尙美會 - 삼국통일의 발자취를 찾아서
[계백 장군 묘]
조갑제: 지금 우리는 국도쪽으로 나가서 논산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논산은 참 희한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황산벌에서 백제가 신라에게 망했고 그 후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다시 후백제가 고려에게 망하게 됩니다. 당시 아들에게 쫓겨나 유폐돼 있던 견훤은 스스로 왕건을 찾아가서 항복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를 쫓아낸 아들 神劍(신검)에 대한 억하 심정으로 왕건에게 ‘후백제를 칠 때는 자기가 앞장서겠다’고 그럽니다. 아들에 대한 복수심이죠. 그렇게해서 결국 후백제는 고려에 의해 망합니다. 그때 신검이 항복한 곳이 또 황산벌입니다. 그러니까 두 번의 백제가 여기서 모두 망한 셈이죠. 거기에 관련된 절도 있습니다.
또 灌燭寺(관촉사)에는 유명한 은진 미륵불도 있습니다. 논산에는 山城도 굉장히 많고 유적, 유물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황산벌 싸움이 어디서 있었느냐 하는 것은 찍어 말할 수가 없어요. 사학계에서는 황산벌 전투가 어디냐 하는 것과 탄현이 어디냐 하는 것을 가지고 몇 가지 장소를 놓고 다투고 있습니다.
삼국통일 당시 백제의 忠臣인 成忠(성충)은 신라 군대가 쳐들어온다 하니까 ‘炭峴(탄현)에서 막아야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때 성충이 말한 탄현이 어디냐 하는 것도 세 가지 설이 있을 정도로 당시의 정확한 위치는 의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당시 역사기록이라는 것이 대충 적은 것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역사기록을 가지고 날짜까지도 정확하게 알고 싶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되는 겁니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16세기 사람인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실존인물인가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그 정도입니다. 베이컨(Francis Bacon)이 筆名으로 세익스피어의 희곡을 썼다는 주장도 있으니까요.
역사를 요즘 책이나 다큐멘터리 보듯이 정확하고 세세하게 알고 싶은데 그렇게 잘 맞춰지지 않는 게 답답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 틈새에서 역사소설이라는 게 생겼습니다. 역사소설의 그 상상력으로 역사에 대한 궁금증을 메워주기도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 문학과 역사가 서로 共存하는 모습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계백 장군이 그렇게 죽었으니까 아마 무덤을 만들어 모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옛날부터 무덤을 만들어서 그 분을 모셨지만 17세기가 돼서야 이게 계백 장군 무덤이라고 관리를 하게 됐고 그것을 1976년에 다시 복원을 해서 지금처럼 만든 겁니다. 계백 장군의 무덤에 가보면 詩文(시문) 등이 있는데 그걸 유심히 한 번 읽어보시면 이 고장에서 계백 장군을 어떤 마음으로 모시고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백 장군의 무덤 옆에는 백제군사박물관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유물이 있는 건 아니고 모조품들을 가지고 재구성을 한 겁니다. 그건 5분에서 10분 정도 둘러보시면 될 겁니다. 그걸 다 보시고 12시 이전에 모이시면 부여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은 백제의 멸망 당시였던 7월에 김유신이 갔던 길과 같습니다. 경기도 이천에서 내려와서 이 근방 어디엔가 있는 탄현이라는 고개를 지났을 거에요. 주변을 보면 아시겠지만 산이 별로 높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여(백제)가 수비하는 데 좀 문제가 있었을 겁니다. 반면 신라의 경주 주변의 산들은 꽤 높은 편이라서 자연적인 방벽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백제가 왜 탄현에서 지키지 않고 황산벌로 왔는가 하는 것은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입니다. 숫자가 적으면 고개에서 지키는 게 나은데 왜 이런 개활지에서 1대 10이라는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전을 선택을 했는지 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 될 거 같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잘 아시겠지만 왜군이 부산에 상륙해서 서울로 진격할 때 조정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申砬(신립)이라는 용맹한 장군을 보내서 막도록 했습니다. 신립 장군은 鳥嶺(조령·문경새재를 말함)에서 막았으면 좋았을 텐데 탄금대에다 背水陣(배수진)을 쳤습니다. 그러니까 강을 등지고 싸우기로 한 겁니다. 이렇게 하면 군인들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운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 전략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도망갈 곳이 없기 때문에 병사들이 사기가 충천할 때는 괜찮지만 오합지졸일 때는 지레 겁을 먹기 때문에 싸움이 잘 안됩니다.
또 그때 우리는 기병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왜병은 조총을 가지고 원거리에서 공격해 기병을 모두 격파해버렸습니다. 결국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의 부대 등이 전멸하면서 그 후에 왜군이 서울까지 진격할 때 별다른 저항을 못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배수진도 하는 사람이 해야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반대의 예로 한니발이 로마로 쳐들어갈 때 유명한 ‘한나의 전투’라는 게 있습니다. 그때 한니발이 배수진을 쳤습니다. 배수진을 치고 자신은 중앙에 있으면서 로마 군대와 싸워서 로마 군대를 완전히 전멸시킵니다. 이 배수진을 잘못 쓰면 위험해진다는 게 신립, 계백의 사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길이 1번 국도입니다. 이게 아마 목포쪽에서 출발해서 수원으로 연결되는 걸 겁니다. 이 길은 우리나라의 옛날 길을 넓힌 거죠. 남북을 가르는 몇 개의 幹線(간선) 도로가 있습니다. 이 길은 호남 지방에서 올라오는 것이고 경상도에서 올라오는 길은 죽령 넘는 것과 추풍령, 조령을 넘는 게 있습니다. 이 길로 가면 忠谷書院(충곡서원)이라고 계백 장군을 모신 서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서원이 선비를 모시는 데 비해 무관, 장수를 모신 서원은 전국적으로 여기뿐입니다. 앞에 보이는 저 호수는 塔亭(탑정)저수지인데 굉장히 큽니다.
저를 따라서 계백 장군 묘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제군사박물관을 들러서 12시10분까지 차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앞으로 30분 정도 저와 함께 행동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저 위에 전망대가 있기는 한데 올라가 봐도 사방이 모두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전망대는 생략하겠습니다.
차 중에서 말씀드렸던대로 이것이 계백 장군의 묘소인데 史蹟(사적)으로 지정돼 있지 않습니다. 대신 地自體의 기념물 74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지자체에서 확실한 자신은 없지만 믿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 만든 겁니다.
우선 이 시를 한 번 꼭 읽어보십시오. 전경웅 씨가 처음부터 크게 한 번 읽어보세요.
「계백의 달
시인 윤순정
백중보름이라 했다
그런 날이면 어쩌다 붉은 달을 볼 수 있다 했다
나는 그 달을 가슴에 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한 남자를 만나 품었던 뜨거운 가슴으로,
달이 울고 있었다.
붉게 멍든 가슴으로 울음 삼키고 있었다
아련한 등잔불 밑으로
다소곳이 아미 숙여 오는 밤이면
하, 조신하여 하얀 보름달 같았을 백제의 여인
깊고 아득한 눈빛으로 裸身 슬어 내리며
굵고 단단한 두 팔로 그녀의 부드러운 허리를 안을 때 마다
이 뜨거움은 무엇이란 말이냐
사랑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곰삭이며
젊은 계백은 되뇌었을 것이다.
칼을 받아라
나의 마지막 사랑이니라
여인은 울지 않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계백의 깊은 눈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 큰 사랑이 황홀하여 목을 길게 늘였다
늙의신 어머니와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백사장에서 평화롭게 모시조개를 건져 올리던 아이들
백강 위로 짙은 안개 서서히 풀리며 햇살 드러나고 있었다
계백은 울지 않았다
백제불멸의 제단에 바쳐질 운명
운명에 앞서 이미 스스로 내일을 정각했던 계백
그는 아들을 베인 칼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다
투구를 들어 올린 소년은 입술이 붉었다
끝내 되돌아온 화랑의 勇과 氣를 죽일 수는 없었다
아비의 가슴으로 관창의 머리를 돌려보냈다
죽이지 않는 것이 자극하지 않는 것임을 계백은 익히 알고 있었다
황산벌 불멸의 신화는 아직 끊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세상의 그 어느 사랑이
목숨을 접수함으로 사랑을 완성한 계백의 사랑보다 더 고귀한 사랑 있으랴
하늘까지 뻗힌 장도의 날 끝에서 영원히 빛부실 휴머니즘이여,
21세기의 청명한 동편의 밤하늘에
피를 삼킨 붉은 달이 울고 있었다
계백의 달이었다
을유년 새 달에 야관 쓰고 목인 새기다.」
계백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아주 짧게 기록이 돼 있어요. 김유신은 무려 3편에 걸쳐 원고지 약 200장 넘는 분량으로 기록돼 있는데 계백에 대해서는 몇 줄 밖에 없습니다. 그 시작이 이렇습니다.
「…백제 사람으로 仕路(사로)에 나가 達率(달솔)이 되었다. 당 고종이 소정방으로 神丘道行軍大摠管(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게 했다. 계백이 장군이 되어 결사대 5000명을 뽑아 막으며 말하기를 ‘한 나라의 인력으로 唐·羅의 大兵을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 죽어서 快(쾌)함만 같지 못하다’하고 그만 다 죽이고 황산벌에 나와 세 곳에 陣營을 만들었다. 신라 군사와 만나 장차 싸우게 되었는데 여러 사람들과 맹세하기를 ‘옛날 越의 임금 勾踐(구천)은 5000명으로 吳의 70만 명의 군사를 무찔렀다. 오늘은 모두 다 힘을 내 決勝(결승)하여 국운에 보답하자’ 하고 무찔러 싸우니 한 명이 천 명의 적을 당해내는 격이어서 신라병이 그만 물러갔다. 이렇게 진퇴하기를 네 번이나 하였으나 힘이 모자라 죽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단순하게 기록돼 있지 않습니까. 이 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달솔이라는 직관은 정2품 정도의 직위라고 합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쓰여진 대로 자기 처 자식을 다 죽이고, 전투에 나가서 관창을 잡았을 때 살려 보내준 것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보면 어떤 분인지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제가 1950년대 국민학교 다닐 때 남자애들끼리 별명을 하나씩 붙였습니다. 당시 제 별명이 계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김유신을 제일 싫어했습니다. 역사소설을 보면서 김유신이 백제군에게 이기는 걸 보면 제가 당하는 것처럼 화가 나고 그러더라구요. 그러다가 김유신을 높게 평가하게 된 것은 나이 40, 50되면서부터 였습니다.
계백의 姓(성)이 뭐냐 하는 질문이 많은데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계씨일 수도 있고 왕족이라면 餘(여)씨일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이 좋은 집안 출신은 아니라고 하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계백이 이름일 수도 있고 성일 수도 있습니다. 관창은 김관창이고 반굴도 김반굴입니다. 신라는 거의 다 김씨입니다. 자, 같이 둘러봅시다.
계백의 무덤이 오래 전부터 전해내려온 것은 사실인데 17세기부터 관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이것을 1676년에 정비하고 1680년에 충곡서원을 세운 겁니다. 저기 뒤에 보면 서원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당시 신라와 백제의 환경을 비교하면 인구는 백제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동원력은 신라가 강했습니다. 전쟁에서는 신라가 이겼습니다. 그렇게 전쟁은 동원력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신라는 각 행정조직이 말단까지 잘 조직돼 호출하면 금방 모일 수 있었습니다. 북한도 그렇지 않습니까. 북한도 호출하면 내일이라도 약 1000만 명을 모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는 호출하면 예비군들이 잘 안모이지 않습니까. 전쟁은 민간인들이 하는 게 아니라 군인들이 대표로 하는 거기 때문에 동원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즘은 휴대폰이 있으니까 예전과는 좀 다르겠죠.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6·25 당일날 군인들에게 외출을 허락했었죠. 6·25 전날 육군회관이 개소식을 했습니다. 육군의 장성급들이 전부 모여서 댄스파티를 하는 바람에 대부분 집에 자정이나 새벽 2시에 들어갔습니다. 채병덕 참모총장은 6·25가 터졌을 때 자고 있었습니다. 부관이 채병덕을 늦게 깨웠습니다. 6·25 때 새벽 4시부터 전면전이 벌어졌는데도 채병덕씨는 아마 8시, 9시 돼서야 일어났을 겁니다. 그때 육본 작전국장 이런 사람들을 소집하려고 해도 그 당시에는 전화가 없으니까 소집이 안되는 겁니다. 마침 그 날이 일요일이니까 어디 놀러가고 그러는 바람에 찾을 수가 없자 차에다 마이크를 달고서는 ‘○○○ 장군님 나오세요’ 이러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제 내려가 보실까요. 박물관을 보신 다음에 버스로 오시면 됩니다.
출발이 조금 늦었습니다. 앞으로 약 40분 정도 가면 부여에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대명식당이라고 구드레 나루, 백마강 나루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식당입니다. 거기서 식사를 하시고 그 다음에 조금 더 이동을 해서 해설해 주실 분을 만나서 오후에는 부소산성, 정림사지를 구경하도록 하겠습니다.
금방 박물관에서 구경하신 건 별 건 없었죠.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을 만든 겁니다. 요새 전국의 각 군이나 시마다 지방 특색을 살리기 위해서 건축물을 많이 짓고 있는데 문제는 내용물이 좀 부족하다는 겁니다. 서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시립박물관도 가보시면 건물은 좋은데 유물이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유물은 앞으로 채워나가면 되니까요.
군사박물관이라는 것은 그 내용물을 채울 수 있는 나라가 세계에서 몇 안됩니다. 그런 나라로는 유럽의 기사 문화를 가진 나라가 있고 아시아에서는 일본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뉴욕에 가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라고 아주 큰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 박물관의 1층에 가면 무기 전시실이 있는데 거의 대부분 서양의 무기, 갑옷, 칼, 총 이런 게 전시돼 있습니다. 동양을 대표해서 제대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일본입니다. 일본의 갑옷, 그 다음에 칼 이런 것은 유럽의 칼, 갑옷과 비교해서 절대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일본이 아시아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징기스칸 군대의 유물은 다 어디갔느냐 궁금해 하실 건데 그걸 보려면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터키 군사박물관에 가셔야 합니다. 터키에는 육군 박물관과 해군 박물관이 있습니다. 거기 육군 박물관에 가면-터키 군대가 원래 기마 민족 출신이기 때문에-우리와 비슷한 무장이 많습니다. 투구 이런 것이 그렇구요, 특히 활 같은 것이 비슷합니다. 저는 일본과 터키 양쪽 군사 박물관이 아시아의 대표적 군사 박물관이라고 생각됩니다.
혹시 말에 갑옷을 씌워놓은 것을 보셨습니까. 쇠조각을 붙여서 갑옷을 씌워놨는데 이게 유럽에 가면 말에 씌우는 갑옷이 다릅니다. 완전히 철판을 씌운 것을 구경하실 수 있습니다. 가야 지방에서 출토된 것을 보시면 저런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벽화에도 보면 말에다 저런 갑옷을 씌워놓은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 때 저렇게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삼국 시대 때 발굴된 천마총이나 이런 무덤에서는 제법 잘생긴 칼들이 많이 나옵니다. 環頭大刀(환두대도)라고 해서 칼손잡이가 이렇게 동그랗게 된 칼이 많이 나오는데 오히려 고려, 조선 시대로 내려가면 칼이 발전하기는커녕 오히려 짧아지고 모양도 이상하게 변합니다. 文弱해지니까 무기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 그렇게 됩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기마민족은 뭘 잘하는 사람들이냐. 칼이나 창을 잘 쓰는 게 아니라 활을 잘 쏩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 기마민족 특유의 전법입니다. 그래서 활은 기마 민족 출신이 제일 잘 쏩니다. 우리가 洋弓(양궁)에서 계속 우승하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터키 사람들도 양궁을 잘 하죠. 그러니까 뭔가가 우리 DNA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고주몽, 이성계 등은 전부 활을 잘 쏘아서 유명해진 사람들이죠. 東夷族(동이족) 할 때도 큰 大자와 활 弓자를 붙여놓은 겁니다. 그래서 큰 활을 쓰는 사람이 동이족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나라 활은 아주 짧고 유럽에서 사용한 거나 영국의 로빈훗이 쓴 활은 롱보우(Longbow)라고 해서 큰 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짧은 우리나라 활이 서양의 큰 활에 비해 멀리 나가고 관통력이 좋았습니다.
기마민족이나 징기스칸이 세계를 정복한 것은 말과 활의 힘이었다고 보면 정확합니다. 그 사람들은 싸움을 하면 멀리서 활을 먼저 쏘아 적진을 혼란스럽게 만든 다음 칼로써 승부를 결정했습니다.
유럽 기사들은 완전무장을 하면 마치 로보캅처럼 쇳덩어리로 무장을 했습니다. 그렇게 완전무장하면 안전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무장한 기사가 말까지 무장시키면 갑옷 무게만해도 150㎏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니까 만약 옆으로 넘어지면 혼자서는 일어나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반면 징기스칸의 군대는 정면만 가릴 정도의 가죽으로 만든 가벼운 갑옷을 입고 말도 작은 조랑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징기스칸 군대가 세계를 정복할 때 사용했던 말은 요새의 경주마 같은 말이 아니라 제주도에서 보는 조랑말과 비슷한 종류였습니다. 그 말이 빠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구력이 굉장히 뛰어나고 성격이 순하며 먹이를 스스로 찾아먹습니다. 그러니까 사료를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죠.
이런 말을 몰고 유럽에 나타나니까 13세기 당시 징기스칸 군대를 처음 본 서양의 기사들은 막 비웃었다는 것 아닙니까. 저 거지 군대와 우리가 어떻게 싸우냐면서 말이죠. 그런데 막상 싸워보니까 전혀 다른 겁니다. 징기스칸 쪽에서 활을 집중적으로 쏘는 데 화살이 100미터, 200미터를 날아와서 내려꽂히면서 웬만한 갑옷도 뚫어버리더라는 겁니다. 특히 말을 맞추면 말이 날뛰면서 대혼란에 빠지는 등 결국 기사들이 거의 다 졌습니다. 이런 전투를 통해 활이 기마 민족의 표상이 됐다 그런 말씀입니다.
일본의 박물관에 가면 칼이 국보로 지정된 것도 많습니다. 일본칼은 담금질도 여러 번하고 쇠를 여러 겹으로 접었다가 두드려서 펴기를 여러 번 합니다. 이렇게 여러 번 단련을 하면 쇠가 강해져서 칼싸움을 할 때 잘 부러지지 않습니다. 그 일본칼을 제일 많이 만든 곳이 尙美會에서도 여행을 했던 시마네(島根), 돗토리(鳥取) 부근인데요 거기의 박물관을 보면 화관 박물관이라고 아주 유명한 박물관이 있고 일본도를 연구하는 연구소도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러일 전쟁 때까지만 해도 영국에서 군함을 수입해서 러시아 함대와 싸웠습니다만 그 이후에는 스스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1920년대에 들어가면 세계 3대 해군국이 됩니다. 3대 해군국이란 미국, 영국, 일본입니다. 이렇게 된 비결 중 하나가 조선업을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조선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도 쇠를 만드는 기술이 옛날부터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겁니다. 즉, 일본도 등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조선업은 한국이 단연 세계 1등 아닙니까. 한국 조선업이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는데 그것도 일본을 설명하는 식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쇠 다루는 기술을 삼국 시대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중간에 잊어버렸다가 조선업을 시작하면서 다시 찾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造船(조선)이라는 게 건설업의 연장선장이라고 하더군요. 집 짓는 거나 배 짓는 게 비슷하다고 합니다. 하나는 위로 올라가고 하나는 옆으로 눕힌 것밖에 차이가 없다는 말도 합니다. 그래서 정주영씨가 현대건설을 경영하던 그 밀어붙이기식으로 조선업을 시작하니까 딱 체질에 맞더랍니다. 그래서 지금은 현대 중공업이라는 어마어마한 회사가 하나 생긴 겁니다.
현대 중공업하면 여러분들 1987년부터 1990년,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强性(강성) 노조의 중심이었지 않습니까. 현대 중공업 노조가 골리앗 크레인이나 기중기를 몰고 나오기도 하고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서 점거하기도 하는, 그런 노사분규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요새 노조 중에서 제일 얌전한 것이 현대 중공업 노조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현대 중공업에 가서 물어보니까 현대 중공업의 이직률이 연간 1~2%밖에 안된답니다. 평균 임금이 아마 6000만 원 정도 될 거에요. 그리고 거기 주소가 울산광역시 동구인데 울산 동구 문화회관을 한 번 갔더니 거기 있는 연주장이 예술의 전당 연주장하고 똑같습니다. 그것을 현대 중공업에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울산 동구 사람들은 현대 중공업 덕분에 굉장한 문화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기업이 행정 기관 역할까지 맡아서 하고 있는 정도였습니다. 복지 기관인지 기업인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렇게 이직률도 적고 말이죠.
기술도 세계 최고라고 합니다. 현대 중공업에서 자랑하기를 ‘세계의 바다를 떠다니는 배 열 척 중 하나는 저희가 만든 겁니다’ 라고 하더라구요. 거기 공장이 약 300만 평 정도의 면적인데 마치 현대판 피라미드를 보는 거 같아요. 어마어마한 공장과 배가 전부 쇳덩어리로 이뤄진 것 아닙니까. 그런 것들이 집중돼 있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우리가 유럽을 여행하면 노틀담 사원이나 성 베드로 사원 등을 보면서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는데 지금은 오히려 이탈리아 사람이 우리나라에 오면 다른 것 보면 어떨지 몰라도 현대 중공업을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게 우리의 관광 자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걸 보면 기죽을 필요가 없겠다 생각됩니다. 포항 제철소나 광양 제철소를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숨이 막힐 정도일 겁니다. 이게 우리의 살아있는 관광자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서울의 테헤란로도 외국 사람들이 오면 제일 감탄하는 것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테헤란로의 역동성이라든지 하는 것을 보면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아침에 마이크를 잡았을 때는 우리나라의 어려운 모습을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희망적인 것을 이야기하게 되네요. 한국이 이렇습니다. 한쪽을 보면 희망적이고 다른 쪽을 보면 절망적입니다. 아침에 신문보면 절망적이 됐다가 저녁에 누구를 만나고서는 희망적이 되는, 하루에 절망과 희망을 냉·온탕 오가듯이 몇 번을 왔다갔다하는 게 한국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종합적으로 봐야 합니다. 종합적으로 봐야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제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속단은 금물입니다.
요즘은 우리나라가 망하기야 하겠냐, 우리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 땀, 눈물을 흘렸는데 망하기야 하겠냐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걸 듣습니다.
망해서는 안되죠. 우리가 이제 선진국이 돼야 하는데 어쩌다가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목표가 너무 하향조정된 것 같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미래가 결정되지 않은 나라인 거 같습니다. 간혹 미래가 결정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제는 통일도 우리가 주도적으로 한다는 식으로 낙관만 할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세 가지가 있는 거 같습니다. 하나는 자유통일을 하게 되면 선진국이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금처럼 분단고착 상태가 오래가면 서로 內紛(내분)이 일어나거나 이런 대통령들이 계속 나오면서 결국은 후퇴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적화통일이 되는, 이런 세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통일을 통해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들이 모두 애국심을 가져야 될 것이고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변하면 분단고착이 계속 될 것이고 사람들이 좌익들의 선동에 넘어가버리면 적화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국민들의 책임입니다.
하여튼 세 갈래의 길에서 이리 가느냐 저리 가느냐 하는 선택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합니다. 미국이 우리 대신 결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야 되는 그런 상황에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백제군이 왜 탄현을 지키지 않고 황산벌에서 싸웠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계백과 신립은 배수진의 실패사례죠.
편집자注: 우리에게 친숙한 ‘민족’개념은 삼국통일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여행은 신라통일의 역사와 그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해 마련한 행사다.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했다.
18편은 11월 13일 경주를 떠나 부여로 이동하는 도중 차 안에서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위원으로부터 계백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다.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했다.
18편은 11월 13일 경주를 떠나 부여로 이동하는 도중 차 안에서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위원으로부터 계백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다.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