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인간은 惡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도덕적 존재이다
콩고 여행은 또한 말로우에게 자신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는 콩고에 오기 전 까지는 자신을 몰랐으며 콩고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짐승 같은 정열’에 압도되어 악마로 전락한 컬츠와 헌신적인 야만족 조타수에게서 자신의 分身을 발견하면서 말로우는 자신을 보다 더 깊이 알게되는 것이다. 컬츠는 말로우에게 인간정신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컬츠의 내면에 있는 암흑에 가까이 갈수록 자신도 악에 대한 가능성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는 컬츠를 따라 冥府(명부)의 세계로 내려가서 자신과 모든 인간에 내재하는 惡魔性(악마성)과 대면하며 戰慄(전율)을 느낀다. 그리고 컬츠가 죽어가면서 “horror! horror!”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구원의 희망을 품게 된다. 컬츠의 전율은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을 바탕으로 하는 문명의 빛이 침투하지 못하는 암흑의 深淵(심연)으로 상징되는 악에 대한 전율이며 이는 인간은 악으로 파멸되는 순간에도 악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도덕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문명사회의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통제력으로부터 완전히 孤立(고립)된 암흑의 奧地(오지)에서 악마로 전락하였지만 죽음에 임박해서 악에 대한 두려움을 회복함으로써 컬츠는 도덕적 승리를 거둔다. 컬츠를 만남으로써 말로우는 인간은 악의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절벽 위의 ‘까마득히 높은 곳’ 천상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도덕적 크리스탈을 우러러 보고 갈망하는 선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말로우에게는 콩고여행은 자기 발견(self-discovery)의 순례여행이다. 그 여행은 지리적 여행일 뿐 아니라 인간정신 내면으로의 여행이며 영혼의 成熟(성숙)을 위한 탐구여행이다. 그는 문명의 허약함, 지적 공허, 우주에 遍在(편재)하는 악, 인간본능의 野獸性(야수성), 존재의 무의미등 삶의 부정적인 면과 함께 理想(이상)과 도덕성을 추구하는 善(선)의 존재도 의식하게 된다. 그는 변화된 사람이 되고, 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 되어 유럽으로 돌아온다.
암흑의 오지를 경험하지 못하고 자신의 영혼에 내재하는 악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은 이제 말로우에게는 ‘알지도 못하고 간섭이나 하는 주제넘은 사람들’ 일 뿐이며, “그들의 인생에 대한 지식은 짜증스런 겉치레에 불과하다.”
악의 지옥으로 내려가 보지 못한 사람들은 약혼녀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에 사로잡히거나 고용주 노부인들처럼 오만과 편견으로 비인간적이고 대리석 彫刻(조각)처럼 생명력이 결핍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삶은 피상적이며 위선과 편견과 거짓으로 織造(직조)된 生中死(생중사)같은 삶이 되기 쉽다.
삶은 안개로 덮여 있다
말로우의 역할 중의 하나는 사람은 實在(실재)에 대한 인식능력이 대단히 부족하다는 것을 표출하는 것이다. ‘暗黑의 奧地’는 불확실성과 模糊性(모호성)을 형상화한다. ‘暗黑의 奧地’는 이러한 모호성의 이미지가 많이 나타난다.
말로우가 테임즈강을 출발 할 때 태양을 어렴풋이 가리는 안개, 야만족이 말로우의 배를 공격할 때의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 짙은 안개, 하늘을 가리는 黑夜(흑야)의 밀림, 그 밀림에서 들려오는 야만족들의 의미를 모를 함성, 어두움에 덮여 가는 유럽의 도시, 어두움에 윤곽을 상실해 가는 약혼녀의 방, 이름을 알 수 없는 대부분의 등장인물, 사람마다 다른 컬츠에 대한 평가 등은 불확실성과 모호성의 이미지들이다.
실재는 안개 속의 사물처럼 시야에 明瞭(명료)하게 들어오지는 않는다. 말로우는 ‘실재는 私的(사적)이고 개인적’이며 “자신에 대한 실재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타인은 한 개인의 실재에 대해서는 겉모습만 볼 수 있고 실재의 진정한 의미를 결코 파악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사람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명확한 이해가 부족하다. 삶은 안개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말대로 “인생은 체계적으로 배열된 긱램프(gig lamps: 2륜마차용 램프. 양쪽에 하나씩 있음)가 아니다. 인생은 의식의 처음부터 끝까지 半透明(반투명) 外皮(외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빛나는 圓光(원광)이어서 실재는 안개 속의 태양이나 램프처럼 희미한 원광으로 보인다.”
#8
인간은 착각하며 살아간다
말로우에게는 ‘한 사물(episode)의 의미는 열매의 核(핵: kernel)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밖에 있어서 그 의미는 유령 같은 희미한 달빛 속에 보이는 안개에 덮인 圓光(원광)처럼 그리고 안개를 밝히는 불빛처럼 에피소드를 둘러싸고’ 있다. 하나의 에피소드에 다양한 의미가 안개 속의 불빛처럼 가리고 있기 때문에 실재의 파악이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개 속으로 사물을 보면서도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錯視(착시)에서 결코 벗어 날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실재에 조금이라도 더 근접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말로우처럼 내면에로의 탐구적 巡禮(순례)가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례의 필요성을 모르고 있으며 순례 중에라도 순례의 의미를 의식하지 못한다. 말로우와 동행하는 총 지배인, 경리책임자, 등 백인 ‘순례자’들은 위선과 탐욕과 편견과 일상의 관습으로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암흑의 오지를 정면으로 대하면서도 암흑의 오지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컬츠의 분신(分身)이다
그들은 백인 문명인도 콩고강 유역 야만인들과는 遠親(원친)이라는 것, 악마로 전락한 컬츠가 자신들의 분신이라는 것, 인간성 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으며 문명인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 문명의 빛도 흐려지고 암흑에 흡수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문명이 타락하지 않고 계속 발달하기 위해서는 문명의 빛 즉 ‘우리가 스스로 세우고 그 것을 위해 우리를 희생할 수 있는’ 理想(이상)과 思想(사상)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
‘暗黑의 奧地’는 ‘地獄의 黙示錄(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다. 이 영화는 ‘暗黑의 奧地’ 및 Frazer(프레이저)의 ‘황금가지’(The Golden Bough) 와 T.S. Eliot의 ‘The Wasteland: 荒蕪地(황무지)’ 등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이해가 거의 불가능하다.
시간과 장소는 20세기의 월남전쟁이며 컬츠와 말로우는 각각 미군 대령과 대위로 나온다. 말로우 대위는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컬츠 대령을 죽인다. 노쇠하여 이성을 상실하고 미쳐 버린 이상주의자 컬츠 대령 대신에 생명력의 상징인 젊은 말로우 대위가 등장함으로써 생명력을 상실한 문명의 황무지에 생명을 가져오는 재생의 비가 내리게 된다.
우리는 ‘暗黑의 奧地’에서 우주의 奈落(나락)에 떨어져서 암흑에 패배하지만 암흑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컬츠를 통해서 우주는 비록 암흑에 쌓여 있지만 도덕적 우주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또한 인간성에 內在(내재)하는 암흑의 오지를 의식하게 됨으로써 맹목적 이상주의의 오만과 편견과 독선에 대해 경계를 하게 되고 더 지혜롭고 더 겸손하며 더 신중한 자세로서 이상을 추구하며 허무주의적 우주에 문명의 질서를 부여하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 성숙되기를 바라게 된다. (끝)
(다음 편부터는 헤밍웨이의 '武器(무기)여 잘 있거라' 해설편이 연재됩니다.)
조세프 콘래드의 암흑의 오지(Heart of Darkness)④
- 朴承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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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8-25, 10: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