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인 에어 (Jane Eyre; 1996)의 한 장면, 결혼을 준비하는 제인(위)와 로체스터의 前부인 버서(아래)
열정의 파도를 타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제인의 이성
화재가 있은 다음날 로체스터는 Eshton(에쉬톤) 지역 행정장관의 저택 Leah(리)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쏜필드를 떠난 후 일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페어팩스 부인의 말에 의하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게 갑자기 떠나는 것이 로체스터의 慣行(관행)이며 언제 돌아올 것인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일 년 뒤에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제인은 ‘가슴 아픈 실망감’을 경험하지만 곧 이성을 회복하면서 “로체스터의 거취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실수이며… 너는 쏜필드의 주인과는 가정교사로서 월급을 받는 것 이상의 관계는 없다. …그러니 그를 환희와 고통의 대상으로 삼지 마라. 그는 너와 계층이 다르다. 자신의 계급에 충실해라. 그리고 원하지도 않고 오히려 경멸을 받을지도 모르는 대상에 대해 영혼에서 나오는 사랑의 정열을 낭비하지 않을 만큼 강한 자존심을 가져라”라고 자신에게 충고하고 결의를 다진다.
그러나 제인의 이러한 각오는 도전을 받게 된다. 2주가 지난 후 로체스터로부터 大宴會(house party)를 준비하라는 편지가 온다. 에쉬톤의 파티에 참석한 지역 名士(명사)들을 쏜필드로 초대하는 것이다.
제인은 페어팩스 부인으로부터 대단한 美人(미인)으로 소문이 나 있는 에쉬톤의 딸 Miss Ingram(미스 인그람)도 파티에 올 것이며 그녀와 로체스터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파티에서 인그람은 ‘파티의 생명이자 영혼’이며 ‘여왕’ 같았다. 인그람은 오만한 言辭(언사)로 제인을 무시하지만 제인의 눈에 비치는 그녀는 ‘과시적이고 정신은 가난하고 가슴은 천성적으로 瘠薄(척박)하고… 생각은 독창적이지 못하고 마음속에 동정심이 없는 여인’이다.
질투심이 그녀의 열정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제인은 “로체스터에 대한 사랑의 포기는 자연에 대한 不敬(불경)(Blasphemy against nature.)이며… 그이는 저들하고는 다른 종류이며 저들보다는 나하고 더 가까운 사람이고… 지위와 재산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지만 내 속에는 그이와 나를 同化(동화)시키는 어떤 것이 있어…” 라며 로체스터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人爲的(인위적)이 아닌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사랑의 표출에 정직하지 못한 로체스터
이에 비해 로체스터가 제인을 대하는 태도는 솔직하지 못하다. 그는 파티가 열리고 있는 동안 버서의 오빠인 Richard Mason(리처드 메이슨)이 멀리 서인도諸島(제도, the West Indies)에서 찾아와도 그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밤중에 메이슨이 버스가 휘두르는 칼에 부상을 입고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손님들이 놀라지만 로체스터는 버서의 존재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이를 잘 수습한다. 그는 의사를 데리러 가면서 제인에게 메이슨의 간호를 부탁하고 부상자에게 위험하니 두 사람에게 말을 시키지도 말고 하지도 말라면서 용의주도하게 버스의 비밀을 제인에게 숨긴다.
로체스터는 다음날 이른 새벽 제인과 함께 메이슨을 떠나보내면서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위급할 때 제인의 도움을 청하고 제인에게 의존하기를 원하면서도, 그리고 제인의 고매한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제인을 사랑하게 되면서도 제인의 사랑을 구하는 데 있어서 솔직하지 못하다.
이는 대지주로서, 또 제인의 고용주로서의 우월감과 남성적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제인의 감정과 자존심에 대한 配慮(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넓은 견문과 깊은 교양을 갖추었고, 하층계급에 속하는 가정교사를 사랑하고 결혼대상으로 선택할 만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로체스터이지만 사랑의 表出(표출)에는 정직하지 않는 것이다.
제인은 쏜필드를 떠날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인그람과 결혼하는 로체스터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로체스터에게 辭職(사직)의 뜻을 표한 후에 일주일 휴가를 내어 게이츠헤드로 간다. 리드부인이 중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제인을 호출한 것이다.
부인은 죽음에 임박한 상태에서도 제인을 증오한다. 그녀는 제인의 부유한 외삼촌이 3년 전에 제인의 행방을 찾는 편지를 보내 왔을 때 제인이 부자가 되는 것이 싫어서 제인에게 편지를 전달하지 않고 제인의 외삼촌에게는 제인이 죽었다고 회답하였다고 말한다. 그래도 제인은 부인과의 화해를 시도하지만 부인은 끝내 이를 거부하며 죽는다. 외삼촌의 유산은 제인이 상실한 재산의 회복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된다.
쏜필드에 돌아온 지 보름이 지나도 로체스터의 결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는 로체스터가 인그람과 결혼할 생각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인그람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고 인그람이 사랑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재산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더구나 최근에는 자신의 재산이 생각보다는 훨씬 적다는 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려 인그람으로부터 완전히 배척당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로체스터는 제인으로부터 ‘사랑의 고백’을 받아내기 위해 이 사실을 제인에게 비밀로 하고 오히려 아일란드에 ‘미래의 장모’가 추천하는 가정교사자리가 있다면서 제인에게 아일랜드로 갈 것을 권한다.
# 8
사랑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제인
로체스터는 '당신의 가슴과 나의 가슴을 단단히 맺어주는 어떤 끈이 있는 것 같다… 이제 그 끈이 끊기면 내적 출혈이 있을 것 같은 불안한 생각이 든다… 당신은 나를 잊을 것이지요?' 라며 제인의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제인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며 ‘사랑의 고백’을 한다. 로체스터가 의도한 대로 제인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제인은 열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동등(equal)한 관계를 주장한다: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남아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내가 아무런 감정이라고는 없는 기계라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빵과 나의 생명수를 탈취당하는 것을 내가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가난하고 보잘것 없고 용모도 평범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혼도 없고 정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나도 당신 못지않게 혼과 정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느 정도의 미모와 재산을 주었더라면 내가 당신을 떠나기가 힘든 것만큼 당신도 나를 떠나기 힘들도록 했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관습이나 전통이 아닌, 심지어 육체가 아닌 정신의 매체를 통해 말하고 있어요. 우리 둘이서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발아래 엎드려 있는 것처럼 동등한 입장으로 말하는 겁니다.”>
제인은 ‘生(생)의 동반자’가 되어 달라는 로체스터의 갑작스런 결혼제의를 진심이 아닌 것 같다는 이유로 거절하다가 로체스터의 진심을 확인한 후 ‘결혼이라는 축복의 잔’을 마시기로 한다.
결혼 준비에도 원칙을 지키는 제인
제인은 로체스터와의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자아를 지키고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분투한다. 그녀는 사랑만으로 결혼할 수는 없다. 제인은 로체스터와의 결혼을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자아성취의 상징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사랑만으로는 결혼할 수 없는 것이다.
결혼은 독립적인 두 남녀의 결합이 되어야 하고 여자가 남자의 부속물로 從屬(종속)되는 결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제인의 생각이다. 그녀는 로체스터와의 사랑에서 男尊女卑(남존여비)의 전통과 관습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남녀평등의 원칙과 이상을 추구한다.
그녀의 사랑에는 재산, 지위 같은 세속적 가치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富(부)와 지위를 가진 대지주로서의 로체스터가 아닌 자연인으로서의 로체스터를 사랑하고 로체스터가 사랑의 추구와 전개과정에서 자연이 부여한 순수한 정열을 보여주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로체스터는 제인과의 결혼을 앞두고도 그녀를 자신의 의지대로 조종하고 자신의 취향에 맞도록 변형시키고 자신의 낭만적 감정에 적합한 여성으로 ‘장식’하려고 한다. 그는 제인을 영혼의 伴侶者(반려자)가 아닌 남성에게 정열의 기쁨을 주는 對象(대상)으로만 간주한다.
그러나 제인은 ‘로체스터에 의해서 인형처럼 장식되는 것’을 견딜 수 없고 그녀에게 호화스러운 미래를 약속하는 로체스터에게서 後宮(후궁)들에게 金銀(금은)과 寶貨(보화)를 하사하면서 즐거워하는 술탄(sultan)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제인은 “나는(결혼 후에도) 가정교사를 계속하겠어요. 그래서 가정교사 봉급으로 먹고 자고 할 것이며 그 돈으로 옷장을 채우겠어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당신의 관심뿐일 겁니다” 라며 사랑에서 물질적 장식품을 제거하고 독립적인 두 인격의 결합을 강조한다. 제인의 사랑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체스터의 왜곡된 여성관은 아직도 淨化(정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 순화되어야 한다.
결혼식 이틀 전날 밤에 제인이 기절하는 일이 생긴다. 제인이 이상한 악몽에서 깨어나 있을 때 감금되어 있던 버서가 제인의 방에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제인이 쓸 면사포(veil)를 쓰고 거울을 본 후 그것을 찢어서 짓밟는다.
그녀의 유령같이 무시무시한 얼굴을 보고 제인이 기절하게 된 것이다. 로체스터는 제인이 非夢似夢(비몽사몽) 간에 그레이스 풀을 유령의 모습으로 착각했을 것이라며 결혼 후 일 년과 하루(마법의 유효기간)가 지나면 풀 같은 이상한 여자를 집에 데리고 있는 이유를 말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제인은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지만 달리 어떻게 할 방안이 없었고, 또 로체스터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모든 불안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한다. 로체스터는 결혼식 날까지도 제인을 소유하려는 의도에서 자신이 기혼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 것이다.
제인의 분신인 버서가 신부 면사포를 찢어버리는 것은 로체스터의 불법적인 결혼에 대한 제인의 무의식적인 항의와 분노를 상징한다. 로체스터의 거짓말과 불법적 결혼 의도에 대한 제인의 분노는 이성의 통제로 내면에 잠복해 있다가 버서의 광기를 통해서 폭발하는 것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