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우주에는 구원이 없다
이스마엘이 棺(관)으로 만든 救命帶(구명대)를 타고 유일하게 살아 남았을 때 죽음을 통해 재생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카타르시스도, 구원도, 재생도 아니다.
일시적인 조화와 희망도 “둘째 날에 帆船(범선) 한 척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마침내 나를 집어 올렸다. 그 배는 잃어버린 자식들(선원들)을 찾아 逆航(역항)하다가 또 하나의 고아만을 찾아낸 멀리 돌아가는 레이철호(The Rachel)였다”라는 음울하고 절망적인 말에 의해 霧散(무산)되어 버린다.
'白鯨(백경)'에 구원이 없는 것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우주의 모순 때문이며 삶과 죽음에 의미를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멀빌에게는 그리스나 셰익스피어의 비극처럼 고통과 고난 뒤에 오는 재생과 보상의 약속은 없다. 고난의 항해 끝에 오는 약속의 항구도 없다. 존재의 고통스러운 모순들이 조화를 이루는 超越(초월)의 땅도 없다. 죽음을 통한 삶도 없다. 삶과 죽음만 있으며 개인에게는 그 둘 중 하나에 대한 선택이 있을 뿐이다.
멀빌에게 가장 가공스러운 현상은 잘못된 선택의 폭력적인 결과이다. 멀빌은 또한 많은 욕망과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창조적이면서도 모순덩어리인 인간이 전개하는 부조리한 행위에서 희극적인 절망을 본다.
모순의 포로인 인간이 벌리는 극적인 행위도 全知的(전지적) 神에게는 微物(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멀빌은 삶에 대한 牧歌的(목가적)이고 에로틱한 애착과 동료 인간에 대한 이상적인 연대에 감동한다. 상호 애착만이 우주의 고아인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행복이다.
이스마엘은 야만족인 퀴케그와도 친숙하게 지낼 만큼 조화로운 인물이다. 그는 가능한한 많은 사람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連帶(연대)의식이 강한 인물이다. 그는 키케그의 棺(관)을 구명보트로 삼아서 죽음에서 살아난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살아남은 것을 淨化(정화)나 재생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일순간의 기쁨과 조화는 “두 째 날에 배 한 척이 가까이 점점 다가와서 나를 집어 올렸다. 그것은 항로에서 이탈하여 실종된 선원들을 수색하다가 단지 또 하나의 고아를 발견한 라헬 호였다” 라는 으슬으슬하고 우울한 절망의 말에 의해 사라져 버린다.
이스마엘은 갈라진 틈을 통해서 우주를 들여다 본 것이다. 그의 시야에 나타나는 우주의 중심에는 사랑이 아니고 파괴만 존재한다. 그는 천상에도 지상에도 그 어디에도 그의 친족을 찾을 수가 없다. 인간은 모두 天涯(천애)의 고아인 것이다.
이스마엘에게는 고난 후에도 재생이나 보상을 약속하는 무지개는 없다. 인간존재의 고통스러운 모순을 조화로운 결말로 이끌며 구원을 가져오는 초월적인 질서나 존재가 없으며 혼돈만 있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부활하는 삶은 없다. 단지 삶과 죽음이 있을 뿐이다.
살아 있을 동안에도 인간은 행복한 삶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멀빌은 一瞬間(일순간)의 오판과 잘못된 선택이 가져오는 가공스러운 결과에 戰慄(전율)한다. 그는 또한 존재론적으로 무자비한 모순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囚人(수인)과 같은 존재이면서도 무한의 상상력과 창조성을 가진 인간이 전개하는 부조리한 행위의 희극적인 양상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멀빌은 이상적인 동료인간에 대한 애착에 깊은 감동을 느끼면서 이것만이 인간이 바랄 수 있는 행복의 유일한 약속으로 간주한다. 인간은 죽음의 존재이고 우주의 고아이지만 연대의식을 통해서 이스마엘처럼 삶의 난파선에서 구조를 받게 된다.
모비 딕은 아합의 自我(자아)가 投射(투사)된 幻影(환영)
唯我獨尊(유아독존), 최면에 걸린 自己愛(자기애), 자신이 만든 감옥 속에 갇히는 것, 이러한 주제는 멀빌 뿐 아니라 미국 작가들의 중요한 관심이었다. 물이나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영상에 몰입되어 자아를 상실하는 것- 이것은 지나친 自己愛(자기애)의 위험성을 표출하는 문학적 장치이다.
'白鯨'의 바로 序頭(서두)에는 바닷가에서 바다의 환희에 몰두하여 꼼짝 않고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crowds of water-gazers)이 나온다. 이들은 샘물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몰입하여 익사한 Narcissus(나르시스)의 이미지와 같다. 그것은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삶의 幻影(환영)이다.
아합은 나르시스처럼 모비 딕의 이미지에 뛰어 들어 익사한다. 인간은 아합처럼 심오하고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는 우주의 深淵(심연)을 들여 볼 때 자신의 이미지나 자아의 投射物(투사물)인 흰 고래를 보게 된다.
혹은 이스마엘이나 일등항해사 스타버크같이 자신의 이미지를 보지만 自我(자아)가 아닌 현실과 삶의 脈絡(맥락) 속에서 비교적 객관적인 관점으로 본다. 아합처럼 된다는 것은 자아의 마력에 최면이 되어 우주를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지배하려는 충동에 지배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마엘처럼 된다는 것은 자아와 非自我(비자아)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자아의 바다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타버크같이 된다는 것은 아합을 이해하고 동정하지만 ‘삶에 대한 집착’ 때문에 흰 고래에 대한 不敬(불경)스러운 추적을 주저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게는 백경은 불경과 광기에 복수하는 괴물에 불과하다.
자아의 포로가 되어 色盲(색맹)이 된 아합
99章의 ‘The Doubloon’(더벌룬)은 ‘白鯨’의 의미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더벌룬은 아합이 메인마스트에 박아 놓은 金貨(금화)이다. 그 금화는 모비 딕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 차지하게 된다. 그 금화는 에콰도르(Ecuador)에서 온 것이다.(에콰도르는 赤道(적도)를 의미한다) 에콰도르는 세상의 중간에 있는 나라이다.
금화에는 안데스산맥에 있는 세 개의 산이 새겨져 있고 각각의 산은 봉우리에 불꽃과 탑과 소리 지르는 수탉으로 된 관을 쓰고 있다. 금화는 天球(천구)의 晝夜平分線(주야평분선)이 지나는 天球赤道(천구적도)와 지구의 남극과 북극의 양극단의 중간을 지나는 적도를 나타낸다.
에콰도르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운명에는 두 가지 대안이 있다. 하나는 고립과 광기와 자살로 이끄는 자기도취이고 또 하나는 불완전하지만 다소 객관적인 자세로 세상을 수용하는 것인데 이것이 삶을 보장해준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금화를 보며 명상에 잠긴다.
아합은 아래와 같은 독백을 늘어놓는다:
〈저 견고한 탑, 저것이 아합이다. 저 화산, 저것이 아합이지. 용기 있고 담대하며 승리를 자랑하는 저 수탉도 아합이야. 모두가 아합이지. 그리고 이 둥근 금화는 더 둥근 球(구)의 이미지이며 그 球(구)는 마법사의 거울처럼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신비한 자아를 반사해 주지.〉
다른 인물들도 각기 나름대로 금화의 상징에 반응을 하지만 아합처럼 금화의 이미지에 구속되지는 않는다. 스타버크는 금화에서 기독교적 신앙의 상징을 본다. 스터브는 삶과 죽음을 기꺼이 수용하고 현재를 즐기는(carpe diem)철학을 상기시킨다. 스터브보다 상상력이 더 부족한 플래스크는 금화를 가지고 960개의 시가(cigar)를 살 수 있다고 계산한다.
점쟁이인 만크스만은 금화를 불길한 징조로 여긴다. King Lear(리어王)의 광대를 연상시키는 핍은 인간은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며 절망에 사로잡힌다. 그가 보기에는 자아의 포로가 되어 색맹이 된 사람은 아합뿐만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한계 때문에 사람들은 우주의 궁극적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만 찾지 못하고 보려고 하지만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핍은 “나는 본다, 너는 본다, 그는 본다; 우리는 본다, 너희들은 본다, 그들은 본다”라고 중얼거린다.
# 6
인류의 고통에 무심한 神들에게 분노하는 아합
지금까지 우리는 아합에 대해서 자기도취와 자기신뢰에 몰입하여 實在(실재)의 환영인 모비 딕을 추적하다가 죽음을 자초하는 인물로 간주하여 왔지만 시각을 달리하여 보면 아합은 實在(실재)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아 고뇌하고 방황하고 실재의 추구과정에서 상처입고 고통받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아합은 우주의 不可解性(불가해성)에 대해 '광기와 열정과 끓는 피와 불타는 이마를 하고 분노에 차서 입에 거품을 뿜으며 인간이 아닌 악마처럼 그의 먹이(진리)를 추격'하는 도정에서 파멸적 독재를 하지만 그의 추구는 자기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가 인류의 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것이다.
그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善과 惡의 경계선이 모호한 우주의 암흑에 정면으로 맞서서 實在(실재)의 의미를 줄기차게 추구한 ‘고귀한' 영웅이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어두움의 深淵(심연)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스타벅은 그것과 화해하고 스터브와 프래스크는 어두움을 一笑(일소)에 부쳐버리며 이스마엘은 어두움의 심연을 보지만 그 곳으로 뛰어들지는 않는다. 이들은 암흑의 탐색보다도 아내와 자식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상의 사람들이다.
아합만이 “정신이 깊은 사람들이 느끼는 것”, “태초부터 존재해온 저 불가사의한 惡意(악의: 삶의 고통과 신비와 공허)- 가슴을 굳어버리게 하는 것, 인간을 압제하고 당황하게 하고 압도하는 모든 것”을 느꼈다. 그는 햄릿이나 리어왕 등 비극의 주인공들처럼 자신의 불운을 인류공동의 운명으로 간주하고 그들처럼 운명에 과감하게 저항했다.
인류가 당하는 부당한 고통에 대한 아합의 증오와 복수는 악마적이지만 아합은 神들에게 조롱받고 고통당하는 인류에 대해 憐憫(연민)의 情(정)을 느낀다. 인류의 고통에 대한 아합의 同情(동정)은 橫說竪說(횡설수설)하는 흑인 소년노예 핍(피핀의 약칭)에게 하는 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萬年雪(만년설)위에서는(하늘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존재는 있을 수 없어. 오! 차갑게 얼어붙은 하늘의 神들이여, 여기 이 세상 아래를 보십시오. 당신들이 이 불쌍한 아이를 만들었소. 그리고는 내팽개쳐 버렸어요, 당신들 방탕한 난봉꾼들이!
이리 봐, 애야. 아합이 살아있는 한, 지금부터 핍의 집이 되어 줄 거야. 너는 나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와 닿는다. 心琴(심금)으로 짠 줄이 너와 나를 함께 묶어 놓았구나. 자, 선실로 내려가자… 여기보다 더 무서운 곳으로 내가 너를 이끌지 않는 한 나는 너의 손을 놓지 않겠다.
그러니, 자, 선실로 가자. 보라! 神들은 모두 선하고 인간은 모두 악하다고 믿는 사람들아, 보라! 고통받는 인간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 全知全能(전지전능)의 神들을 보라. 그리고 비록 백치같이 어리석고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사랑과 감사의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찬 인간들을 보라. 아이야, 황제의 손보다는 너의 검은 손을 잡고 너를 이끄는 것이 더 자랑스럽구나!”〉
아합의 모비 딕에 대한 광적인 분노는 부조리한 우주에서 부당하게 당하는 고통에 대해 인류가 느끼는 분노이며 아합은 자신이 하나의 포탄이 되어 모비 딕의 肉峰(육봉)위에서 散華(산화)했다.
(계속)
허만 멀빌의 '白鯨'(Moby-Dick) ③
- 朴承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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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1-23, 1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