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사건의 단초가 된 釜馬사태 30주년

金載圭 정보부장은 民心이 정권을 떠났다는 판단을 내리고, 강경노선의 車智澈(차지철) 경호실장과 대립한다.
1979년 10월16일 부산에서 부산대학생들이 주동한 都心시위가 일어났다. 18일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은 反정부 구호를 외치고, 출동한 경찰 차량을 불태웠다. 중산층 시민들이 합세하여 民亂의 양상을 보였다는 점에서 정권에 큰 충격을 주었다.

朴正熙 정부는 18일 0시를 기하여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으나 시위는 馬山으로 확산되었다. 馬山엔 위수령이 선포되었다. 공수부대의 투입으로 시위는 진압되었으나 金載圭 정보부장은 民心이 정권을 떠났다는 판단을 내리고, 강경노선의 車智澈(차지철) 경호실장과 대립한다. 이런 권부의 갈등은 10.26 사건으로 이어진다. 필자가 쓴 '朴正熙의 결정적 순간들'(기파랑)에 나오는 釜馬사태 관련 글의 일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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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載圭의 부산 출장

金載圭는 10월18일 새벽 2시쯤 부산의 계엄사령부(군수기지사령부)에 나타났다. 야간 비행으로 급히 내려온 것이었다. 金載圭는 朴興柱 대령(수행 비서관) 등 참모들을 데리고 왔다. 그는 부산지역계엄사령관 朴贊兢 중장에게 朴 대통령의 지시를 구두로 전달했다. 그 골자는 “데모의 징후가 여러 타 지역에서도 엿보이니까 빨리 사태를 진정시키라”는 것이었다.

朴 중장은 金載圭가 3군단장일 때 그 휘하에서 사단장으로 1년 정도 근무해서 친면이 있었다. 金載圭는 18일 아침 계엄사령부에서 열린 계엄위원회의에 참석했다. 崔錫元 부산시장을 비롯, 부산지검장, 시경국장, 교육감, 관구 사령관, 법원장 등 계엄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金載圭는 이렇게 말했다.

“4·19는 우리 軍의 수치였다. 계엄군이 본분을 이탈, 시민과 합세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이번에는 軍의 본분에 충실하라.”

金 부장은 또 1964년의 6·3 사태 때 6사단장으로서 서울지구 계엄 업무를 맡았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金載圭의 이 부산 출장은 그와 朴 대통령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하나의 요인이 됐다. 부산에서 그가 보고 듣고 판단하고, 또 이용하려고 한 것이 10·26의 중요한 동기가 됐기 때문이다. 부산사태는 金載圭의 마음을 통해 계산되고, 과장되고, 왜곡되기도 하면서 커 가고 있었다.

金載圭가 밤중에 부산사태의 현장을 살피고 있던 바로 그 순간 丁一權 前 총리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그는 생전에 이런 증언을 남겼다.

“朴 대통령의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였습니다. 눈꺼풀에도 피가 엉겨붙어 있었어요. 그런 얼굴로 대통령은 ‘정 형!’이라고 부르며 저를 껴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이놈들, 이놈들’ 하며 쓰러졌습니다. 이 순간 나는 깨어났는데, 집사람을 깨워 꿈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는 ‘꿈에 피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저를 안심시킵디다. 전에도 큰 사건 전에 들어맞는 꿈을 몇 번 꾼 적이 있어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군수사령관 朴贊兢 중장(뒤에 총무처 장관)은 ‘발포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간밤에 들이닥친 金載圭는 “사태를 빨리 수습하고, 연행자들을 서둘러 선별하라”는 朴正熙 대통령의 지침만 전달했을 뿐 발포문제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朴사령관은 경찰이 시위 군중에 밀려서 軍이 나서게 된 것이니까 軍까지 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으나, 발포를 최악의 순간까지 억제하는 지침을 휘하 부대에 내렸다.

<첫째, 사령관의 직접 명령에 의해서만 발포를 할 수 있다.

둘째, 이 직접 명령은 문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면담을 통해서 받아야 한다. 급박한 상황에서 전화로 발포 지시를 받아야 할 땐 먼저 사령관의 육성을 확인해야 한다>

정부는 계엄 선포 첫날 신속하게 병력을 투입했다. 18일 새벽에 서울로부터 1개 공수특전 여단이 날아왔고, 아침에는 포항으로부터 1개 해병연대가 부산으로 이동했다. 부산의 현지 병력과 합쳐서 계엄군의 규모는 5,500명에 달했다.

19일에 다시 2개 공수여단 병력 3,600명이 추가로 투입되었다. 약 9,100명으로 불어난 軍 병력에다가 약 1,800명의 경찰 병력을 더해 총 1만 900명의 계엄병력이 편성되었다. 이들 중 1,500명가량은 휴교에 들어간 10개 대학에 배치되었다. 부산시청, 방송국 등 주요 공공건물 26개 소에서 약 6,000명이 경비에 임했고, 나머지 3,400명은 기동 부대로서 시내를 순찰하는 등의 임무를 받았다.

朴 장군은 계엄군에게 실탄을 지급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최루탄도 소·중대장에게만 주었다. 데모대는 개머리판으로 진압토록 했다. 1개 소대에 경찰관 1∼2명을 배치시켰다. 현지 사정에 밝은 경찰관이 데모 군중 속에서 불량배를 지적해 주면 그들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朴 장군은 이번 데모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여론조사를 실시하도록 합동수사단에 명령했다.

그는 지게꾼에서 대학교수까지 각계각층의 여론을 정확히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며칠 뒤 집계 분석된 여론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부산 시위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 침체에 의한 서민·상인층의 불만’으로 나타났다. 다음이 金泳三 의원 제명 뒤 야당 의원들이 낸 의원직 사퇴서에 대해서 여당 측이 선별수리한다는 보도였다. 석유 파동에 의한 경기 침체와 金泳三 제명이 2大 요인이었다는 얘기다.

18일 오전 10시, 간밤에 부산에 온 金載圭는 부산대학교에 나타났다. 본관 현관에서 박기채 총장이 그를 맞았다. 金載圭는 의례적인 말투로 “학생들은 어떻습니까?”고 물었다. 朴 총장이 총장실로 안내하려니까 金 부장은 “사실은 우리 부대가 여기 주둔하게 돼서 한 번 찾아보고 싶어 왔다”면서 “수고하십시오”라고 말하곤 軍 부대의 지휘부가 들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金 부장은 침착했고 잔말이 통 없었다.

정부가 계엄령 선포 직후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공수단과 해병대를 긴급 투입한 것은 부산사태를 철저하게 진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것이었다. 특수훈련을 받고 특수전에 쓰이도록 만들어진 공수부대는 시위자들은 물론이고 일반시민들에게도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이로써 6·25 전쟁 이후 처음으로 일반인들이 군인들에 대한 악감정을 갖게 되었다. 특전사령부나 軍 지휘부에서는 이 과잉진압을 성공사례로 평가하여 1980년 5월 18일 광주에 또 공수단을 투입하였다가 유혈사태를 부른다.

동래구 동상동에 사는 회사원 신희철(당시 37세) 씨는 18일 밤 8시 50분쯤 서구 충무동 상륙다방 앞에서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끌려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머리를 크게 다쳤다. 뇌좌상과 뇌경막 손상을 당한 그는 봉생 신경외과에서 뇌수술까지 받았다.

부산지구 당감동에 사는 금은방 종업원인 전병진(당시 32세) 씨는 계엄령 첫날인 10월 18일 밤 9시 30분쯤 서면 태화극장 앞에서 택시를 먼저 잡으려고 찻길로 조금 나가 서 있었다. 앞당겨진 통행금지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아 시민들은 서로 먼저 타려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이때 공수부대 한 소대병력이 찻길을 따라 남쪽으로 행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앞에 걸리는 사람들을 청소하듯 해버렸다.

술에 조금 취해 있었던 전병진 씨는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당했다.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몇 대나 맞았는지 구둣발로 얼마나 채였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정차한 택시 꽁무니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다. 군인 네 명이 다시 그를 끌어내 발길질과 개머리판으로 녹초를 만들었다. 그는 쓰러졌다. 군인들이 다 지나갔을 때 그는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지하도를 건너서 한독병원을 찾았다. 한독병원에서는 간단한 응급치료만 해주고 자가용에 태워 당감동 한태일 신경외과로 옮겨다 주었다.

진단을 해보니 앞 이빨 다섯 개가 부려졌고 오른쪽 귀 위의 머리뼈에 분쇄골절이 생겼음이 드러났다. 그는 분쇄골절된 부분을 잘라 내는 수술과 그 자리에 플라스틱을 대신 끼우는 수술을 두 차례 받았다.

공수부대에서 쓰는 곤봉은 야간 전투에 쓰도록 만든 것으로서 경찰관의 그것보다 훨씬 길며 조금 휘어 있어 이슬람 기병들의 환도처럼 생겼다.

시민들은 길바닥에 꿇어앉혀져 몽둥이질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못 본 체하고 지나가는 버릇을 익혀야 했다. 구타를 말리려다가 얻어맞기도 했다. 경찰관들도 안전하지 못했다. 동부경찰서 ㄱ경위는 두 형사와 함께 남포동에 나왔다가 공수부대 군인 두 명이 한 시민을 개머리판과 발길질로 심하게 때리는 것을 보았다. ㄱ경위는 불끈 화가 치밀었다. 몇째 동생 나이밖에 안 되는 그 군인들에게 “이러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넌 뭐야?”

“경찰관이다.”

ㄱ경위는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이때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오더니 버럭 고함을 질렀다.

“경찰 같은 것 쓸데없어. 이 새끼들 조져!”

이 명령이 떨어지자 근처에 배치돼 있던 공수부대 사병들 10여 명이 몰려와 세 경찰관을 으슥한 골목으로 끌고 갔다. 주먹과 발길이 어지럽게 오갔다. ㄱ경위는 전치 2주의 상처, 형사 한 명은 고막을 다쳤다.

군인들에게 맞아 다친 시민들의 80% 이상이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다친 시민들의 진단 병명을 늘어놓으면 군인들이 어떻게 두들겨 팼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창자파열, 뇌좌상, 뇌진탕, 전두부파열상, 후두부열창, 안면열창, 안면부내부열창, 전신타박상, 뇌경막손상….

18일 마산 경남대학교. 점심 때 도서관 앞 잔디밭에선 이야기꽃이 피고 있었다. 경제과 3학년엔 부산에서 통학하던 학생이 둘 있었다. 이 두 학생은 부산 데모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학생들은 귀를 쫑긋하여 듣고 있었다. 이날 아침 학생들은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등교했다. 학교 게시판에는 ‘박정희 파쇼정권 타도’라고 쓰인 격문이 붙어 있었다. 술렁대는 분위기 속에서 점심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는데, 이때 느닷없이 교내 스피커에서 “오늘은 휴강을 실시하니 학생들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 주기 바랍니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학생들은 웅성웅성했다.

“우리는 데모도 안 했는데….”

학생들은 납득할 수 없는 휴강령에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부산 데모가 경찰의 개입으로 확대된 것과 똑같이 마산 데모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이 휴강 조처였다.

귀가하는 학생들은 저절로 길목인 도서관 앞으로 모여들었다. 군중이 되면 용기도 전염된다. 누가 나서 주기를 바라는 분위기가 됐다. 말하자면 인화물질에 기름은 끼얹어졌는데 성냥을 그어 댈 사람이 아직 안 나타난 상황이었다.

부산이나 마산사태의 발단은 모두 우발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因果(인과)관계가 분명하다. 부산에서 鄭光敏이 한 역할을 마산에서 한 것이 국제개발학과 2학년 정인권(당시 22세)이었다. 두 鄭 군은 울컥하는 충동적 심정으로 성냥을 그어 댄 것이 아니라 오랜 고민과 결심의 결과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다.

정인권은 며칠 전부터 일곱 명의 학생들과 데모 계획을 짜 놓고 있었다. 중간고사가 시작되는 10월 21일을 D 데이로 잡고 있었다. 휴업이 길어지면 D 데이를 지킬 수 없게 된다. 당황한 정인권은 대책을 의논하려고 동료들을 찾아 우왕좌왕하다가 스스로 결단을 내렸다. 그는 학생들 앞으로 나섰다.

“부산 학생들과 같이 싸우자.”

“3·15 정신을 되살리자.”

“부모들이 피땀 흘려 공부시킨 것이 이럴 때 바보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한 줄 아느냐.”

鄭 군의 일장 연설은 학생들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는 뇌관을 터뜨렸고, 그 다음부터는 학생과 시민의 자체 추진력에 의해 저절로 굴러갈 것이었다. 그 뒤로는 鄭 군이 다시 지도자로 나설 필요조차 없었다.

마산 시위도 부산과 거의 같은 생리로 진행됐다.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치며 학교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정문 앞을 경찰이 막자 “3·15 의거탑에서 만나자”, “불종거리(의거탑에서 가까움)에서 만나자”고 속삭였다. 일부는 담을 뛰어넘어, 일부는 집으로 가는 체하다 정문을 통해 노동자와 시민들이 기다리는 시내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4·19는 시작됐습니다”


金載圭는 10월 18일 오후 항공편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10·26 사건의 재판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부산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고 피신처를 제공하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 대의 경찰차와 수십 개 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부산을 다녀오면서 바로 朴 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김계원, 차지철 실장이 동석하여 저녁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였습니다. 부산사태는 체제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高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民亂(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및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랬더니 朴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더니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車 실장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朴 대통령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절대로 말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이었습니다.

朴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압니다. 그는 군인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모르는 분입니다. 더구나 10월 유신 이후 집권욕이 애국심보다 훨씬 강해져서, 심지어 국가의 안보조차도 집권욕의 아래에 두고 있던 분입니다. 李承晩 대통령과 여러모로 비교해 보았지만 朴 대통령은 李 박사와는 달라서 물러설 줄을 모르고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필코 방어해 내고 말 분입니다.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4·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습니다>(《항소이유 보충서》 中 발췌)

金載圭는 1979년 초에 일어난 이란 혁명에 대해 연구를 시킨 적이 있었다. 일반 시민의 봉기를 제압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얘기를 평소에 자주 했다. 그는 부산사태의 현장 시찰을 하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부산에 연고가 있는 간부들을 현지로 내려보내 사태의 원인을 분석하도록 지시했다.

부산 시위 현장에 다녀온 직후의 金載圭를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했던 사람은 김봉태였다. 金載圭 부인의 여동생 남편으로서 의사인 김봉태 씨는 퇴근 뒤 거의 매일 남산 기슭의 정보부장 공관으로 손위 동서를 찾아갔다. 金載圭 부부와 저녁을 먹으면서 가끔 충고를 하기도 했다. 金 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부산사태를 시찰하고 돌아온 다음날인가, 저녁식사 때 이런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납니다. 제가 ‘民亂이라면 반란 아닙니까’라고 되물었더니 그분은 ‘자네가 그런 말을 하나’고 하더니 ‘그렇지, 그건 민중봉기야, 민중봉기’라고 말하더군요.”

이날부터 金載圭의 분위기는 싹 달라졌다고 한다. 식탁에서도 말이 없었고 굳은 표정으로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람도 피했다. 저녁식사 뒤에는 여느 때처럼 잡담도 하지 않고 바로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金載圭는 10월 24일 당시 공화당 의원 李厚洛을 만났을 때 지나치는 말처럼 “제가 싹 해치우겠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李厚洛은 그때는 “신민당을 해치우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金載圭가 존경했던 李鍾贊 장군(당시 유정회 의원)도 이 무렵 金載圭를 찾아가 “유정회 의원을 더 이상 못 해먹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金載圭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사정하더란 것이다.

朴 대통령은 10월 19일 오후 싱가포르 李光耀 총리의 예방을 받았다. 李 총리는 10월 16일에 來韓했었다. 朴 대통령은 李 총리에게 우리 농촌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李 총리는 “농민의 생활 수준이 대단히 높은 데 놀랐다”고 답했다. 대접견실에서 훈장 수여와 기념 촬영이 끝나자 두 사람은 서재로 옮겨 요담에 들어갔다. 창가에는 가을 양광이 따스하게 비치고 있었다. 이날 朴 대통령은 대단히 만족해하였다. 李 총리와 뜻이 통했던 것이다.

그해 6월 말에 있었던 카터 대통령과의 거북한 만남과는 대조적인 대면이었다. 朴正熙, 李光耀 두 사람 다 공산주의자와 싸워 가면서 아시아의 후진국을 개발도상국으로 도약시키는 데 성공한 국가 지도자인 만큼 서로의 고뇌를 同病相憐(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이날 저녁에 베풀어진 만찬에서 李光耀 총리는 답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의 성공과 경제 번영은 대한민국 국민과 그 지도자들의 자질이 어떠한가를 가장 잘 나타내는 징표이며, 한국이 공업·농업 분야에서 이룩한 발전은 다양하고 뚜렷하다. 이와 같은 발전은 첫째, 능력 있고 추진력이 강한 국민과 둘째, 확고한 지도력 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지도자들은 그들의 관심과 정력을 대중매체로부터 각광을 받고 여론조사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 데 소모하고, 다른 지도자들은 일에 모든 정력을 집중하고 자신들의 평가를 역사의 심판에 맡긴다. 朴 대통령 각하가 바로 눈앞의 현실에 집착하는 분이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金致烈과 밀담
1979년 10월 22일 金致烈 법무장관은 朴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밤에 청와대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장시간 釜馬사태 등 時局문제를 이야기했다. 다음날도 金致烈 장관은 두 번째의 단독 면담을 했다. 金 장관은 난국을 타개할 근본 대책으로 유신헌법의 개정을 건의했다. 개헌의 골자는 유정회 제도를 없애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를 바꾸자는 것이었다.

朴 대통령은 “나도 같은 의견이다”는 태도를 보였다. 金 장관은 이를 “개헌 문제를 연구해 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첫날 면담 도중 朴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몇 년 근무했지” 하고 물었다. 金 장관은 1970∼1973년 사이 金桂元·李厚洛 부장 아래서 차장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朴 대통령의 물음에서 金 장관은 대통령이 자신을 정보부장감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朴 대통령과 金 장관의 면담 직후 권력층 주변에선 ‘후임 정보부장은 金致烈’이란 얘기가 돌았다. 당시 공화당 의원이었던 李厚洛은 10월 24일에 같은 선거구 출신인 신민당 의원 崔炯佑를 만나 당직 사퇴를 권유하면서 그런 귀띔을 했다.

金 장관은 신민당 金泳三 총재에 대한 의원직 제명 직전엔 “강경책이 百藥之長(백약지장)이라면 팔레비나 소모사의 말로가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라는 일종의 ‘상소문’을 개인적으로 朴 대통령에게 올린 적도 있었다. 이러한 金 장관에게 朴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맡기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은 정국의 근본적인 전환뿐만 아니라 유신체제의 進路(진로)에 대한 재검토를 뜻하는 것이었으리라.

金載圭도 자신의 후임으로 金致烈 장관의 이름이 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상당수 정보부 간부들도 “금명간 부장이 바뀐다”고 믿고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金載圭로서는 “내가 해치울 수 있는 시간도 며칠 남지 않았다”는 강박관념이 생겼을 것이다.

玄鴻柱 국장은 10월 22일 오후 2시부터 청와대에서 釜馬사태에 대한 중간 보고를 했다. 朴 대통령, 金載圭 정보부장, 金桂元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내무·국방·법무·문교·문공장관 등이 참석한 자리였다. 玄 국장은 보고서의 제목을 ‘부산·마산 소요사건의 실태와 대책’이라고 붙였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학생데모가 아니라 시민 일부가 가담한 폭동에 가까운 소요였다. 시민들이 가세한 이유는 각 계층별로 차이는 있으나 租稅 저항, 일선 경찰관 등 행정기관의 부조리에 대한 불만, 貧富 격차에 따른 위화감, 변화에 대한 기대감 등이다. 민심 수습을 위한 각종 대책과 함께 현 정부가 안정되어 있으나 정체함이 없이 항상 쇄신하는 정부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정부 각 부처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원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항상 새로운 면모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구체적으로는 부산·마산 사건 수사결과를 빨리 발표할 것, 지방도시의 소요진압 능력을 강화할 것, 관계기관의 예방정보활동을 강화할 것, 서민생활 안정대책을 세울 것 등이다>

朴 대통령은 이 보고에 대단히 만족했다. 그는 “이 보고서를 국무위원들에게 읽어 주고 총리 책임 하에 대책을 시행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朴 대통령은 또 “이번 사태는 충분히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 내무부 등 정보기관의 활동이 미흡하였다”고 지적했다. 이날 오후 5시 釜馬사태 대책 수립을 위한 긴급 국무회의가 소집되었다. 朴 대통령 대신 崔圭夏 국무총리가 주재했다.

10월 23일 오전 金載圭 정보부장은 부장실에서 간부들을 불러 놓고 전날 청와대에서 있었던 대책회의 결과를 설명했다. 그는 “각하께서 中情은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학원 내의 정보망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크게 꾸중을 하셨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金 부장은 朴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지적사항을 그대로 전달하는 성격이었다.

10월 24일 정보부 기정국장 玄鴻柱 씨는 상부로부터 “내일 청와대에서 안보대책회의가 열린다. 보고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다시 받았다. 그는 22일 보고문서를 토대로 새로운 보고서를 작성했다.

신민당 黃珞周 총무는 10월 23일 정보부 金正燮 차장보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黃 의원은 24일 오전 약속된 장소인 서울시청 근방 백남빌딩의 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金正燮 차장보의 부하가 불쑥 전화기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았다. 金載圭였다.

“아이구, 黃 총무님 오랜만입니다. 중대한 문제가 있으니 지금 이리로 와 주십시오, 안내는 金 차장보가 할 겁니다.”

黃 총무를 태운 뉴 코로나가 당도한 곳은 궁정동의 정보부장 사무실이었다. 문 앞에서 낯익은 金 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응접실로 黃珞周를 안내한 金載圭는 30분 동안 딴소리를 했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야기를 하더니 “지도자는 후퇴를 잘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朴 대통령의 위대성에 대해서는 열을 내 말했다. 이윽고 釜馬사태 이야기가 나왔다.

“신문에선 양아치와 불량배가 데모했다고 하지만 실은 선량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난국을 수습 못 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가 됩니다. 이걸 수습할 분은 나와 黃 총무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본론이 시작됐다. 金載圭는 “난국 수습을 위해선 金泳三 총재가 당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하며, 黃 총무도 원내총무직을 사퇴해 주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金泳三 총재는 나와는 같은 피가 섞인 一家가 아닌가. 내가 그분이 망할 일을 하겠는가. 黃 총무도 사퇴하면 경영하고 있는 진해여상의 확장을 도와주겠고, 2∼3년 뒤에는 롤백할 수 있도록 밀어주겠다”고 미끼를 던졌다.

黃 총무는 김재규가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데 놀랐다. 金載圭는 계속해서 “만약 黃 총무가 불응하면, 감옥에 안 보낼 수 없다. 총무에 대한 모든 비위조사는 다 돼 있다”고 위협했다. 釜馬사태가 진정 기미를 보이자 金載圭는 중단된 신민당 당직자 사퇴 공작을 再開(재개)했다. 그는 李厚洛 공화당 의원에게 부탁하여, 崔炯佑 의원이 당기위원장에서 사퇴하도록 설득하도록 했다. 金載圭의 의도는 黃 총무 등 당직자들을 사퇴시키고 鄭運甲 代行체제를 출범시켜 조종하려는 것이었다.

黃 의원은 오후 4시쯤 “선약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뒤 궁정동 사무실을 나왔다. 金載圭는 문 밖까지 따라 나오면서 부탁했다.

“내일 기자회견을 통해 사퇴를 발표해 주세요. 일을 잘 처리하고 함께 진해의 맑은 공기나 마시러 갑시다.”

黃 의원은 그 길로 같은 선거구의 공화당 의원 朴鐘圭(前 대통령 경호실장)를 찾아갔다. 朴 의원은 黃 의원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바로 청와대에 대통령 면담 신청을 했다. 오후 5시 30분쯤 崔侊洙 의전수석비서관이 “지금 바로 들어오시랍니다”라고 연락을 해왔다.

이날(10월 24일) 朴正熙 대통령은 車智澈 경호실장을 오전 9시53분부터 10시 55분까지 만나는 것으로 日課(일과)를 시작했다. 그 직후 金載圭 부장을 불러 32분간 보고를 받았다. 朴 대통령은 오후 2시엔 조지 볼 前 美 국무차관의 예방을 받고 ‘한국미술5천년전’ 圖錄(도록)을 선물했다. 朴 대통령은 오후 4시50분부터 6시까지 金桂元 비서실장, 柳赫仁 정무1수석, 申稙秀 특보, 金淇春 검사를 불러 시국대책에 대해서 논의했다. 이들은 오후 6시부터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오후 6시 10분에는 면담신청을 했던 朴鐘圭가 합류했다. 朴 의원이 집무실 옆 식당으로 들어가니 朴 대통령과 측근들이 칵테일을 들고 있었다.

“馬山은 어땠어? 자네 집은 피해 없었나?”

朴鐘圭는 보고 들은 釜馬사태의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온건한 대책을 건의했다. 오후 7시 30분쯤 저녁식사가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일어서는데 朴 대통령은 “자네는 남게”라고 했다. 두 사람만 남자 朴鐘圭는 “각하, 오늘 낮에 黃珞周 총무가 찾아왔습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김재규를 만났대?”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만났더라도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겠죠.”

“알아. 아까 다 보고받았어.”

朴鐘圭는 金泳三 의원직 제명과 선별수리론의 부당성을 험구까지 섞어 가면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공화당의 경직성도 비판했다. 두 시간쯤 이야기를 했는데 朴 대통령은 “그렇다면 자네가 나서서 일단 金泳三과 의견을 나누어 보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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