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최고의 위대함은 최고의 슬픔 속에 있다
아합은 폭풍 같은 분노나 고뇌 속에서 죽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면서 죽는다. 모비 딕과의 최후의 전투가 있기 전에 아합은 자신의 운명에 諦念(체념)한 상태에 있다.
‘촛불’(the Candles)章에서 아합은 선원들을 향해 불붙은 작살을 겨눈다. 그의 唯我獨尊(유아독존, solipsism)은 가장 난폭해지고 그의 분노는 가장 격해진다. 폭풍의 밤이다. 아합은 분노를 거리낌 없이 폭발시킨다. 그는 모비 딕을 죽이기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진 작살을 자기와 같은 인간인 동료와 선원들을 향해 겨누고 분노의 작살을 휘두르는 것이다.
그것은 神들에게 반항하는 것보다 더 큰 不敬(불경)의 죄가 된다. 폭풍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 번갯불에 망가진 나침반을 고치면서 아합은 모비 딕을 죽이겠다는 집념에 더욱 더 몰두한다. 그는 ‘치명적인 자만심’에 사로잡혀있다.
몇 시간 뒤에 아합에게 변화가 온다. 그 변화의 결정적 요인은 핍이다. 선원들로부터 봉변을 당하고 있던 핍은 아합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아합은 핍을 붙잡고 있는 선원에게 “손을 떼라!”라고 명령한다. 그 순간 아합의 영혼은 핍에게 “애야, 네가 내 마음의 가장 깊은 중심에 와 닿는구나. 너는 내 心琴(심금)으로 엮어진 줄로 나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자, 마음을 가라 앉혀라”라고 말하게 된다.
아합은 아직도 인간에 대한 神들의 非情(비정)함을 저주하고 있지만 이 순간부터 그의 音調(음조)는 보다 조용해지고 보다 덜 거칠고 분노도 누그러지게 된다. 그는 심지어 神을 모독하고 비난한 것이 옳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
이는 핍을 선장실에서 寄居(기거)하도록 한 이후로 아합의 마음속에는 슬픔이 자리잡고 점점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출항하기 전 펠레그 선장이 이스마엘에게 아합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그 어떤 것이 아합에게 돌아온 것이다.
펠레그 선장은 아합에게도 아내와 자식이 있다는 것을 밝힌 후에 “아합에게 치유할 수 없는 악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젊은이, 절대로 그렇지 않네. 타격을 받고 저주를 받았지만 아합에게도 인간적인 데가 있다!”라고 말했었다. 이제 아합에게 잃어버렸던 인간성이 돌아 온 것이다.
인간성이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고통에 동정할 줄 알고 인간과의 유대와 連帶(연대)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다. 아합은 모비 딕에 대한 증오 때문에 이러한 인간적인 속성을 밀쳐놓았었다. 그는 밤중에 갑판 위에서 왔다갔다하며 걸을 때 그의 고래뼈 다리가 내는 소리 때문에 선원들이 잠을 설친다는 것을 개의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이를 지적하는 스터브를 무자비하게 叱責(질책)했었다. 몸에서 잘리어 나간 한 쪽 다리처럼 아합의 인간성도 인간적인 정서로부터 절단되어 있었던 것이다. 흰 고래 모비 딕에게 빼앗긴 아합의 다리는 不可解(불가해)한 존재의 추구로 인해 불구가 된 아합의 정신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핍은 신비스럽게도 아합의 정신을 치유하는 역할을 계속한다. 아합은 “나는 너로부터 가장 놀랄만한 철학을 빨아들이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핍을 축복하고 구원해 달라고 神에게 간청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핍을 죽이겠다고 위협하기도 한다. 핍이 모비 딕에 대한 그의 복수의지를 약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 章(장)들에서 핍은 등장하지 않지만 그가 아합으로부터 이끌어 낸 柔順(유순)함은 계속해서 자라난다. 아합은 자신의 영혼을 계속해서 유순하게 하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핍을 선장실에 남겨 둔다. 갑판 위에서는 아합은 더 이상 神에게 반역하는 천사장(Lucifer)이나 오만한 마왕이 아니다. 그는 神에게 레이철호의 선장을 축복해 달라고 간청한다.
모비딕과의 최후의 決戰(결전)이 있기 전에 스스로 망루에 올라가서 모비 딕을 찾는다. 그는 자신의 생명줄(life-line)을 스타벅에게 맡긴다… 그는 스타벅에게 자신의 아내와 자식이야기를 한다… 이제 그는 복수를 추구하기보다는 복수를 운명으로 생각하고 그 운명에 체념하듯이 자신을 맡긴다. 그의 생각은 이 세상의 저편에 있는 것 같았다.
모비딕을 추격하는 3일 동안 아합은 긴장되고 흐트러짐이 없는 非情(비정)한 인간처럼 보였다. 그는 아직도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멀리하고 있지만 더 이상 오만하지는 않다. 그는 단지 고독할 뿐이다. 둘째 날의 추격이 끝나고 페달러가 실종된 것을 알고 그는 몸을 뒤틀며 괴로워한다.
복수심에 불타는 가슴에서 나오는 그의 분노는 페달러처럼 실종되어 버린다. 그는 운명의 여신에게 자신의 모든 행동은 하늘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날 밤 그는 모비딕과 대면하지 않는다. 그는 동쪽을 바라보며 죽음을 기다리듯이 운명의 마지막 날이 밝기를 기다린다… 모비 딕이 목격되어도 아합은 행동하지 않고 망설인다.
그는 바다를 凝視(응시)하고 배를 걱정하며 돛대꼭대기를 향해서 작별의 인사를 한다.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스타버크에게 말한다. 그의 예언은 실현된다. 그의 마지막 말에서 그는 그가 죽고 없을 때 피쿼드가 사라지는 것을 슬퍼한다.
“오, 고독한 삶에 다가온 고독한 죽음이여! 오, 이제 나는 최고의 위대함은 최고의 슬픔 속에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저주를 퍼부으며 모비 딕에게 돌진한다. 피쿼드호에서 그에게 들려오는 마지막 소리는 “오, 선장님, 선장님, 돌아오십시오” 라는 핍의 울부짓는 소리였다.
핍이 아합에게 끼친 영향은 ‘白鯨’의 마지막 부분을 비애의 帳幕(장막)으로 덮고 모비 딕에 대한 증오로 인한 긴장을 완화시키고 고뇌하는 한 인간에 대한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火焰(화염)같은 비극 ‘白鯨’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憐憫(연민)의 情(정)으로 인해 深遠(심원)한 餘韻(여운)을 남기게 된다.
# 15 자아와 세계가 일체가 되면
모호성의 바다에 溺死(익사)한다
‘白鯨’은 상징적 항해이다. 이스마엘은 항해를 비전과 동일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비전의 場(장)은 바다이다. 모든 街路(가로)가 바다를 향해 뻗어있는 섬의 도시 또는 그 도시 바닷가의 ‘바다를 응시하는 사람들’(crowds of water-gazers)처럼 인간 각각의 감수성은 大洋(대양)을 향해 열려있다.
바다의 환상에 몰두해 있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은 바다에 대한 조용한 명상으로 하나가 되어있다. 마음이 바다에 끌리는 것은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왜 고대의 페르시아 사람들은 바다를 성스럽게 생각했을까? 왜 그리스인들은 바다에게 神性(신성)을 부여하고 바다의 神을 主神 제우스의 친형제라고 생각했을까? 이 모든 것에는 분명히 뜻이 있을 것이다.”〉
다음 章(장)에서 그 의미는 보다 선명하게 나타난다. 돛대 꼭대기 망루에서 바다를 지켜보고 있는 파수꾼(watergazer)은 파도의 물결처럼 요동치는 想念(상념)으로 환희에 빠져
〈“마침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는 발아래에 있는 신비한 대양을 인간과 자연에 未滿(미만)해 있는 저 깊고 푸른 바닥 모를 영혼의 可視(가시)적 이미지로 착각하게된다.
그를 피해 달아나는 모든 이상하고 보일 듯 말듯하며 유동적이고 아름다운 것들, 바다위로 솟아오르고 있는 모든 희미하고 형체를 분별하기 힘든 형태의 물고기지느러미들이 그에게는 사람의 영혼 속을 휙휙 날라 지나가는 저 포착하기 힘든 생각의 화신처럼 보인다.”〉
항해하고 있는 사람의 정신은 파도처럼 유동적인 상태에 있는 세계와 융합하게 된다. 자아의 정체성은 汎神論(범신론)적인 바다 속으로 沈潛(침잠)해 버린다. 그러나 이 순간 이러한 “나는 투명한 眼球(안구)가 된다. 나는 無(무)이다. 나는 모든 것을 본다” 라는 비전은 갑자기 위험하게 된다.
자신과 외부와의 구별이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면 투명한 안구가 되고 모든 것이 사라지기도 하고 모든 것이 보이기도 하는 환상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이 돛대에서 미끄러지며 몸이 바다로 떨어지는 순간 자아와 세계는 분리되며 외부의 사물은 자아와 다른 존재가 되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무한대의 공간이 펼쳐지게 된다.
그리고 사물과 일체가 되었던 자아는 공포 속에 되돌아온다. 자아와 세계는 별개의 존재이지 하나가 아니다. 바다 속에 잠기는 것은 溺死(익사)하는 것이다. 아합은 沒入(몰입)으로 인해 익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마엘은 이러한 몰입에 회의를 느낀다. 바다를 응시하는 것(water-gazing)은 하나의 역설적인 행위이다. 絶對(절대)에 대한 탐색과 절대에 대한 지식이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르시스(Narcissus)이야기의 깊은 의미이다. …나르시스는 샘물(fountain)에 비치는 자신의 아름다운 이미지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미치도록 괴로운 나머지 샘물 속에 뛰어들어 익사한다. 나르시스가 본 것과 같은 이미지를 우리는 바다와 강에서 보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幻影(환영, phantom)이다.”〉
그 이미지는 우리 자신의 反影(반영)일 뿐 아니라 생각의 화신이다. 그 이미지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바다의 환영과 같다. 그 환영은 우리가 해안에 서 있을 때는 이해할 수가 없으며 그 환영을 쫓아 우리가 바다 안으로 뛰어 들면 바다는 파멸적이 된다.
모비 딕은 무한히 변화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수한 형상들의 總合(총합)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이미지이며 ‘공중에 솟아 있는 雪山(설산)같은 하나의 거대한 환영’이다. 모비 딕의 ‘끊임없는 航行(항행)’은 백색의 모호성의 반복이고 백색은 유동적인 실재에 대한 同義語(동의어)이다.
백색의 다양한 의미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유동적인 바다는 비이성적이며 모호하고 無形(무형)이다. 백색이 주는 궁극적인 공포는 백색은 定議(정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백색은 무색이다. 무색은 구별이 없으며 개별성을 부정한다. 고로 백색은 유동적이어서 定形(정형)이 없는 바다와 같다.
이성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세계는 정의를 불가능하게 하며 접근을 불허한다. 이러한 세계를 접근 가능한 것으로 바라보는 몽상가를 세계는 삼켜버린다. 이스마엘은 ‘바다를 응시하는 것’의 위험을 의식하고 있다. 바다의 모호성과 무형 속으로 사라지는 피쿼드호는 이스마엘의 우려를 입증하고 있다.
自滅(자멸)에 의해서만 피쿼드호는 백색을 뚫고 들어간다. 이스마엘은 모호성과 무한성을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는 항해를 수용하면서도 항해에 대한 공포를 느끼면서 바다의 모호성 속으로 몰입하지 않고 항해를 정지함으로써 自滅(자멸)을 면하게 된다. 그는 허무의 백색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허무의 바다에 익사하지 않고 구조되는 것이다.
아합의 비극적인 운명은 정지상태에서 머물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이다. 아합의 動機(동기)는 자연에 복수하고 神에게 반항하는 악마적 자존심(satanic pride)보다 더 깊은 곳에 놓여 있다.
그는 금전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교환의 매개물인 돈은 그에게는 그 가치를 추구하는 상징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그는 고래의 금전적 가치를 부정한다. 이것은 이성적인 思考(사고)의 거부이다.
그는 可視(가시)적인 사물과 유동적인 세계를 구분한다. 그에게는 “인간과 모든 사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분리되어 달아난다.” 가시적인 사물은 단지 ‘板紙假面(판지가면)’에 불과하다. 가면의 벽을 허물고 ‘존재의 구석진 곳’으로 들어 가야한다. 아합의 죽음은 이러한 논리의 결과이다.
그에게는 흰 고래(the White Whale) 모비 딕이 벽이다. 그는 작살을 던지며 벽을 뚫고 들어간다. 그리고 “비록 고래에 몸이 묶여 있지만… 여전히 추격하면서…”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사물은 관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가정은 誤謬(오류)이기 때문에 아합은 죽는다.
최후의 흰 고래 추격이 있기 오래 전에 아합이 말하듯이 “그 죽은 그리고 눈먼 벽은 모든 캐묻기 좋아하는 머리들을 그 벽에 충돌시킨다.” 아합은 실재에 도달하기 위해 항해를 극단까지 감행함으로써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인간의 지성과 그 지성이 탐구하는 세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 용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는 不可解(불가해)한 세계와 직면해 있다. 그는 의미가 대단히 매혹적이지만 파괴적인 假面(가면)과 직면해 있다. 그는 인간적인 의미가 없는 벽과 마주 서 있다. 아합은 “저 불가해한 것을 증오한다”라고 선언한다. 그는 그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의미의 모호성과 탐구하는 정신에 저항하는 사물을 증오한다. 그래서 그의 ‘삶의 행동’(living act)은 반항의 행동으로 변한다.
‘白鯨’에 나타나는 최대의 역설(paradox)은 항해의 필요성과 실패의 필요성이다. 인간으로서 지식의 탐구는 필수적이다. 궁극적인 것, 神적인것, 불가해한 것에로의 항해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삶의 행동이며 인간 영혼의 속성이다. 그러나 아합의 파괴적인 지식추구는 허무로 溶解(용해)되어 버린다. 아합은 극단에까지 상징적 항해를 추구하다가 그 항해의 無益(무익)함을 깨달으면서 파멸하는 허무주의자이다.
(계속)
허만 멀빌의 '白鯨'(Moby-Dick) ⑦
- 朴承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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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2-02, 11: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