 발전시킨 다음에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하는 식으로 해서 한국적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여튼 외래 문물을 무조건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무조건 받아들인 예가 조선이 주자학을 받아들인 겁니다. 무조건 받아들이다보니까 중국보다 더욱 敎條的(교조적)으로 변했고, 그러다 보니까 조선 왕조가 그 모양으로 망해버렸습니다. 북한은 사회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더 교조적인 주체사상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이것도 조선조의 모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 한국은 외래문물을 받아들일 때 그것을 현실에 맞게 받아들이는 여과과정이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재호 향토사학자: 자, 여담으로 선덕여왕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선덕여왕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어떻든 우리나라의 최초 여왕이라는 점에서 비중이 있습니다. 저는 안타까운 게 선덕여왕을 대한민국 사람들이 알기는 아는데 왕릉이 어디 있는지, 선덕여왕과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모릅니다.
선덕여왕에 대해서 ‘知機三事(지기삼사)’라는 설화가 있죠. 하나는 당 태종이 모란꽃을 선물하니까 ‘이 꽃은 향기가 없다’ 그럽니다. 왜인가 물었더니 그림에 벌이 없다 그럽니다.
그 다음에 靈廟寺(영묘사)에서 겨울에 개구리가 사나흘 동안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저게 뭐냐 하니까 ‘개구리가 운다는 것은 화를 낸 것이다. 병사 2000명을 데리고 빨리 서쪽에 있는 여근곡에 가서 백제군사를 무찔러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가서 보니까 정말 백제 군사 500명이 숨어있어서 무찌르고 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알게 됐냐 물어보니까 서쪽은 흰색을 의미하고 여자는 음이다. 서쪽에는 여근곡이 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남근은 여근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고 설명합니다.
마지막은 이겁니다. ‘내가 몇년 몇월 며칠 몇시에 죽으니까 도리천에서 장사지내라’ 그럽니다. 거기가 어딥니까 물으니까 낭산 정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37년 뒤엔가 사천왕사가 서게 되는 거죠. 불교에서 도리천은 수미산 정상입니다. 그 중턱에 사천왕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知機三事(지기삼사)’입니다.
저는 이런 설화보다도 선덕여왕 당시에 어떤 걸 만들었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선덕여왕 때 만든 것이 첨성대, 황룡사, 분황사, 그리고 동남산에 있는 ‘龕室(감실)부처’입니다. 그것도 선덕여왕을 모델로 만들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저는 이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서울 사람들을 보면 잘난 사람들이 좀 많지 않습니까. 당대의 교양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보면 서양의 아폴로가 어떠니 아프로디테가 어떠니 비너스가 어떠니 이야기하면서 조금 우아하게 행동하면 굉장히 교양있다고 인정해줍니다. 하지만 최소한 자기가 태어난 곳에 대한 예의로라도 우리 역사에 대해서 알아야 교양인입니다. 우리나라 신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자기도 잘 모르는 그리스 로마 신화, 감정도 없는 걸 외워서 써먹는 걸 보면 정말 무식하게 보입니다. 앞으로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무식하다고 해주십시오.
또 하나는 영화이야기입니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영화는 열네 편인가 됩니다만 선덕여왕 영화는 아직 한 편도 못봤습니다. 감독들이 역사를 몰라서 영화를 안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감독들이 전부 감각적인 것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까 역사 영화가 없습니다. 여기서 저와 인연을 맺은 학생들만이라도 교양있는 행동을 위해서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이야기하시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앞으로 신라도 모르는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무식하다고 말씀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한미 동맹이 무너지면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삼국통일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이 보여주는 겁니다.
편집자注: 우리에게 친숙한 ‘민족’개념은 삼국통일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여행은 신라통일의 역사와 그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해 마련한 행사다.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했다.
15편은 대왕암이 보이는 이견대와 신문왕릉, 선덕여왕에 대해 향토사학자 이재호 선생과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위원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했다.
15편은 대왕암이 보이는 이견대와 신문왕릉, 선덕여왕에 대해 향토사학자 이재호 선생과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위원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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