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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노회찬. |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세계 명곡 365곡’이니 ‘500곡집’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魯 대변인은 또 고등학교 재학시절 한 해 개봉영화를 모두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영화광이었며, 친구들과 자취 아파트에서 電蓄(전축)을 가지고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샐러리맨들의 경우 전축을 사려면 짧게는 몇 개월에서 1년 이상의 월급을 지출해야 했다. 음반 또한 고가였기 때문에 서민들에게 전축은 ‘그림의 떡’이었던 시절이다.
 
 魯 대변인은 경기고 1학년 재학 중이던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제작·배포하면서 운동권 생활을 시작했다. 이 시기 <씨알의 소리>, <다리>와 같은 잡지를 탐독했으며, 함석헌, 백기완 등의 인물들과 교류했다. 당시 경기고에서 함께 운동권 생활을 했던 동기들은 정광필 이우학교 교장, 이종걸 민통당 국회의원 등이다. 
 
1976년 경기고 졸업 후 대학입시에 떨어진 뒤 재수를 하지 않고 軍에 입대했다. 軍복무를 마친 뒤 1979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 한 뒤 학생운동에 가담했으며, 1980년 광주사태 이후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82년부터 각종 시위를 주도하고 불온문서를 배포한 혐의로 수배되어 오랜 수배 생활을 했다. 1980년대 후반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전위조직 ‘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인민노련, 하단 자료 참고)의 설립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魯 대변인과 함께 인민노련 활동을 했던 인물로는 송영길 인천시장,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조승수 前 진보정치연구소 소장 등이 있다. 
 
魯 대변인은 인민노련 중앙위원, 격주간 <사회주의자> 편집위원으로 인민노련 활동을 주도하던 중 1989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체포됐다. 魯 대변인은 법정에서 국보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 받고 1992년 만기 출소했다. 2000년 민노당 창당 이후 초대 부대표를 맡았으며, 2002년 3월 정기 黨대회에서 사무총장을 거쳐 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됐다.
魯 대변인은 민노당 제17대 대통령 선거 예비후보 선거에서 ‘7공화국 11테제’를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신자유주의체제 해체와 ‘민주적 사회경제체제’ 확립을 공약으로 제시했었다. 여기서 그가 제시한 ‘민주적 사회주의체제’는 다음과 같다.
 
 “부와 경제 권력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하여 ‘제7공화국’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해체하고 민주적 사회경제체제로 나아가는 초석을 다진다. 민주적 사회경제체제란, 소유의 사회화와 사회적 조절을 우위에 두고 다양한 소유와 시장적 조절을 보완하는 체제로서, 노동자‧농민 ‧서민이 경제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을 보장한다. 사회적 소유는 국가적 소유, 공공적 소유, 협동조합 소유, 민주적 참여기업 등을 포괄한다. 사회적 조절은 노동자‧농민‧서민의 고용 복지향상을 위하여 생산자원과 소득의 재분배를 실시한다. 재벌을 해체하고, 대기업의 독과점을 규제한다.” (2007년 7월17일, <7공화국 11테제> 中)
 
 魯 대변인이 주장하는 ‘민주적 사회경제체제’에서는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소유를 제한하고 적절히 소유와 시장을 조절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의 근원은 사회주의다. 사회주의에서는 정부가 계획에 의해 소유와 시장을 조절할 수 있으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魯 대변인은 자신의 사회주의 이념을 ‘민주적 사회경제’로 이름만 바꿨을 뿐이다.
 
 魯 대변인은 또 자신의 홈페이지인 ‘난중넷’에 게재한 ‘통일테제’에서 “제7공화국은 흡수통일에 반대하며, 남과 북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평화적이고, 단계적인 방식으로 통일을 실현할 것을 목표로 한다”면서 권영길, 심상정 등과 함께 연방제 통일을 대선공약으로 내걸었다.
 
 구체적으로 그는 “코리아연방이 건설 될 때까지 7공화국은 통일의 첫 단계인 코리아연합을 건설하고, 코리아연방을 준비할 것”이라고 밝힌 뒤, 남북정상회담의 정례화, 남북각료회담 및 남북국회회담의 상시적 개최, 코리아연합 건설을 위한 남북합의서 체결, 2012년 코리아연합 건설 등을 주장했다. 그는 통일을 가로막는 법적‧제도적 장애물로 ‘헌법의 영토조항’과 ‘국가보안법’을 예로 들며 영토조항의 삭제 및 국보법 폐지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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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이 편집위원을 지낸 인민노련 기관지 <사회주의자> |
[관련자료] 인민노련의 실체
이들은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생 이후 곧바로 ‘살인·강간·고문정권 타도를 위한 인천노동자투쟁위원회’(타투)를 결성, 서울지역 원정시위를 벌이고 이를 모태로 6월에는 인천의 부평역 앞 광장에서 노동자 5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인민노련을 결성했다.
인민노련은 강령에서 “당면한 민족해방과 민중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인천·부천지역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구심이 되며,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발전시키고 여러 형태의 대중조직을 촉진시키고, 노동자들의 모든 투쟁을 발전시켜 스스로를 정치무대화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혔다.
이 강령은 해방정국과 대한민국의 建國을 左翼(좌익) 수정주의적 입장에서 파악, “美제국주의자들이 동아시아 혁명의 확대 발전을 저지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자본가와 지주 親日관료 등 반동적 세력들의 보호자가 되어 그들을 지원 육성하고 민중민주주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노동자 농민의 혁명투쟁을 온갖 수단으로 억압했다”고 규정했다.
여기서 동아시아의 혁명이란 ‘사회주의혁명’을 의미한다. 이 강령은 또 “右翼(우익) 반동세력은 美帝의 보호와 지원 아래 親美적 자본가 정권인 이승만 정권을 세웠으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혁명적 민중은 불굴의 무장 항쟁을 계속 전개했다”고 기술했다.
국보법 폐지, 공안기관 해체, 연방제 통일 주장
강령은 6·25에 관해 남한 사회에서의 노동자 농민의 계급투쟁과 美 제국주의의 개입도 한 원인이라는 식의 엉뚱한 남한 원인설을 주장하고 있다. 강령은 미리 짜여진 김일성의 남침계획과 소련 및 중국의 승인과 지원 사실은 물론이고 중국군의 직접 개입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강령은 이어 “남한의 독점 자본가는 노동자 계급을 노예화시키고, 그 고통을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데 앞장서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1987년의 격렬하고 전투적인 노동자투쟁이 이제는 더 이상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해 무제한한 착취를 자행할 수 없는 시대가 왔음을, 본격적인 계급투쟁의 시대가 다시 왔음을 선언하고 있다”고 했다.
이외에도 강령은 구체적으로 ▲독점재벌의 해체 ▲기간산업의 국유화 ▲외국자본의 국유화 ▲국가보안법의 폐지 ▲안기부와 보안사의 해체 ▲작전권의 반환과 주한미군의 철수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 ▲연방제 통일을 주장했다.
인민노련은 결성 직후부터 내부의 주사파와 非주사파간의 대립이 불거져 넉 달 만인 1987년 10월 2박3일간의 비밀 대의원대회를 계기로 非주사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주사파들은 인민노련에서 탈퇴한 다음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주사파의 탈퇴를 계기로 인민노련의 강령도 완전히 非주사파 노선으로 개정됐다. 다만 개정된 강령도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보고 혁명으로 이를 전복하려 한 점에서는 개정이전과 다름없이 전투적이었다.
13대 대선에서 사회주의 운동가 백기완 추대
인민노련의 활동은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지도·지원과 당면 정치투쟁의 조직, 노동자들의 정당건설을 위한 노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인민노련은 1987년 7,8월의 이른바 노동자대투쟁이후 본격적으로 개화된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투쟁과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나자 이들에게 사회주의사상을 교양했다.
인민노련은 또한 매 시기 노동조합운동의 현황에 대한 평가 및 전망, 그리고 의견을 냄으로써 노동조합운동의 이념정립과 단일대오 구축을 도왔다. 이들은 노동자대투쟁 이후 지역민주노조협의회 건설안을 제출하고 88년 임금인상 투쟁을 노동법 개정 투쟁과 결합시켰다.
그리고 민노총과 산별조직 건설의 방향을 제시했다. 인민노련은 1987년 12월에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CA학생그룹’(제헌의회, Constituent Assembly)과 손을 잡고 左派진영의 독자후보로 민주연립정부 주창자인 백기완을 추대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런 투쟁은 당시의 노동조합운동에 있어서 인천노련의 ‘공헌’으로 左派세력 안에서 평가를 받았다. 인민노련은 또한 민중당 창당(1990년 11월10일)에도 크게 기여했다. 인민노련은 이름과는 달리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인민노련은 <정세와 실천>, <노동자의 길>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면서 노동운동의 선진화에 앞장섰다.
두 기관지 중 <정세와 실천>은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의 이념적 전술적 쟁점을 다룬 이론지였고 <노동자의 길>은 파업현장 및 노동자들의 생활을 탐방하는 내용으로 매주 발간하는 노동자 대중신문이었다. 인민노련은 노동자계급의 정당 혹은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혁명적 조직 없이는 전략도 민족민주전선도 있을 수 없다는 관점에서 과학적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을 결합시키려 했다.
<사회주의자> 창간, 과학적 사회주의 홍보
인민노련은 1989년 8월 <사회주의자>라는 기관지를 창간, 전국의 독자들을 상대로 과학적 사회주의를 홍보했다. 인민노련은 1989년 10월 反帝혁명을 선동한 혐의로 간부들이 대거 체포되어 세칭 인민노련사건이 터졌다. 치안본부는 10월 18일 非합법적인 노동운동조직을 만들어 경인지역 노사분규에 개입하는 등 노동운동을 주도해온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중앙상임위원장 吳東烈(오동렬,) 등 핵심조직원 15명을 검거, 모두 국보법 위반(利敵단체 구성) 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경찰에 의하면 이들은 1987년 6월 사회주의혁명 노선에 따라 서울대와 고려대 운동권출신 30여명을 중심으로 인민노련을 결성, 기관지를 펴내면서 인천 부천 등지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정치 의식화 작업을 벌였으며, 마르크스-레닌의 ‘5단계 사회발전론’에 따라 現 정부를 타도하고 미국을 축출하는 反帝·反독점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노선을 바탕으로 활동해왔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국적 조직원 확보, 국가보안법 철폐, 합법적 민주정당 및 전국민주노조협의회 결성을 89년의 투쟁목표로 삼았다고 경찰은 밝혔다. 이어 12월에는 관련자들이 경찰에 추가로 구속되어 구속자는 모두 21명으로 늘어났다.
피고인들은 재판과정에서 분리심리에 대해서도 항의하면서 조직사건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전원 병합심리를 요구했다. 이들은 始終一貫(시종일관) 인민노련 활동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남한 사회주의자로서 사회주의적 실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특히 윤철호와 오동렬은 법정에서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라고 당당하게 진술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1심 재판 과정에서 김진균 교수(서울대) 등 교수 147명과 權皓景(권호경) 목사 등 교직자 85명이 검찰의 기소사실 중 폭력혁명 利敵단체 부분에 대해 “소수 독점재벌의 손에 우리 사회의 엄청난 富가 집중되고 그로 인해 많은 폐해가 야기되는 현실에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한 인민노련의 활동은 정당한 일면이 있다”는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1990년 4월의 1심 선고공판은 피고인들에게 비교적 가벼운 형인 징역3년에서 징역1년6월이 선고했다. 2심에서는 항소가 기각되었다.
1991년 한국 사회주의노동당 창당 준비
인민노련은 지도부가 경찰에 대거 검거되었음에도 와해되지 않고 1991년 12월 들어 당초의 목표였던 노동자정당건설을 본격 추진했다. 인민노련 강령은 노동자들의 전국적인 정치적 통일과 노동자 정당의 건설을 위해 모든 힘을 다 할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비합법 前衛정당을 의미한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민족통일 민주주의 노동자동맹(삼민동맹), 노동계급(1989년에 결성된 수도권 노동운동가 및 학생운동권 조직) 등 3개 노동운동세력은 1991년 7월 한국 사회주의노동당 창당 준비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당시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어 국내 左派세력이 심대한 정신적 타격을 입고 있던 시기였다. 그 영향은 바로 前衛조직 노선을 표방한 인민노련의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노동운동계 안에서 前衛조직 결성 반대의 목소리가 강하게 일어났다. 이 때문에 그해 12월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 준비 위원회는 자진 해체하고 합법정당 건설이라는 新노선으로 선회했다. 이에 따라 합법적인 진보적 대중정당을 결성하자는 다수파에 의해 ‘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원회’(약칭 노정추)가 발족했다. 노정추는 서울의 주대환, 인천의 李庸瑄(이용선), 경기남부의 全聖(전성), 대구의 민영창, 전국 노동단체연합회의 김의수 등이 창당일정에 합의함으로써 결성을 보게 됐다.
노정추 결성대회는 1991년 12월 전국 20여개 지역 노동자 대표 241명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어 위원장에 경인지역 노동운동가 주대환을 뽑았다. 주대환과 유민용 서울노동단체연합 의장 등 노동운동가 7명은 이튿날 기자회견을 갖고 이듬해 2월초 한국노동당(가칭)을 창당하겠다고 밝혔다. 한국노동당 창당 발기인 대회는 이듬해인 1992년 1월 서울 삼성동 한국종합전시장에서 27개 지역별 노조대표 등 5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어 창당준비위원회를 공식 발족시켰다. 이날 대회에서는 그해 3월의 제 14대 국회의원 총선 전에 창당을 완료하고 민중당을 흡수 통합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이들은 창당 이유로 민중당이 더 이상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노정추의 한국노동당 창당 작업은 노동계 내부의 반대로 순조롭지 못했다. 민주노조운동의 구심점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 가입 13개 지노협 가운데 광주와 구미 지역만이 이를 지지했을 뿐이고 서노협 등은 사실상 회원의 노정추 참여를 통제했다. 전국규모의 협회 차원에서도 의견이 갈려 전국노동운동단체연합은 이에 적극 참여한 반면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는 대체로 비판적 입장이었다.
정책으로 재벌해체·군비축소 등 내세워
노정추는 이 때문에 역량이 약화된 상황에서 민중당 측에 통합을 제의하고 당명을 한국노동당으로 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민중당 측 통합추진위 대표인 김문수(現 경기도 지사) 노동위원장은 선거 전에 당명을 바꾸는 것은 무리이며, 민중당은 이미 국민들에게 고유명사 아닌 일반명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당명 변경제안을 거부했다. 반면에 민중당 탈당파인 오세철이 이끄는 민중회의는 노정추의 신당창당을 반대하면서 진보진영의 단합을 촉구했다.
그런데 1992년 1월 15일 노정추 측의 주대환 의원장, 전성 조직부장, 이용선 대외협력부장 등이 경찰청 보안국에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이들이 91년 7월 공산주의국가 건설을 강령으로 하는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 민중정권 수립을 목표로 전국 규모의 지하당 건설을 추진해왔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노정추의 처지는 크게 불리하게 되어 양측의 통합협상은 민중당 페이스로 급진전됐다.
민중당의 이우재 상임대표와 한국노동당(가칭)의 황선진, 창당준비위원장 직무대행은 1992년 2월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두 당의 통합을 선언했다. 양측은 黨 이름을 민중당으로 하고, 지도체제는 민중당의 現 체제(공동대표 3명)를 유지하되 궐석인 노동당 쪽 대표는 임명을 보류하고, 총선 뒤 2개월 안에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한국노동당으로의 黨名 개칭 문제와 지도체제 문제를 논의해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양측 대표들은 이날 발표한 통합선언문을 통해 “총선과 대통령선거에 참여해 노동자와 서민대중의 목소리를 대변할 것”이라고 밝히고 총선과정에서 ▲토지공개념 완전실현 ▲재벌해체와 민주적 재편 ▲대대적 군비축소와 긴장완화 ▲노동3권 완전보장 ▲농산물 수입개방 저지 ▲정치적 민주주의 달성 등을 정책으로 내세울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로써 노정추는 사실상 민중당에 흡수된 셈이다.
복수의 민중당 인사, 사노맹 사건 등 公安사건 연루
민중당은 북한정권과의 공조에도 역점을 기울였다. 일례로 1990년 8월3일에는 소위 북한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민족통일문제를 협의키 위해 30명에 달하는 북한방문대표단(단장 이재오 조국통일위원장)을 구성했다. 1991년 2월23일에는 조선로동당의 초청을 수락해 방북을 결정하기도 했다. 민중당 당 간부들은 굵직굵직한 간첩사건에 거듭 연루돼왔다.
1990년 10월 검거된 ‘남한사회주의 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에는 이성수 민중당 인천 남동구지구당 사무장 등 다수의 黨 관계자들이 검거됐다. 1992년 9월에는 다수(多數)의 민중당 간부 출신이 ‘남한조선로동당’(남로당) 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밝혀졌다.
남로당 사건은 해방 이후 최대 간첩사건으로서 민중당 前 대표 金洛中(김낙중)을 주범으로, 민중당 前 고문 권두영, 민중당 前 조국평화통일위원장 손병선 등 주요 간부가 연루됐었다. 金洛中은 36년간 간첩으로 암약하면서 북한으로부터 미화 2백10만 달러를 넘겨받아 민중당 창당을 지원하고 장기표, 이우재 등 민중당 후보 18명의 선거자금에 사용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