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紀行

베란다에 나가 앉아 보스포루스 해협의 야경을 감상하면서 먹은 터키 음식은, 이곳 사람들이 중국, 프랑스 다음의 세계 3大 요리로 터키요리를 치는 까닭을 짐작케 하였다.
오전 9시30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공항을 이륙한 터키 항공 소속 보잉 737-400 여객기는 機首(기수)를 곧 正西쪽으로 돌렸다. 아랄海 남쪽-카스피海 상공을 가로질러 이륙 3시간만에 터키 공화국 영공으로 진입했다. 노아의 방주가 어딘가에 박혀 있다는 눈 덮인 아라라트山(해발 5165m)을 오른쪽으로 내려다 보면서 날아도 날아도 설산(雪山)의 연속이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陸橋, 아나톨리아 반도 전체를 점유한 터키의 면적은 75만5천㎢로서 한반도의 3.5배쯤 된다(인구 약8000만).
5시간만에 여객기는 유럽쪽 이스탄불市의 상공으로 들어갔다. 황토색 지붕을 가진 집들이 나타났다. 이스탄불 공항에 착륙,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동양인 소녀가 기자에게 다가오더니 몇 마디 하다가 얼굴을 붉히며 달아났다. 그 소녀를 동행한 서양인에게 『웬일이냐』물었더니 『알마타에서 오는 카자흐人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자의 얼굴이, 투르크族에 속하는 카자흐人과 비슷했다는 얘기다. 공항을 나와 지중해쪽 해변도로를 달려 바로 토카프 궁전 박물관에 도착했다.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 쪽으로 돌출한 반도형 언덕에 세워진 오스만 투르크 帝國 시대의 궁전이다. 궁전을 에워싼 성벽은 5㎞, 면적은 약 30萬坪,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꾼 마호멧 2세가 지은 것으로 그 뒤 20여 명의 황제가 이곳에서 살았다.

몽골 초원에서 본 천막(겔)을 그대로 본뜬 지붕이 많아 궁전이 아니라 유목 기마민족의 야영지 같은 느낌도 주었다. 실제로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황제)들은 19세기까지도 이 궁전 뜰에 천막을 쳐놓고 깔개를 깐 뒤 푹신한 방석 위에 앉아 있곤 했다. 이 궁전에서도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화살통과 활집과 골무가 전시되어 있었다. 헝가리에서 한국까지 몽골 벨트 나라의 상징물로 빠지지 않는 것이 활이다. 이 토카프 궁전 박물관은 황제와 그 가족들이 쓰던 도자기와 장신구, 옷, 의자, 무기, 보석류로 채워져 있었다. 영롱한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황금으로 호사의 극치를 보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사파이어도 진품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이 토카프 궁전만큼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목격한 건물도 인류역사상 흔치 않을 것이다. 투르크-몽골族의 권력觀은 특이했다. 권력 승계의 규칙이 존재하지 않았다. 누가 王이 되느냐 하는 것은 神의 손에 달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규칙을 만드는 것은 그런 신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황제가 죽은 뒤에는 草原의 법칙에 따라 황족(皇族) 안에서 실력 대결이 벌어지고 승자(勝者)가 황제位에 오르는 날 패자(敗者)들은 저승으로 가야 했다. 무라드 3세가 1574년에 등극한 날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다섯 형제들을 교수형시킨 것이었다.
마호멧 3세는 1595년에 등극한 날 19명의 형제들을 처형했다. 그는 여러 아들 중 후계자로 지목한 아들만 남겨두고는 남은 아들들을 토카프 궁전 내의 카페(kafes : 새장이란 뜻)에 가두어 그곳에서 살게 했다. 여자와 마약은 허용되었으나 출산은 허용되지 않았다. 매일 처형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들은 정신병자가 되거나 폐인이 돼갔다.
1687년 슐레이만 2세는 왕자 시절이 이 「새장」에 갇혀 있다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를 모시러 온 사람을 사형집행인으로 착각한 그는 『제발 신에게 기도를 드린 뒤에 죽을 수 있도록 해다오. 나는 여기서 40년간 살면서 매일 조금씩 조금씩 죽어갔으니 차라리 단번에 죽는 게 편하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신라 진흥왕 시절에 해당하는 東로마제국 때 지어진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 세력에 의하여 이스탄불이 점령된 뒤엔 모스크로 쓰였다. 15세기까지는 세계 최대의 건물이었고, 지금도 성당으로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크다. 높이 66m, 건물 내부 면적은 7000㎡. 1층 바닥엔 「세계의 배꼽」이란 원형 표시가 있다. 세계의 중심, 비잔틴의 중심, 콘스탄티노플의 중심이란 뜻이다. 그 바로 옆엔 이슬람 황제의 금색 예배실이 누각처럼 세워져 있었다. 이교(異敎)의 본부 속에다가 만든 회교의 예배실이다.
배를 타고 해협을 건너 이스탄불의 아시아쪽으로 건넜다. 오후 5시, 마이크를 통해 코란을 낭송하는 소리가 도시 전체, 그리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뒤덮었다. 터키 전체에 7만개의 모스크가 있고 이스탄불에만 큰 모스크가 800여 개가 있다. 바다에 나서서 도시쪽으로 눈을 돌리니 모스크의 미나렛이 전봇대처럼 거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터키는 國父 케말 파샤에 의하여 이슬람과 정치가 분리되었다. 이곳의 이슬람은 유연하고 개방적이다.

아시아쪽 이스탄불에 도착하여 배를 내리는데 일곱 살쯤 돼 보이는 소년이 체중기를 길바닥에 놓고 귀엽게 앉아 있었다. 한 뚱뚱한 할머니가 올라서서 몸무게를 재 보더니 돈을 낸다.

이날 저녁에는 大宇자동차 현지 판매회사 회장인 오마르 오자르군氏의 집으로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그의 2층 저택은 기막힌 경관을 보여주었다. 보스포루스 해협 가운데서도 가장 좁은(폭 670m) 물목을 내려다보는 비탈에 자리잡은 언덕 응접실. 화물선이 쉴 새 없이 흑해와 지중해 방향으로 오가고 석양에 물든 하늘과 바다, 그리고 두 대륙에 걸친 이스탄불의 불빛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두 대륙을 잇는 술탄 마호멧 2세 현수교는 海面에서 높이가 60m. 석양을 등진 다리 위의 차량들은 마치 하늘에 떠서 달리는 것 같았다.

베란다에 나가 앉아 보스포루스 해협의 야경을 감상하면서 먹은 터키 음식은, 이곳 사람들이 중국, 프랑스 다음의 세계 3大 요리로 터키요리를 치는 까닭을 짐작케 하였다. 오자르군氏는 터키의 국민가요들을 틀어주었다. 한국의 창이나 판소리를 연상시키는 노래도 있었다. 폐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歌唱의 방식과 감정표현도 비슷했다. 그는 「사랑과 용서」라는 노래를 틀더니 『여자와 남자의 관계를 한 차원 승화시키는 힘이 있는 노래다』라면서 『이런 노래를 듣는 데는 아시아 쪽인 여기가 제격이다』라고 말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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