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國史學科 盧泰敦(노태돈) 교수가 쓴 '삼국통일전쟁사'(서울대학교 출판부)를
재미있게 읽었다. 거의 한글專用으로 쓰여져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다. 國史 관련 책을 한글전용으로 쓰면 정확한 의미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재확인하였다.
예컨대 <나아가 탐라인이 왜국의 해로 향도가 되었다는 것을 상정해볼 수 있다>라는 문장이다. 해로를 海路라고만 써도 문장 전체가 살아난다. <유인궤는 웅진에 진수하여 전후 복구사업을 주관하게 되었다>도 마찬가지이다. 진수를 鎭守, 전후를 戰後라고 써야 의미가 통한다. 이런 쉬운 한자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이 책을 읽을 리는 만무하다. 이런 책의 한글전용은 독자를 위한 게 아니라 출판사 편집자들의 편의를 위한 경우가 많다.
한글專用으로 된 역사관련 책들을 읽다가 보면 머리가 아파오는 경우가 많다. 암호화된 용어들을 일일이 풀이해야 하니까. 고급, 전문도서의 한글전용은 장기적으로 독자들을 그런 책들로부터 멀리 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는 교양의 弱化로 이어지고 교양 없는 국민들을 만들어낸다.
이 책을 읽으면 무서운 집념과 안목으로 三國통일을 이룩한 新羅 지도부에 대하여 자연히 敬意를 표하게 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金春秋, 金庾信, 文武王이 주도하였다. 김춘추(나중에 태종무열왕)은 외교, 김유신은 군사, 문무왕은 정치를 주로 맡았다. 외교-군사-內政이 三位一體的으로 잘 조화되었다. 통일주체세력들의 내부 단합이 결정적 성공요인이었다.
盧泰敦 교수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가 나열한 事實들이 그런 관점을 갖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신라는 중국에서 隋와 唐이란 거대 통일국가가 등장하는 東아시아의 격동기를 잘 활용하였다. 김춘추는 倭, 고구려, 唐을 찾아가는, 목숨을 건 외교를 감행하였다. 고구려에선 억류되고, 唐에서 돌아올 때는 고구려 해군에 요격되는데, 부하가 대신 죽는다.
新羅는 백제, 고구려, 倭, 唐을 상대로 밀고 당기는 4각 외교 및 군사작전을 벌인다. 백제, 고구려를 칠 때는 唐의 힘을 빌리고, 唐과 싸울 땐 배후의 倭를 중립화시키고 고구려의 遺民들을 이용하였다. 三國중 가장 작은 나라가 세계최강국인 唐을 갖고 노는 외교를 한 것이다. 민족사 2000년 가운데 국가 지도부가 이 정도의 용기와 지혜와 경륜을 갖추었던 적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정신력이 최초의 민족통일 국가를 만들어냈고, 한반도를 우리의 생활공간으로 확보하게 하였다. 이 정신력의 源泉(원천)을 규명하는 일이 남아 있다.
신라 지배층은 백제, 고구려에 비하여 自我(자아)의식과 주체성이 강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6세기 초까지 중국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草原(초원)의 길을 활용하여 북방유목 제국, 더 나아가선 로마 문명과 교류하였던 자신감이 그런 주체성으로 昇華(승화)되었다고 본다.
盧泰敦 교수의 책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을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對唐결전을 앞두고 신라가 적대국 倭를 중립화시키는 외교 전략을 구사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신라와 唐의 연합군은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켰으나 곧 백제 부흥운동에 직면한다. 倭는 663년에 약3만의 大軍(대군)을 한반도로 파견, 百濟(백제) 부흥군을 도우려 한다. 白村江의 해전으로 알려진 유명한 決戰(결전)에서 倭(왜)의 해군은 唐과 신라군에 의하여 전멸한다. 백제부흥운동은 좌절되고 倭(왜)는 한반도에 대한 野慾(야욕)을 포기한다.
이후의 사정에 대한 盧泰敦 교수의 분석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백강구(백촌강) 전투 이후 많은 수의 백제인이 倭로 망명하였다. 백제 지배층뿐 아니라 일반 민중도 상당수 바다를 건너갔다. 상당수는 그들의 재능을 활용하려는 倭 조정에 등용되었다. 백강구 전투 이후 망명한 그들의 일본에서의 삶은 비록 전문인으로서 능력에 대한 높은 평가가 큰 힘이 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일본 조정의 배려에 의지하여 이루어졌다. 일본 황실에 寄生(기생)하여 내일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이 지닌 숙명이었다. 그들은 백제 부흥과 故國(고국) 복귀를 바랐지만, 自力(자력)으로 구체화할 역량은 없었다. 그들이 이를 열망할수록 실현 가능성을 일본세력의 한반도 개입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일본 朝廷(조정)이 한반도에 관심을 유지하게 깊은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고, 이를 위해 한반도가 이른 시기부터 일본 천황가에 종속되었다는 歷史像(역사상) 구축에 적극 나섰다. 그들이 돌이켜 백제 존립 당시의 백제와 倭(왜), 그리고 왜와 가야나 신라와의 관계사를 정리 기술할 때 취하였을 입장의 큰 틀은 짐작할 수 있다. 이른바 百濟三書는 이들의 저술이거나 그들의 손을 거쳐 수정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런 저술은 ‘日本書紀(일본서기)’의 내용 구성에 크게 작용하였다.
또한 ‘日本書紀(일본서기)’는 그 뒤 일본인들의 對外의식, 특히 對한국 인식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백강구 전투에서 흘린 백제인과 倭人의 피의 저주는 천수백 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작용하여 韓日 양국인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이제 그 呪術(주술)에서 벗어나야겠다>(인용문중의 漢字표기는 필자가 한 것이다).
요컨대 盧泰敦 교수는 亡國의 恨을 품고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인들이 일본의 正史인 日本書紀를 쓰는 데 직간접으로 관계하여 신라를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관을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심었고, 이것이 지금의 韓日 갈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취지의 기술을 하고 있다. 필자는 수년 전부터 이와 비슷한 글을 써 왔다. 오늘의 韓日 갈등, 그 深層(심층)에는 신라와 백제의 갈등이 깔려 있다는 의미였다. 日本書紀는 8세기 초에 간행된 일본 최초 正史(일본 정권이 편찬한 공식 역사서)인데, 正史이므로 이 책에서 기술한 부정적인 新羅觀은 그대로 일본에서 국가적, 국민적, 공식적 對신라관-對한국인관으로 굳어졌다는 이야기이다.
新羅(신라)에 패배한 백제와 倭人(왜인)이 흘린 피와 원한의 呪術에서 벗어나려면 오늘의 일본인들은 古代史의 진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고,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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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天皇家의 철천지 원수 新羅
- '그들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趙甲濟)
서기 562년 신라가 大伽倻, 지금의 高靈을 점령하여 가야국이 최종적으로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의 欽明천황은 이런 한탄을 한다. 일본의 正史인 日本書紀에 적혀 있는 대목을 옮긴다.
<신라는 서쪽 보잘것 없는 땅에 있는 작고도 더러운 나라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皇家를 파멸시키고 백성을 해치며 우리 郡縣(군현)을 빼앗았다. 지난날에 우리 신공 황후가 신령의 뜻을 밝히고 천하를 두루 살피시어 만백성을 돌보셨다. 그때 신라가 천운이 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애걸함을 가엾게 여기사 신라왕의 목숨을 살려 있을 곳을 베풀어 번성하도록 하여주었다. 생각해보아라. 우리 신공황후가 신라를 푸대접한 일이 있는가. 우리 백성이 신라에게 무슨 원한을 품었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미마나(가야를 일본에선 미마나라고 불렀다)를 공격하여 온 백성을 죽이고 상하게 하며 간과 다리를 잘라내는 것도 모자라 뼈를 들에 널고 시신을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하늘 아래의 어느 백성이 이 말을 전해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지 않겠는고. 하물며 황태자를 비롯하여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그 자손들과의 情懷(정회)를 회상하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나라를 지키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윗분을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돌보아 힘을 합하여 이 간악한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게 하여 천지에 맺힌 원한을 풀고 임금과 선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신하와 자손의 길을 다하지 못한 후회를 뒷날에 남기게 될 것이다>
欽明천황은 '그들(신라)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고 말했다. 大伽倻(대가야) 지역의 사람들을 倭의 천황이 '친척'이라고 부른다. 이는 고대 일본을 세운 主力 세력이 伽倻에서 규슈를 거쳐 近畿지방(나라, 교토)으로 건너간 伽倻人들임을 암시한다. 동시에 일본의 天皇家가 가야계통 사람들임을 추정하게 한다.
日帝는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뒤 총독부의 명령으로 金海金氏의 족보발행을 금지시키는 이상한 조치를 취했다. 金海金氏는 금관가야 김수로 王의 후손들이다. 금관가야 사람들이 맨 먼저 규슈로 건너가 정권을 잡고 천황가를 만들었는데, 日帝는 이 사실, 즉 천황가가 김해김씨 후손이란 것을 숨기기 위하여 족보발행을 금지시켰다는 주장이 있다(朴炳植說). 지금까지도 일본의 천황은 姓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姓은 있는데 공개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천황의 즉위식은 가야식이라고 하는데 공개되지 않는다.
서기 554년 관산성(충북옥천) 싸움에서 倭는 백제, 가야와 연합군을 만들어 신라와 싸웠다. 가야계인 倭는 고향인 가야를 지키기 위하여 백제와 동맹했던 셈이다. 伽倻는 本家, 倭는 分家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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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원동력은 정치안정
삼국사기 列傳에 등장하는 신라인 56명중 20여명이 殉國한 사람이다. 金令胤은 이렇게 말했다.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忠을 다해야 하고, 남의 자식이 되어서는 孝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나라가 위급한 것을 보고 목숨을 내놓는 것은 忠孝를 함께 하는 인간의 도리이다'
신라 56왕중 암살 등의 이유로 왕위를 찬탈당한 사람은 여섯 명에 불과하다. 이는 신라의 王權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삼국사기 本紀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新羅本紀에는 정치관련 기사가 전체의 48.3%나 된다. 백제는 29.8%, 고구려는 36.4%이다. 이는 신라의 역대 왕들이 정치행위에 신경을 가장 많이 썼다는 의미이다.
신라사 연구의 권위자 申瀅植 이화여대 교수는 이렇게 썼다.
<신라는 정치기사가 큰 비중을 갖고 있어 왕권의 강화나 제도의 정비 등 정치적 발전에 큰 진전을 본 나라였으며, 전쟁에서 가장 적은 출혈을 보았으므로 비교적 정치적 안정과 문화의 개발이 가능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지배층이 정치를 잘해서 내부단합과 이에 기초한 생산력과 동원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唐의 장수 蘇定方은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뒤 귀국하여 당 고종에게 보고한다. 고종은 왜 신라마저 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蘇定方은 이렇게 설명한다(삼국사기에서 인용).
'신라는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겨 아랫사람들이 윗사람 섬기기를 父兄과 같이 하니, 비록 나라는 작지만 함부로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
정치의 근본은 내부단합을 이루는 것이다. 상하관계에 질서와 의리와 인정을 심어 외부의 충격에도 잘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 시대가 달라도 변함이 없는 정치의 본질이다.
국민들 사이에서, 분열과 갈등과 반목을 부채질 하는 것을 정치의 본질로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1300년 전 신라를 배워야 할 것이다.
*통계: 전쟁과 천재지변이 가장 많았던 新羅
한국 역사학계의 원로학자인 申炯植 교수가 쓴 '新羅通史'(주류성 출판사)에는 재미 있는 통계가 있다. 삼국시대의 전쟁통계이다.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는 신라로서 총174회이다. 다음이 고구려로서 145회, 백제는 141회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倭와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가장 많이 싸웠고 백제와는 다음으로 많이 싸웠다. 백제는 신라와 가장 자주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싸워 한반도를 지켜냈고, 신라는 倭와 싸워 한반도의 남쪽을 지켰다.
신라는 지진, 가뭄,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에서도 삼국중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申교수가 三國史記를 분석하여 통계를 냈다. 삼국시대에 한정해보면 신라는 322회의 천재지변을 겪었다. 백제는 191회, 고구려는 153회였다. 申교수는 천재지변이 가장 많다는 것이 오히려 신라를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신라의 잦은 시련은 그에 상응하는 대책을 세우는 과정에서 오히려 사회발전과 王權강화를 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申교수는 신라가 수행한 전쟁의 긍정적 면을 이렇게 분석했다.
<전쟁은 제도개혁이나 정치반성의 계기를 제공했고, 이것이 사회발전의 轉機를 가져왔다. 특히 신라는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확장시켰으며, 對唐전쟁을 통해서 백제 고구려의 殘民(잔민)을 하나의 민족대열에 융합했다. 신라는 對外전쟁을 민족자각과 융합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전쟁과 천재지변은 국가가 당면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이 난관을 성공적으로 돌파한 나라나 인간은 강건한 체질을 터득하게 된다. 신라가 그런 나라였다는 이야기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逆境을 극복한 결과였다. 역사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국가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통일인데 삼국통일이 요행수로 되었다고 믿는 것은 과학이 아닌 미신이다.
"(신라에 패배한) 백제인과 왜인의 피의 저주"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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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4-11, 17: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