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햄릿’(Hamlet) ⑪

사람은 저속한 배역을 맡아도 위대한 배우가 될 수 있다
# 36
햄릿은 인생 드라마의 꼭두각시 배우


유령은 햄릿을 복수에 얽어매지만 이보다 더 微妙(미묘)한 방법으로 유령이 햄릿을 끊임없이 붙어 다니며 괴롭히는 것이 있다. 햄릿으로부터 자유를 빼앗아간 바로 그 무서운 인물이 理性(이성)에 있어서 고귀하고 능력에 있어 무한대인 바로 그 이상적인 인물이라는 것은 엄청난 아이러니라 하겠다.

노르웨이의 포틴브라스왕과의 영웅적인 匹馬單騎(필마단기)의 결투에서 입었던 갑옷을 그대로 입고 아들 앞에 나타나는 햄릿왕은 인간적인 威嚴(위엄)과 가치의 表象(표상)이며 햄릿의 뱀 같은 삼촌이 죄악의 악취로 오염시키기 이전의 에덴동산 같았던 덴마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햄릿의 이름이 아버지와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先王(선왕)은 햄릿이 崇仰(숭앙)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고 있다. 햄릿도 匹馬單騎(필마단기)의 결투를 한다. 그의 전투는 형이상학적이며 惡(악)과의 싸움이다.

햄릿왕과 포틴브라스왕의 용맹한 결투의 추억이 ‘햄릿’의 비극에 執拗(집요)하게 따라다니고 햄릿과 클로디어스와 그리고 햄릿과 레어티즈의 대결에서 크나큰 배경으로 작용한다.

출생에 의해 제한을 받고 클로디어스에 의해 밧줄에 매이고 유령에 의해 붙들려 있는 햄릿은 자유와 自存(자존)을 强迫的(강박적)으로 갈망한다. 사람은 ‘정열의 노예’나 ‘운명의 여신의 손가락에 놀아나는 악기(pipe)’는 되지 말아야한다.

극의 처음 3막까지 클로디어스는 로젠크랜쓰와 길덴스턴을 통해서 그리고 햄릿은 극중극을 통해서 상대를 악기처럼 ‘연주(play)’하려고 한다. 이 싸움에서 햄릿이 승리한다. 그는 클로디어스의 心中(심중)을 쥐어뜯어서 자제력을 상실하게 하는 데 성공한다.

햄릿은 로젠크랜쓰와 길덴스턴에게 “너희들이 나를 무슨 악기라고 부르든 나를 화나게 할 수는 있지만 나를 마음대로 연주는 못할 것이다”라며 자신의 자유를 지켜낸다. 햄릿은 이어서 방금 들어온 폴로니어스에게로 돌아서서 구름의 모양에 대한 게임을 시작한다.

그는 폴로니어스로 하여금 구름을 낙타와 족제비와 고래처럼 보인다고 말하게 하는 등 폴로니어스를 악기를 다루듯이 마음대로 조종한다. 햄릿은 그 누구라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악기처럼 소리를 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경멸적으로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햄릿이 스스로 타인의 악기가 되는 폴로니어스 같은 인간을 경멸하는 것은 자신도 일종의 악기(pipe)에 불과할 것이라는 비통한 心情(심정)의 發露(발로)일지도 모른다.

햄릿은 인생이란 빈약한 연극에 불과하며 자신도 자신의 고귀한 가치관에 逆行(역행)하는 인생 드라마에서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꼭두각시 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햄릿은 자신의 소리가 아닌 다른 곡조를 연주해야한다. 그는 복수하는 사람의 격정적인 음악을 연주해야 하는 것이다. 햄릿에게는 복수는 전통적이고 陳腐(진부)한 가치이다.

유령이 햄릿에게 복수의 역할을 부여하는데, 인간의 尊嚴(존엄)을 대표하는 이상적인 인물이 아들을 복수라는 低劣(저열)한 행동으로 내 모는 것은 대단히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햄릿이 하나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고 그 역할도 도덕적 이상주의자 햄릿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수라는 살인의 역할이다. 햄릿은 유령의 명령을 수행해야하는 의무감을 가지면서도 복수에 반대하라는 自我(자아)의 명령도 따라야하는 矛盾的(모순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자신의 역할에 대한 햄릿의 거북한 감정은 배우들에 대한 그의 말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복수하는 사람의 役(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논평하면서 연기에서의 위엄 즉 우아함과 자제를 요구한다:

〈“배우는 臺詞(대사)를 입에 서툴게 더듬거리지 말고 우아하게 말해야 한다. 배우는 상스러운 몸짓을 해서도 안 되고 激情(격정)의 순간에도 節制(절제)를 보여야 한다. 격정을 폭발시키는 배우는 市井雜輩(시정잡배, groundlings)에게 갈채를 받을지는 몰라도 異敎徒(이교도)의 포악한 神이나 헤롯(Herod)왕 보다 더 나쁘다.

절제되지 않은 연기는 단지 빈약한 예술일 뿐 아니라 자연을 거역하는 것이고 햄릿자신과 같은 휴머니스트들이 대표하는 모든 것에 대한 侮辱(모욕)이다. 격노하고 고함지르는 것은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것이다.”〉


# 37
사람은 저속한 배역을 맡아도 위대한 배우가 될 수 있다


자신이 맡아야 하는 역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햄릿은 겸손과 자연과 인간의 자존을 毁損(훼손)하지 않는 복수를 시도한다. 그는 절제를 실행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자신의 폭풍 같은 격정을 馴致(순치)하기 위해 奮鬪(분투)한다.

폴로니어스家의 사람들은 매우 평범한 인물들로 햄릿의 노련함과 절제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폴로니어스는 자신을 마키아벨리 같은 政略(정략)가로 생각하지만 햄릿과 비교하면 햄릿의 말처럼 덩치 큰 아이에 불과하다.

슬픔을 통제하지 못하여 미쳐서 溺死(익사)하는 오필리어는 미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광기를 가장하여 자신의 强點(강점)을 숨기는 햄릿과 克明(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레어티즈도 오필리어와는 다른 형태로 미치게 되고 햄릿이 경멸해 마지않는 類型(유형)의 복수하는 인물이 된다.

햄릿은 자신이 배우의 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레어티즈는 자신의 역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햄릿은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失性(실성)한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에 그의 맥박은 '항상 절도 있게 뛰고 있어요'라고 말하지만 레어티즈는 아버지의 죽음의 원인을 밝히라며 왕에게 대들다가 진정하라는 왕의 말에 “이 몸속에 진정할 수 있는 피가 한 방울이라도 있다면 나는 내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다'라며 신파조로 응답한다.

레어티즈는 무분별한 激情(격정)으로 인해 자신이 클로디어스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스스로 자기는 왕의 풍금이라고 한탄한다. 그가 아버지 폴로니어스의 충고를 충실히 따랐더라면 스스로 비운을 초래하는 어리석은 짓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속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말 것이며
섣부른 생각은 행동에 옮기지 마라〉

역설적이게도 폴로니어스의 충고는 레어티즈보다는 햄릿에게 적용된다. 햄릿은 처음부터 격노를 통제하는 것의 중요성을 통찰하고 있다. 그는 그의 첫 독백의 끝에 가서 '그러나 가슴은 터져도 입은 다물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오필리아의 무덤에서 햄릿과 레어티즈는 遭遇(조우)하게 된다. 레어티즈는 보통 인간의 전형이고 햄릿은 특별한 인물이다. 햄릿은 레어티즈가 죽은 누이와 함께 무덤에 산채로 묻히겠다며 자신의 激情(격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앞으로 나서서 레어티즈를 비판한다:

〈哀痛(애통)의 말이 저렇게 맹렬하여
하늘에 떠도는 별조차 놀래서 일어서게 하는
저 자는 누구인가?〉

햄릿은 레어티즈의 감정처리 스타일을 嘲弄(조롱)하고 있지만 그의 조롱의 지독함이나 신랄함은 오필리어에 대한 자신의 진지한 슬픔에서 緣由(연유)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과 괴이하리만큼 과장된 행동이 지배하는 세상은 햄릿처럼 분별력이 뛰어난 인물을 알아보지 못하는 법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비정상적인 소리와 분노가 압도하는 곳에서는 순수한 감정은 믿어지지 않는다. 햄릿이 레어티즈를 戱畵(희화)하는 것은 그가 속한 세상의 通俗性(통속성)과 이러한 세상에서 그가 맡아야 하는 역할에 대한 비통한 반항의 표시이다.

왕을 죽일 수 있는 好機(호기)-클로디어스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있을 때-를 맞이하고도 복수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순간에 복수를 행동에 옮긴 결과 엉뚱하게도 폴로니어스를 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햄릿은 정신적 근육을 느슨하게 푼다.

그는 배에 몸을 싣고 운명의 바다에 자신을 맡겨 버린다. 바다는 그가 맞서서 싸우기 위해 무기를 들었던 ‘고난의 바다'이다. 왕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올 때 그는 실제로 배를 타고 떠나며 이제는 환경을 지배하려하지 않고 환경에 반응만 할 뿐이다.

그는 다시 덴마크로 돌아오지만 오필리어의 무덤에서 격정적인 순간을 한 번 보여줄 뿐 세상만사에 비교적 무심하다. 그는 어떠한 힘에 의해서도 조종당하지 않겠다는 이전의 생각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햄릿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검술시합에 동의하기 전에 공허한 凡節(범절)의 상징 같은 인물인 오르직과 한 판을 벌린다. 폴로니어스와 구름의 모양에 대해 게임을 벌렸던 것처럼 햄릿은 오르직으로 하여금 먼저 날씨가 따뜻하다고 말하게 하고 다음에는 춥다고 말하게 하고 마지막에는 다시 춥다고 선언하게 하여 그를 장난감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다룬다.

햄릿은 마음만 먹으면 왕이든 누구든 오르간처럼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햄릿이 오르직을 무덤에서의 레어티즈처럼 조롱하는 것은 초기의 자존심강한 왕자를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햄릿은 더 이상 반항적이지는 않은 것 같으며 그의 座右銘(좌우명)은 이제 “마음이여, 너의 본성을 잃지 마라” 가 아니고 “세상의 일에 상관하지 마라”이다. 그는 절대적 자유를 위해서 투쟁하기를 중단했고 자신의 삶을 자신이 형성하는 自存(자존)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도 중단하였다.

그는 이제 자신이 자신의 삶을 造形(조형)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마침내 햄릿은 신분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자신은 神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며 아버지처럼 하나의 인간이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先王(선왕)햄릿은 세상의 법과 의무에 따라 匹馬單騎(필마단기)의 전투를 하였다.

그래서 아들인 햄릿도 거짓된 騎士道(기사도)와 毒劍(독검)의 부패한 세상에서 아버지처럼 싸워야 한다. 그러나 햄릿의 레어티즈와의 결투는 아버지의 포틴브라스와의 전투만큼 영웅적이다. 햄릿은 자신의 방식대로 싸워서 그도 군인의 자격이 있음을 증명한다.

포틴브라스의 “햄릿 왕자님을 군인답게 예를 갖추어서 단상으로 모셔라”라는 명령은 햄릿의 영웅적 행위를 기리는 말이다. 온 세상이 하나의 무대이고 모든 사람이 단지 배우에 불과하다면 위대성의 기준은 전문성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 기준에 의하면 햄릿은 위대한 배우이다. 왜냐하면 그는 복수라는 粗惡(조악)한 역을 맡았지만 그 역의 수행과정에서 인간의 위엄이나 겸손함을 손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비록 사슬에 묶여 있을지라도 어느 정도의 자유는 있는 것이다. 사람은 저속한 배역을 맡더라도 연기하기에 따라서는 위대한 배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끝)


(다음 편부터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해설편이 연재됩니다.)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