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햄릿’(Hamlet) ⑧

外見(외견)은 欺瞞的(기만적) 迷路(미로)의 덫
# 25
고매한 왕자 햄릿은 지옥의 세력에 드리는 供物(공물)


햄릿의 이런 본능적이고 反射的(반사적)인 행동은 ‘햄릿’ 전체를 통해서 나타난다. 그는 “곤자고의 살인”을 관람하다가 경련을 일으킬 만큼 흥분하여 공연을 중단시킨다. 그는 반사적인 행동으로 폴로니어스를 살해하고 로젠크랜쓰와 길덴스턴을 죽음의 땅으로 보낸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神(신)이 아니고 인간의 본능적인 행동이다.

인간은 흥분상태에서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면 먹이를 공격하는 호랑이처럼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되며 이성의 化身(화신)같은 햄릿도 예외는 아니다. 극장에서 왕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스릴은 天上(천상)의 神聖(신성)한 스릴은 아니다.

사람들은 햄릿이 왕을 죽이는 것을 고귀한 使命(사명)을 수행하는 행동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나중에 조용히 그 장면을 회상하면서 우리는 햄릿의 그러한 행동은 무의미하며 치명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우리가 상황을 바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행동의 순간이 아니고 그 後(후)이다. 그리고 극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생도 그렇다. 세월이 지난 후에야 사실을 바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햄릿은 죽어가면서 호레이쇼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한다:

〈잠시 하늘의 축복을 멀리하고
이 거친 세상에 남아 괴로움을 참고
이 햄릿의 이야기를 전해주게〉

멀리에서 軍樂(군악)소리가 들린다. 정복자 포틴브라스가 폴란드에서 돌아온다. 햄릿은 마지막 숨을 쉬면서 포틴브라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다. 이것은 대단한 아이러니이다. 先王(선왕)大햄릿의 모든 정복은 虛事(허사)가 된 것이다. 그의 敵(적)이었던 포틴브라스가 덴마크왕국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유령이 가졌던 복수의 열망은 이렇게 결말이 난 것이다.

포틴브라스는 죽은 햄릿을 군인으로 禮遇(예우)하라고 지시한다:

〈부대장 네 사람은,
군인답게 예를 갖추어서 햄릿 왕자를 단상으로 모셔라.
王座(왕좌)에 계셨더라면 가장 뛰어난 왕이 되었을 분이다. 그 분의 서거를 애도하여
군악과 弔砲(조포)를 소리높이 울리게 하라.
屍身(시신)들을 치워라. 이러한 광경은
전쟁터에는 어울리겠으나 이 자리에서는 심히 보기 흉하구나.
가서 병사들에게 弔砲를 발사하도록 명령하여라〉

‘햄릿’극의 마지막 단어는 “shoot(발사하라)”이다. 우리가 듣게 되는 마지막 소리는 葬送曲(장송곡)과 발사되는 砲(포)의 反響(반향)이다. 극의 마지막 장면이 전체의 의미를 집약하고 있다. 운명의 어떠한 揶揄(야유)도 이보다 더 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귀함을 갈망하였지만 햄릿은 죽음에 이르러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戰士(전사)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햄릿’의 주제는 전쟁과 복수이며 고매한 햄릿 왕자는 젊은이의 희생과 증오의 피를 요구하는 전쟁과 복수라는 괴물에게 드리는 供物(공물)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에는 두 개의 세력이 있다. 하나는 理性(이성)이고 하나는 비이성적인 동물적 本能(본능)이다. 이성은 빛이고 본능은 암흑이다. 이성은 맑은 정신이고 본능은 沒理性的(몰이성적)인 狂氣(광기)이다. 이성은 합리성을 추구하여 창조로 이끌고 본능은 비합리적인 파괴의 결말을 가져오기 쉽다.

햄릿은 天上(천상)의 일을 하도록 태어난 이성적인 인간이다. 그러나 그는 본능적인 행동으로 인해 패망한다. 햄릿자신도 이성이라는 地殼(지각)을 뚫고 분출하는 본능의 힘을 의식하고 있다. 그는 폴로니어스를 죽인 것에 대해서 사과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레어티즈에게 난폭한 짓을 한 사람이 햄릿라고? 절대 햄릿이 아니야!
햄릿이 정신이 나가서 그 자신이 아닐 때에 레어티즈를 해친다면
그 때는 햄릿의 소행이 아니야. 햄릿은 그런 행동을 반대한다.
그러면 누가 했느냐고? 햄릿의 광증이지. 그렇다면
햄릿도 피해자의 한 사람,
그의 광증은 이 가련한 햄릿의 적이란 말이다.〉

怨恨(원한), 악마, 광증, 살인명령… 이 말들은 인간의 본성 속에 潛伏(잠복)해 있다가 이성의 지속적인 警戒(경계)가 없으면 언제라도 뛰쳐나오는 지옥의 세력을 나타내는 이름들이다. 햄릿은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서 살인의 생각을 품게 되고 무책임한 행동을 恣行(자행)한다. 피의 복수는 햄릿의 성격이나 이념에 맞지도 않으며 실행불가능한 일이다. 햄릿은 이를 敢行(감행)함으로서 본의 아니게 어두움의 세력에 봉사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자신마저 파괴하게 된다.


# 26
外見(외견)은 欺瞞的(기만적) 迷路(미로)의 덫


3막과 4막에서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수녀원에나 가라고 몰아 부치는 수녀원 장면에서 폴로니어스의 살해와 햄릿과 레어티즈의 결투에까지 이르는 장면까지 計略(계략)과 음모와 隱蔽(은폐)와 假裝(가장)의 상황이 연속되면서 드라마의 위기는 최고점을 향해 나아간다.

이 과정은 햄릿이 처한 운명의 急轉(급전)을 明瞭(명료)하게 드러낸다. 덴마크의 왕자이며 왕위계승권자인 햄릿은 모든 사람의 눈에 왕국을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로 비치게 되며 클로디어스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햄릿을 제거하려고 한다.

이 불안한 動搖(동요)의 기간에 햄릿의 내면의식은 挫折(좌절)의 행로를 밟는다. 햄릿은 자신의 가치와 思惟(사유)가 혼란 상태에 빠지고 모든 계획이 무위로 끝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는 것이다.

햄릿의 내면의식의 進路(진로)에 초점을 맞추어야 제 3 독백 (사느냐 죽느냐)을 완벽하게 眺望(조망)하게 될 것이다. “사느냐 죽느냐” 독백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은 삶에 대한 불만과 疎遠(소원)이다.

유령의 폭로, 로젠크랜쓰와 길덴스턴의 이중성, 그를 도와주지 못하는 오필리아의 無力(무력), 그 자신이 경험하는 불안과 긴장-이것들은 햄릿의 삶을 지치게 하고 죽음의 잠이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만큼 그를 우울하게 한다.

독백에서 나타나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懷疑(회의)와 죽음과 삶의 선택에 대한 저울질, 인간의 삶에 대한 愛着(애착)과 동정심의 發露(발로)-이러한 것들은 비극적 주인공의 특징적인 고뇌의 결과이다. 고통의 인내와 역경의 甘受(감수)는 헤큐바에 상응하고 苦海(고해)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고 그것을 끝장내는 것은 피로스(Pyrrhus: 아킬레스의 아들)와 일치한다.

햄릿은 양심 때문에 복수를 지연시키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 비겁한 인간이라며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한다. 생각이 깊으면 輕擧妄動(경거망동)을 경계한다. 햄릿의 창백한 思念(사념)은 행위를 제약하고 행위의 선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지나친 配慮(배려)로 인해 행동이 불가능해지는 것-햄릿은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서 출구를 찾을 수 없다. 그는 어떠한 가치에도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자유와 가치는 그를 사로잡는 덫이 되고 망상이 된다. “사느냐 죽느냐”는 절대적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햄릿의 정신적 彷徨(방황)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방황은 생각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경험하게 된다. 3막이 가리키는 것은 인간정신의 한계에 대한 깊은 인식이다. 3막은 지식과 지식의 혼돈 및 정열과 행위의 無益(무익)함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표출하고 있다.

정열은 영혼의 발전소이고 모든 행동의 발전기이다. 그러나 정열의 통제는 말과 행동의 先決條件(선결조건)이다. 정열에 대한 節制(절제)가 없으면 인간은 정열의 노예가 된다. 아버지의 복수라는 피하지 못할 운명과 마주한 햄릿이 호레이쇼의 냉철함을 칭송하는 것은 克己主義的(극기주의적)인 냉정함에 대한 그의 갈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햄릿은 정열에 대한 통제력이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햄릿은 극중극의 上演(상연)에서 정열과 환경에 대한 지배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배우들의 연기를 거울로 하여 진리를 비추게 할 것이다. 그는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罪人(죄인)들의 내면을 폭로하고 있다.

극은 그들의 가면을 벗기면서 그들의 眞面目(진면목)을 비추어 낼 것이다. 왕의 역을 맡은 배우는 위선적인 국왕의 假裝(가장)된 미덕을 노출시킬 것이다. 왕 뿐 아니라 왕비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될 것이다.

햄릿은 오필리어를 어머니의 대리인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는 의도적으로 性的(성적)으로 모욕감을 주는 대화를 오필리어에게 강요하고 그녀를 창녀로 취급한다. 그는 오필리어를 조롱함으로써 어머니를 간접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국왕의 기도장면과 왕비의 내실장면에서 햄릿의 통제력은 혼돈을 일으킨다. 이것은 外見(외견)과 實在(실재)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경향이 있는 인간이성의 內在的(내재적) 脆弱性(취약성) 때문이다. 그는 현상세계의 외견의 欺瞞的(기만적)인 迷路(미로)의 덫에 걸린다.

국왕 클로디어스가 극중극의 살인 장면에서 충격을 받고 기도하는 장면에서부터 폴로니어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과 사건에서 외견과 실재는 정반대이며 행위는 의도와는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햄릿의 치명적인 과오와 오판으로 인해 자신은 물론 7명이 죽고 오필리어는 미친다.


# 27
이상주의적 열망의 패배와 좌절은 폭력을 낳는다


햄릿이 神에게 기도하고 있는 왕을 죽이지 않는 것은 힘이 없는 왕이 神(신)에게 애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복수는 神(신)의 소관’이라고 생각하거나 과도하고도 무자비한 복수심 때문도 아니다.

햄릿이 기도하고 있는 왕을 살려주는 것은 행위와 膺懲(응징)의 완전한 일치를 위해서이다. 懺悔(참회)하고 있는 왕을 죽이면 그는 천국으로 갈 것이다. 그러면 왕은 악의 행위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햄릿에게는 이것은 정의가 될 수 없다.

죄의 행동에 대해 그에 符應(부응)하는 刑罰(형벌)을 가하는 것이 절대적인 정의이다. 그리고 이런 완벽한 정의만이 죄악으로 병든 사회에 대한 분노와 혐오로 고통 받고 있는 햄릿의 영혼에 위로와 평안을 가져 올 것이다. 그러나 햄릿의 아버지는 이렇게 까지 철저한 정의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햄릿 외의 그 누구도 이런 절대적 정의를 요구하지 않는다. 햄릿은 완벽의 化身(화신)으로서 神의 의지를 대행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햄릿은 그가 가지고 있는 비극적 영웅의 특성-찬란하게 빛나는 절대적 진리의 추구-으로 인해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완벽을 추구하다가 自慢(자만)의 덫에 걸려 전락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절대성에 사로잡혀있는 이상주의자가 되고 자신의 도덕적 명령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패배하는 도덕적 절대주의의 희생자이다. 그는 정의라는 祭壇(제단)에 받혀진 희생의 羊(양)이다.

햄릿을 속이는 것은 바로 외견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irony)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왕은 실제로는 전혀 기도하고 있지 않았고 햄릿의 推論(추론)은 잘 못된 가정과 잘 못된 외견에 근거를 두었고 이러한 誤謬(오류)로 인해 그는 왕이 기도를 통해 영혼을 淨化(정화)하고 있다고 오판하여 그를 죽이지 않는 것이다. 그는 폴로니어스를 자기를 염탐하고 있는 왕이라고 착각하였기 때문에 그를 죽인다.

햄릿은 善意(선의)로 행동을 하지만 원래의 의도와는 반대로 악을 행하게 된다. 의도와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행동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클로디어스가 경험하는 상황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는 죄악의 속박에서 탄식하고 있는 클로디어스의 상황을 再演(재연)하고 있는 것이다:

〈오, 덫에 걸린 내 영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칠수록
더 꼼짝 못하게 되는 구나!〉

왕의 유죄를 확신한 햄릿은 정의의 수호자로서 그리고 징벌의 벼락을 치는 하늘의 대리인으로서 意氣揚揚(의기양양)하게 복수의 칼을 들지만 惡人(악인)을 처단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엉뚱하게도 죄도 없는 폴로니어스를 살해하게 된다. 그는 이제 피묻은 손과 죄악으로 오염된 정신을 가지게 된다. 그는 악과 싸웠지만 오히려 그 악에 매이게 된다. 정의의 실현이라는 그의 목표는 더욱더 멀어지게 된다.

왕비의 內室(내실)장면에서 햄릿은 어머니로 하여금 그녀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녀가 저지른 죄악을 인식하게 하려고 시도한다. 여기에서도 그의 예상은 빗나간다. 그는 오필리아를 오해하였듯이 어머니 거트루드도 잘못 본 것이다. 거트루드는 남편을 죽이지도 않았고 살인에 가담하지도 않았다.

모든 비극적 주인공이 경험하게 되는 顚落(전락)의 最低點(최저점)에 도달한 햄릿의 복수는 젊은 포틴브라스와 레어티즈의 복수와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父王(부왕)이 햄릿의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포틴브라스의 복수는 公的(공적)으로 인정된 군대와 동맹에 의해서 성취된다.

레어티즈의 복수는 기만과 배신으로 이루어진다. 포틴브라스와 레어티즈의 복수는 일반적인 형태의 것이고 公的(공적)인 의무이지만 私的(사적)으로는 부담이 되는 햄릿의 복수는 비극적 자아발견으로 귀결된다.

햄릿은 ‘생각의 창백한 그늘’이라는 말로서 행동을 마비시키는 생각의 偉力(위력)에 대해 독백한 적이 있었다. 이제 그는 “내 생각은 피를 보아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라고 생각하게 되고 복수에만 몰두할 각오를 한다. 이것은 패배의 徵候(징후)이다. 이상주의적 열망의 패배와 挫折(좌절)은 위험한 폭력을 낳는다는 것은 현대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비극적 영웅으로 태어난 햄릿이 발견하고 수용해야 될 것은 인간이 巨大談論(거대담론)이나 이상에 사로잡히면 그 담론이나 이상의 크기에 비례해서 障碍(장애)도 많아진다는 것이고 또한 神(신)에 가까울 만큼 이성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좌우를 철저하게 살펴야 하며 이렇게 하는 것은 능력을 發揮(발휘)하기 위해 지불해야 되는 대가라는 것이다.

이 시점에 와서 햄릿의 위대한 능력이 무력화되고 좌절되고 있다는 徵候(징후)는 그의 독백에서 보이는 비논리적 사고이다. 그는 비록 자신이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지 혹은 생각을 너무 적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못하지만 유령의 명령을 아직도 수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책감에서 포틴브라스의 무모한 도발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결행을 방해하는 ‘생각’을 비판하게 된다.

양심적이고 자책감과 분별력이 강하며 신중한 성격의 햄릿은 생각을 거침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포틴브라스의 용기와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참아내는 호레이쇼의 인내를 부러워한다. 그는 完全無缺(완전무결)을 요구하는 내면의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들을 부러워한다.

햄릿이 당면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意識(의식)의 시련’을 거부하는 것이다. 클로디어스의 선동과 음모에 하나의 도구로써 적극 참여하는 레어티즈나 국왕의 허락도 없이 임의로 募兵(모병)하여 덴마크 침공을 기도하는 포틴브라스 등은 햄릿처럼 의식의 고통을 받지 않고 행동하는 인간의 전형이다.


# 28
햄릿은 淨化(정화)의 제단에 바치는 희생의 제물


오필리어의 발광은 인생의 불행한 면을 浮刻(부각)하는 기능을 한다. 狂的(광적)인 고독의 深處(심처)에서 너무나 외로운 나머지 의식의 가장 깊고 후미진 곳에 숨겨져 있는 공포와 소망을 미친 노래로 나타내는 그녀의 悽然(처연)한 모습은 인간존재의 허약함과 덧없음을 강력하게 표출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인간의 행동과 열정과 죄가 지나가며 남겨 놓는 破片(파편)과 회복불가능의 손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녀의 노래가사 “주님,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가는 알지만 무엇이 될지는 모릅니다”는 이 장면의 중심사상이다.

그녀의 노래가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클로디어스왕의 범죄만이 아니고 왕비의 병든 영혼 및 양심의 가책으로 덫에 걸린 것처럼 괴로워하는 왕의 영혼이다. 오필리어의 노래와 꽃들은 왕과 왕비와 레어티즈 등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는 각자가 희미하지만 고통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거울과 같다.

“그녀는 근심과 고통과 정열과 지옥 자체를 은총과 아름다움으로 변모시킵니다”라고 레어티즈는 말한다. 오필리어의 영혼의 망가진 파편과 赤裸裸(적나라)한 광기와 죽음은 인간의 행복을 부정하는 것이며 인간이 겪어야 하는 상실을 나타낸다. 이런 부정과 상실은 묘지장면과 연결되면서 햄릿로 하여금 절대적 도덕의 한계를 깨닫게 한다.

묘지에서 햄릿은 인생사를 경멸하는 瞑想(명상)에 잠긴다. 그는 그가 어릴 때 그를 업어주던 요릭(Yorick)이라는 재담꾼의 해골을 들고 그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살아온 시간의 어두운 深淵(심연)을 생생하게 회상하게 된다. 해골은 죽음을 상징하며 웅변적이거나 정의롭지도 않고 강한 것도 아니며 악취로 햄릿의 내장을 뒤집어 놓는 문자 그대로 해골에 지나지 않는다.

햄릿은 고귀한 알렉산더 대왕의 시신은 塵土(진토)가 되었을 것이고 이 진토는 다시 구워져서 술통마개로 쓰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햄릿의 죽음에 대한 事實的(사실적)이고도 痛烈(통렬)한 인식은 묘지일꾼의 “죽은 사람 몸 안에 있는 수분은 시체를 썩히는 데 좋아요”라는 말에 의해 더욱 더 浮刻(부각)된다.

그는 죽음에서 공포와 악취와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1막의 첫 독백에서

〈“아, 이 너무나 더러운 몸
녹고 녹아 한 방울의 이슬이 되고 싶구나”〉

라고 말할 때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때는 햄릿의 죽음에 대한 祈願(기원)은 思念에 머물면서 현실과는 乖離(괴리)되어 있었다. 죽음에 대한 憧憬(동경)은 사실이었지만 죽음을 말하는 용어가 상당히 아카데믹한 것이었고 죽음은 삶의 비애와 고달픔을 終熄(종식)시키는 수단으로써 바람직하게 보였다.

비록 정신이 우울한 상태에 있었지만 햄릿은 운명이 不可抗力的(불가항력적)이라 하더라도 운명에 굴종에 하기보다는 운명과 투쟁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삶의 무의미에 대한 의식 때문에 심신이 망가지지도 않았었다.

이제 햄릿은 죽음을 추상적인 아닌 구체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無(무)가 되며 인간은 죽음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죽음을 진심으로 수용할 자세를 가지게 된다.

묘지일꾼들이 파고 있는 무덤이 오필리어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 된 햄릿은 또 하나의 큰 충격을 받는다. 자신에 대한 레어티즈의 격렬한 비난을 엿듣고 햄릿은 응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오필리어의 무덤과 레어티즈가 과도하게 늘어놓는 哀悼(애도)의 辭說(사설)은 햄릿에게 새로운 힘을 주면서 그의 마음에 크나큰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가슴에는 열정적인 자기 주장의 파도가 솟구쳐 오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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