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해외 여행을 처음 한 것은 1975년 3월이었다. 부산의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 시절이었다. 그 전해 한국 기자협회에서 주는 한국 기자상 취재보도 부문의 수상자가 된 나는 해외 여행이란 副賞을 받아 일본을 22일간 여행할 수 있었다. 그때 1회용 여권을 내는 데 한 달 걸렸다. 특히 신원조회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김포에서 혼자서 점보를 타고 동해를 건너 도쿄의 하네다 공항에 내렸다. 예약해두었던 메구로에 있는 한 오래 된 호텔에 들었다. 밤에 시내로 나와 라면 집을 찾았다. 주방에서 일하는 두 아줌마끼리의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한 아줌마가 '어제 모파상이 쓴 '여자의 일생'을 읽었다. 너무 재미 있더라. 다 읽은 뒤에 빌려주겠다'고 하니 다른 아줌마도 최근의 독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날 일본에 오기 전부터 별렀던 일을 했다. 바나나와 귤을 한 아름 사 가지고 호텔 방에 가서 실컷 먹고 다음날 아침까지 때운 것이다. 도쿄에서 시작하여 가마쿠라, 아타미, 오사카, 교토, 나라, 히로시마, 후쿠오카, 벳부, 미야자키를 돌고 시모노세키에서 釜關페리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고등학교 때 獨學으로 배웠고 공군에서 근무하면서 실습했던 일본어가 많이 도움이 되어 별 불편 없이 여행했다. 모든 점에서 한국보다 두 단계 정도 앞선 일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편하게 느껴졌다. 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보는 유일한 나라의 국민임을 속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 여행중 나는 아타미에서 여관을 잊어버렸다. 밤에 아타미 역 부근에 있는 여관에 체크 인을 했다가 나와서 밤 거리를 몇 시간 돌아다닌 후 돌아가려는데 아뿔싸, 여관 이름을 잊어먹은 것을 깨달았다.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물어보니 아타미엔 여관이 400개나 된다는 것이었다. 친절한 택시 기사의 도움으로 한 시간을 헤맨 끝에 겨우 찾았다. 정말 진땀이 났다.
이 무렵 해외 여행을 하고 돌아가는 한국인들은 대체로 골치가 아팠다. 선배와 동료,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는 것이 그러했고, 세관에서 까다로운 짐 검사를 받을 생각을 하면 귀국일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1970년대 초까지 신문사에선 해외 취재를 떠나는 기자를 자랑하듯이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고, 주요 인사의 출국이 기사거리가 되었다. 나도 일본을 겉만 훑어보고 돌아와선 신문에다가 10회에 걸쳐 일본 기행문을 썼다. 간도 컸던 시절이다.
1977년 포항석유는 경제성이 없다는 글을 썼다가 정보부의 압력으로 신문사에서 쫓겨난 나는 세계 최대의 신발 공장인 국제상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해 여름 두번째로 해외여행에 나섰다. 일본에서 회사 일을 끝내고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날았다. 열흘간 로스엔젤레스, 워싱턴, 뉴욕, 샌프란시스코를 돌아다녔다. 한국과는 악연이 깊은 카터 대통령 시절이었다. 미국의 도심은 흑인들 차지가 되고 밤길을 걷는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뉴욕 타임 스퀘어에 있는 카터 호텔에 들었다가 밤 거리를 돌아다닌 것까지는 좋았는데 객실로 돌아오니 도둑이 들어 가방안에 넣어두었던 녹음기만 빼내가버렸다. 녹음기에 취재메모를 구술해두었는데 말이다. 파출소에 신고했더니 경찰관을 보내겠다고만 하고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야구광인 나는 미국에 갈 때마다 메이저 리그 구경을 간다. 로스엔젤레스의 다저스 스태디움의 최상단에 앉았다. 내 옆은 흑인 장님이었다. 가만 보니 큰 라디오를 가슴에 끌어안고 중계를 들으면서 현장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1977년의 미국은 히피로 상징되는 反戰문화가 끝물이었다. 여행중 '1965년 졸업생'이란 책을 사 읽었는데, 촉망 받던 한 고등학교의 한 반원들이 그 뒤 10년간 어떤 궤적의 삶을 살았는지를 추적한 이야기였다. 이 젊은이들은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질풍노도와 같은 10년을 헤쳐가면서 상처받고 성숙했다. 그 20년 뒤 한국의 대학생들이 비슷한 경험을 할 줄은 미처 몰랐다.
1977년 나는 신문사에 복직했다가 1980년 5월 광주사태를 취재하고 와서 다시 해직되어 1년간 잡지 기고로 먹고 살아야 했다. 1981년부터는 서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는 轉禍爲福(전화위복)이었다. 1981년에 창간된 월간 마당에서 나는 심층취재를 맡았다. 두 달 간 오일로드, 즉 중동-울산간 석유수송로 취재를 한 적도 있다.
먼저 홍콩-싱가포르-말레이시아-타일랜드를 거쳐 쿠웨이트에 도착했다. 여기서 아세아 상선(현대상선의 전신)의 20만t 탱커 동해 2호에 올랐다. 동해 2호는 기름을 가득 싣고는, 걸프-호르무즈 해협-인도양-벵골만-말래카 해협-동지나해를 지나 울산으로 돌아왔다. 항해에 한 달 걸렸다. 동해2호는 동지나해에서 초속 40m의 강풍을 만났으나 그 속을 뚫고 지나갔다. 높이 6~10m의 파도를 헤쳐가는데도 끄떡 없었다. 기름을 실어 船體의 5분의 4는 물속으로 들어간 상태의 동해 2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갑판위로는 파도가 쓸고 다녔다. 뱃전을 친 파도가 거대한 물덩어리가 되더 한 100m 상공으로 뛰어오르더니 반대 편으로 떨어졌다. 한밤중에 선장이 船橋(조타실)로 올라오더니 '이런 구경은 돈 주고도 못한다'면서 갑판위에 있는 전등불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장관이었다.
나는 1983년 10월 조선일보 월간조선부로 옮겼다. 당시의 全斗煥 정권下 정보부는 反정부 해직기자들의 복직을 금하고 있었지만 잡지 부서에는 예외를 인정했다. 좋은 간판 아래서 넓은 지면 위에서 마음껏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1984년 1월 나는 6년만에 처음으로 일본에 취재차 건너갔다. 필로폰 문제를 취재하기 위함이었다. 후코오카 공항에서 대한항공기를 타고 김포로 돌아왔는데 폭설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가, 한 30분간 구름속에서 불안한 선회비행을 하는 동안 나는 마감시간이 지난 기사를 쓰느라고 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착륙바퀴가 활주로에 닿는가싶더니 다시 이륙하여 김해 공항으로 갔다. 김해 공항 상공에서도 몇 바퀴 돌더니 착륙했다. 비행기는 한 시간쯤 기다렸다가 다시 김포로 돌아왔다.
그 석달 뒤 나는 대한항공의 안전문제를 취재하다가 바로 내가 탔던 여객기의 그때 機長을 만났다. 대기 선회를 너무 오래 하는 바람에 연료가 거의 바닥 나 혼이 났고, 회사에서 징계를 당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생각났다.
그해 7월엔 조선총독부 시절의 고위 관료들이 해방 뒤 귀국하여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다시 일본에 갔다. 이때 흥미로운 두 사람을 만났다. 伊藤博文의 손자와 李容九의 아들. 伊藤博文의 손자는 할아버지가 한국을 강제합병하는 데는 반대했었다는 점을 강조했고, 매국노로 알려진 李容九의 아들은 病床에서 내리 사흘간 나에게 한 맺힌 회고담을 털어놓았다.
1985년 나는 대한항공의 협조를 받아 점보의 조종실에서 지구를 일주했다. 태평양을 밤에 건너면서 조종실 창문을 통해서 별들을 바라보니 꼭 우주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계속).
人生과 여행(1)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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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12-03, 2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