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解體(해체)의 江’에서 버킨을 구조하는 어슈라
어슈라는 소설 전체를 통해서 죽음의 과정이 아닌 생명의 과정을 상징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녀는 異化(이화)가 아닌 新陳代謝(신진대사)를 나타내는 창조와 생성의 이미지가 된다. 그녀에게서 보이는 一群(일군)의 자연적이고 유기적이며 육체적인 이미지로 인해 그녀는 성장과 발달이 가능한 자연적인 자아의 化身(화신)으로 나타나게 된다.
로렌스는 현대 산업사회에서의 삶을 죽음과 異化(이화)와 해체의 이미지로 그리면서도 어슈라같은 세상에 재생을 가져올 새로운 자아(emergent self)의 출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後光(후광)처럼 어슈라를 동반하는 새벽과 꽃의 이미지는 현대인이 문명의 이름으로 파괴하여 황폐화시킨 세계를 생명력이 鼓動(고동)치는 새로운 세계로 재생시키는 자아의 탄생을 의미한다.
어슈라는 버킨과의 접촉을 통해서 버킨이 말하는 새로운 세계를 의식하게 된다. 그녀는 버킨과 함께 인스브루크로 가면서 기계문명에 찌들어 축소된 ‘舊(구) 세계’(the old world)를 떠나간다고 생각한다.
낡은 세계 영국은 ‘표면적이고 비현실적인’ 인간사회이다. 그녀와 버킨은 舊(구) 세계에 대한 모든 생각을 지워버리고 ‘未知(미지)의 천국’에만 의식의 초점을 맞춘다. 어슈라는 그녀가 알고 있던 세계-그녀 자신의 과거-로부터 放出(방출)되었다고 느낀다.
어슈라는 새롭게 발달하고 있는 그녀의 새로운 자아, 즉 ‘기존 사회로부터 소외된 새로운 자아’의 생성에 그녀의 과거는 장애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과거가 없기를 바랐다.” 과거의 자신은 ‘실제의 그녀가 아니고 지나간 역사의 작은 생물’처럼 느껴진다.
알프스에서 그녀의 이러한 생각은 더 심화된다. 알프스는 ‘세계의 배꼽(중심)이고 사람들에게 다른 세계의 모습’을 준다. 알프스에서 어슈라는 사회적 禁忌(금기)에서 풀려나고 의식이 高揚(고양)되고 ‘감정과 힘의 환상’에 陶醉(도취)된다.
버킨, 제랄드, 거드런 특히 어슈라에게는 그들의 과거와 영국은 사라진다. 그곳은 현실의 세계가 그들에게 거부하는 자유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알프스에서 그들은 버킨이 원하였던 ‘이름 없는 곳’(nowhere)에서 영국으로 대표되는 ‘다른 세계’, ‘저 망령의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슈라의 개인적이고 분리된 자아에 대한 생각은 버킨의 ‘소수의 타인과 함께 하는 삶’과는 다소 다르다. 그녀는 타인을 排除(배제)하고 버킨과의 관계에서만 분리된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녀는 버킨과 마찬가지로 구 세계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해방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버킨과 진정으로 맺어지게 되고 함께 그들 자신의 세계에서 살게 된다.
‘연애하는 여인들’의 시작 부분에서 어슈라는 자신이 성장해 온 과거와 직장이 있는 장소는 있지만 미래는 없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소설의 끝에 가서 그녀는 과거도 없고 ‘이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욕망도 없는 시점에 다다르게 된다. 그녀의 미래는 단순히 버킨과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그녀는 어떠한 후회도 없이 세상을 방랑할 수 있게 된다.
어슈라는 존재의 순수하고 신비한 總體性(총체성, wholeness)의 化身(화신)이다. 그녀는 自存(자존)과 완전성을 가리키는 ‘황금의 빛’으로 충만한 여인이다. 이러한 어슈라와는 대조적으로 버킨은 존재의 타락(degradation)을 가져오는 사회적 개인적 腐蝕(부식, corrosion)과 連累(연루)되어 있다.
소설의 이야기는 어슈라가 이러한 타락에 대한 해결책을 버킨에게 제공하는 것을 보여준다. 버킨은 어슈라와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써 현대사회를 홍수로 위협하는 ‘해체의 강’(river of dissolution)을 헤엄쳐 나오는 기회를 가진다.
‘연애하는 여인들’에서 어슈라는 해체에 대한 해독제로서의 상징성을 가진다. 버킨과 어슈라는 ‘암흑의 강’과 같은 삶의 탁류 속으로 표류하면서도 새로운 삶의 꽃과 빛이 있는 순수의 세계로 나아간다.
# 12
관능적 감각과 추상적 지식의 포로가 되면 인간은 해체된다.
‘연애하는 여인들’의 핵심적인 주제인 解體(해체, decomposition)의 개념은 주로 버킨의 內的獨白(내적독백)에 의해서 그 윤곽이 드러난다. 버킨은 아프리카의 여인의 彫刻像(조각상)에 대한 기억에 자극을 받아 인류의 ‘보편적인 해체’(universal dissolution)를 우울한 어조로 예언한다. 해체의 과정은 두 가지 형태인데 아프리카적인 것과 북극적인 것이 있다:
〈수천 년 전에 이들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창조의 욕망과 생성의 행복은 사라지고 한 가지 종류의 지식에 대한 충동 즉 정신은 없고 감각을 통해서만 성장하고 감각에 사로잡히고 감각으로 끝나는 지식만 남았음에 틀림없다.
정신이 죽은 時點(시점)을 찾아서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영혼이 심한 고통을 받으며 유기적 據點(거점)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점과 만나게 된다… 우리는 생명과 희망과의 연결고리에서 떨어져 나와서… 순수하고 완전하던 존재와 창조와 자유로부터 逸脫(일탈)하여 순전히 관능적인 지식과 해체의 과정으로 몰입되어 버린다.
이것은 오랜 세월동안 지속되어 온 아프리카적 해체과정이다… 백인종들은 다른 해체과정에 들어서 있다. 광대한 북극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백인종들은 얼음과 눈처럼 차가운 추상적인 지식에 의해서 파괴와 축소와 해체의 과정을 밟고 있다〉
아프리카적인 과정에서는 사상과 가치를 생성하는 정신이 放棄(방기)되고 그래서 창조적인 자기 확장의 기회가 상실되기 때문에 인성(personality)이 분열된다. 확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유기체는 축소의 방향으로 가고 자신의 소모적인 감각을 집어삼킴으로써 스스로를 枯渴(고갈)시켜 버린다.
자아는 하나의 封函(봉함)된 봉투처럼 되어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경험하는 자폐아가 되고 육체의 포로로서 자신의 해체 외에는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한다. 이리하여 자아는 소똥이라는 부패와 해체 속에 사는 쇠똥구리가 가진 지식처럼 ‘해체와 붕괴의 과정’에 있는 지식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북극처럼 차가운 지식의 백인종들도 동일한 해체의 원칙에 따라 살아간다. 여기에서도 자아는 폐쇄되어 있고 자신의 區域(구역)내에서 만족을 찾고 그러한 한계로 인해 자신을 축소시켜나간다. 그러나 이 과정은 ‘광대한 抽象(추상)’의 배경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식 기반의 문화를 가진 서구인들은 自意識(자의식)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감각을 억압하는 자기 省察(성찰)의 의식을 통해서 육체를 경험한다.
‘얼음처럼 파괴적인 지식(ice-destructive knowledge)과 눈처럼 추상적인 파멸(snow-abstract annihilation)’의 길은 삶의 경험으로부터 차가운 추상적인 사상(ideas)과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의미하며 이런 삶의 방식은 부패의 蓋然性(개연성)이 있는 자아의 경험을 超越(초월)하지는 못한다. 즉 이성이 감성마저 지배하는 순수지식과 순수추상만으로는 자아의 부패와 해체를 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상과 지식의 길은 얼음처럼 굳어 버린 해체로서 결말을 낸다. 아프리카적인 길과 북극의 길을 가는 인간은 유기적인 삶(organic life)의 창조적이고 재생적인 활동에서 나오는 즐거움과의 접촉을 상실하고 ‘해체와 崩壞(붕괴)의 지식’(knowledge in dissolution and disintegration)에서 나타나는 보다 미묘한 감각을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버킨은 男根像(남근상, phallus)은 보다 깊은 ‘감각적 실재’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아프리카적인 과정과 북극의 과정은 생성하고 성장하고 開花(개화)하는 삶의 양상에 반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패와 해체를 낳는다.
제랄드 크라이치는 北方(북방)의 해체양식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처음부터 그는 북극의 이미지를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그의 북방적 육체와 금발에는 수정처럼 맑은 얼음을 통해 반사되는 햇빛과 같은 반짝임이 있었다.”〉
버킨이 해체에 대한 북방적인 樣式(양식)을 처음으로 착상할 때에 그는 즉각 제랄드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파괴적인 얼음처럼 차가운 신비 속에서 만족을 찾는 이상하고도 놀라운 북방의 하얀 악마(demons)들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지식, 이러한 嚴冬(엄동)의 酷寒(혹한)같은 지식 속에서 죽을 운명이었던가? 그는 완전히 얼어 죽을 것인가? 그는 세상 모두가 백색의 눈으로 해체되어 간다는 징조를 알리는 使者(사자)였던가?”〉
소설의 결론 부분에 가서 제랄드의 주도로 버킨-어슈라와 제랄드-거드룬은 백설로 얼어붙은 알프스로 여행갈 때 백설의 隱喩(은유)는 구체화된다. 그들은 눈썰매와 스키를 타며 현실의 삶을 초월하는 속도와 白光(백광)의 환희에 압도되어 자신들의 영혼을 비인간적인 추상의 세계로 날려 보낸다.
그러나 버킨과 어슈라는 ‘삶과 희망과의 連繫(연계)’로부터 떨어지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북방적 해체의 풍경으로부터 따뜻한 남쪽의 나라로 향한다. 제랄드와 거드룬은 그들의 운명-제랄드의 눈 속에서의 凍死(동사)와 거드런의 ‘유기적 생명체의 해체’-를 선택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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