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6월 4일(한국시간 6월 5일) 노태우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역사적인 韓蘇 정상회담을 가졌다.
고르바초프는 이때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그가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그라스노트(개방) 정책은 국제적으로는 그를 슈퍼스타로 만들었으나 국내에선 원성(怨聲)을 샀다. 당내 민주화의 혼란 속에서 소련 공산당의 권위가 떨어지고 물가가 치솟았으며 발틱 3국은 독립을 추구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가 미국 방문 길에 나서기 직전에 발틱 3국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변혁을 공산권에 몰고 왔다. 1989년엔 동구 공산국가 국민들이 차례로 공산당 정권을 몰아내고 민주화를 선언했으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소련의 군부, 당, KGB(첩보 수사 기관)는 소련의 위상이 떨어지는 데 불만이 많았다. 고르바초프도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을 방문하여 사흘 간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샌프란시스코로 날아온 것이었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부시 미국 대통령과 만나 미소(美蘇)무역협정을 맺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편, 부시는 고르바초프로부터 진행중인 독일 통일 협상에 대한 양보를 얻고 싶어 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미 통일된 독일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머물러선 안 되고 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공산권 군사 동맹체) 양쪽에 가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공표한 뒤였다. 5월31일 오후 고르바초프와 부시가 백악관에서 대좌(對坐)했을 때 세계 정상(頂上) 외교사상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사건이 발생했다. 고르바초프가 부시 대통령에게 설득당하여 즉석에서 독일 통일 문제에 대한 기본입장을 180도 바꿔버린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독일이 통일 후에 NATO 회원국으로 있어야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주변국에 대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통일된 독일은 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동시 가입하든지 어느 쪽에도 가입하지 않아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는 부시 대통령이 2차 대전 때 해군 조종사였다는 점을 상기시키듯이 “귀하는 수병(水兵)이었으니까 잘 알 것입니다”라고 운을 뗐다.
“닻이 하나라도 좋다면 두 개면 더 좋지 않습니까?”
부시 대통령은 “그렇지만 닻이 두 개면 작동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주장이 한동안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부시 대통령이 논점(論点)을 바꾸었다.
“헬싱키 조약에 명시된 유럽 안보(CSCE) 원칙에 따르면 모든 국가는 동맹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통일된 독일도 그런 권한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고르바초프는 “그건 그렇지요”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에 배석했던 고르바초프의 보좌관들 표정이 일그러졌다고 한다. 찬스를 잡았다고 생각한 부시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 로버트 블랙윌이 메모를 써서 부시한테 내밀었다. ‘고르바초프가 지금 미국의 입장에 찬동하는 듯한 발언을 했으니 더 밀어붙여달라’는 요지였다.
이 메모를 읽은 부시는 다그치듯이 말했다.
“모든 국가가 동맹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데 우리가 동의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러자 고르바초프가 말했다.
“이런 식으로 정리합시다. 미국과 소련은 (독일 통일을 논의중인) 투 플러스 포 회담에서 합의가 이뤄진 이후, 독일이 동맹국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말입니다”
부시가 수정안(修正案)을 내어놓았다.
“미국은 독일이 NATO 회원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점을 확실하게 요구한다. 그러나, 독일이 이와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이를 존중할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이에 동의했다. 배석했던 고르바초프 보좌관들은 이 중대한 조건에 대해서 고르비가 종전의 태도를 즉석에서 바꾸는 것을 보고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은, 고르비가 “독일 문제는 베이커 국무장관과 귀하가 더 논의를 해보세요”라고 말하니 즉석에서 이를 거절했다. 미국측 인사들이 보는 앞에서 외무장관이 대통령의 지시에 항명(抗命)하는 꼴이었다. 고르비가 한번 더 부탁하자 마지 못한 듯 셰바르드나제는 동의했다. 이 상황을 지켜본 부시 대통령은 고르바초프의 국내 지지기반이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시는 고르바초프를 너무 코너로 몰면 소련에서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부시는 고르바초프가 애원하다시피한 미소(美蘇) 무역 협정 체결에 동의함으로써 그의 입장을 살려주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독일통일에 대하여 까다로운 조건을 붙임으로써 많은 양보를 미국과 서방측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었지만 너무나 쉽게 카드를 포기한 것이다. 그 달포 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방문한 콜 독일 수상에게, 독일통일에 관한 서독측의 요구사항을 거의 전부 들어주었다. 콜 수상도 믿을 수 없는 양보였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이런 행태에 대하여 불만을 키워가고 있었던 보수세력이 1991년 8월에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옐친의 영웅적 투쟁으로 좌절되었다. 복귀한 고르바초프는 권위를 잃었고, 옐친이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했으며, 소련 공산당은 금지되고 소련 연방은 해체의 길로 간다. 그런 몰락과정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 이 고르바초프-부시 회담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부시와의 정상회담을 끝내고 귀국 길에 나와 회담하기 위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레이건 부처의 예방을 받았고, 스탠포드 대학교를 방문했다. 학생들은 “고르비! 고르비!”라고 환호했다. 고르비는 이 무렵 외국에선 인기가 높았고 국내에선 떨어지고 있었다. 고르비는 이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슐츠 전 국무장관을 만났다. 그는 “내가 보니 슐츠씨는 지금 천국에서 살고 있군요. 이렇게 좋은 날씨에 감사하는 뜻으로 세금을 내셔야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서 노태우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한국 대통령과 史上 최초의 회담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냉전식 이념외교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싶어했다. 동시에 번영하는 한국의 투자를 유치하고싶어했다. 이 회담을 소련측에서 추진하는 데 主役이었던 사람은 대통령 고문 아나톨리 도브리닌이었다. 그는 노태우-고르비 정상회담과 관련해서 소련 외무부와는 의논하지 않고 바로 고르바초프에 보고했다. 소련 외무부가 북한을 의식하여 이 회담에 반대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외무부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회담 추진 상황을 알게 되면 사보타주를 할 가능성도 있었다.
셰바르드나제는 韓蘇 정상회담이 개최될 것이란 사실을 사후에 통보받고 화를 냈다고 한다. 고르비의 수교 결심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으나 자신이 준비 과정에서 소외된 데 대하여 굴욕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셰바르드나제는 그 뒤 韓蘇 수교를 앞당기는 조치를 취했다. 그루지아 출신인 그는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그루지아가 독립하면 조국의 대통령이 되고싶어했다고 한다. 그의 이 꿈은 나중에 성취되었으나 민중봉기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韓蘇수교가 급진전되고 소련이 한국의 유엔가입을 지지해준 것은, 고르바초프가 내려 앉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회복하기 위하여 脫냉전적 외교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흐름을 노태우 정부가 능동적으로 이용한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부시의 말 한 마디가 역사를 바꾸다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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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2-17, 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