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에 들어오면 나를 포함한 한국인의 외국 여행 횟수가 급격히 늘어난다. 중국과 소련, 東歐가 열리고, 아시아나 항공이 생겼다. 일본의 지방 도시와 한국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일본 동북지방의 센다이, 북해도의 삿포로도 가까워졌다.
나는 1994년엔 싱가포르, 프랑스, 스위스, 독일, 리비아, 베니스, 로마를 다녀왔다. 프랑스 샤모니를 찾은 날은 눈이 펑펑 쏟아졌다. 몽블랑에 오르기는커녕 산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9년 뒤에 다시 샤모니를 찾았을 때는 날씨가 좋아 몽블랑 3800m까지 케이블 카로 오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이 궁전으로 사용했던 파리 근교의 퐁텡블루 궁전에 있는 그의 침대는 정말 작았다. 그의 키는 167cm 정도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나폴레옹 숭배자였다. 朴正熙 전기를 쓰다가 보니 이 가난한 소년이 나폴레옹 傳記를 읽으면서 군인의 꿈을 키운 것이 그뿐만 아니라 민족의 운명을 바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많다.
두 사람 다 식민지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 다 포병장교 출신이었다. 두 사람 다 이혼경력이 있다. 두 사람 다 쿠데타를 두 번 했다. 두 사람 다 죽은 지 한참 뒤에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두 사람 다 프랑스와 한국의 제도적, 물질적 토대를 놓았다. 두 사람 다 “영웅에게는 하인이 없다”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나폴레옹과 박정희를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은 그를 가까이서 모시면서 좋은 점, 나쁜 점을 다 보았던 이들이었다. 두 사람 다 자신들의 後光을 업고 정치적으로 출세한 親族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조카는 나폴레옹 3세가 되었고, 朴槿惠씨는 아버지의 蔭德(음덕)으로 유력한 정치인이 되었다.
南독일의 바덴바덴에 자주 가게 된 것은 조선일보 파리특파원으로 이름을 날린 愼鏞碩씨(2014 인천 아시안 게임 유치위원장) 덕분이었다. 1994년 유럽 여행 때부터 愼 위원장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유럽의 사정에 정통한 그는 여행을 무척 좋아했다. 독서와 見聞이 많은 분이라 여행중의 대화가 즐거웠다. 愼 위원장은 바덴바덴을 특히 좋아했다.
그는 1981년 9월 IOC 총회가 바덴바덴에서 열렸을 때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는 득표 활동에 참여한 적도 있다. 바덴바덴은 독일의 黑林 지대 속에 있는 휴양지이고 로마시절부터 온천이 발견되었다. 더구나 이곳 온천은 크고 남녀 혼탕이다.
바덴바덴을 벗어나 한 30분쯤 산속으로 근사한 드라이브를 하면 옛성을 호텔로 개조한 뷜러회어 슐로스 호텔이 나온다. 그곳 커피 숍에 혼자 앉아 아래로 내려뻗은 樹林을 내려다보며, 노인이 치는 피아노를 들으면서 언젠가는 꼭 여기서 하룻밤을 자야겠다고 다짐했으나 아직 꿈을 이루지 못했다.
1994년 5월엔 리비아, 베니스, 로마를 취재 여행했다. 동아건설이 맡아 하던 리비아 대수로 공사장을 둘러보고는 “왜 한국인은 조국을 떠나야 위대해지는가”라는 話頭를 품게 되었다. 19세기말 한국을 여행하고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란 名著를 남긴 영국의 이사벨라 비숍 여사가 가졌던 생각이기도 했다. 비숍 여사는 시들어가는 조선의 조선사람들만 만나보다가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 근방에 이민 가서 집단거주지를 만들어 살고 있던 조선인들을 만나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깨끗했고 근면했으며 自治를 잘 하고 있었다. 비숍은 예언했다. 원래 좋은 자질을 가진 한국인들이 조선조적인 정치제도를 벗어나기만 하면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여 크게 될 것이라고. 1945년 이후 남한이 섬이 되면서 해외진출은 생존의 수단이 되었다. 해외여행, 해외진출로 대표되는 한국인의 진취성은 조선조적인 명분론과 위선으로부터의 탈출이었던 것이다.
1996년 여름에 나는 대우 金宇中 회장의 도움으로 몽골벨트와 동구권을 두 달 동안 취재 여행했다. 대우가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던 곳이었다. 소년기 때 나의 영웅은 칭기즈칸이었다. 소년 테무진이 아버지를 일찍 잃고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고생하는 이야기를 특히 감명 깊게 읽었다. 유럽의 기사단을 짓밟던 몽골 기마군단의 말발굽소리는 1950년대 한국의 가난했지만 야망이 컸던 소년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었다.
중국 신강성의 우루무치에서 시작한 몽골벨트 여행은 西安-몽골-카자크스탄-우즈베키스탄-파키스탄-인도-터키-불가리아-헝가리-폴란드-체코-루마니아-러시아-월남으로 이어졌다. 몽골-투르크族은 16세기에 소총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는 말과 활로써 세계사의 주먹 역할을 했다. 제국을 부수고 만들고 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했던 이 기마민족의 활동무대가 그대로 한국 기업의 무대로 변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인종적, 역사적, 정신적 인연도 유라시아 草原의 바람과 하늘에 닿아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은 간단했다. 몽골-투르크族이 세운 나라에 가면 뭔가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이었다. 엉덩이에 몽골반점이 찍혔던 이들끼리는 말은 통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뜻이 통했다.
몽골인들의 공통점은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자연속에서 편안해하고, 그러다가보니까 인공적인 것에 대해선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며, 속박을 싫어하고 자존심이 대단하다. 머리가 좋고 강건하며 무엇보다도 간편한 삶을 추구한다. 이들이 중국, 이란, 로마 문명과 접속해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간 근원에 있는 것은 자존심이다. 삼국통일이 동북아에서 가장 非중국적이고, 북방초원적이었던 신라에 의해서 이뤄졌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갈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강성 우루무치 박물관에 가니 唐 나라 때 아시아 지도가 있었다. 당과 陸續(육속)된 곳은 전부가 청색이었는데 한반도만 예외적으로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그것이 자랑스런 신라였다.
나는 1994년에 비로소 三國史記를 읽었다. 列傳의 주인공 金庾信을 알고선 “아, 이 분이 있었기 때문에 신라가 對唐決戰을 통해서 독립을 지켜내었고 내가 지금 중국말을 쓰지 않고 한국인으로 존재하는구나”하는 감동이 왔다. 외국을 여행하면서도 新羅를 항상 머리 속에 넣고 다니기 시작했다.
몽골벨트를 가다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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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12-04, 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