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 보고서는 記者가 수년 전 美정보기관 사이트에서 우연히 찾은 자료이다. 정보공개법(FOIA)에 따라 공개된 보고서로 북한의 핵(核) 능력과 관련된 자료(1986년 작성)의 일부이다.
자료의 공개된 부분을 보면 북한은 다양한 核 운반수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미그-23에 '약간의 개조'를 통해 핵무기를 장착, 남한 북부 지역에 대한 타격이 가능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연평도 포격 도발 직전인 2010년 11월23일 북한의 미그-23기 5대가 서해 5도 인근에서 초계비행을 실시했다. 이를 두고 국내 언론은 한국 공군의 F-15전투기와의 공중전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분석했다. 북한의 미그-23이 남한 공군의 F-15와 공중전을 벌이면 백전백패(百戰百敗)한다. 그러나 북한의 미그-23에 핵무기가 장착되어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對北정보를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다 보니 북핵 문제와 관련된 국내 언론 보도는 3~5년 정도 늦는다. 북한의 핵무기 운반 능력 및 소형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의 핵능력이 어떤 식으로 발전해왔는지를 보려면 중국과 소련 미사일 및 核기술을 자세히 봐야 한다. 이 시기를 제대로 이해하면 과거 김정일과 푸틴이 맺은 '비밀 군사 협정'에 어떤 무기체계가 들어가 있는지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의 군사능력을 과대평가(過大評價)해서도 안 되고 과소평가(過小評價)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최소한 적(敵)이 지금 이 시간 무엇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미국과 러시아의 미사일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북한이 최근 수년 동안 대포동-2호(길이 32m) 미사일 보다 더 큰 미사일을 개발 중이라고 한다. 문제의 '괴물' 미사일이 완성되면 그 때는 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2. 강석주(姜錫柱)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2002년 10월 방북한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에게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했다. 이어 2006년과 2009년 북한은 플루토늄을 사용해 두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실시했다. 2010년 11월에는 미국의 核과학자인 헤커(Hecker) 박사를 초청, 중국의 도움을 받아 구축한 대규모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했다.
 
북한의 核개발은 역사가 꽤 길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舊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다. 1955년 核物理연구소를 창설한 북한은 1956년 소련과 ‘核에너지 평화 이용 협력협정’을 맺었다. 같은 해 북한은 核物理학자 30명을 소련의 ‘드브나(Dubna) 核 연구소’에 파견해 연수를 받게 했다.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110㎞ 떨어진 드브나 시(市)에 세워진 이 과학기지에는 소련 최대 核실험실이 있었다. 1964년 중국 최초의 核실험을 성공시켜 ‘중국 核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核물리학자 왕감창(王淦昌) 등 중국의 주요 核과학자들도 이곳에서 길러졌다.
 
1956년 연구소의 설립 이후 1990년 북한과 러시아의 과학연구 협력이 중단될 때까지 30여년 동안 모두 250여명의 북한 과학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이후 1960년대부터 북한은 核物理學 연구진을 자체적으로 길러냈다. 1962년 평북 영변에 원자력연구소를 세운 데 이어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대학에 核物理학원을 설립해 核과학자와 기술자를 양성했다. 1965년에는 영변에 소련의 도움으로 IRT-2000 연구용 핵반응로를 건설했다.
 
이때부터 북한의 核연구는 일정한 규모를 갖추게 된다. 1979년에는 자체 기술로 실험용 核반응로 건설에 착수해 1986년 정식 운전을 시작했다. 1985년에는 영변 核시설에 사용한 核 연료봉을 써서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실험실 건설에 착수했다. 북한은 1983년부터 1993년까지 영변 核시설 내부의 모래밭에서 核武器 개발에 필요한 고폭 실험을 130여 차례 실시했다. 
 
![]() |
| 미국의 '원자과학자 회보'가 최근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북한 영변 경수로 공사현장 3D 그림/출처: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
3. 북한의 초기 核 연구는 도상록(都相錄), 한인석(韓仁錫), 이승기(李升基) 등 越北 과학자들이 주도했다. 일본 교토(京都)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한 도상록(1903~1990)은 해방 후 서울대 교수를 지내다 1946년 5월 월북,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과 주임을 맡았다.
 
한인석은 해방 후 연세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월북한 뒤 김일성종합대학 고급 교사를 맡았으며, 모스크바에서 장기간 첨단 물리학을 배우고 돌아와 1960년대 대량의 核物理學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전남 담양 출신인 이승기는 1939년 교토대학에서 응용화학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공과대학장으로 재직 중 6.25 때 월북했다. 1940년대 초반 석탄으로부터 합성섬유 1호를 개발한 그는 1961년 비날론 생산을 주도했고 영변원자력연구소장(1967)과 과학원 함흥분원장(1987)을 지내는 등 북한 과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북한은 현재 核개발 핵심고급인력 200명을 포함, 전문 인력 3,000명, 기술인력 6,000명 등 총 9천여 명의 核과학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核物理學 분야의 핵심 교육기관은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성이과대학이다. 평성이과대학은 核物理學, 化學, 數學 등 다섯 개 학과로만 구성된 특수대학이다. 이외에도 평양고등물리학교, 김일성고등물리학교 등도 물리학 연구 인력을 배출하는 주요 교육기관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북한이 정말 核武器 기술을 보유하고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核武器 기술은 첨단기술이 아니라 50년대 이미 모든 원리가 밝혀진 기술이다. 원자로 기술과 核武器 기술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동일한 분열 핵물질을 사용해 원자로는 3년 정도의 장기간에 걸쳐 核分裂이 일어나도록 작동시키는 반면, 核武器는 짧은 시간에 核分裂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분열시간의 조절기술에 불과한 것이다.
 
과거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의한 核武器 개발 시 설계된 모형에 대한 核계산을 현대와 같은 대용량의 슈퍼컴퓨터로 계산하지 않고 수기식 계산으로 개략적인 계산을 하여 설계했으나 특이한 문제점은 없었다. 북한도 이미 1980년대부터 자체 기술로 영변의 5MWe 원자로를 설계했다. 그러므로 어떠한 모형의 핵물질에 대해서도 정확히 묘사, 계산 가능한 核계산 코드를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核武器 개발에 필요한 기술상의 문제점은 없다고 봐야 한다.
여러 가지 이설(異說)들이 있을 수 있으나, 컴퓨터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核실험의 필요성은 과거에 비해 상당부분 감소됐으며, 컴퓨터 시뮬레이션만을 가지고도 핵무기를 유지 관리할 수 있다는 점에 적지 않은 核과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2012년 8월23일 작성)
 
조갑제닷컴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