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쯤 지나 로마시대 때의 항구유적인 프톨레마이스에 도착했다. 박물관을 구경하다가 변소를 찾으니 관리인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양심의 가책 없이 지중해를 지향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작은 어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운 로마시대의 도시엔 石柱와 미로처럼 복잡하고 거대한 지하시설이 남아 있었다. 간단하게 둘러본 뒤 계속해서 동쪽으로 달렸다. 차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린 마운틴」 지역이 펼쳐졌다. 동서로 길이 약 200㎞ 남북으로 너비가 최대 100㎞쯤 되는 해발 300∼700m의 고원지대였다. 전체면적은 경상남도를 합친 정도가 아닐까? 전개되는 풍경은 유럽적이었다. 과수원, 아담한 야산, 과일 노점상, 유럽풍의 집. 군데군데 쓰레기. 아직 리비아人들은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나쁘다는 의식이 없는 듯했다. 물론 지정된 쓰레기처리장도 없다.
高原지대의 지형은 점점 험준해져 갔다. 깊은 계곡, 토굴, 절벽…. 金이 사는 『여기가 영화 「사막의 라이온」에 나오는 곳이다』라고 설명한다. 리비아를 점령한 이탈리아를 상대로 독립항전을 지휘한 영웅 목타르(영화에선 앤소니 퀸)가 이런 험악한 지형을 배경으로 게릴라 전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깊이가 100m는 실히 될 것 같은 계곡 위에 걸쳐진 거대한 시멘트 현수교는 장관이었다. 지슬와디 알 쿠프 다리. 스웨덴 회사가 건설했다고 한다. 金이사는 『쇠가 아닌 콘크리트 빔으로 다리판의 무게를 지탱하도록 한 것이 대단한 기술이다』고 감탄했다.
다리를 건너 10여분을 달려가니 북한 건설회사의 본부가 길 오른쪽에 서 있었다. 입구에 다가갔더니 경비원은 없었고 본부 안도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입구 바깥의 진열장 안에는 1993년 봄에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 李仁模 노인을 열렬히 환영하는 내용의 선전 畵報가 붙어 있었다. 리비아엔 북한 건설회사 이외에도 북한의 의사와 간호원이 여러 병원에 취업하고 있다. 이들과 동아건설 근로자들 사이엔 훈훈한 미담과 가슴 아픈 사연들이 경계심이나 적대감보다 더 많이 쌓여 있는 듯했다.
키레네의 샘물
山中도시인 알 베이다를 지나는데 경찰의 검문을 받았다. 우리 일행이 탄 두 車엔 SSB통신용 안테나가 달려 있었다. 물론 설치 허가증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도 두 경찰관은 팩팩 소리를 지르며 차를 몰고 따라 오라고 하더니 경찰서로 데려갔다. 알고보니 우리 차가 경찰車를 기분 나쁘게 추월했고 정지하라는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다고 화가 나 있었다. 아랍어語가 통하는 洪과장이 간절히 사과한 끝에 우리는 곧 풀려날 수 있었다. 다른 사복 경찰관이 『동아건설인데 봐주지 뭐』하면서 단속 경찰관을 달래더란 것이다. 오후 1시에 키레네(CYRENE)에 도착했다. 지중해가 10여㎞ 북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高原의 가장자리에 세워진 도시의 폐허 속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스-로마-비잔틴 문명으로 이어지면서 약1600이나 계속된 도시. 발굴돼 있는 부분은 주로 그리스-로마 시대의 것이다. 한때 20만 명 이상이 살았던 北아프리카 최대의 도시터가 작렬하는 태양 아래 누렇게 변색된 대리석과 석회석의 돌기둥·조각상·성벽·참호·야외극장·신전·개선문·우물·수영장의 골격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기원 전 7세기에 그리스의 테라섬 사람들은 가뭄과 기근 때문에 고향을 탈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델피의 아폴로 신전의 신탁을 받아보니 리비아로 건너가서 식민지를 건설하라는 명령이 나왔다. 바투스란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200여명의 젊은이들이 이곳에 상륙, 왕국을 세웠다는 것이 신화의 시작인데 거의 史實과 일치한다고 한다. 이들이 키레네를 택한 것은 용솟음치는 샘물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 샘물은 언덕 비탈에서 지금도 냇물을 콸콸 토해내고 있었다. 리비아에 도착한 지 사흘만에 처음 듣는 물소리였다.
키레네 王朝는 피비린내 나는 궁중음모와 이집트軍의 침입, 원주민의 반란에 시달리다가 200년 뒤인 기원 전 5세기엔 왕이 암살되고 共和政으로 바뀌었다. 키레네는 리비아 동부지역의 그리스系 다섯 도시국가 중 맹주였다. 리비아 서쪽엔 强國 카르타고가 지배하는 트리폴리타니아(지금의 트리폴리 주변에 있던 세 도시국가)가 번창하면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두 세력은 경계선의 분할을 의논했는데 그 방법이 재미 있다. 키레네의 경주선수와 카르타고의 선수가 동시에 자신의 고향을 떠나 마주 달리다가 만나는 지점을 국경선으로 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카르타고 대표선수 필라에니 형제는 날아왔는지 키레네쪽으로 너무 깊이 들어간 지점에서 키레네 선수와 만났다. 키레네측에선 속였다고 항의했다. 필라에니 형제는 그런 주장을 거부하면서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하는 뜻에서 『만약 키레네가 이 지점을 국경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묻히겠다』고 자살을 자원, 그렇게 되었고 국경선이 카르타고에 유리하게 확정되었다는 신화같은 얘기가 전해져온다. 物産이 풍부했을 그린 마운틴을 누르고 지중해 해상무역로를 감제하는 요충지 키레네는 지중해 연안의 정세변화에 따라 여러번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해상과 육로로 접근이 용이한 북아프리카는 對岸(대안)인 유럽대륙이나 中東에서 정치적 태풍이 일어나면 반드시 그 영향을 받게 돼 있었다. 문명과 전쟁과 무역의 회오리바람이 그칠 날 없는 길목에 이 고원도시가 놓여 있었다.
전쟁과 평화의 기록
기원 전 4세기엔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영향권에 들고, 그가 죽은 뒤엔 스파르타의 원정군에게 점령당했다가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에게 구원을 요청했던 키레네는 프톨레미가 스파르타군을 내쫓은 뒤 주저앉아버리는 바람에 식민지가 돼버렸다. 기원 전 1세기엔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를 제압하고 지중해 연안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로마의 속국으로 변했다. 서기 2세기엔 키레네에 살던 유태인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수많은 건물들을 파괴했다. 로마에서 파견된 진압군은 22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했다고 전한다. 서기 365년엔 지진과 해일로 키레네와 그 주변도시국가가 황폐화되었다. 그 뒤부터는 사막 유목민들의 잇따른 침략. 이어서 아랍족의 침략, 그리고 11세기의 유목민 침입이 이 도시의 생명을 끊어버렸다. 목이 날아간 조각상, 넘어진 돌기둥을 타고 넘으면서 이 폐허를 한 바퀴 도는 데는 한나절이 걸린다. 기자는 언덕 비탈에 만든 야외극장의 스탠드에 앉아 한가롭게 지중해를 내려다보면서 눈부신 햇볕 아래서 잠시 그 시대로 돌아가 보았다.
비탈면에는 열 겹도 넘게 층층으로 토치카 같은 방어진지가 구축돼 있었다. 참호 사이를 연결하는 교통로도 잘 뚫려 있었다. 동굴같은 진지 안에 화덕자리도 있었다. 피를 부르는 함성과 창·칼의 부딪침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저 아래 바다 쪽에서 상륙해서 올라오는 스파르타, 이집트, 로마 군대와 배후로 들어오는 유목민 사이에서 이 도시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비명에 갔을까? 역사란 결국 전쟁과 평화의 기록이다. 한 인간이 성숙되려면 死生觀이 서 있어야 하듯 한 국가가 제대로 이어지려면 국민들의 전쟁관이 확립돼야 하는 것이다. 어떨 때 전쟁을 피하고 어떤 조건에서 전쟁을 결심할 것인가. 누가 전쟁 비용을 부담하고 전쟁의 지휘부는 어떻게 조직하며 병사들은 어떻게 뽑아야 하는가. 카르타고처럼 용병으로 해결할 것인가, 로마처럼 징집제로 대처할 것인가. 아니면 한국처럼 외국에 의존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중국의 宋처럼 침략국에 뇌물을 바치는 것으로 모면할 것인가.
북한이 「전쟁불사」의 자세로 달려들어도 「전쟁불가」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국의 일부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키레네 언덕에 서서 이 폐허 밑에 쌓여 있는 전쟁과 죽음과 流血의 의미를 느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듯이 국가로 생존해 가기 위해서는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전쟁은 국가란 조직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것이 두려울 때는 국가를 해체하여 식민지로 전락하든지 노예의 신분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마가 대제국으로 성장한 것도 전쟁이란 운명을 받아들이면서였다. 로마는 기원 전 4세기 북쪽에서 쳐내려온 켈트족에게 로마시를 점령당해 학살·약탈의 수모를 겪은 적이 있었다.
로마의 전쟁의지
이때 로마인들은 일대 각성을 했다고 한다. 내부적으로 다투는 것은 좋지만 外敵이 나타나면 擧國체제로 단결해야 한다는 것, 국방에 관해서는 국론의 통일을 꾀해야 한다는 것, 국방의무는 기득권층인 로마시민계층이 져야 한다는 것에 합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는 그 뒤 800년 동안 한번도 수도를 敵에게 내주지 않고 세계제국으로 팽창했다. 켈트족에 당한 수모를 심오한 국방의지로 승화시킨 때문이었다. 기원 전 3∼2세기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3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면서 로마는 비로소 지중해 문화권을 통일하여 세계적인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시실리의 주도권을 놓고 시작된 이 결전을 통해서 로마는 버거운 상대이던 카르타고뿐 아니라 그리스, 마케도니아, 시리아까지도 순차적으로 제압하는 패권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도전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응전한 결과였다.
로마보다도 더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아테네가 도시국가 이상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국방에 대한 國論의 분열과 전쟁기피 또는 위선적인 평화론이었다. 아테네는 기원 전 404년 펠로포네소스 전쟁에서 숙적인 스파르타에 패전하였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인들에게 민주정치체제를 포기하고 寡頭(과두)정치체제를 택하도록 명령한 뒤 성벽을 헐게 했다.
이날 아테네인들은 마치 축제를 벌이듯 유쾌하게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한 지금의 북한같은 병영국가 스파르타는 전쟁기술은 가졌으되 로마와 같은 전쟁철학, 전쟁의 도(道)를 터득하지 못했다. 즉 전쟁을 문화로 만들지 못함으로써 패권국가가 아닌 군사강국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아테네는 찬란한 문화를 지킬 만한 전쟁관이, 스파르타는 군사기술을 지속시킬 만한 문화가 없었던 데 대해 로마, 영국같은 패권국가는 둘을 다 갖추었다. 전쟁에 관해서는 가장 깊은 명상을 한 지도자임에 틀림없는 처칠(영국 수상)은 한 국가가 전쟁을 결단하는 과정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유화적으로 나가서 전쟁을 피하는 것이 좋은지 강경책으로 나가서 전쟁을 막는 게 좋은지에 대해선 정답이 없다. 국가가 전쟁을 결심하는 데 있어선 계산의 정확성을 보장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해득실이 아닌 국가의 명예가 걸렸을 때 전쟁을 결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2차세계대전 때 영국이 독일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한 것은 독일이 자기 나라를 공격해 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했기 때문에 폴란드에의 지원을 공약했던 영국은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가 카르타고와 결전을 결심하게 된 것도 침략의 위협 속에 놓인 동맹국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동맹국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오로지 평화의 방법으로써」를 외치는 일부 한국인들은 전쟁이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며 「자격」이 있는 국가와 국민만이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이란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 유적의 공짜 입장
키레네 유적엔 숲이 있었고 거기서 우리 일행 7명은 미리 준비해온 매운탕을 끓여서 점심을 먹었다. 태국, 필리핀 운전사도 한국인같은 食性으로 변한 듯 맛있게 해치웠다. 우리는 다시 동쪽으로 출발했다. 꼬불꼬불한 도로를 타고 고원을 내려와 한적한 어항인 수사(Susa)에 도착한 것은 20㎞ 뒤였다. 벌겋게 녹슨 폐선이 바닷가에 얹혀 있고 항만시설은 가동불능상태였다. 어떤 생산활동도 보이지 않고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그냥 잠들어 있는 마을이었다.
여기에 키레네의 부속 항구에 해당하는 아폴로니아 유적이 있다. 해변을 따라서 하얀 돌기둥이 줄을 선 채 졸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려는데 철문은 닫혀 있었다. 입장권을 파는 직원도 자리를 비웠다. 철문은 그러나 한덩어리 작은 돌로 고여 있었다. 그것을 밀어버리고 침입했다. 밟히는 모자이크 타일 조각이 삑삑 소리를 냈다. 무너진 성벽 아래 그늘엔 한 아랍인이 플라스틱 물통을 옆에 두고 앉아 있었다. 명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멍하게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리비아에선 혼자서 종일 저렇게 앉아 있는 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가다피가 녹색혁명의 꿈을 실현시키려면 저런 사람들을 奮起(분기)시켜야 하는데 그 방법이 상당히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료입장객은 단 한 사람도 없는 이 세계적인 그리스-로마유적지는 사회주의적 폐쇄정책의 비생산성을 증언하고 있었다.
폐쇄는 1이란 자원을 1 또는 그 이하로 만드는 반면 개방은 자신의 1과 바깥의 1을 더해서 2나 4로 만드는 사업이다. 알폴로니아라는 내부 자원에다가 외부의 자본을 결합시키면 당장 몇배의 財貨(재화)가 창출된다. 폐쇄는 자원의 이용을 제한하면서 동시에 인간능력의 이용률을 떨어뜨린다. 외부와의 경쟁심리가 없고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없기 때문이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풍광(風光) 속의 무력해보이는 인간, 그것이 폐쇄의 결과물이었다. 돌아나오는데 뚱뚱한 매표원이 돌아와 있었다. 무단침입에 대해서 추궁을 당할까 두려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악수를 교환했더니 입장료도 사양하고 『잘 가라』면서 배웅까지 해주었다. 폐쇄된 나라일수록 인간은 순하다. 그러나 개방에 견딜 정도로 그 순수함이 강인한 경우는 드물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金洙吉 이사는 대수로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이유를 두 가지로 꼽았다. 리비아 정부에서 그 공사를 지휘하기 위해서 만든 대수로공사관리청(GMRA : 게무라라고 발음) 공무원들의 청렴결백과 일에 대한 엄격성. 리비아는 고위공직자일수록 깨끗하다고 한다. 요컨대 업자로부터 뜯어먹고 봐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대수로 공사의 감리를 맡은 것은 용역사(동아는 원청사가 된다)인 영국 브라운 앤드 루트社(Brown & Root)의 철저한 감독. 金이사는 『BR은 우리에게 100%가 아니라 150%의 품질보증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중동진출의 최대인맥인 한양공대 토목과 출신인 金이사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주택공사를 할 때 겪어야 했던 준공검사의 지긋지긋한 고생담을 들려주었다.
『창 하나하나를 직접 열어 봅니다. 도어를 열었다가 놓았을 때 너무 빨리 닫혀도 불합격입니다. 벽면을 손으로 만져 약간의 돌출만 있어도 재시공. 그때는 불평도 많이 했지만 그런 준공검사로 단련받으면서 우리의 건축·토목 기술이 이렇게 발전한 겁니다』
사(士)자 계급의 죄악
건설부에서 공사감독으로 일한 적도 있는 金이사는 『해외에 나오면 세계제일의 건설기술을 과시하는 우리나라 업계가 국내에선 짓던 다리가 무너지는 수준의 부실공사를 하고 있는데 이 문제를 최단시일내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엄격한 준공검사라고 했다. 다 지은 고층건물 몇개를 헐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타협없는 준공검사의 본때를 보이면 시공자들은 청탁이 아니라 기술로써 해결하려 들 것이고 자연히 부실공사도 극복되고 건설기술도 향상될 것이다. 부실공사의 원인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인 것이다. 金이사와의 車中토론이 여기에 이르자 기자는 늘 지니고 다니던 의문이 생각났다.
「왜 한국인은 조국을 떠나야 위대해지는가?」
1970년대 초 한국의 가장 큰 人力수출시장은 海運분야였다. 많을 때는 약4만 명의 선원들이 외국배를 탔다. 「바다에서 번 돈은 처자식 먹여 살리기도 아깝다」는 그 달러를 한국으로 보내주던 이 수출선원들은 세관의 밥이었다. 몇 년간 고생한 끝에 가족품으로 돌아오는 길, 멀리 부산항이 보이면 설레임보다는 「세관원에게 또 얼마나 당해야 하느냐」란 걱정이 앞서 다가오는 고향이 두려웠다는 푸념을 기자는 많이 들었다. 반도국가이면서도 뱃사람을 「뱃놈」으로 멸시해온 이 나라에서 자란 선원들은 왜 외국배만 타면 펄펄 날 정도로 기량을 발휘하여 세계최고의 선원들로 변모했던가. 이 의문에 대해서 한국해양대학의 한 교수는 기자에게 『조국을 떠났기 때문이다』고 잘라 말하던 기억이 새롭다.
『사농공상(士農工商)적인 신분차별, 관(官)에 의한 착취의 질곡에서 해방되니까 본래의 실력이 나온 것입니다』
하도 官의 착취가 심하니 바닷가에 고래가 얹혀도 잡아서 돈벌 생각은 하지 않고 『관리들이 알면 일만 죽도록 시킨다』면서 어민들은 밤새 그 고래를 바다로 밀어 넣었다는 朝鮮朝(조선조) 사회에서 산업이 발달할 리가 없고 초원을 달리던 기상이 발휘될 리가 만무했다.
朝鮮왕조의 유교적 지배 이데올로기, 그 가장 큰 해독은 경제의욕과 尙武정신을 퇴화시킨 것이었다. 그 책임은 士로 상징되는 정치인, 지식인, 관료들의 몫이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도 이 士자 계급이 트집과 위선과 냉소적 태도로써 이 나라의 뻗어가는 기상에 찬물을 끼얹고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왜 같은 한국인이라도 서울시내에서 만났을 때보다 사하라에서 만났을 때 더 패기 있고 정직하며 당당해 보이는가? 어째서 한국의 공사감리제도는 리비아보다도 못한가. 왜 많은 한국인들은 지금도 김포를 떠날 때 「앞으로 몸이야 고생이겠지만 마음은 편하다」고 느끼는가. 기자는, 士자 계급(기자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에 의한 農工商계급에 대한 착취구조는 지금도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질서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기자는 이런 농담을 즐겨한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과대평가되고 있는 직업인은 교수, 과소평가되고 있는 것은 기업인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보통사람」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은 기업인이다. 사람이 해선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정치인이다』
몽고기마군단의 기상 되찾다
1993년의 金泳三 정부 출범 이후 한국 사회에선 지난 50년간의 국가건설기에서 낙오되거나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힘을 갖고서 그 건설에 흠집을 내는 일을 「개혁」이니 「민주화」니 하는 말로 위장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오늘의 한국을, 우리 역사속의 어느 단계와도 확연히 구별짓게 만든 해양정신과 尙武정신을 망가뜨리고 그 결과로서 한국인의 기상을 꺾어버리는 일을 하고 있다. 역사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폐쇄적 역사관의 표현이랄 수밖에 없는 옛 중앙청의 졸속철거 결정이 그 한 예이다. 냉전시대의 붕괴에 신호탄을 올리고 동구공산권의 붕괴에 한 기폭제가 되었던 서울올림픽정신을 기념하여 만든 서울평화상을 낭비적이란 이유로 폐지하라고 지시한 사람들은 사회주의적 색채가 분명히 끼어 있는 민예총에 2억원이 넘는 문예진흥기금(국민들의 돈으로 조성되었다)을 대주고, 남북한 화가들의 합동전시회(코리아통일 美展)를 허가했다. 그 합동전시회에 출품된 그림들의 공통점은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묘사하고 대한민국을 미국과 자본주의의 노예로 형상화한 점이었다.
좌파의 宿主가 된 김영삼 세력은 그들의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내부의 敵」이란 전투적 용어를 쓰면서 김일성 세력에 대해선 침묵한다. 권력을 쥔 일부 지식인들의 병적인 태도가 만드는 사회분위기는 우리가 모처럼 찾아낸 한국인의 야성을 죽이고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士자 계급에 의한 질곡에서 벗어난 해외의 한국인들은 우리의 피속에서 너무나 오랫 동안 잠들어 있던 거대한 에너지를 재발견했다. 그 에너지는 아마도 북방의 초원을 달리던 몽고기마군단의 폭발력이었을 것이다.
인구 150만의 몽골이 1억 인구를 지배할 수 있었던 비결, 12만의 기병으로서 유라시아의 강대국을 차례로 점령해간 조직력의 비밀은 리비아 대수로 공사 현장에서도 발견된다. 동아콘소시엄은 8개국 노동자로 구성된 다국적軍이다. 지휘부를 장악한 것은 전체 인력의 약 20%인 한국인들이다. 몽골군단도 12만의 自國군대를 장교 및 하사관으로 삼고 졸병들은 현지에서 다국적군으로 편성하여(그래야 조직적인 반란이 불가능하다) 세계를 정복해 갔다고 한다. 몽골은 식민지 지배도 현지국가의 지도부를 강권으로 인질화하여 그들을 조종하는 방식으로 했으므로 인력의 과도한 배치를 줄일 수 있었다. 몽골 유목민들의 이런 국제감각이 산악국가인 한국에서는 억눌려 있었으나 무대가 넓은 외국으로 나가면 되살아나는 것이다.
우리는 넓은 무대를 가져야
리비아의 한국인들을 만나면서 기자가 절실하게 느낀 점은 한국인들은 넓은 공간을 가질 때 비로소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한다는 점이었다. 인구밀도가 세계최고인 한국에선 한정된 공간과 자원 때문에 「내 것이 늘면 네 것은 줄어든다」는 「제로섬 게임」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치열한 권력투쟁과 치사한 방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해외의 광활한 무대는 한국인을 그런 새장에서 탈출시켜 훨훨 날게 만들었다. 20%의 한국인이 80%의 외국노동자를 일사불란하게 장악하여 열심히 일하도록 만든 비결은 군사문화였다. 리비아 현장에서 외국노동자들은 상관만 보면 구호를 외치며 거수경례를 올려 부치는데 영락없는 군대 분위기였다. 한순간, 한치의 실수가 큰 참사를 부르게 되는 작업현장에선 군사문화적 규율은 불가피하다. 군복무 경험을 가진 한국인 관리층이 군대식으로 외국노동자를 통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군대, 전쟁이란 말에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하고 보자는 사람들은 생각을 달리하는 게 좋을 것이다.
기자는 분단이란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서의 해양정신, 북한이란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서의 尙武정신이 한국인의 야성을 폭발시켰고 이 바탕 위에서 통일이 이뤄질 수 있다고 앞에서 썼다. 金日成의 사망으로 통일의 방법은 보다 명쾌해졌다. 힘(경제력+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북한동포를 노예로 삼고 있는 김정일(金正日)정권을 제거하고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통일의 본질이다. 남북한간에는 공존·공영을 이야기하기엔 너무나 큰 격차가 나버렸다. 북한은 共榮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직도 역사의 흐름을 잃지 못한 채 흡수통일이 불러올 부작용을 과장하고 있는 한국의 지도층은 한국인의 야성·기상·희생정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들 유약한 士자 계급보다 農工商계급의 사람들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북한문제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통일정신을 생각하다
통일이란 도전에 대해서 어떤 논리와 정신으로써 응전할 것인가. 이것을 집중적으로 토론할 때이다. 남한의 폭발적 에너지가 그동안 해양 쪽으로 지향했다면 통일은 그것을 북방으로 돌려놓을 것이다. 만주-몽골-러시아 동부 지역이 한국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곳은 또 몽골문화권이기도 하다. 몽고-만주-한국-일본으로 이어지는 ㄴ자형 몽골문화권은 앞으로 우리의 무대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만주는 우리 것」이란 식의 저질 민족주의를 내세워 주변 국가를 놀라게 해선 곤란하다. 주변 국가들과 공존·공영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역할을 찾아야지 되지도 않을 영토적 야심을 촌스럽게 드러내어선 앞길이 막힌다. 심신이 피로한 북한동포를 손잡아 끌면서 통일의 에너지를 해외, 그리고 북방으로 확장시켜 나갈 때 통일의 부작용은 오히려 새로운 추진력으로 바뀔 것이다.
거대한 통일의 비전을 그릴 생각은 하지 않고 소심하게, 또 이기적으로 통일의 후유증을 과장하는 이들은 독일에 가봐야 한다. 통일 후유증을 급속히 치유한 독일 사람들은 이제 독일적인 가치관의 세계화를 꿈꾸면서 원대한 포석을 하고 있다. 통일 독일의 후유증을 흡수통일 반대론의 근거로 과대 선전하고 있는 한국의 일부 인사들은 독일이 그 후유증을 轉禍爲福의 계기로 삼고 있는 지금 무엇이라고 변명할 것인가. 인류역사상 가장 평화적이고 성공적인 독일통일을 부정하는 좌익들은 사실상 분단고착론자들이거나 적화통일론자들이다.
벵가지로 돌아오니 저녁이었다. 吳홍채 과장과 나는 훈덕시장으로 나가보았다. 달러 유통은 법으로 금지돼 있는데도 「달러도 받습니다」란 한국어 표시가 돼 있는 상점들이 눈에 띄었다. 吳과장은 『2년 전에 비해 엄청나게 변했다』고 했다. 여자 사진이 나오는 광고 포스터나 화장품·브래지어의 진열은 2년 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가다피가 1988년에 국유화 정책을 부분적으로 완화한 이래 自營상점들이 많이 나타나면서 경제도 서서히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술도 집에서 마시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고 가다피가 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다음날 아침 기자는 벵가지 본부內 한국인 직원들의 숙소를 둘러보았다. 3층짜리 영구 아파트였다. 棟마다 휴게실 체육시설 대중목욕탕 세탁장 사우나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不實없는 아파트는 깨끗하기 짝이 없었다. 외국노동자들을 청소부나 건물관리인으로 많이 쓰기 때문이었다. 한국인 직원들의 품위 있는 생활을 지탱하는 것은 값싼 이들 외국인 노동력이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로마인의 우아한 문화생활을 뒷받침한 물리력은 노예노동력이었던것처럼. 로마가 천년이나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노예가 로마시민이 될 수 있는 길을 넓게 열어 두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10년 뒤 방글라데시나 조선족은 오늘날의 한국인 직원처럼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다시 사막을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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