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딸아이가 대학에 다닐 때 무슨 대화를 나누던 중 녀석은 백낙청 교수님이 아주 훌륭한 학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더군요. 그 후 필자는 백 교수님과 이념적, 정치적으로 배척관계에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백 교수님을 비난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이 존경하는 스승을 비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 교수님의 부친께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안 뒤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김희선 전 의원의 부친이 독립군을 체포하던 일제 비밀경찰 특무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김희선 전 의원과 백 교수님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백 교수님이 아버지의 친일행각을 숨긴 채 친일파를 매도하는 위선자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친일파였다고 해서 아들까지 친일파가 되란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백 교수님은 비록 아버지라 할지라도 친일행위는 비난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백 교수님은 자신의 그런 판단기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했어야 했습니다.
우선 백 교수님은 자신의 부친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그랬기에 좌파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되었을 터이며 백 교수님 본인도 거기에 전혀 항의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고백하고, 아들로서 국민들에게 사죄하는 솔선수범을 보이셔야 했습니다. 그럴 때 같은 잣대로 다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공정성과 객관성이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부친의 과오를 사죄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부친의 과오를 사죄하라고 종용한다면 그것은 저잣거리 시정잡배들의 행패지 학자가 취할 태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백 교수님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친의 친일행적을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밝혀졌으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니냐고 자위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옳지 못한 태도입니다. 백 교수님 본인이 직접 공개석상에서 사실을 밝히고 사죄해야 합니다. 백 교수님은 한국사회를 이끌어 가는 진보좌파진영의 존경받는 원로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침묵을 지키면서 다른 사람의 이실직고를 강요한다면 그런 소인배를 누가 존경하겠습니까? 김희선 전 의원은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백 교수님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필자가 백 교수님 부친의 친일행각을 알게 된 뒤 충격을 받은 이유는 백 교수님 부친의 친일행적보다 그에 대한 백 교수님의 침묵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백 교수님의 침묵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백 교수님은 인품 상 부친을 매우 존경했으리라 봅니다. 아들을 훌륭한 학자로 키우신 백 교수님의 부친이 어떤 분이셨는지 대충 미루어 짐작이 갑니다. 그 옛날 동경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신 분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백 교수님은 혹시 당시의 시대상황 상 어쩔 수 없이 친일행위를 하긴 했지만 그러나 아버지는 나에게 가장 위대한 존재였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닐런지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필자는 백 교수님의 그런 생각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더라도 백 교수님은 부친의 친일행각을 공적으로 시인하고 아들로서 사죄해야 옳았습니다. 백 교수님과 똑같은 입장의 수많은 친일파 자녀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원죄 의식(儀式)을 치러야 할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독립군 후손을 제외한 모든 국민들은 친일파의 후예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제강점기에 싫든 좋든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악질적인 친일파가 있었고 그래서 보복감정에 불을 지르지만 대다수의 친일파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또는 자신의 꿈을 펼쳐보기 위해 어쩔 수없이 친일을 했던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승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상처받은 과거는 빨리 잊고, 은혜 받은 기억은 잊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취지를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는 잊어야 합니다. ‘친일파 사전’이 나오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빨갱이 사전’이 나오고, 그러면 백 교수님 부친은 친일파로, 백 교수님은 빨갱이로 매도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망조입니까?
백 교수님이 훌륭한 학자이시며 존경받는 스승이라면 더 이상 과거사에 연연하여 현재와 미래를 답보상태로 묶어두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필자는 백 교수님의 부친은 친일행적과 상관없이 시대를 잘 못 만난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확신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긍휼히 여기고 국민화합을 이루는 사회를 만드는 게 오늘날 지성인들의 역할이 아닐까요? 모쪼록 백 교수님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합니다.
위 글의 출처는 인터넷매체 프런티어타임스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