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윤기복 서울방문의 교훈

"盧泰愚(노태우) 대통령더러 김일성 80회 생일잔치에 참가하라는 엉뚱한 제안이 방문 목적"

북한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서울에서 보내드리는 이동복의 통일대화 시간입니다. 지난 주에는 엉뚱한 북한 손님이 예고도 없이 서울을 다녀 갔습니다. 북한의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의 김양건 부장이 그 손님이었습니다. 그는 11월29일 육로로 판문점을 경유하여 서울로 왔다가 12월1일 역시 육로로 평양으로 돌아갔습니다. 남한 정부에서는 이번 김양건 부장의 남한 방문이 남한의 이재정 통일부장관과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볼 때 김양건 부장의 이번 남한 나들이가 갖는 의미가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지금 남한에서는 대통령선거가 실시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번 대통령선거 투표일은 12월19일이지요. 이날 남한의 3800만명의 유권자들은 일제히 투표소로 가서 이 투표용지에 기재되어 있는 12명의 후보 가운데서 각자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기표를 해서 투표함에 집어넣게 됩니다. 이 가운데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가 다음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내년 2월25일부터 5년간 대한민국을 영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한은 지금 이 대통령선거로 경황이 없을 지경입니다. 이러한 때에 <조선노동당>에서 대남사업을 총지휘하는 김양건 부장이 남한을 방문한 것입니다. 남한에서는 그의 방문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남한에 머무는 동안 김 부장 일행은 남한의 이재정 통일부장관 및 김만복 국가정보원장과 회담도 하고 노무현 대통령을 예방하기도 했으며 산업시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인천에 건설 중인 송도 신도시와 함께 남한 남부의 거제도에 있는 대우조선소, 부산세관, 울산의 현대자동차공장 등 주요 산업시설을 시찰했습니다. 남한 정부 당국은 김 부장의 이번 남한 방문 목적을 매우 사무적인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재정 통일부장관의 말에 의하면 '김 부장의 이번 방문은 지난 10월 초 평양에서 있었던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하여 발표했던 <남북관계 발전•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의 이행 문제를 논의하고 경제 시설을 시찰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이 같은 이 장관의 말을 곧이 듣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남한 사람들은 시기적으로 볼 때 예정에 없던 김양건 부장 일행의 남한 방문이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남한에서의 대통령선거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남한의 언론들은 이번 김양건 부장의 서울 방문을 2000년 당의 대남담당 비서를 겸하고 있었던 김용순 당시 통전부장의 서울 방문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김양건 부장의 서울 방문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1992년에 있었던 윤기복 당시 <조선노동당> 대남담당 비서의 서울 방문 때를 회상하게 됩니다.

이 때는 남북간에 쌍방에서 각기 총리를 비롯한 7명의 대표들이 참가하는 ‘고위급회담’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남북 쌍방은 평양에서 열린 제6차 ‘고위급회담’ 기간 중인 1992년 2월19일 두 건의 역사적 합의문건을 탄생시켰습니다.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그것들이었습니다. 그보다 하루 전인 2월18일에는 ‘고위급회담’에 참가하는 남북의 대표들이 당시는 살아 있던 북한의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그때는 그의 집무장소로 북한 사람들이 ‘주석궁’이라고 일컫기도 했던 ‘금수산 의사당’에서 점심 식사를 대접받기도 했었습니다. 이 ‘금수산 의사당’은 지금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그의 묘소가 되어 있는 곳이지요. 지금은 ‘금수산 기념궁전’이라고 한다더군요.

그리고 남북은 그해 5월 서울에서 제7차 ‘고위급회담’을 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 3월 어느 날 북쪽으로부터 남북직통전화를 통해 예정에 없던 제안이 남쪽으로 날아 왔습니다. 그 당시 <조선노동당> 대남담당 비서였던 윤기복이 서울을 방문하고 싶은데 가도 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때도 남쪽의 입장은 북쪽 사람들이 남쪽을 방문하는 것은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었으니까 마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때 남한의 대통령은 노태우 씨였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에게 윤기복의 서울 방문 요청을 받아들일 것을 건의했고 대통령은 우리의 건의를 받아들여 윤기복의 서울 방문이 실현되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윤기복은 이번에 김양건 부장이 묵었던 곳인 셰라톤 워커힐에 묵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상연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 나와 함께 윤기복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면서 그로부터 서울 방문 목적을 이야기 들었습니다. 그때 그로부터 들은 서울 방문 목적이 들어보니 웃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는 4월15일 우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꺾어진 생신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민들은 금년에는 위대한 수령님에게 한 상을 크게 차려 드리려고 합니다. 그때 남쪽의 노 대통령이 평양에 와서 우리가 차리는 위대한 수령님 생신 연회 주탁의 한 자리에 앉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 과정에서 아마 위대한 수령님과 노 대통령 사이에 상봉도 있게 될 것으로 우리는 예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였습니다.

말을 더 들어보니 북쪽에서는 특히 김일성의 생일 가운데서 0과 5로 끝나는 해의 생일은 다른 생일과 구분하여 크게 축하한다는 것이더군요. 1992년은 김일성의 80회 생일의 해였습니다. 그래서 생일 잔치를 예년에 비해 더 크게 준비하고 있는데 남쪽의 노 대통령더러 그 생일 축하객의 한 사람이 되어서 평양으로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연회 도중에 ‘위대한 수령’과 노 대통령 사이에 ‘상봉’도 있게 되리라는 것이었지요. 북한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때 그 저녁 식사 자리에서 윤기복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이상연 부장과 나는 똑같이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선, 도대체 ‘상봉’이라니, 이 사람들이 남북 정상 간에 만나는 것을 무슨 ‘이산가족 상봉’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지요.

또 그 당시의 남북관계 상황이 남쪽 대한민국 대통령이 느닷없이 북한의 왕처럼 되어 있는 독재자의 생일 잔치에 찾아가는 축하객의 한 사람이 되어준다는 것이 되기나 한 말이었겠습니까? 우리는 노 대통령에게 이 같이 무례한 요청은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건의했고 노 대통령도 이 건의를 받아들여서 하루 뒤 윤기복에게 따로 저녁 식사를 대접하면서 완곡하게 거절하여 돌려 보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에서 우리는 남북관계가 정상적으로 개선되지 못하는 원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컨대 많은 남한 동포들은 지난 주 평양에서 열렸던 남북 국방장관회담이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사진을 벽에 걸어놓은 방에서 진행되는 광경을 신문과 텔레비전이 전하는 사진을 통해 보고 황당해 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을 보는 많은 남한 동포들이 해묵은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1951년 북한측 지역인 개성에서 6.25 전쟁 휴전협상 첫 회담이 열렸을 때의 광경이었습니다. 그 때 북한측은 북한측 단장 남일의 의자를 유엔군측 수석대표 조이의 의자보다 훨씬 높은 것을 가져다 놓아서 의자에 앉은 남일이 조이를 내려다 보는 장면을 연출하는가 하면 유엔기보다 훨씬 큰 인공기를 회의 탁자에 올려 놓는 장난을 했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우리 말이 있습니다마는 이번 평양에서 전해지는 국방장관회담 광경 사진을 보면서 남쪽의 많은 동포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은 변한 것이 없구나”라는 상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은 북한의 당국자들은 북한의 처지를 스스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툭 하면 ‘고난의 행군’을 운운해야 하는 북한의 형편은 북한이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남한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남한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북한을 도우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초 노무현•김정일 사이의 평양회담에 이어서 지난 달 서울에서 열린 남북총리회담에서 남한은 엄청난 규모의 대북 경제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심지어 남한에서는 내년 국가예산에 북한 경제관료들의 시장경제 학습을 지원하기 위한 돈을 3억원이나 계상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주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다져 두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남쪽의 대한민국의 경제는 세계적으로 인정된 성공한 경제인 반면 북한의 경제는 이제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실패한 경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북한의 경제를 살리고자 한다면 실패한 경제인 북한식으로 할 것이 아니라 성공한 경제인 남한식으로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로 여기서 주는 쪽인 남한이 결코 오만해서는 안 되지만 반면 받는 쪽인 북한은 당연히 겸손해야 한다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지금 남북간에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남쪽으로부터 받는 지원으로 경제를 회생시키겠다는 북한이 사사건건 북한식을 고집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실패한 나라인 북한이 사사건건 쇠뿔을 잡고 제 멋대로 흔들겠다는 식인 것입니다. 이래서는 바다로 가야 할 배가 산 꼭대기로 올라 갈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한 경제협력은 하는 것이 하지 않느니만도 못 해 질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번 남한의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가장 유력해 보이는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경고의 말을 던졌습니다. “지금 남북이 무언가 자꾸 합의를 하는 것 같은데 그 합의들을 실천하느냐의 여부는 뒤에 꼼꼼하게 따져 보고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더구나 이제 이번 대통령선거의 결과로 남쪽에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려 하고 있는 시점에서 북한 당국이 남한 동포들의 정서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침 대선 기간 중에 이루어진 이번 김양건 통전부장의 서울 나들이가 북한 당국에게 그 같은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와는 반대로, 많은 남한 동포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그의 서울 나들이의 목적이 가령 남한 현지에서 대통령선거의 양상을 살펴 보는 한편 <한나라당>의 승리에 의한 정권교체를 저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동안의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이 추진해온 소위 ‘햇볕정책’의 계승을 다짐하는 정치세력인 <통합민주신당>의 승리를 지원하는 방안을 찾아 보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 될 것입니다. 지금 남한에서 언론기관들이 실시하는 모든 여론조사 결과는 절반 이상의 유권자들이 지난 10년 동안 김대중•노무현 두 정권이 무분별하게 추진해 온 대북포용정책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이번 김양건 부장의 남한 방문을 통해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확인했어야 합니다.

남한에서 이번 대통령선거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구호가 세 개입니다. 즉, ‘정권 교체’•’좌파 퇴출’•’잃어버린 10년 되찾기’입니다. 이것은 절반 이상의 남한 동포들이 지금 이번 대통령선거를 통해 지난 10년 간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추구해 온 소위 ‘햇볕정책’에 대해 운동경기에서 흔히 보는 ‘레드 카드’를 들어서 ‘퇴장’을 ‘선고’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김정일의 북한 정권도 이제 내년부터는 그 동안의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좌파’ 정권과는 다른 ‘우파’ 정권을 상대할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모쪼록 이번 김양건 부장 일행의 남한 나들이를 통해 이 같은 남한 정세에 대하여 올바른 실태 파악이 이루어졌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북한 동포 여러분,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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