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시간은 再生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징성은 인물뿐 아니라 사물에도 해당된다. 예를 들어 우더링 하이츠 현관 문 위의 銘刻(명각)이다. 로크우드는 첫 번째 하이츠 방문에서 ‘1500’이라는 숫자와 ‘Hareton Earnshaw’라는 이름을 목격한다.
이 단계에서는 하이츠의 명각은 언쇼家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 이상의 역할은 하지 않지만 나중에는 캐시와 헤어턴과의 관계의 발전에 있어서 다양한 단계를 가리키게 된다.
소설의 21장에서 캐시와 린턴은 명각을 읽지 못하는 헤어턴을 조롱한다. 24장에서 헤어턴은 글자 읽는 것을 배웠지만 숫자를 읽지 못해 더 심한 모욕을 당한다. 헤어턴의 문제는 그가 꾸준히 노력하여 글자를 해득하게 됨으로써 해결되며 이것은 그와 캐시와의 사랑의 진전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동시에 그들의 사랑은 그들이 하이츠를 떠나는 계기를 제공한다. 헤어턴과 캐시가 언쇼家 사람들이 300년 이상을 살아온 우더링 하이츠를 떠나는 것은 농경시대의 終焉(종언)과 새로운 산업시대의 도래를 상징한다.
어린 시절 캐서린의 방의 침대에 얽혀 있는 복잡한 의미도 주목할 만하다. 로크우드가 이 방에서 죽은 캐서린을 만나는 악몽을 꾸고 히스클리프가 창문을 통해서 캐서린을 열정적으로 부르는 장면에서 우리는 이 방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결혼 후 혼수상태에서 캐서린은 그녀가 다시 그 방의 침대에 누워있는 꿈을 꾸면서 창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한다:
〈“오! 다시 옛날 우리 집 내 침대에 누워있으면 좋겠어! 그리고 창문가의 전나무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고 싶어. 그 바람을 느끼고 싶어… 그 바람은 무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에요… 그 바람을 들이마시도록 해 주세요!”〉
18년 후에 캐서린의 딸 캐시가 바로 그 창문을 통해 탈출하여 病席(병석)에 있는 아버지 에드가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히스클리프가 창문을 열어둔 채 그 침대에서 죽는다. 혼수상태의 꿈 속에서 캐서린은 어릴 때 혼자 누워 있었던 그 침대로 돌아가지 못해서 비참해진다.
소설의 이 단계에서 캐서린의 침대와 창문은 캐서린에게 히스클리프가 전부였던 때를 상징하게 된다. 과거에로의 回歸(회귀)나 과거의 오판이나 과오는 원상복구가 불가능하다. 시간은 재생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아마도 죽은 후에도 각각 혼자 남아있게 될 것이다.
# 22
野性(야성)의 추방이 파멸을 부른다
캐서린은 어린 시절의 사랑을 배신하고 난 후 자신의 행동의 의미를 깨닫고, 남편 에드가를 사랑하기를 거부하지만 히스클리프와의 첫 사랑의 시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녀는 히스클리프와 함께 살 수 없다. 히스클리프를 배신한 죄는 에드가를 배신한다고 해서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잘못은 사랑의 배신 이상으로 더 큰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본성에 內在(내재)하는 자연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 잘못을 교정할 수가 없다. 그녀는 悔恨(회한)에 사로잡혀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랄 뿐이다.
캐서린이 자신에 대한 통제가 가능할 때는 고통을 표면에 나타내지 않는다. 그녀의 고통은 히스클리프와의 열정적인 再會(재회)에서만 암시될 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정신적 착란상태에서 의식의 통제가 느슨해질 때 그녀의 고뇌는 어린 시절의 침대, 창문, 히쓰 등의 상징물을 매개로 하여 명백히 드러나게 된다.
의식의 이러한 昏睡狀態(혼수상태)에서 캐서린은 사회적 관습과 남편에 대한 儀禮的(의례적)이고 微微(미미)한 애정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合理化(합리화)에 의해 억압되어 있던 內面(내면)의 의식을 표현하게 된다. 착란상태에 빠져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나면 그녀는 비극적 여주인공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일상의 일들이 다시는 그녀의 苦惱(고뇌)를 덮고 가리지 않는다.
착란상태에서는 그녀는 자신과 정면으로 대면한다. 그녀가 주의 깊게 의도적으로 유지해온 린턴 부인이라는 역할은 무너져 버리고 그녀의 보다 깊고 원시적인 自我(자아)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녀의 병은 그녀의 열정에 附合(부합)되는 우더링 하이츠라는 야성의 세계에서 쓰러시 크로스라는 俗物性(속물성)으로 타락한 문명의 세계로 追放(추방)되는 바람에 생긴 정신의 병이다:
〈“나는 아이였어요. 아버지는 방금 땅에 묻히셨어요. 그런데 힌들리가 나와 히스클리프를 강제로 떼어놓는 바람에 내가 비참하게 된 것이에요. 열두 살 때에 하이츠와 히스클리프를 포함한 어린 시절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고 끝내는 쓰러시크로스 그레인지의 마님인 린턴 부인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방인의 아내가 된 것이지요. 그 이후로 나는 나의 세계로 쫓겨난 추방자이고 버림받은 부랑자가 된 것입니다. 오! 가슴이 타는 것 같아요. 다시 소녀로 돌아가고 싶어요. 반야만적이고 강하고 거칠고 자유로우며 마음에 상처받는다고 미치지 않고 오히려 그 상처를 비웃을 수 있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내가 왜 이렇게 변했지? 내가 왜 남들의 몇 마디 말을 듣고도 광란하듯이 반응하게 되었지? 내가 저 구릉지의 가시금작화 속에 있다면 다시 내 자신이 될 수 있을 거야.”〉
당연히 에드가는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녀가 겪고 있는 고뇌의 핵심을 알지 못한다. 그는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이에요”라는 캐서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캐서린은 에드가의 고통에 아예 무심하다.
그녀는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때는 평상시에는 도달 불가능한 무의식의 深層(심층)에 있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식을 잃고 환상에 빠지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그녀가 성인의 세계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정신이 야만과 문명으로 갈라지기 이전의 어린 아이의 野性的(야성적)인 세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무어랜드에서 뛰놀 때의 행복이 가장 깊은 자아이고 그녀의 정신적 고향이다. 그래서 로크우드가 창문에서 본 악몽의 아이는 하이츠로부터 쫓겨난 아이일 뿐 아니라 쓰러시크로스의 마님인 린턴 부인이기도 하다.
12세 때에 캐서린은 린턴家에 들어가서 ‘야생적이고 모자를 쓰지 않은 야만인’에서 의복과 예절에 신경을 쓰는 젊은 숙녀로 변형된다. 아름다운 머리칼과 신사계급의 예절과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에드가와 이사벨라가 그녀의 새로운 친구이고 옛 친구 히스클리프는 그녀가 새롭게 습득한 우아함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시골 숙녀의 전통적인 세계가 그녀에게 열린다. 그녀는 이것이 보다 거칠고 보다 오래 된 하이츠의 세계를 몰아 낼 것이라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시골 상류계급인 린턴家가 대표하는 敎養(교양)과 品位(품위)에서 나오는 문명적 魅力(매력)에 캐서린의 야성은 압도당한다. 그러나 야성의 追放(추방)은 캐서린의 정신과 육체를 파멸시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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