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⑤

인간은 虛構(허구)를 만들고 虛構를 믿을 수밖에 없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1974년 作)
# 11
인간은 虛構(허구)를 만들고 虛構를 믿을 수밖에 없다


舊大陸(구대륙)의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순간, 아메리카는 隱喩的(은유적)으로 여인이 된다. 아메리카의 발견은 화신을 상징하는 性的(성적)인 결합이 된다. 그리하여 아메리카는 물질과 정신을 결합하는 지상의 낙원이 되고 神의 왕국이 될 것임을 약속한다:

〈달이 높이 떠오를 때에… 나는 네덜란드 선원들의 눈앞에 꽃처럼 피어났던 옛날의 그 섬-신세계의 싱싱한 푸른 젖가슴-을 차츰 의식하게 되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개츠비의 집 앞까지 울창하게 서 있던 나무들은 한때는 모든 인간들의 꿈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가장 새로운 꿈을 창녀처럼 유혹하듯이 속삭이고 있었다. …마법에라도 취한 듯 인간들은 이 대륙 앞에서 숨을 죽였음에 틀림없다. …그들이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마음도 없었던 美學的(미학적)인 명상에 잠겨서 역사상 최후의 인간의 가능성에 직면하고 있었다…〉

‘신세계의 싱싱한 푸른 젖가슴’은 데이지가 개츠비를 위해서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났듯이’ 네덜란드의 뱃사람을 위해서 “꽃처럼 피어났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정착민들은 ‘변경의 난봉꾼이며… 약탈자이며… 아메리카를 부패시키는 자’인 댄 코디같은 인간들로 타락해버렸다.

코디는 情慾(정욕)과 탐욕으로 사로잡힌 혼이 없는 육체로서 머틀 윌슨과 같은 인물이다. 그의 제자인 개츠비는 돈으로써 데이지를 사려고 한다. 신세계는 인간에게 꿈의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꿈의 실현 과정에서 꿈과 현실의 결합은 깨어져 버린다. 질서에의 꿈은 실패하게 되어 있고 이러한 실패에는 코디 같은 인물들도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虛構(허구, fiction)의 꿈을 계속해야 한다고 소설은 암시하고 있다.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허구를 믿을 수밖에 없다. 그밖에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진리는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믿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인간은 可變(가변)과 혼돈의 우주에 질서와 의미와 영원의 허구를 부여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비록 적대적이고 무심한 우주가 잔인하게 그러한 허구를 배척하더라도 허구에의 믿음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허구는 꿈의 파괴에 대한 인간의 유일한 방패이다.

逆說的(역설적)으로 허구만이 인간에게 진실(real)하다. ‘荒蕪地(황무지)’에서처럼 인간은 허구를 통해 생존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을 표현하게 된다. 감당할 수 없는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 인간은 ‘여분의 庭園師(정원사)’가 필요하다.

개츠비가 어이없게 피살되고 모든 것이 초점을 잃고 산산이 부서진 상황에서 닉 케러웨이는 경찰에 즉각 전화를 하는데 이것은 법과 질서에 대한 갈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반면에 개츠비는 닉과 다르게 전통적 질서의 기준 밖에서 행동한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神(신)과 자신의 개인적 도덕을 창조한다. 그는 기존의 질서에 의존하거나 그 질서에서 위로를 구하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인 허구를 창조하고 그 허구에 끝까지 집착한다.

개츠비가 그리는 허구의 세계에서는 인간은 ‘에덴(Eden)에서 추방된 존재이며 우연에 의해서 운명이 좌우되는 바보이며 맹목적인 자연의 장난감이고 혼돈의 狂風(광풍)에 휘날리는 하루살이’에 불과하며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만들고 그것을 붙잡아야하며… 인간은 자신의 神과 악마를 선택해야 하고 자신의 이름을 우주에다 刻印(각인)해야’ 한다.

이것은 다분히 實存主義的(실존주의적) 인간관과 유사하며 절대적 가치기준을 상실한 실존의 세계에서는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또 주장해야 한다. 그 외의 다른 길은 없다.”

닉은 개츠비의 실패한 꿈을 긍정적으로 본다. 개츠비는 ‘혼돈의 광풍’에 맞서서 인간의 의지를 담은 意味(의미)를 주장하지만 닉을 제외한 톰과 데이지 등 나머지 사람들은 ‘혼돈의 광풍’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들은 썩은 무리들입니다”라고 닉은 개츠비에게 고함지른다. “당신은 저것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는 질서에 反(반)하는 모든 것에 대항하여 인간적 질서의 가치를 주장한다.

환상적인 꿈을 추구하는 핏제랄드 소설의 인물들 중에서 제이 개츠비를 가장 두드러지게 만드는 것은 그의 환상의 규모와 화려함과 환상을 실현하려는 의지의 강렬함이다. 그는 聖杯(성배)를 찾아가는 순례자처럼 一片丹心(일편단심)으로 비전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의 비전은 허상이다. 그의 꿈의 화신인 데이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비전이다.

데이지의 船艙(선창)에 비치는 푸른 불빛은 개츠비를 영원히 끌어들이겠지만 그는 결코 그녀를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 선창의 불빛은 현실적으로는 뱃사람을 안내하는 신호에 불과하며 유혹적으로 반짝이고 있지만 결코 포착할 수는 없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을 상징한다.

개츠비의 꿈을 미국에 적용한다면 푸른 불빛은 ‘미국인의 꿈’(아메리칸 드림, American Dream)에 대한 불안정하고 無謀(무모)한 추구를 표현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개츠비의 꿈은 미국을 발견하고 미국에 정착했던 사람들의 꿈과 동일시된다. 그것은 ‘인류의 모든 꿈 중에서 가장 위대한’ 꿈이었다.

개츠비의 꿈은 또한 ‘공화국의 어두운 평원의 어딘가에서 상실해버린’ 현대 미국의 꿈이다. 개츠비는 그의 꿈은 과거의 덧없는 환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그의 꿈의 祭壇(제단)에 목숨을 바친다.

그가 찾고 있던 환상은 일순간도 존재한 적이 없으며 그 것은 자신의 상상력의 발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꿈의 화신인 데이지의 實像(실상)은 그의 꿈의 ‘뒤에 남아 떠도는 더러운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 12
아메리칸 드림의 타락과 枯死(고사)


‘위대한 개츠비’는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냉엄한 비판이며 삶에 대한 미국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의 形象化(형상화)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주제는 아메리칸 드림의 타락과 枯死(고사)이다.

역사적으로 아메리칸 드림은 자연과 인간의 선량함을 믿는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인간을 原罪(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타락한 존재로 간주하는 칼빈주의적(Calvinistic) 신학사상에 反(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메리칸 드림은 淸敎徒(청교도) 전통이라기보다는 변경(frontier)과 서부의 산물이다. 이 두 가지 상반적인 삶의 태도의 작용은 미국인의 생활에서 긴장을 낳고 이러한 긴장에서 ‘위대한 개츠비’같은 불멸의 예술작품이 생성된다.

실제 인물이든 허구 인물이든 그 인물이 인류 전체나 아니면 특정 집단의 典型(전형)이 되는 운명이나 열망을 나타낼 때에 그들은 神話的(신화적)인 특성을 띠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개츠비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그는 미국인의 삶의 중심에 있는 환상과 현실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의 화신일 뿐 아니라 아메리칸 드림의 진정한 후계자인 미국의 낭만적인 영웅의 화신이다.

개츠비는 낭만적인 주인공일 뿐 아니라 종족의 소망과 고난을 化身(화신)하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신화적인 인물은 非個性的(비개성적)이다. 그들에게는 공적인 삶과 개인적인 삶 사이의 구별이 없다. 그들은 모든 사람과 의미를 공유하기 때문에 비밀이 없으며 그들에게는 타인의 눈에 띄지 않고 머무를 수 있는 숨겨진 공간이 없다.

신화적인 인물은 古今(고금)의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意識(의식)의 영역으로부터 결코 떠나갈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개츠비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그에게는 개인적인 사생활이 없다. 그의 파티에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초청을 받지 않아도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모여든다.

이들 손님들의 명단은 낡아빠진 일정표 餘白(여백)에 기록된다.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을 쫓는 이들은 시간 자체만큼 덧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환상은 부서진 아메리칸 드림의 파편들이고 왜곡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이 기록된 방명록의 날짜는 독립기념일의 축제에 참여하였던 군중들이 타버린 폭죽처럼 지쳐서 귀가하는 ‘7월 5일’이다.

理想鄕(이상향)의 꿈을 가지고 창시된 미국은 꿈을 상실한 천박한 사람들의 혼돈의 파티장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나 개츠비에게는 이들 파편들이 꿈의 재료가 되고 그의 파티는 꿈을 생성하는 場이 된다.


데이지는 허상이지만 비전의 핵심으로 안내하는 선창의 불빛이다

데이지와 개츠비에게 있어 서로에게 끌리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데이지의 경우 답은 간단하다. 그녀는 성공한 개츠비의 화려한 몸짓(gorgeous gesturings)에서 매력과 안정을 발견한다. 닉은 개츠비의 개성을 ‘끊임이 없고 성공적인 몸짓’(unbroken series of successful gestures)으로 표현한다. 인간은 성공한 사람들의 몸짓에 끌리게 된다.

데이지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개츠비의 화려한 몸짓은 삶의 가능성에 대한 갈망의 반영이지 求愛(구애)의 공허한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속적인 성공의 자랑스런 몸짓은 虛無(허무) 속으로 사라지는 공허한 것이다. 그러나 데이지는 개츠비의 공허한 몸짓에서 현실에 두려움을 잊는다.

보다 중요하고 진정한 문제는 개츠비가 데이지에게서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고 그가 그녀로부터 이끌어 내는 방향이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초월하는 그 어떤 것을 본다. 그래서 개츠비의 비전에 내재하는 未成熟(미성숙)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전에는 崇嚴(숭엄)하고 高貴(고귀)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개츠비가 이상화하는 데이지는 그녀 안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는 개츠비를 궁극적인 비전의 핵심으로 안내하는 船艙(선창)의 푸른 불빛이다.

소설에서 데이지의 의미는 개츠비의 비전에 대한 客觀的 相關物(객관적 상관물, objective correlative: 어떤 특별한 情緖(정서)를 나타내는 사물, 情況(정황), 사건으로서 바로 그 정서를 곧장 환기시키도록 제시된 외부적 사실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개츠비의 비전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로서의 데이지의 실패는 개츠비의 꿈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미국 사회의 실패이다. 핏제랄드는 浮薄(부박)하고 사치스런 데이지의 실패를 데이지라는 한 개인의 실패가 아닌, 상징적인 수준에서 퇴폐적인 미국적인 세계의 실패와 동일시하고 데이지의 실패에서 미국사회의 실패를 반영하고 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富(부)가 주는 매력의 표상으로 간주한다. 데이지의 목소리는 개츠비의 말대로 ‘돈으로 가득 차 있어서’ 무한의 매력을 발산한다. 뛰어난 미모와 엄청난 부를 가진 데이지의 매혹적인 음성은 아메리칸 드림의 화려한 음악 같다. 그녀는 王城(왕성)의 높은 곳에 사는 황금의 공주이다.

개츠비의 황금과 개츠비의 소녀는 아름다운 공주가 金貨(금화)로 방을 가득 채우는 동화에 속한다. 동화에서는 궁극의 가치는 황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곳에 있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선창에서 밤새도록 타오르는 푸른 불빛을 넘어서 존재하는 비전의 성취에 대한 약속일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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