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인간은 보호자 없는 '우주의 고아'
멀빌은 존재의 무의미(無意味, meaninglessness)함에 절망한 허무주의자이지만 그를 더욱 절망시키고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神이 창조한 자연의 잔인함이다. 자연은 생명을 창출하면서 또 생명을 죽인다. 神은 죽이기 위해서 생명을 빚어내는 것 같다. 자연에서는 殺害(살해, killing)가 생존의 기본법칙으로 되어 있다.
포경선 피쿼드號(호)의 뱃전에 메어 놓은 고래를 뜯어먹기 위해 모여드는 상어 떼들은 잔인한 자연의 표상이다. 퀴케그와 또 한 명의 水夫(수부)가 고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창으로 상어 떼를 퇴치하는 장면은 자연의 잔인성을 처절하게 부각시킨다:
〈“그들은 세 개의 랜턴을 내려 피로 붉게 물든 바다 위를 비추었다. 두 명(퀴케그와 또 다른 수부)은 고래창으로 상어들의 머리 쪽을 내리찍으면서 상어들을 계속 죽였다. 그러나 바닷물이 튀어 오르고 상어떼들이 마구 날뛰는 혼란 때문에 상어가 잘 보이지 않아서 창이 급소인 머리에 바로 맞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이것이 상어들의 도저히 믿기 어려운 포악성을 드러내었다. 그놈들은 서로 서로의 창자를 뜯어먹을 뿐 아니라 몸을 활처럼 굽혀서 자기 자신들의 창자도 뜯어먹는 것이었다.”〉
상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생존을 위해서는 다른 생명체를 逋脫(포탈)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모두 살해자들이며 우리가 살해의 죄로 벌을 받지 않는 것은 자연에는 善과 惡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모비 딕의 흰색처럼 가치의 색채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에 善惡(선악)이 존재한다면 상어는 물론 인간도 살해의 죄목으로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아합은 자연의 도덕적 공허와 허무의 하얀 벽에 善惡의 색채를 부여하려다가 패배하는 것이다.
고래를 잡는 포경선의 선장으로서의 아합이 자신을 불구로 만든 고래(모비 딕)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五大洋(오대양)을 누비는 것은 코믹할 만큼 부조리하다. 모비 딕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동족을 학살하는 것을 생업으로 하는 포경선 선장 아합의 다리 하나 뜯어내는 것은 전혀 죄가 되지 않는 것이다. 자연에는 正義(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도덕의 진공지대이다.
이러한 도덕적 허무주의는 처음으로 香油(향유)고래를 잡은 날 밤에 이스마엘의 마음에 떠오르는 철학적 想念(상념)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한 사람(스터브)이 방금 잡은 고래고기를 먹는다. 그리고 그 고래의 기름으로 불을 밝히고 먹는다. 최초로 소를 죽인 자는 틀림없이 살인자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교수형을 받았을 것이다. 만약 소들이 재판관이 되어 재판을 했더라면 그는 반드시 교수형을 당했을 것이다.
살인자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면 그도 당연히 교수형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토요일 밤에 肉(육)고기 시장에 가보라. 그리고 죽은 네발 달린 짐승들을 쳐다보고 있는 살아 있는 두발 달린 짐승들(사람들)을 보아라. …식인종이라고? 식인종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는가?
饑饉(기근)에 대비해서 빼빼 마른 선교사를 소금에 절여 지하창고에 보관하는 저 야만족 피지인(Fijian)이 더 낫지; 다시 말하자면 거위를 땅바닥에 못질해놓고 파테이더퐈그라(살찌운 거위간을 갈아서 만든 요리)를 즐기는 당신들 문명화되고 계몽된 美食家(미식가)보다는 先見之明(선견지명)이 있는 저 피지인이 최후의 심판 날에 더 나은 대우를 받을 거야.”〉
제69장 ‘The Funeral’(葬禮)는 잔인한 생존조건과 허무주의적 우주관을 詩的(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거대한 태클(활차와 로프를 이용하여 물건을 오르내리는 장치)은 이제 그들의 임무를 끝내었다. 머리가 잘리고 껍질이 벗겨진 고래는 대리석 무덤처럼 빛난다. 죽은 고래는 비록 색깔은 변했지만 크기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거대하다.
그것은 천천히 멀리 더 멀리 표류해 간다. 만족할 줄 모르는 상어들이 그것 주변의 바다 물을 틔기며 갈라놓는다. 고래 屍體(시체)위의 공기는 귀를 째는 소리를 내는 바닷새들의 탐욕스러운 날개 짓으로 소용돌이치고, 새들은 匕首(비수)같은 부리로 죽은 고래를 모욕하듯이 찌른다.
거대하고 머리 없는 하얀 그 유령은 배로부터 점점 더 멀리 표류해 간다. 그리고 고래가 흘러가는 길 따라 수십 평방미터의 상어와 수십 입방미터의 바닷새들이 殺害(살해)의 소음을 증폭해간다.
그 소름끼치는 광경은 거의 정지 상태에 있는 우리의 배로부터 여러 시간 동안 보인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아래, 상쾌한 바다의 아름다운 수면 위에서, 즐거운 微風(미풍)에 떠밀리면서, 저 거대한 죽음의 덩어리가 계속해서 표류해 간다. 그리고는 무한히 먼 遠景(원경)속으로 사라진다.〉
멀빌은 고래를 자연이 창출해 내는 최고의 생명체로 간주하고 이러한 고래를 죽이는 자연에서 허무주의적 모순과 부조리를 절감했다. 고래의 무의미한 죽음과 죽은 고래를 뜯어먹는 상어와 바닷새의 살벌한 생명의지에서 도덕적 가치나 神의 섭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부조리한 세계를 창조한 神에 대한 아합의 분노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는 ‘우주의 고아’이며 우주에는 고아를 보살펴 줄 보호자가 없다.
# 10
인간이 神의 영역을 침범하면 저주를 받는다
‘白鯨'은 존재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려는 아합의 비극적 행로의 기록이다. 아합은 不可思議(불가사의)한 우주와의 싸움에서 피를 흘린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신비의 벽은 위협적이다. 그는 허무의 벽에 갇혀 있는 죄수이다. 그가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벽을 향해 돌진하여 뚫고 나가는 것이다.
아합은 벽 저쪽에 있는 존재의 궁극적 의미의 추구는 위험하며 사람을 미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존재의 궁극적 의미는 무의미한 空虛(공허)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우주에 遍在(편재)하는 惡(악)에 대해서 우주의 통치자에게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는 존재의 허무와 우주의 악에 절망하고 있다. 그는 그의 절망과 분노도 허무의 심연에 매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멀빌은 우주와 허망한 전투를 벌리고 있는 아합을 동정한다. 그는 “인간이 不可知(불가지)의 세계를 객관화하고 나(Me)와 神(a God)과 자연(a Nature)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모비 딕과 싸우는 아합처럼 자신의 목에 걸 올가미를 스스로 준비하게 된다. 모비 딕은 형체가 없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표상이며 화신이다.”라고 말한다.
멀빌은 不可解(불가해)한 우주의 深淵(심연)을 들여다보는 아합의 프로메테우스的 (Prometheus: 천상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기 때문에 제우스神의 노여움을 사서 큰 바위에 사슬로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먹히는 고통을 당함) 용기는 영웅적이며 찬양할만하지만 인간이 아합처럼 神의 영역을 침범하려고 하면 그 오만과 不敬(불경)으로 인하여 神의 분노를 사고 저주를 받고 고난을 당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 11
아합의 영웅적인 자질
前述(전술)한 바와 같이 슬픔과 위대함 그리고 고난과 영웅적 행위는 不可分(불가분)의 관계이다. ‘白鯨’은 神에게 싸움을 걸고 神과 싸움으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는 비극적 영웅의 이야기이다. 神이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문제와 싸움으로서 아합이 겪게 되는 정신적 고통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그 이미지는 고통받는 신체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멀빌은 “끌려가다, 비틀다, 얻어맞다, 찔리다, 관통 당하다, 채찍질당하다, 관절이 빠지다, 피부껍질을 벗기다, 깊이 베이다, 고문당하다, 끓는 물에 데다, 뼈가 부러지다” 등 상처받는 육체의 이미지를 지속적이고도 유동적으로 동원하여 아합의 정신적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갑판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아합 묘사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는 불길이 사람의 四肢(사지)를 완전히 불사르지 않고 처참하게 태워 버렸을 때 火刑柱(화형주, stake)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이 時點(시점)부터 아합이 언급되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이러한 이미지는 樂節(악절)처럼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밤중에 ‘불타는 머리’(blazing brain)에 의해 고문을 받으며 “아합은 눈을 부릅뜬 채 불길에 휩싸인 침대에서 탈출하듯이 선장실에서 뛰쳐나오곤 했다.”
스타버크는 아합의 눈에서 “내 몸을 말라 시들게 하는(shrivel) 어떤 전율적인 비애”를 본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아합의 뇌는 다 타버린 분화구라고 말한다. 아합은 모비 딕을 추격하면서 사람을 ‘미치게 하고 고문하는’ 모든 것, ‘근육을 찢어버리고 뇌를 굳어지게 만드는 그 모든 것’에 의해서 휘몰린다.
그가 쓰고있는 쇠로 만든 비애의 冠(관)의 ‘들쭉날쭉’한 테두리는 머리를 난타 당하는 싸움을 하고 있는 그에게 살가죽을 벗기는 듯한 고통을 가한다. 그의 ‘찢어진’ 몸과 ‘칼에 베인’ 영혼은 서로 서로에게 피를 흘린다. 그의 “치유할 수 없는 생각이 가진 무자비한 ‘毒牙’(독아)는 그의 내면을 ‘갉아먹고’ 외면을 불태운다.”
그는 “얼굴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고통을’ 가지고” 부하들 앞에 선다. 그는 “하나님! 하나님! -나의 심장을 갈라놓으십시오! 내 머리를 박살내십시오!” 라며 절망의 소리를 지른다. 그의 희망은 “독수리의 날카로운 주둥이처럼 그의 머리를 쪼아댄다”. 그는 슬픔으로 “시들어간다”:
〈번갯불이 내 두개골을 뚫고 지나간다. 눈알이 너무 아프다. 두들겨 맞은 내 머리는 斬首(참수)를 당해서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 같다.〉
독수리가 그의 심장을 파먹는다. 그는 “내리치는 번개를 맞아 아래에까지 찢어졌지만… 아직은 살아 있어서 시커먼 불탄 자국을 가지고 있는 巨木(거목)의 줄기 같다.”
아합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지만 그 고통을 통해서 고귀하게 된다. 멀빌은 “우울함과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영웅적인 인간이 배워야하는 것을 조금도 모르는 사람이다”라며 “白鯨”에서 영웅주의와 고통은 竝存(병존)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아합은 황혼녘에 “그렇다면 내가 쓰고 있는 관은 너무 무거운가? 이것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쓴 못으로 만든 롬바르디아의 鐵冠(철관, Iron Crown of Lombardy)… 그러나 이 철관은 수많은 보석으로 빛나고 있어. 쓰고 있는 나는 관의 번쩍임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난 그것을 쓰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사람을 눈부시게 현혹시키는 관이지” 라며 독백을 한다.
비애의 관을 쓰고 있는 아합의 정신은 모든 보통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고상하다. 그는 “외로이 서있는 거대한 느릅나무”이며 스칸디나비아의 왕이다. 그는 프로메테우스이며 “에덴의 천국이후 쌓여온 세월의 모든 짐을 지고 분투하고 있는 아담이다.” 인간은 비극의 비전(vision)을 가질 때에 거인의 모습을 한 영웅이 된다.
神들에 대한 프로메테우스的(적)인 반항과 강렬한 자존심도 아합이 가지고 있는 비극적 영웅의 자질이다. 아합은 거의 습관적으로 우주를 지배하는 神들에게 반항하며 그의 자존심은 하늘의 神들에게 도전할 만큼 높다.
그러나 그의 자존심은 허영이나 자만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겪고 있는 고통에서 나온다. 아합의 자존심에는 자주적인 정신이 內包(내포)되어 있으며 그의 자주정신은 비극적인 비전을 가질 때에 인간은 神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위대한 사람만이 암흑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비극적 비전에 따르는 슬픈 위대함은 비록 환상일수는 있어도 그 슬픔은 기쁨보다는 보다 더 고귀한 정서이다. 인류를 위해 고통을 당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위대함이 있어서 아합은 “그리스의 神처럼 자존심이 강하다.” 아합은 神에게 반역하는 영웅적인 大天使(대천사)이다.
(계속)
허만 멀빌의 '白鯨'(Moby-Dick) ⑤
- 朴承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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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1-29, 1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