續․金賢姬 단독 인터뷰
-月刊朝鮮의 특종이 만든 ‘김현희-다구치 가족 면담’의 內幕
*“이승복 사건을 보면서 나의 처지를 생각하였습니다.”
*“나에게 중국어를 가르친 이는 마카오에서 납치되어 온 미스 孔이었습니다.”
*“북한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곳이니 (다구치가 살아서 돌아올지도)...”
*“공작이 실패하면 죽습니다. 나를 가짜로 만들려는 공작이 실패하였으니 누군가는 나처럼 독약 앰풀을 깨물어야...”
趙甲濟/月刊朝鮮 편집위원 겸 조갑제닷컴 대표
“기자들 앞에서 웃지 마세요”
3월10일 오전 金賢姬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나의 휴대전화기에 찍힌 번호를 보면서 "또 공중전화로 거는구나"라고 생각하였다. 북한에서 공작원 교육을 받던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주었던 '리은혜', 즉 다구치 야에코씨 가족과 만나는 날을 하루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어느 때보다 목소리에 활기가 넘쳤다. 金씨는 이런 만남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서 감사하다고 하였다. 나는 우선 물어볼 것이 있었다. 지난 주 남편 鄭씨를 통하여 보내준 마카오 납북여인 사진이 궁금하였다.
"그 사진 보셨죠? 그 사람이 미스 孔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1985년입니까? 중국어를 배운 게."
"1984년 중간입니다. 용성 초대소에서 김숙희와 함께 배웠지요."
북한정권이 1978년 마카오에서 납치해간 孔令譻(공영앵. 당시 스무 살)이란 여성의 정체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일종의 '人種 수집가'인 김정일은 일본여성을 납치해가선 일본어를 가르치게 하고, 마카오 여성을 납치해선 중국어를 가르치게 하였다. 한국 파괴 공작에는 정말 정성을 다하는 인간이다. 나는 서둘러 조갑제닷컴에 미스 孔 관련 기사를 올리고 국내외 기자들에게 알려주었다. 일본 언론은 일제히 크게 보도하였는데 한국 언론은 한 곳도 다루지 않았다.
나는 김현희씨에게 말하였다.
"저는 다른 일이 있어 내일 부산에는 내려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잘 하세요. 기자만 수백 명이 올터이니 하시고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하세요."
金씨는 거듭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前週(전주) 김씨의 남편에게 나는 이런 부탁을 했었다.
"기자들 앞에서 김현희씨가 웃지 않았으면 합니다. 김현희씨가 잘 살면 배가 아프고, 못 살면 가슴이 아픈 사람들이 많아요. 지난 좌파정권 때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김씨에 의하여 115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남편 鄭씨는 나의 충고에 감사해 하였다. 月刊朝鮮, 李東馥(김현희씨가 보낸 편지를 공개한 전 국회의원), 그리고 일본의 납치자 단체와 언론 등 한국과 일본의 뜻 있는 사람들이 지난 넉 달 간 김현희씨의 처지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알리고 문제를 제기한 끝에 3월11일의 역사적 만남이 이뤄지게 되었다. 물론 이런 만남을 가능하게 한 사람은 李明博 대통령이다. 그는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당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현대건설 회장이었다. 이 세상에는 역시 좋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보다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스 孔, 중국어를 가르치다
지난 2월말 金賢姬 씨는 기자와 최근 들어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자신에게 중국어를 가르친 마카오 거주 피납자의 신원에 대하여 처음으로 상세히 설명하였다. 김현희 씨는 1984년 6월에서 8월 사이 동료 김숙희와 함께 평양 근교 용성 40호 초대소에서 밀봉수용 상태로 중국어 교육을 받았다. 나중에 대한항공기 폭파에 참여하는 金勝一과 함께 잠시 해외 실습을 나가기 위한 준비였다.
김현희 씨는 “마카오 여성으로부터 중국어 기초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이때 저에게 북경어를 가르친 여성은 저보다 나이가 다섯 살 정도 많은 ‘미스 공’이란 분이었습니다. 전형적인 중국 미인이었습니다. 마카오에서 납치되어 왔다고 들었습니다. 북한으로 납치되어 와서 수용중 달아났다가 다시 붙잡혔다고 했습니다. 崔銀姬 씨가 手記에서 만났다고 한 그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붙잡혀 온 지 오래 되어서인지 한국말을 잘 했습니다.”
1978년 홍콩에서 납북되었던 崔銀姬씨는, 자신의 手記에서 북한의 동북리 초대소에 수용되었을 때(1979~1980년) 산책을 하다가 ‘미스 공’이란 여자를 만나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다고 썼다. 일본인 납치자 단체에선 최씨의 증언을 근거로 조사를 하여 2006년에 미스 공의 정체를 밝혀냈다. 미스 공은 마카오 리스보아 호텔의 보석상점에서 근무중이던 1978년 7월에 납치되었다. 관광객으로 위장한 북한공작원이 안내를 해달라고 꾀어 다른 마카오 여성과 함께 납치한 것이다.
崔銀姬(최은희)씨에게 미스 공은 “북한으로 끌려온 후 자신과 다른 마카오 피납 여성이 북한주재 인도네시아 대사관으로 뛰어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고 말하였다. 인도네시아 대사관은 두 사람을 북한측으로 넘겨주었다. 최은희 씨는 가톨릭 신도인 미스 공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崔(최)씨는 미스 공의 세례명이 마리아라고 기억하였다. 일본인 납치자 단체에서 마카오로 가서 미스 공의 가족을 만났더니 그들은 세례명을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교회에 알아보니 마리아로 밝혀졌다.
최은희씨는 원흥리 초대소로 옮기면서 미스 공과 헤어졌는데, 나중에 공작원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이 공작원들 중에 김현희, 김숙희가 포함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인 납치자 단체에서 확인한 ‘미스 공’의 이름은 孔令譻(공영앵)으로서 납치 당시 스무 살이었다. 김현희씨보다는 다섯 살이 더 많다.
기자는 김현희 씨와 만나고 와서 孔令譻씨의 사진을 구하여 남편을 통하여 김씨에게 보냈고 김씨가 “바로 이 여자가 미스 공이다. 그로부터 중국어를 배웠다”고 확인한 것이다. 마카오가 그 뒤 중국영토로 전환했으니 孔令譻씨는 중국인이다. 결국 김정일은 우방국인 중국인도 납치한 셈이다. 金賢姬(김현희)씨는 남편이 사다준 崔銀姬(최은희)씨의 회고록 ‘告白’을 읽다가 미스 공에 대하여 언급된 대목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2005년말 ‘북조선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가 위한 전국협의회’(구출회) 부회장(지금은 회장 代行) 니시오카 츠도무씨가 나에게 崔銀姬씨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니시오카씨는 이때 崔씨를 만나 미스 공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카오로 가서 그의 가족을 취재하여 피납 여인의 實在를 확인하였으나 김현희씨에게 중국어를 가르쳤다는 증언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무현에 대한 분노가 李明博에 대한 감사로
아소 일본 수상은 3월10일 저녁 기자들과 一問一答(일문일답)하면서 하루 앞으로 다가온 KAL기 폭파범 金賢姬(김현희)씨와 일본인 납치자 다구치 야에코 가족의 만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나, 우리로서는 이런 만남이 가능하도록 해준 한국 정부의 협력에 감사하고 있다는 것이 정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한국정부로서는 (만남을 허용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어려운 문제였다고 생각되므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부산에서 이뤄진 金賢姬-다구치(리은혜) 가족(오빠와 아들)의 만남은 李明博 정부가 들어섰기에 가능하였고 이는 韓日관계가 정상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준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다.
일본 언론이 韓日 頂上 회담보다도 더 극성으로 이 만남을 취재한 것은 김현희씨가 리은혜에 대하여 증언한 것이 일본에서 납치자 문제를 공식화시키는 결정적 계기였기 때문이다. 김현희씨와 한국정부에 대하여 일본 정부와 언론이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좌파정권하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2006년 12월 도쿄에서 북한정권에 의한 국제적 납치행위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고 기자도 발표자로 참석하였다. 야당인 민주당의 납치대책본부장 나카이(中井 洽) 의원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사정없이 비판하였다.
"저는 지난 30년간 한국의 국회의원들과 접촉이 있었습니다만 노무현 대통령 등장 이후 이렇게 형편없는 나라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무현은 김정일의 동생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로 납치문제에 관한 한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만나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의 인생철학은, 모든 문제는 언젠가는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납치자 문제로 일본에서 떠들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언젠가는 해결되겠지요'. 그때는 정말 화가 났습니다."
그날 저녁 주최측이 도쿄 주재 외교관들을 초청한 연회가 있었다. 한국 대사관에서 온 사람이 나카이 의원에게 '노무현=김정일 동생' 발언에 항의했다는 이야기가 돌자 한국에서 온 납북자 가족회 사람들은 "뭐, 맞는 말 한 것 아닌가"라는 반응이었다.
기자는 발표 때 "납치자 문제 등 북한의 인권탄압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데 있어서 한때는 한국이 일본보다 선진국이었다. 그때는 한국에서 일본에 납치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고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좌파정권이 등장한 이후 북한인권 문제에 대하여 입과 귀를 닫는 바람에 일본이 선진국처럼 되었지만 2007년 大選에서 우파 정권이 들어서면 다시 한국은 지도적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소 총리가 李明博 정부에 대하여 납치자 문제에 협력해주었다고 감사를 표시함으로써 기자의 예언이 실현된 셈이다.
일본 언론에서 집중 보도 시작
지난 해 10월 金賢姬씨가 남편을 통하여 李東馥 전 의원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李 선생은 나에게 그 편지를 보여주었다. 이때 남편 鄭씨는 나에게 보내는 같은 내용의 편지를 가져왔다가 연락이 닿지 않아 돌아갔다고 했다. 나는 이 편지를 기초로 취재하여 月刊朝鮮(월간조선) 12월호에 김씨가 좌파정권하에서 당한 사연들을 소개하였다. 李東馥씨는 월간조선이 나온 1주일 뒤 조갑제닷컴을 통하여 자신이 받은 편지의 全文을 소개하였다. 김현희씨가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도 같이 공개하였다. 金賢姬씨의 호소에 귀를 기울인 것은 李明博 대통령과 청와대였다. 청와대는, 국정원에 지시하여 김현희씨의 주장(舊국정원이 KAL기 사건을 조작하는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주장)을 조사하게 하였다. 일본 언론도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다. 일본 언론은 김현희씨가 편지에서 다구치씨 아들을 만나고싶다고 한 아래의 대목을 부각시켰다.
<북한당국은 일본어선생 이은혜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고 하지만, 그녀가 초대소 창문 밖을 내다보며 어린 두 자식이 보고 싶어 울면서 끌려온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몇 해 전 일본 TV방송에서 방영된, 이미 청년이 된 이은혜의 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의 큰 눈매가 어머니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를 만나 자신의 어머니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지만, 그렇게 해줄 수 없는 저의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생사를 모르는 북녘의 가족들과 생이별 하고, 이곳에서 추방생활을 하고 있지만 저의 두 자식을 가까이서 보며 지낼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나는 남편 鄭씨를 통하여 김현희씨와 연락을 했고, 작년 12월 초엔 통화도 할수 있었다. 그 뒤 김현희씨가 가끔 공중전화로 나에게 연락을 해오다가 지난 1월8일 3시간 반에 걸친 인터뷰가 이뤄졌다. 김현희씨가 남편과 함께 예고 없이 나타났고, 나는 카메라를 준비하지 않아 남편에게 부탁하여 휴대전화기로 사진을 찍었다. 그 직후 김현희씨가 NHK와 전화 인터뷰한 내용이 방송되었다.
졸지에 김현희의 대변인 역할
1월17일에 나온 月刊朝鮮 2월호에 김현희 단독 인터뷰 기사가 실린 이후 나에겐 일본 기자들이 자주 전화를 하고 여러 번 인터뷰도 했다. 그들의 첫 질문은 대체로 “무슨 인연이 있어 인터뷰를 할 수 있었느냐”였고, 두 번째 질문은 “김현희씨가 어떤 모습이었던가”였다. 세 번째 질문은 “단독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 소개해달라”였다. 내가 수도 없이 되풀이한 대답은 이러하였다.
“김현희씨를 세계에서 맨 처음 인터뷰하여 책도 쓴 인연이 있습니다. 좌파정권 때 김현희씨를 상대로 MBC 등이 터무니 없는 의혹을 제기할 때 月刊朝鮮만이 김씨 편을 들었습니다. 그런 저런 인연으로 나를 믿은 모양입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였습니다. 약간 야위었고, 안경을 꼈더군요. 표정은 밝고 투지에 차 있었습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연락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쪽에서 전화를 걸어 와야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월12일 韓日외무장관 회담에서 金賢姬-다구치 가족 면담을 주선하기로 합의한 이후 일본 언론은 취재경쟁을 더해갔다. “언제 어디서 만남이 있느냐”라는 질문이 나에게 쏟아졌다. 우리 외무부는 처음엔 양국 민간단체들이 만남을 주관하도록 하려 했으나 곧 생각을 바꿨다. 일본 정부가 만남을 주관하고 한국 정부는 안전을 책임지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일본 기자들은 가끔 “한국 언론에선 이 문제에 대하여 왜 관심이 적은가?”라고 궁금해 하였다.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좌파정권 10년간 선동방송과 나쁜 사람들이 김현희를 가짜로 몰려고 했으나 다수 국민들은 그런 일을 ‘이상한 짓 하고 있네’ 정도로 생각하였다. 정상적인 신문들은 그런 캠페인에 따라가지 않았다. 최근 김현희씨가 공개적으로 MBC, KBS를 비판하고 나서자 방송사들은 자신들의 前過(전과) 때문에 침묵하고 있다. 일본엔 납북자가 수십 명이지만 한국은 납북자가 6.25전쟁 납북자까지 쳐서 십만 명을 넘는다. 이러니 일본인 납치자 문제에 대하여는 둔감할 수밖에 없다.”
이즘 訪韓한 일본인 납치자 구출회의 회장 代行인 니시오카씨는 “일본인 납치자 가족들은 김현희씨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만약 김현희씨가 金勝一과 함께 자살해버렸던지, 안기부 신문중 자살하였던지, 진술을 거짓으로 하였더라면 리은혜의 존재는 묻혀버렸을 것이고 일본인 납치자 문제는 관심을 끌지 못하였을 것이다. 좌파세력의 압박에 굴복하여 김현희씨가 과거 발언을 번복하였더라면 일본측의 입장이 곤란해졌을 것이다. 김현희씨가 양심의 명령에 따르고, 용기를 갖고 꿋꿋하게 버티어내어 진실을 지켜낸 점에 대하여 감사하고 싶다.”
韓日 우호의 상징
니시오카씨는 북한정권이 2002년에 일본 정부에 설명한 다구치 야에코씨의 入北과정을 예로 들면서 金賢姬씨 증언의 소중함을 설명하였다. 북한측은 두 아기를 둔 다구치씨가 북한을 관광시켜주겠다는 북한 공작원의 제의를 믿고 따라나섰다는 어설픈 설명을 하였다.
“다구치를, 두 아이를 버려두고 북한에 놀러간 여성으로 만든 것 아닙니까? 이런 거짓말을 하는 북한이 다구치가 죽었다고 하니 누가 믿겠습니까?”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은 두 범인, 김승일-김현희가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위조된 일본여권을 사용하였으므로 처음부터 일본정부가 개입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가 신속하게 가짜 여권임을 밝혀 바레인 공항에서 출국하는 두 사람을 차단한 것이 이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안기부는, 김현희로부터 리은혜에 관한 증언을 얻어 일본정부에 알리고 일본경찰이 이 증언을 토대로 몽타즈 사진을 만들어 리은혜가 실종된 다구치 야에코임을 밝혀내는 일을 도왔다. 기억력이 비상한 김현희씨의 사진 확인이 결론을 내렸다.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사건은 日北 수교를 지금까지 막고 있다. 김정일이 일본으로부터 100억 달러의 배상금을 받아 핵무기 개발이나 군사력 증강에 투입하였더라면 그들의 對南 압박은 지금보다 더 강해졌을 것이다. 김현희씨는 이처럼 한국과 일본이 김정일 정권을 공동의 敵으로 삼고 인도주의의 원칙하에서 국경을 초월하여 공동 대응하는 데 있어서 상징적인 존재였다.
“이승복 사건을 보니 내 처지가 생각 났다”
지난 2월25일 저녁 나는 金賢姬씨 부부와 다시 만나 식사를 함께 하였다. 그 며칠 전 정부측에서 사람을 보내 다구치씨 가족과 만남을 주선하겠다는 통보를 하더라고 했다. 이날 나는 첫 인터뷰 때 빠뜨렸던 사안들을 물어서 확인하였다. 처음 만났을 때 김현희씨가 고장 난 보일러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 나 어떻게 생활하는지 물었다.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기 싫어하는 김현희씨의 단편적 이야기를 종합하면 상황이 어려운 듯하였다. 2003년 11월에 살던 아파트가 MBC-PD 수첩에 방영된 이후 옮겨 다녔는데 지금은 두 칸짜리 옥탑방에서 두 아이와 함께 네 가족이 산다. 목욕 시설도 없고 개인 컴퓨터조차 놓을 공간이 없다고 한다. 김현희씨는 불쑥 이렇게 말하였다.
"이승복 사건을 보니 나의 처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승복 소년이 공산당한테 죽은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했든 안했든 공산당은 나쁜 놈들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했느냐 안했느냐라는 시비를 그렇게 심하게 하는 겁니까? 저를 가짜로 몰아간 사람들과 같은 수법을 쓴 거예요. 부분적 의혹을 과장하여 전체를 부정하려는 거지요."
김현희씨를 가짜로 모는 이들의 상투적인 술책은 지엽말단적인 의혹을 과장하여 사건의 본질을 뒤집으려는 것이다. 김현희씨의 진술서에 '규율' '규률'로 달리 쓰인 것을 물고 늘어져 김현희가 북한공작원이 아니란 억지를 피우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김현희씨는 그 단어를 북한식으로 썼다가 다시 남한식으로 바꾼 것밖에 없다.
일본 언론이 金賢姬씨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로부터 북한의 외국인 납치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이다. 金賢姬씨가 공작원 교육을 받던 시간과 공간이 북한이 집중적으로 외국인들을 납치하던 시기와 겹친다.
1977년 7월에 북한공작조직은 파리에 살던 尹靜姬(윤정희)-白建宇(백건우) 부부를 당시 유고슬라비아로 유인, 납치하려다가 未遂(미수)에 그쳤다. 이해 북한측은 일본 서해안 니아가타에서 당시 여중 1년생이던 요코다 메구미양을 납치하였다. 1977년과 78년에 북한공작원들은 남한의 해안가에서 놀던 고교생 다섯 명을 납치, 북한으로 데려가 남파간첩 교관으로 양성하였다. 1978년 북한은 홍콩에서 崔銀姬(최은희)씨를, 그 여섯 달 뒤에는 申相玉(신상옥) 감독을 납치해갔다. 북한측은 78년에 마카오에서 두 여성, 타일랜드에서 한 명을 납치해가서 간첩교육에 투입하였다. 일본인 납치는 1977년부터 1980년대 초에 집중되었다.
이 기간 김정일의 지령으로 북한공작조직이 납치해간 외국인은 확인된 숫자만 쳐도 12개국에서 40여 명이고 의심이 가는 사람까지 치면 100명을 넘는다. 휴전후 한국에선 약500명이 납북되었다. 김정일은 세계인을 상대로 ‘인종 수집활동’을 벌여 수많은 가정을 파괴하고 생이별의 피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저들이 공작에 실패했으니 나처럼 독약앰플을 깨물어야”
김정일이 외국인 납치를 독려한 가장 큰 이유는 간첩들을 보낼 나라의 사정을 잘 아는 현지인으로 하여금 교육을 시켜야 제대로 된 공작원을 키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일본에서 납치된 다구치 야예코(리은혜), 마카오에서 납치된 孔令譻(공영앵), 한국에서 납치된 고교생들이 공작원 교관으로 이용되었다.
KAL기 폭파범 金賢姬씨가 공작원 교육을 받은 때가 1980년대 초반이었으므로 직간접으로, 납치되어온 외국인들을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리은혜’였다.
두 번째 인터뷰에서 김현희씨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때 공작원들과 외국인 교관들은 비슷한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서로 얼굴을 스칠 기회는 거의 없었으나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소문이나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공작원 교육시설인 초대소내를 비교적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운전사들이 가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전해주곤 하였습니다.”
김현희씨는 또 1980년대 초반에 납치되어온 외국인들을 결혼시켜라는 지시가 상부에서 내려왔다고 기억하였다. 리은혜는 이때 일본에서 납치되어온 요리사 출신의 하라 타다아키와 결혼하였다고 북한이 발표하였으나 일본에선 이를 믿지 않는다. 김현희씨는 다구치 야에코로부터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하였다.
“지도원이 나를 데리고 야외에 나가 선을 보게 하였다. 한 남자를 내 앞으로 지나가게 한 뒤 ‘저 사람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하였다.”
최근엔 다구치 야에코가 메구미처럼 한국에서 납치되어간 고교생 출신자와 결혼하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金賢姬씨는 좌파정권하에서 터무니없는 의혹을 제기하여 자신을 가짜로 만들려 했던 세력(舊국정원, 방송, 친북단체 등)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그건 분명히 정권적 차원의 공작이었습니다. 공작이란 것은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실패하면 저처럼 독약 앰풀을 깨물어야 합니다. 저를 가짜로 만들려는 공작은 실패하였으니 누군가는 앰풀을 깨물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金賢姬씨의 남편 鄭씨는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을 담당하였던 안기부 수사관 출신이다. 작년에 그는 舊국정원의 반역적 행태를 고발하는 김현희씨의 호소문을 들고 국정원을 찾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우파정권으로 바뀌었는데도 국정원은 냉담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앞으로 또 좌파정권이 들어서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가족은 국가만큼 소중하다”
김현희씨가 지난 10월에 李東馥 전 의원을 비롯한 知人 몇 명에게 써 보낸 편지는 컴퓨터로 찍은 게 아니고 자필로 쓴 것이었다. 트집 전문가들은 이 편지의 필적이 과거 金賢姬씨의 필적과 다르다고 또 의혹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김씨는 같은 내용을 여러 부수의 편지로 만드느라고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많이 썼다고 한다. 김현희씨는 지난 3월 초순엔 산케이 신문의 서울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씨에게 편지를 써 인편으로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이루어지는 만남을 생각하니 저의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저와 다구치씨 가족의 만남이 개인 간의 기쁨으로 끝나지 않고 韓日(한일) 양국이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공간으로 확대되리라 믿습니다. 또한 그 만남이 북한에 의해 헤어진 양국 이산가족들에게 가족이란 국가만큼 소중하고, 귀중한 것임을 일깨워주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어느 하늘 아래에서 고생하고 있을 다구치 야에코는 꿈에 그리던 그녀의 자식을 제가 그녀를 대신해서 만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한 살 때의 아들을 두고 북한에 납치되어 온 그녀는, 이제 30세를 훌쩍 넘어 성인이 된 아들, 이즈카의 늠름한 모습을 여태껏 상상 속에서 그려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30년 동안 자식과 헤어져 살면서 보고 싶어 흘린 눈물이 얼마나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래 전부터 그녀의 오빠 이즈카 시게오(飯塚繁雄)와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飯塚耕一郞)가 납북자들의 송환을 위한 구출 운동을 전개해오고 있습니다. 이제 그 아들이 성장하여 어머니의 구출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안다면, 그리고 그가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자 저를 한국에서 만난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녀는 기쁜 나머지 그녀의 큰 눈망울에서 눈물을 또 흘릴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새 희망을 갖고 자식을 만날 날을 학수고대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저 또한 북한에 그리운 부모님과 동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가족의 生死(생사)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가족과의 생이별을 운명이라고 스스로 받아들이기에는 세상이 원망스럽고, 가혹하기까지 합니다. 다구치의 아들이 그러하듯이 제가 어머니를 보고 싶은 심정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현재 한국과 일본에는 북한에 의한 수많은 납치피해자 가족들이 있습니다. 특히 일본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2년 9월 이후 피납자 송환의 성사는 저조한 실정입니다. 정말 어떻게 하면 북한당국의 체면을 살려주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다구치씨 가족과의 상봉을 앞두고 있는 것처럼, 일본 정부가 북한당국의 빗장 친 마음의 문을 열어 ‘마침내 다구치 야에코가 그의 가족을 상봉하게 되었다’는 1면 기사가 언론에 보도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럼 몸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십시오.
2009년 3월 초순. 金賢姬 드림>
KBS와 MBC는 사과하고 방송했어야
3월11일 오전 나는 궁금한 게 있었다. 좌파정권의 지원을 받고 홍위병 세력을 활용하여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의 범인 金賢姬를 가짜로 몰려는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였던 MBC와 KBS는 김현희-다구치 가족의 만남을 어떻게 보도할까?
과거 보도 행태를 따른다면 두 방송은, "공작원인지 긴가민가한 김현희, 또는 마유미가, 이은혜인지 긴가민가한 다구치씨와 만났는데 뭔가 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보도하든지 "지난 시기 김현희씨가 살던 집을 노출시키고 턱도 없는 의혹을 제기하여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김씨에게 괴로움을 준 데 대하여 깊이 사과하고 관련자들을 문책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게 정상이다.
작년 李東馥 전 국회의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金賢姬씨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제가 안기부 재직時 북한 소식을 전해주는 프로그램인 MBC ‘통일 전망대’와 KBS의 ‘남북의 창’에 수시로 출연하여 북한 실상정보를 제공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당시 방송사의 북한국은 시작 초기여서 지금과 달리 북한관련 정보가 빈약한 상태였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태어나 생활하지 않았다면 방송사에서 북한 사회의 실상을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북한국은 교양제작국의 조작설 수준의 의혹제기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 방송사의 교양제작국은 제가 북한인이라는 것조차 의혹의 눈길로 보았습니다. 방송사들은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독약 앰풀을 깨물지도 않은 부도덕한 여자’라고 맹비난을 하며 저를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저는, 역사는 이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응징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고한 많은 생명을 앗아간 항공기 테러사건을 국가기관과 공영방송 기관들이 정치적으로 악용한 것에 대해 그들은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金賢姬씨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의혹을 제기한 KBS와 MBC는 결국 自社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는 이야기이다. MBC는 2003년에 의혹을 제기하기 전에 먼저 "그동안 저희들이 방송하였던 '통일 전망대'에 북한공작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김현희씨를 북한공작원이라고 단정, 출연시켰던 점을 사과드립니다"라고 社告를 냈어야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좌파정권에 맞추어 지금은 이런 방송을 하지만 김현희가 가짜일 리가 없지"하는 인식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즉, 김현희씨에 대한 방송사들의 의혹제기는 몰라서가 아니라 뻔히 진실을 알면서 그냥 해본 것이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희극적 비극이다.
한 일본신문의 서울특파원은 한국의 좌경세력이 내세운, KAL기 사건에 대한 의혹들은 거의가 사건발생 직후 일본에서 조총련과 좌파들이 퍼뜨린 것이라고 했다. 일본에선 정상적인 기자들이 타지 않아 음모설이 곧 식어버렸는데, 이게 한국에 들어와선 사건이 난 지 근 20년이 된 뒤까지도 猛威(맹위)를 떨치고 국정원 같은 국가기관까지 움직였다는 것이다. 일본에선 죽어버린 음모설이 한국에선 살아났다! 일본 언론은 거짓을 죽이고 한국의 방송은 거짓을 살린다! 일본發 거짓말까지 수입한 KAL기 사건 의혹제기자들이야말로 한국 좌파들의 표현을 빌면 '가장 악질적인 親日派'라고 할 만하다.
“북한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곳”
1987년 11월29일에 일어났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 폭파 사건의 범인인 金賢姬(47)씨는, 3월11일 오전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BEXCO) 건물에서 일본인 납북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씨의 장남 이즈카 고이치로(飯塚耕一郞·32)씨, 오빠인 일본인 납치피해자가족회 대표 이즈카 시게오(飯塚繁雄·70)씨와 면담한 뒤 기자회견에 임했다. 김씨는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던)다구치 씨에 대해 "내가 87년 1월부터 10월까지 북한초대소에서 생활하며 들은 것은 ‘다구치 씨를 어디로 데려갔는데 어디 갔는지는 모르겠다’는 것이었다”며 “사망한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간 것으로 생각했고, 86년에 결혼시켰다는 얘기를 들었다. 죽었다는 북한발표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 기자가 “월간조선과 인터뷰하면서 요코다 메구미씨에 대해 얘기했는데..”라고 묻자 이렇게 말하였다.
“(또 다른 납북자) 요코다 메구미씨(1977년 13세 중학 1학년생일 때 납북)는, 공작원 동지인 김숙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쳤고, 87년에 남조선 사람과 결혼해 딸을 낳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김숙희와 같이 있을 때 한 번 정신적으로 아파서 입원했던 적이 있지만 심각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메구미 씨가 사망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다구치씨의 아들인 이즈카 고이치로씨는 “어머니가 확실히 생존해 있다는 증거를 얻었다. 구출활동에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며 “김씨가 한국의 따뜻한 엄마가 되겠다고 해 기쁜 마음”이라고 말했다. 최근 月刊朝鮮과 한 인터뷰에서 “노무현 정권 당시 국가정보원이 나를 MBC에 출연시켜 바보를 만들려 했다”고 주장했던 김씨는 “97년 결혼 이후 사실 사회와는 거리를 둔 채 돌아가신 분들과 유가족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며 조용히 살려고 했다”면서 “지난 정부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얘기를 하기는 그렇고, 현 정부가 지난 정부에서 있었던 일을 조사하고 있다고 하니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현희씨는 또 "일본 정부가 북한의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계속 노력하면 북한은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니까 기적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북한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된 만큼 최소한 가족이 만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미국에 의하여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것은 김현희씨의 진술과 미국 정보기관의 독자적 조사에 의하여, KAL기 폭파는 김정일이 지령하여 일어났다는 사실이 확인된 이후이다.
김씨는 이날 오전 스타렉스 승합차 편으로 벡스코에 도착했다. 건물 외곽에서 대기하던 사복 경찰기동대 100여명이 입구에 이른 검은색 스타렉스를 향하여 2열로 늘어서 경호하였다. 대기하고 있던 취재진도 김현희씨를 찍으려고 몰려들었다. 검은색 계통의 점퍼와 바지를 입은 김현희 씨는 경찰특공대원의 호위를 받으며 도열한 경찰기동대 사이를 지나갔다. 김씨는 차분한 표정이었다. 시종일관 땅을 보며 출입 검색대 쪽으로 향했다. 취재진의 질문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김현희의 시간은 거꾸로 갔다
이날 MBC 뉴스 데스크 진행자는 “지난 87년 대한항공 폭파범 김현희씨가 자신은 가짜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라면서 보도를 시작하였다. MBC가 이미 ‘대한항공 폭파범’이라고 단정했으니 “나는 가짜가 아니다”는 말은 기정사실이지 뉴스가 아니다. “나는 가짜입니다”라고 해야 뉴스가 된다. MBC는 “해는 동쪽에서 뜹니다”를 뉴스로 보도한 셈이다. 이 MBC는 2003년 11월 김현희씨에 대하여 그토록 집요하고 거칠게 의혹을 제기하였던 그 MBC와는 관계가 없는 회사인가?
일본 언론은 한국 언론이 이번 만남에서 나온 뉴스거리 중 유독 “내가 KAL기를 폭파하였다”는 말을 부각시킨 것이 이상하다는 투로 보도하였다. “내가 KAL기를 폭파하였다. 나는 가짜가 아니다”는 말은 김씨기 1988년 1월15일 안기부 기자회견 때 한 말이다. 21년이 지나도 그 舊聞(구문)이 뉴스가 되고 있는 한국 사회는 21년간 정신적 성장이 멈추어버렸다는 것이 된다. 김현희씨도 이날 인터뷰에서, "일부 유가족이 지금도 의혹을 제기하는데, 20년이나 지난 사건인데 그동안 뭐 했는지 모르겠다"라고 한탄하였다. 한국 사회의 좌경화가 언론과 교육을 망가뜨려 한국인들의 역사적 기억을 말살함으로써 집단치매 상태로 만든 현장을 목격한 셈이다. 벤자민 버튼이 아니라 김현희의 시간이 거꾸로 간 것이다.
김현희씨는 지난 10월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저는 최근에, 지난 정부에서 출간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198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있었던 대한항공기 폭발사건은 남북한 정부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북한에 의한 테러’라는 사실과 이 사건으로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 등 국민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들이 생략되어 있었습니다.
고교 역사교과서를 통해서도, 지난 정부가 친북성향의 역사의식을 가진 정부임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때문에 지난 정부가 KAL기 사건에 대해 조작의혹을 제기하고 과거사 위에서 재조사하는 소동을 벌인 일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KAL기 사건에 관한 편향된 역사 해석들을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현희씨가 중고등 학교에서 강연을 하게 되는 날을 기다려 본다.
2003년 12월18일자 오마이뉴스(인터넷매체)에는 <"잠적한 김현희, 현상금 29만원에 긴급수배". KAL 가족들, 19일 낮 연희동 全(전) 전 대통령 집앞 골목시위 예정>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좌파정권 시절 김현희씨를 가짜로 몬 사람들 중엔 KAL기 폭파사건의 일부 유족도 있었다. 이들은 미국의 팬암기 폭파 사건 유족들이 사망자 1인당 1000만 달러씩을 리비아 정부로부터 받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 같다. 한국정부와 유족들은 이런 관례에 따라 남북한 관계의 정상화 과정에서 북한정권측에 적어도 11억5000만 달러(사망자 1인당 1000만 달러)의 배상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일부 유족들이 김현희를 가짜로 몰아 북한정권의 책임을 면하게 해주려는 것은 장래의 보상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종의 自害행위이다.
김현희씨를 만나고 귀국길에 오른 다구치 야에코의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씨는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여 기자회견을 가진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김현희씨의 우아한 자태, 오열을 참지 못하면서 눈물을 흘리던 그 모습이었습니다. 이번 만남의 기쁨을 다른 납치 피해자 가족과 나눠가지면서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겠습니다”다구치씨의 오빠 이즈카 시게오씨는 “이번 만남을 계기로 일본과 한국이 손잡고 납치문제에 공동대응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였다. NHK의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특종이 좋은 정부와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역사를 움직일 수 있다는 평소의 생각을 재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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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우리들의 영웅
2007년 10월에 발표된 國情院 과거사 조사위원회의 대한항공 폭파사건에 대한 최종 보고서에는 범인 金勝一, 金賢姬를 신속하게 추적, 공항에서 아슬아슬하게 체포하도록 하였던 안기부 쿠웨이트 파견관의 활약상이 소개되어 있다. 이 사람이 없었더라면 두 테러리스트는 로마로 빠져나가 북한으로 귀환하였을 것이고, 이 사건은 영구 미제 사건이나 안기부의 自作劇으로 남아 한국 정부를 괴롭혔을 것이다. 음지에서 일하는 정보요원으로서 아직까기 그 이름이 공개되지 않고 있는 이 파견관은 우리들의 영웅이다. 그는 시간을 다투는 상황에서 기민하게 현지 기관들을 통제하여 일본인으로 위장한 두 북한공작원의 정체를 밝혀내도록 함으로써 김정일의 음모를 분쇄하였고, 결과적으로 서울올림픽을 보호하고 북한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준 혁혁한 공을 세웠다. 國情院은 '匿名에의 정열'을 불태운 이 사람을 국민들에게 알림으로써 좌파정권 때 저질렀던 과오와 실추된 이미지를 조금이라고 씼어야 할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파견관은 初動(초동) 조치가 빨랐다.
<1987.11.29 오후(현지시간, 이하 동일) UAE로 출장중 두바이 공항에서 KAL 858기 실종 소식을 듣고, 직무 경험과 旣 입수했던 첩보에 근거해 同 사건이 폭탄 테러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아부다비의 한국대사관과 대한항공 지점에 전화를 걸어 중간 경유 승객의 신원 파악을 요청, 11.29 밤 대한항공 직원과 UAE한국대사관 직원이 아부다비에 내린 KAL858기 중간 경유 승객의 신원과 행적을 파악한 결과, '비엔나-베오그라드-바그다드-아부다비'를 거쳐 바레인으로 간 父女지간으로 보이는 신이치와 마유미를 발견하도록 하였다>
<11.30 오전 UAE 한국대사관에 도착한 안기부 쿠웨이트 파견관은 이전 일본에서의 근무 경험으로 신이치와 마유미가 일본 이름임을 바로 파악하고, 兩人의 수상한 旅程(여정)과 함께 입국 금지자 명단에 야카베 마유미가 등재돼 있는 점 등의 이유로, 대사관과 대한항공을 통해 본격적으로 兩人에 대한 추적을 개시, 11.30 오후 UAE 한국대사관은 UAE 일본대사관을 통해 兩人의 신원 파악을 의뢰하는 한편, KAL 바레인 지점은 兩人의 바레인 입국 사실과 Full name, 여권번호, 리젠시 호텔 투숙 사실 등을 파악했고 KAL 아부다비 지점은 이들의 이전 행적지 투숙 장소 등을 파악, 11.30. 21:30분경 駐바레인 한국대사관 대사대리는 兩人의 투숙 호텔 방을 방문, '하치야 신이치'와 필담을 나누는 등 거동수상 여부를 확인했으나 특이사항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한국의 대사대리는 誤判하였으나 <12.1 새벽 일본정부로부터 '하치야 신이치'의 여권이 위조된 것임을 통보받은 駐바레인 일본대사관은 바로 리젠시 호텔을 방문해 공항으로 향하는 兩人을 추적, 바레인 마나마 공항 경찰에 兩人의 출국을 제지해 줄 것을 요청, 兩人을 검문하는 도중 공항 로비에서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가 飮毒, '신이치'는 현장에서 사망, '마유미'는 응급조치 후 회생, 바레인 수사기관에 체포>되었다. 안기부 요원의 활약에 의하여 일본 정부가 개입하여 폭파組를 체포하게 하였던 것이다. 일본정부가 결정적으로 한국을 도왔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현희는 그 일본정부에 報恩이라도 하듯이 납치된 일본인 여성 '리은혜'에 대하여 진술하였다. 일본 경찰은 '리은혜'가 '다구치 야에코'임을 밝혀냄으로써 일본인 납치자 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한일관계史에 남을 만한 협력이었다. 일본인 납치문제로 인하여 對南공작기지인 조총련이 사망 일보 직전까지 몰려 있고, 日北 수교도 늦춰져 일본의 자금이 북한으로 들어가 김정일 정권을 강화시키는 것을 차단하였다. 그런 점에서 안기부 쿠웨이트 파견관은 역사를 바꾼 셈이다.
續-김현희 인터뷰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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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3-30, 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