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아무것도 남기고 갈 게 없습니다"

*2017년 10월31일

오늘 아침에 안경알을 닦기 위해 안경과 함께 안경집에서 주는 손바닥만한 네모진 헝겊조각 한 모퉁이에 적힌 글자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임명희 안과의원 중앙극장 건너편 전화 266-5639’ 이 안과에 여러 번 다녔습니다. 내 눈이 노안에 접어들던 그 무렵이었을 겁니다.

임명희 안과 의사가 이화여대 의대 출신이고 김옥길 총장을 정성스럽게 모시던 의사여서 나도 그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 의사는 사람됨이 너그럽고 매우 친절한 의사여서 환자가 무척 많았습니다. 그러나 명이 짧아 잘 되던 병원을 그대로 두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수십 년 임명희 의사를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오늘 새벽 이 헝겊 조각에 적힌 임명희라는 이름 석 자를 읽고 그를 생각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나에게 남긴 것은 이것이 전부지만 이를 계기로 “사람은 무엇을 남기고 갈 수 있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의 저명한 기독교인 우치무라 칸조는 <후세에의 최대의 유물>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매우 감명 깊게 그 책을 읽었습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그 나라 역사에 혁혁한 공적을 남긴 유명 인사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인으로 태어나 거기에 묻히는 사람이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 같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오늘 지구상에 사는 70억도 더 되는 억조창생 중에서 과연 몇 사람이 인류의 기억 속에 계속 살아있을 겁니까?

잘생기고 공부 잘 하는 아들·딸이 오늘 있다고 해서 그의 아들·딸이 계속 잘 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큰 돈 번 기업가가 만든 공익재단이 오늘의 큰일을 많이 하지만 100년 뒤에도 그런 일을 잘 하고 있을 것으로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유명한 사람들이 내일도 유명하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안과의사 임명희만큼 이름을 남기기도 어렵습니다. 나는 이제 어쩔 수 없는 노인이 되어 떠날 날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엇이라도 남기고 갈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한 마디뿐입니다. “아무것도 남기고 갈 것은 없습니다”

“Thus I come and thus I go"
-William Shakespeare

우치무라 칸조는 우리 모두가 남기고 갈 수 있는 것은 ‘용감하고 고상한 생애’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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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13일

아무 생각 없이 애국가 4절을 부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무궁무진한 애국충정이 스며있어서 감동이 저절로 가슴을 울립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는 이 백성의 뿌리 깊은 종교적 본성을 명시한 것이고 ‘우리나라 만세’는 이 나라의 무궁무진한 미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표명입니다.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라는 핑계를 내세우며 부르지 않으려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통일이 되면 대한민국의 ‘애국가’보다는 북의 인민공화국의 ‘국가’를 불러야 한다는 잘못된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애국가’를 폄하하는 것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이 빨리 망해야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일종의 미신에 사로잡혀 ‘애국가’를 마음속에서 저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북의 독재체제를 ‘고무찬양’하면서도 대한민국 땅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뻔뻔스러운 인간들 - 그런 꼴을 매일 보면서, 대한민국이 혹시 천치바보가 아닌가 의심하게도 됩니다.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을 저주하면서도 이 나라의 요직에 앉아서 떵떵거리는 파렴치한 인간들을 볼 때 끝날이 그리 멀지는 않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나는 한반도의 파멸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최후 승리를 예언합니다. 김정은이 북의 동족을 착취하면서 권력의 영구화를 위해 무서운 수소폭탄까지 만들었다고 자랑하지만 그 수소폭탄이 사실상 그 사람의 무덤을 파고 있습니다.

애국가를 힘차게 부릅시다. 애국가는 하늘이 이 겨레에 내리신 크나큰 축복입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그 나라가 바로 이 대한민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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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님은 중키에 매우 단정한 용모를 지닌 분이셨습니다. 나는 아버님보다는 어머님을 많이 닮은 아들로 태어난 것이 확실합니다. 내가 태어나던 새벽에 면장이시던 아버님은 출장 중이셔서 나를 보지 못하셨고 이튿날 산모와 신생아를 보시고, “당신 정말 큰 수고했어요”라고 칭찬해 주셨다고 어머니는 자랑삼아 여러 번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종이 장에 한시를 한 수 적어놓은 것을 보시고, “어떤 놈이 글씨를 이 따위로 썼냐, 읽을 수가 없다”라고 비난을 하셨답니다. 옆에 계시던 어머님이, “거 동길이가 써놓은 건데”라고 하셨더니 단박 표정이 달라지시더니, “읽기는 좀 어렵지만 글씨는 참 잘 썼다”라고 하셨답니다. 어머님은 아버님의 그런 편견을 비웃으셨습니다.

고려대학의 김상협 총장은 내가 펴낸 책 <대통령의 웃음>에 수록된 우스갯소리들 중에서 ‘자구새끼 챙이'라는 것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셨습니다. 옛날 시골 장터에 한 젊은 엄마가 못생긴, 아주 못생긴 아들을 업고 나타났는데 장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를 ‘쓴 오이 보듯’ 보고 지나가더랍니다.

그런 차에 훤칠하게 생긴 장돌뱅이 한 사람이 지나가다 등에 업힌 그 아이를 보고 “야 그 놈 잘 생겼다. ‘자구새끼 챙이’처럼 생겼구나”라고 하였답니다. “잘 생겼다”는 그 한 마디에 감격한 이 젊은 엄마가 그 칭찬한 장돌뱅이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면서 “점심이라도 들고 가세요”라고 하였답니다.

아들 칭찬에 크게 감동한 이 엄마는 닭 잡고 제비국 끓여 극진히 대접하고 보냈답니다. 그런데 저녁에 신랑이 돌아왔기에 자초지종을 다 고해 바치며 칭찬 받은 감격을 되새셨답니다. “그 장돌뱅이가 뭐라고 했는데?” 남편이 물었습니다. “자구새끼 챙이처럼 잘 생겼다”고 했어요. 그 때 남편이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야단을 쳤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당신 몰라? ‘자구 새끼’는 평안도 사투리로 멱자구(개구리) 새끼라는 뜻이니 못생겨도 되게 못생겼다는 뜻이야”

부모의 편견 때문에 못생긴 아들·딸도 살아남게 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런 편견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들의 생존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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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과격한 사상과 이념을 가진 사람을 ‘빨갱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고 해외에서도 흔히 쓰이는 낱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극단적 사회주의를 부르짖는 사람이나 계급투쟁이니 노동계급의 독재니 하는 목표를 내세우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일컬어 ‘색깔 논쟁’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흰둥이’라는 말은 별로 쓰이지 않습니다.

내가 평소에 잘 아는 고영주 변호사가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다”라는 발언을 하여 2015년 명예훼손으로 고발되어 아직도 그 민사소송은 법원에 계류 중인 줄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 민사소송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다시 형사소송으로 그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가고 고영주 변호사는 화제의 인물이 되었는데 나는 그를 위해 자진하여 무료변호를 담당하고 싶지만 불행하게도 변호사 자격증이 없어 그렇게 할 수 없는 사실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내가 아는 고영주 변호사는 한 시대를 같이 살면서, 언제나 어디서나 바른 말만 하는 의로운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다”라는 말을 되풀이 할 만큼 신념에 가득찬 인물입니다.

이번 대선이 있기 전에 제대를 강요당한 전 모 장군은 문재인 후보와 면담 한번하고 나오면서 “만나보니 문재인 후보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더라”라고 한 마디 하여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한 전 장군도 문재인 후보가 공산주의자라고 알고 있었던 것도 사실 아닙니까? 문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고영주 변호사를 불러서 단 한 번도 면담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고영주 변호사는 여전히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다”라고 믿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국민들 가운데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다”라고 믿고 있는 사람은 상당수 있는 것 같고 그런 사연으로 하여 지난 대선에서 59% 가까운 유권자가 문재인 후보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것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번 대선에서는 문 후보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르겠지만) 문재인 후보는 당당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매우 바쁜 줄은 나도 알지만 고영주 변호사를 한 번 청와대로 초청하여 고 변호사를 설득하는 노력을 시도해보는 것이 옳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한번 만나보면 문재인 대통령도 고 변호사의 정의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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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3일

옛날에 많이 쓰이던 말입니다. 총을 쏘면 ‘쾅’하고 요란한 소리가 나니까 주변에서나 또는 멀리서도 그 요란한 소릴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면 난처하게 될 것이므로 죽이고 싶은 놈을 아무도 모르게 해치우고 싶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고얀 놈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근년에 스파이 영화를 보면 이미 소리 안 나는 총은 개발 생산되어 그 총으로 미운 놈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면 ‘쾅’하는 굉음이 아니라 ‘피식’하는 낮고 약한 소리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조용히 사람을, 미운 놈을, 없이하는 간편한 방법이 생긴 것도 같습니다. 영화의 장면으로 봤기 때문에 소리 안 나는 그런 총이 정말 있는 지 없는 지는 나도 아직 모릅니다.

하늘이 만약 ‘소리 안 나는 총’ 한 자루와 탄환 한 알을 넣어서 주면서, “네가 꼭 죽이고 싶은 놈을 한 놈만 골라서 해치우라”고 분부하신다면 오늘의 75억 인구 중에서 어느 놈 하나를 거명하실 겁니까? 일제 때라면 나는 경찰의 고등계 형사 중의 한 놈을 골라잡았을 것입니다. 일제시대의 사상범으로 몰려 잡혀가서 유치장에 있는데 고등계 형사라는 우리 동족 중의 한 놈이, 뒤에 유명한 여류시조 시인이 된 이 젊은 여성을 취조하면서 이 처녀의 음부를 담뱃불로 지졌다는 겁니다. 하도 심하게 하니까 옆에 있던 일본 놈 형사가 “그만 하지”라며 역정을 내더랍니다. 그 조선인 형사는 내가 내 손으로 해치우고 싶습니다. 내게 소리 안 나는 총만 있다면!

해방이 되고 인민위원회가 생기고 적위대(赤衛隊)가 조직된 평양에 살던 때 가장 미워한 놈은 김일성이었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해치우고 싶은 원수 중의 원수였지만 그때에도 나에겐 ‘소리 안 나는 총’ 한 자루가 없어서 쏠 생각도 못하고 월남하여 내가 몸을 피하고 말았습니다.

손원일 제독의 동생 되는 손원태 씨가 Omaha, Nebraska에서 개업한 의사였는데 어렸을 적에 김일성과 친구였다고 합니다. 김일성이 하도 보고 싶다고 연락을 하기에 한 번 평양에 찾아갔더니 정말 대접을 후하게 하더랍니다. 김일성이 처음에는 못 알아보다가 “야, 너 원태 아니야. 우리가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냐. 좀 자주 오라”고 하더랍니다. 그 뒤에도 몇 번 가서 Rolex 금시계도 하나 받아왔다고 들었습니다.

김일성이 손원태 의사에게 “인실이 잘 있냐?”고 묻더니 “인실이 한 번 오라고 해”라고 하여 여동생 손인실 씨에게 그 말을 전했더니, “오빠, 내가 미쳤어? 내가 거길 왜 가?”라고 하더랍니다.

그런 말을 듣고 나니 김일성을 향해 ‘소리 안 나는 총’의 방아쇠를 당길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이젠 그 사람도 저 세상으로 갔고 나도 이곳을 떠날 날이 멀지도 않았으니 ‘소리 안 나는 총’도 이젠 나에게 필요가 없습니다.

김동길 / www.kimdonggill.com



*2016년 8월15일

조국이 해방되던 그 날이 어제만 같은데 그것이 벌써 71년 전의 일이라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1945년 8월 15일에 18세이던 젊은이가 해마다 나이를 한 살씩 먹다보니 어느덧 89세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읍 괴천공립국민학교의 촉탁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 담임이 되었는데 내 반에는 나하고 동갑인 정기탁이라는 몸집도 크고 생기기도 잘 생긴 학생도 한 사람 있었는데 그 학생이 아직도 북에 살아있다면 내년에는 함께 90이 될 것입니다.

일본말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일본총독부가 조선어교육을 전적으로 금지하고 그들이 국어라고 주장하는 일어만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집에서는 부모와 한국말만 하다가 등교한 뒤에는 일본어로만 말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어독본이 있었지만 우리가 국민학교 3-4학년 때 전면 폐지가 되어 나보다 뒤에 학교에 다닌 동생들은 조선어를 배울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익힌 일본어라 아무리 나이 들고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해도 일본말처럼 잘할 수는 없습니다.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던 그 날의 광경이 지금도 내 가슴에 생생합니다. 영유 시내에서 그 중대한 정오 12시 라디오 방송을 나는 내 귀로 들었습니다. 당시의 일본의 천황 히로이도가 직접 육성으로 방송을 하는데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약해서 그 전문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일본이 연합군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한다는 말만은 듣는 사람 누구나가 다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방송을 듣고 일본인들의 고개가 뚝 떨어졌고 그들은 일본어로, “이렇게 빨리 망할 줄은 몰랐어”라고 말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 날은 정말 감격의 날이었습니다. 벌써 동네 청년들이 감추어 두었던 태극기를 찾아들고 나왔습니다. 정말 가슴이 뛰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동네 기슭 언덕에 세워졌던 일본 신사를 본받은 작은 사당은 청년들이 올라가 다 때려 부셨습니다.

그러나 그 감격은 얼마 안 되어 다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욕심의 독버섯이 무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다 못해 시인 김기림(金起林)이 '우리들의 8월로 돌아가자'라는 유명한 시를 썼습니다. 해방이 되던 그 날에는 저마다 조국의 문지기라도 되어 나라를 섬기겠다던 자들이 모두 한 자리 하려고, 돈 좀 벌어보겠다고, 아귀다툼을 하니 보기가 역겨워 '우리들의 8월로 돌아가자'고 전 국민에게 호소한 것입니다. 시간이 되면 이 시를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아마도 1947년이나 1948년에 이 시를 읊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를 가르치던 김기림은 6·25 때 납북되어 소식을 모릅니다.

아, 우리들의 8월로 돌아갑시다.

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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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12일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오늘 207회 생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가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251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그는 나의 삶에 매우 중요한 인물로 남아있는 것일까요?

그와의 인연은 매우 오래 됩니다. 아마도 한 80년 전쯤 될 것입니다. 일제 때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때 수신(修身) 교과서에 링컨에 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 실려 있었습니다. 내용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켄터키 시골에 가난한 통나무집에 태어났지만 성공하여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을 뿐 아니라 남북전쟁에 승리하여 미국역사의 거인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직 철도 들지 않은 어린 나이였지만 가난 때문에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나도 링컨처럼 성공하여, 호강하시도록 해드리고 싶은 어리석은 욕망이 있었을 뿐입니다. 나에게는 뛰어난 재능도 없었고, 일본인들에게 시달리는 평범한 ‘식민지의 소년’에 불과하였으나 정의감만은 두드러진 어린이였습니다. 그것이 이 소년이 타고난 DNA의 특색이었습니다.

해방이 되고 월남하여 백낙준 박사 밑에서 면학의 길을 더듬었습니다. 해방 직후의 풍조를 따라 영문과에 다녔지만 선생님이 풀 스칼라십(full scholarship)을 주선하여 나에게 미국유학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문학에 별 소질 없는 나는 내가 흠모하던 두 스승 (백낙준 박사와 함석헌 선생)께서 전공하신 역사 공부로 전환하여 Boston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미국역사를 전공하였습니다. 내가 지도교수에게 Abraham Lincoln에 관한 논문을 쓰고 싶다고 하였더니 아미 수천 권 단행본이 나왔는데 무엇을 더 쓸 것이 있겠느냐고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기에 내가 고집했습니다. “나의 어릴 적 꿈을 살려 링컨에 관해 쓰고 싶다”고 하여 허락을 받았습니다. 논문 심사위원들은 “오랜만에 재미있는 학위논문을 읽었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작년 오늘 Lincoln Academy of Korea를 창설하여 링컨에 관심 있는 이들이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링컨을 생각하며 점심을 함께 합니다. Lincoln은 21세기에도 우리 곁에 가까이 살아 있습니다.

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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