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전쟁은 인간의 존재론적 숙명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는 1899년 시카고(Chicago)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하였다. 그는 학교생활의 모든 면에서 활동적이고 성공적이었지만 두 번이나 가출하였고 17세의 어린 나이로 1차 세계대전에 參戰(참전)하여 이탈리아 戰線(전선)에서 앰블런스 운전병으로 활약하다가 중상을 입었다. 그는 그 후에도 從軍記者(종군기자)로서 스페인內戰(내전)을 취재하였다.
‘武器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는 이러한 전쟁 경험이 만들어낸 절망과 환멸의 小說(소설)이다. ‘武器여 잘 있거라’에서 헤밍웨이는 전쟁으로 상징되는 우주의 暴力性(폭력성)으로 인해 인간의 사랑과 희망과 삶에 대한 애달픈 갈망도 모두 허망하게 霧散(무산)되어버리는 과정을 냉엄하게 그리고 있다.
‘해는 또다시 뜬다’(The Sun Also Rises),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는가?’(For Whom the Bell Tolls), ‘武器여 잘 있거라’ 등 헤밍웨이의 전쟁 소설에서 전쟁은 혼돈과 무질서와 맹목적 파괴와 喪失(상실)의 象徵(상징)이다. 인간은 문명을 일으키고 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하는 神性(신성)에 근접하는 지혜와 능력을 가진 존재이지만, 또한 수시로 전쟁을 일으켜 相互屠殺(상호도살)을 일삼을 만큼 獸性(수성)도 가진 모순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희한하게도 當代(당대)의 최첨단 과학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무기를 만들고 또 당대의 가장 뛰어난 지혜를 끌어 모아서 명분을 만들어 전쟁을 일으킨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문명과 문화가 발달할수록 전쟁은 더 잔인해지고 殺傷(살상)의 정도가 더 커진다. 헤밍웨이에게 전쟁은 인간의 생존조건에서 일어나는 모든 잔혹하고 無意味(무의미)한 것과 同一視(동일시)되며 인간성에 內在(내재)하는 惡魔性(악마성)에 대한 핵심적 이미지이다.
相互屠殺(상호도살: mutual butchery)이 생존조건이다
악마성은 인간성에만 내재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생존방식이 악마적이다.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를 죽이지 않고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모든 생명체는 식물이든 동물이든 숙명적으로 먹이사슬의 한 부분이 된다. 작은 고기는 큰 고기가 잡아먹고 큰 고기는 보다 더 큰 고기나 사람들이 죽인다. 작은 새는 큰 새의 밥이 된다. 큰 나무는 햇빛을 가려서 작은 나무를 죽게 만든다.
모든 생명체는 죽이기 위해서 태어났으며(built for the kill) 살해와 被殺(피살)이 그리고 가해와 희생이 삶의 방식이며 자연은 거대한 鬪技場(투기장)으로서 생성과 소멸이 동시에 일어나는 혼돈의 場(장)이다. ‘老人(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의 극히 평범한 어부인 산티아고(Santiago) 노인의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어떤 형식으로든 다른 존재를 죽인다”(Everything kills everything else in some way)라는 넋두리는 사실이다.
노인의 낚싯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작은 새도 육지에 도달하기 전에 독수리의 먹이가 될지도 모른다. 우주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파괴한다. 이들의 죽음을 알리는 弔鐘(조종)은 우리들 주변에서 항상 울리고 있다. 죽음이 존재의 조건인 것이다. 그래서 헤밍웨이의 세계는 무의미하게 죽은 자들의 屍身(시신)으로 가득 차 있는 죽음의 惡夢(악몽)같은 세계이다.
비를 맞고 있는 죽은 여인들, 퉁퉁 부어오른 군인시체, 침몰된 상선의 舷窓(현창)을 통해서 보이는 무수한 屍身(시신) 등 그의 소설은 시체 展示場(전시장)을 연상케 한다. 그의 소설에는 또한 얕은 물에서 익사하고 있는 다리가 부러진 노새, 쇠뿔에 관통상을 입은 투우장의 말, 자신의 창자를 물어뜯고 있는 하이에나 등 고통 받고 있는 동물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강펀치를 맞고 비틀거리는 권투선수들, 전쟁에 지친 군인, 폐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제대군인들, 레즈비언, 色情狂(색정광), 신경이 절단 된 투우사 등 삶의 투기장에서 상처입고 탈락된 사람들도 자주 등장한다.
교수대의 밧줄을 끄는 말처럼…
인간이 당하는 이러한 죽음과 고통에 대해 우주는 무심하다. 우주는 공허하고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교수대의 밧줄을 끄는 말처럼 우주는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해 무심하다. 죽음에 대한 선악의 기준도 없다.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포탄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죽이 듯이 우주는 그 운행과정에서 도덕적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삶은 외로운 奮鬪(분투)이며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삶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없다. 무심하고 무의미하고 공허하며 파괴적인 우주에서 인간은 분투하다가 허망하게 죽는다. 죽음이 끝이며 죽음 저편에는 허무(nothingness)만 있을 뿐이다.
헤밍웨이의 이러한 虛無主義的(허무주의적) 우주관은 그가 소위 잃어버린 세대( the lost generation)에 속하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의 慘狀(참상)을 경험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문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상실하였다. 문명은 戰傷(전상)으로 性不具(성불구)가 된 제이크(“태양은 또 다시 뜬다”)처럼 생식능력을 상실하고 不毛(불모)의 황무지로 변하였다.
#2
神에게 버림받은 세대
문명의 황무지에는 救援(구원)의 神이 보이지 않는다. 헤밍웨이의 인물들은 神의 加護(가호)를 받지 못하는 迷兒[미아 (the lost child)]들이다. 전쟁 중의 인간은 神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다. 神은 생명수가 고갈된 황무지에 재생과 구원을 가져오려는 의지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神은 지옥의 전쟁을 막기는커녕 악마의 대리인들이 전쟁을 일으켜 수백 만 명을 屠戮(도륙)해도 傍觀者(방관자)로서만 남아 있었다.
따라서 잃어버린 세대의 작가들의 대부분은 神의 존재를 믿지 않는 無神論者(무신론자)이거나 神의 존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不可知論者(불가지론자)였다. 헤밍웨이의 세계에서는 神은 할 일이 없는 백수와 같은 존재이다.
神의 가호가 없는 인간은 보호자를 잃은 미아의 공포와 절망 속에서 삶을 살아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헤밍웨이의 인물들의 생각이나 정서 및 행동계획에 神이 들어 올 자리가 없다. 그의 인물들은 神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神은 無所不在(무소부재)의 존재가 아니다. 또한 神은 인간에게 은총을 베풀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인간을 악의적으로 대하는 존재도 아닌 그저 존재하는 존재이다.
그들은 위기의 순간에 때때로 神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만 그들은 결코 神의 도움에 의존하거나 기대하지는 않는다. 산티아고 노인은 거대한 마린과 24시간의 死鬪(사투)후에 “나는 신앙심이 없어” 그리고 ‘Marys’(성모마리아)보다는 ‘Our Fathers’(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말하기에 더 수월하지” 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기계적으로 또 자동적으로 하늘의 도움을 청한다.
48시간 후에 그는 “이제 저놈이 너무나 멋있게 저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 제가 저놈과의 싸움을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나중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백 번이나 부르겠으며 성모마리아님도 백 번이나 부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싸움중이라서) 말 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神의 능력을 믿지 않는 자의 말투이다. 노인은 무엇이 자신을 패배하게 하였는가를 自問(자문)한 후 “아무것도 없어… 내가 너무 멀리 갔었어” 라고 답한다.
패배하더라도 싸워야 한다
헤밍웨이에게는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 기도에 너무 의존하거나 그래서 다른 외부의 원조를 기대하는 사람은 매력적이지 못하다. 인간은 쟁투의 끝은 패배라는 것을 알면서도 압박해오는 세력과 싸워야 한다. 중요한 것은 승리나 패배가 아니라 투쟁 그 자체이다. 헤밍웨이의 주인공은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완벽한 장애물’(the absolutely perfect obstacle)에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맞서야 한다.
산티아고 노인은 상어와의 無望(무망)한 싸움을 혼자서 堪耐(감내)해야한다. 투우사 Manuel(마뉴엘)(The Undefeated: 패배하지 않는 사람들)은 허리가 부러지고 치명적으로 찔리는 상처를 입고서도 소와 여섯 번을 겨룬 끝에 소의 뿔을 받아드린다. 제이크는 압도적인 좌절 속에서 ‘정직’하고 ‘진실’되고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 조단(‘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은 죽을 줄 알면서도 단독으로 적군과 맞선다.
그리고 각자는 고독한 개인으로서 외부의 도움 없이 도전에 정면으로 응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인류의 구원자가 되었듯이 패배가 불가피한 도전에 정직과 성실로 대응할 때 인간은 神性(신성)에 근접해 간다.
헤밍웨이의 주인공들이 패배의 고통을 당할 때 사람들은 무심하다. 사람들은 그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거나 보더라도 그의 苦難(고난)과 그가 고난을 감내하는 용기를 의식하지도 않는다. ‘노인과 바다’는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카페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산티아고 노인이 잡아온 마린의 거대한 척추와 꼬리를 지켜보는 장면으로서 끝난다.
그들 중의 한 여인이 웨이터에게 그 것이 무엇이냐고 물은 후에 말한다:
“상어가 저렇게 핸섬하고 아름답고 잘 생긴 꼬리를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나도 몰랐어.” 그녀의 남자 친구가 말했다.
길 위쪽 오두막에서 노인은 다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바닥에 대고 자고 있었고 소년은 그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들에 대해서 꿈을 꾸고 있었다.
고통을 우아하게 감내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
관광객들은 노인의 고통과 용기를 전혀 모르는 무심한 대중을 대변한다. 관광객들은 또한 개인의 죽음이나 고통에 무심한 우주에 대한 상징이 되기도 한다. 노인의 고난에 무지한 관광객들의 무심한 반응은 노인의 고통의 통렬함을 강화시키고 독자들에게 깊은 연민의 情(정)을 일으킨다.
群居(군거)를 하면서 강력한 연대 속에 살아가는 사자에 대한 꿈도 노인의 고독을 한층 더 부각시킨다. 헤밍웨이의 군인, 어부, 웨이터, 그리고 외견상으로 별 볼일 없는 인물들은 도살장 문 앞에서 되새김질하고 있는 소처럼 멍청한 사람들이 아니며 그들은 차갑고 공허한 우주에서 고통을 우아하게 감내하고 있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들 보통 사람들이 패배에 맞서는 용기에서 동정과 敬畏(경외)를 느끼게 된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