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와 백제의 감정이 韓日감정으로 이전

고향을 멸망시킨 신라를 원망하다가 韓民族을 敵對하게 된 과정
8세기 초에 일본에서 나온 正史 '日本書記'(*)는 그 대부분이 한반도의 4國-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과 관련된 기술이다. 이 기술의 특징은 신라에 대한 매도와 백제와 가야에 대한 友好감정이다. 이 책을 읽으면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비난하기 위하여 쓰여진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 책은 일본의 동맹국이던 백제출신(도래인들과 遺民) 지식인들이 집필했다. 이 史官들은 母國을 멸망시켜 돌아갈 고향을 없애버린 신라에 대한 원한을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이 써질 당시 신라는 唐을 한반도에서 추방하고 당당한 독립국가를 건설한 선진강국이었다. 일본은 신라가 唐과 손잡고 일본으로 쳐들어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여 곳곳에 山城-水城을 쌓다가 서기 676년 신라가 唐을 몰아내고 통일을 완성하자 신라와 친선외교관계를 맺는다.

수십 년 간 일본은 신라와 적대관계이던 唐에는 사신을 파견하지 않고(따라서 국교단절상태) 신라에는 2~3년에 한번씩 대규모 사절단을 보낸다. 신라도 일본에 자주 사절단을 보냈다. 일본역사학자 이노우에 기요시(井上淸)는 '일본의 역사'(이와나미 문고)에서 이렇게 썼다.
<天武朝는 이렇게 하여 신라의 통일국가 만들기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 치세에 飛鳥淨御原朝廷(아스카기요미가하라 조정)의 율령으로 불리는 성문법이 반포되었다. 이것이 토대가 되어 천무천황으로부터 2대 후인 文武천황의 大寶元年(701년)에 大寶律令이 완성되어 실시되었다. 律은 대체로 지금의 형법에 해당하고 令은 국가조직과 행정관계법, 즉 민법과 소송법에 해당한다. 이 율령의 제정과 실시에 의하여 신라에서 배우고 唐을 모범으로 삼은 法式備定의 고대 천황국가는 名實 공히 달성된 것이다.>

百濟系 학자들이 쓴 日本書記는 일본 국가건설의 모델이 된 신라에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열등감과 위협, 그리고 원한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이 한 일은 과거의 역사를 조작하여 신라가 倭의 속국이었다고 묘사하고 신라가 매년 倭에 조공을 바쳤다고 쓴 것이다. 일본서기는 온통 倭에 의한 신라정벌과 신라의 저자세 對日외교에 대한 기술로 채워졌다. 이 책이 그리는 신라는 배은망덕하고 비겁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그 신라가 한반도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日本書記는 자체 모순에 빠진다. 그런 신라를 겁내고 그런 신라와 친해보려고 애쓴 天武天皇朝에 日本書記 편찬이 시작되었다. 백제계 일본인들은 이런 현실에 대한 불만을 역사적 환상의 조작으로 풀려고 했을 것이다. '지금은 이렇지만 왕년에는 우리가 신라를 갖고놀았다'는 식으로 자위하려는 목적에서 倭의 신라정벌 신화를 만든 것이다.

백제계 일본인들의 신라에 대한 이런 열등감과 원한은 日本書記라는 公刊史를 통해서 定型化되었다. 신라에 대한 원한과 열등감은 그 뒤 한국인과 韓國史 전체에 대한 일본인의 시각으로 굳어져버린다. 이런 시각은 일본인들의 유전인자처럼 되어 상황이 바뀌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명치유신 이후 이런 新羅觀은 조선침략을 합리화하는 데 악용된다. 과거에도 倭가 신라를 정벌했으니 이제 우리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하는 생각의 심층심리 속에는 '우리 나라 (또는 우리 조상들의 나라) 백제와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에 복수하자'는 백제-가야系 일본인들의 집념도 집단무의식으로 스며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일본에서 국가주의적 입장에 서서 일본 고대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일본의 고대 국가가 한반도 도래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신라로부터 국가건설의 노하우를 배웠다는 사실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또 선사시대에 대륙과 한반도 도래인이 만든 야요이 文化를 경시하고 토착성이 강한 조몬 文化를 중시한다.

한편 한국 땅일 수밖에 없는 독도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는 데 앞장 서는 일본 혼슈의 시마네(島根)현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간 신라(경상도) 사람들의 후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마네에는 이즈모(出雲)란 작은 도시가 있고 여기에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神社가 있다. 出雲大社라고 불리는 이 神社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고 서열상으로도 가장 위이다.

일본 고대국가의 한 발상지가 이즈모이다. 지금의 경상도 지역으로부터 많은 한국인들이 시마네 지역으로 건너갔고 이들이 선진된 제철기술과 騎馬術을 갖고 가서 倭라고 불리던 토착 일본인들을 정복하면서 지금의 나라 지방으로 진출했다.

전설에 따르면 이즈모에 처음 도착한 神은 이름이 스사노오노미고도이다. 日本書紀에 따르면 스사노오노미고도가 신라에서 살고 있다가 아들과 신하들을 이끌고 배를 만들어 타고 이즈모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는 신라지역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진출했음을 神話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즈모에서 아주 가까운 야스기(安來)시에는 和鋼박물관이 있다. 시마네는 명치유신 때까지도 일본에서 가장 많은 철을 생산했다. 砂鐵(사철)이 많이 나오고 제련할 때 필요한 나무가 풍부했다. 이 박물관의 설명문에도 이 지역의 제철기술은 한반도 남부로부터 건너왔다고 적혀 있다. 기술이 왔다는 것은 기술자가 도래했다는 이야기이다.
가야와 신라의 제철기술이 일본에 전해졌고, 이 기술로써 많은 무기를 만든 집단이 동쪽으로 진출하여 고대국가의 터전을 놓은 것이다. 경북 해안에서 배가 표류하면 해류를 타고 시마네나 돗토리현 해안에 닿는다. 조선시대 울진지역에서 漁民들이 표류하다가 돗토리현 해안에 도착한 기록이 있다.

시마네 사람들은 왜 경상북도 울릉군의 독도를 괴롭히는 것일까. 자신들의 조상들이 떠나온 고향을 왜 저토록 저주하려는 것일까.

6.25 전쟁을 전후하여 월남한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고향을 정복하고 온갖 惡行을 다 저지르고 있는 북한정권을 미워한다.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역에 정착했던 영국인들은 나중에 고향인 영국과 싸워 미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데 主力이 되었다.

영국을 정복한 프랑스 노르망디 公의 후손들은 고향인 프랑스로 쳐들어가서 100년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은 그 고향을 정복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증오심을 느끼는 것이 아닌지, 이 증오심은 유전자가 되어 대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신라 도래인들의 피가 많이 섞여 있을 것이 분명한 시마네 사람들이 하필 신라 지역의 울릉도와 독도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도 무의식 속에서 살아 있는 고향 저주의 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日本書記의 신라 저주

신화와 사실이 뒤섞여 있고, 왜곡과 조작이 심한 日本書紀(720년 발간)를 읽어보면 반 이상이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와 관련된 기사이다. 이 책의 집필진은 가야 백제를 자신들의 편으로, 신라를 主敵(주적) 내지 屬國(속국)으로 간주하는 서술방법을 택하고 있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뒤에는 이런 적대감과 경멸감이 韓民族에 대한 감정으로 바뀌어 오늘날 韓日민족감정의 한 축이 형성되는 것이다. 일본 고대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왜 일본 정권이 신라를 그토록 미워하게 되었는가이다.

日本書紀 欽明천황 23년7월 기사에는 任那(임나: 가야지방에 있었다는 일본의 기지)를 도와 신라를 치려고 파견되었다가 신라군에게 포로가 된 調吉士(귀화 백제인氏族)란 사람에 대한 내용이 있다.

<신라 장군이 칼을 빼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억지로 바지를 벗겨 궁둥이를 내놓고 일본을 향하게 하고 큰 소리로 '일본 대장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는 그런데 큰 소리로 '신라왕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했다. 그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전과 같이 부르짖었다. 이 때문에 죽었다. 그 아들도 아비의 시신을 안고 죽었다. 그의 처 大葉子 또한 잡힌 몸이 되었다. 슬퍼하여 노래를 불렀다. '한국의 城上에 서서 大葉子가 領巾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難波(나니와)를 향해서'>

倭人(왜인)으로 귀화한 백제인이 倭(왜)를 위해 싸우다가 신라군에게 잡혀 고문을 받으면서도 생명을 던져 倭(왜)에 충성을 바치고, 신라군의 포로가 된 그의 아내는 천황이 있는 難波(나니와)를 향해서 충성의 깃발을 흔든다. 이런 글을 쓴 사람들이 조국을 신라에게 빼앗겨 돌아갈 고향이 없어진 백제系 일본인이었다면 이해가 간다.

서기 562년 신라가 大伽倻(대가야), 지금의 高靈(고령)을 점령하여 가야국이 최종적으로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의 欽明천황은 이런 한탄을 한다. 日本書紀에 적혀 있는 대목을 옮긴다.

<신라는 서쪽 보잘 것 없는 땅에 있는 작고도 더러운 나라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皇家(황가)를 파멸시키고 백성을 해치며 우리 郡縣(군현)을 빼앗았다. 지난날에 우리 신공황후가 신령의 뜻을 밝히고 천하를 두루 살피시어 만백성을 돌보셨다. 그때 신라가 天運(천운)이 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애걸함을 가엾게 여기사 신라왕의 목숨을 살려 있을 곳을 베풀어 번성하도록 하여주었다. 생각해보아라. 우리 신공황후가 신라를 푸대접한 일이 있는가. 우리 백성이 신라에게 무슨 원한을 품었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미마나(가야 지방)를 공격하여 온 백성을 죽이고 상하게 하며 간과 다리를 잘라내는 것도 모자라 뼈를 들에 널고 屍身(시신)을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하늘 아래의 어느 백성이 이 말을 전해 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지 않겠는고. 하물며 황태자를 비롯하여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그 자손들과의 情懷(정회)를 회상하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나라를 지키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윗분을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돌보아 힘을 합하여 이 간악한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게 하여 천지에 맺힌 원한을 풀고 임금과 선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신하와 자손의 길을 다하지 못한 후회를 뒷날에 남기게 될 것이다.>

欽明천황은 '그들(신라)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고 말했다. 大伽倻(대가야) 지역의 사람들을 倭의 천황이 '친척'이라고 부른다. 이는 고대 일본을 세운 主力 세력이 伽倻에서 규슈를 거쳐 近畿지방(나라, 교토)으로 건너간 伽倻人들임을 암시한다. 동시에 일본의 고대 天皇家 가야계통 사람들임을 추정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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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 감정의 뿌리

한국과 일본인들이 서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감정의 뿌리는 역사적이고 인종적인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모태가 되는 고대국가를 만든 지배층은 몽골고원의 초원지대를 누비던 기마민족이었다. 이들은 4-5세기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상륙하여 농경민족들을 점령해갔다.

이 기마민족들은 일본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한때 한국의 남부(가야지방)에 머물렀고 일본에 가서 고대국가를 세운 다음에도 그들의 고향인 한반도 남부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군대를 보내 한반도 정세에 개입하곤 했다.

이때 倭는 신라-고구려와는 적대관계, 가야 백제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倭와 친연성이 깊은 가야가 신라에 흡수된 이후엔 백제계통의 도래인들이 天皇家를 형성하면서 倭는 反신라, 親백제 정책을 유지하였다. 古신라의 전반기 역사는 왜와의 투쟁사이기도 하다.

660년 신라가 羅唐동맹을 바탕으로 하여 백제를 무너뜨리자 倭는 그 3년 뒤 국력을 총동원하여 만든 함선 400척에 병력 3만 명을 실어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금강하구로 보낸다. 羅唐 연합군은 白村江(군산 근방)의 해전에서 일본의 대함대를 전멸시켰다.

이 해전은 倭의 한반도 개입을 최종적으로 종식시켰다. 왜는 한반도에 대한 미련과 야심을 단념하고 그 뒤로는 일본을 고대국가로 가꾸는 일에 전념한다. 그러나 일본의 지배층은 그들의 우호국가인 가야와 백제를 잇따라 멸망시킴으로서 그들이 돌아갈, 의지할 고향을 없애버린 신라를 증오하게 되었다.

일본의 신라에 대한 증오심이 그들의 무의식에 오래 작용하여 한국과 일본인 사이의 감정으로 남은 것이다.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쓴 '韓國 기행'을 읽으면 일본인들이 가진 백제문화에 대한 호감과 신라 예술에 대한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시바 료타로는 이 책에서 신라의 통일전략을 높게 평가한다.

그는, 백제의 멸망의 한 원인으로서 백제 지배층이 남북조 시대에 양자강 남쪽의 東晉과 밀착하면서 중국화되었고, 특히 중국의 사치풍조를 많이 받아들인 점을 지적하였다. 시바료타로의 요지는 이러했다.

<백제 지배층은 隋와 唐이 중국을 통일한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은 唐이 곧 분열할테니 걱정할 것이 없다면서 六朝風의 화려한 문체와 歌舞音曲을 즐기고 현세보다도 佛國土를 동경하였다. 신라는 다분 야성적이라 文보다도 武를 숭상하면서 武人의 감각으로써 大唐제국의 무서운 힘을 느꼈다. 신라는 적극적으로 唐의 힘을 이용하여 동맹을 맺음으로써 백제를 멸망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고구려도 백제처럼 국제정세를 오판하였다. 돌궐과 동맹하여 隋, 唐과 대항하려고 한 것이 실수였다. 이런 사태를 보고 신라는 唐과 동맹했던 것인데, 이는 신라사람들이 오랫동안 고구려로부터 압박을 받아오면서 터득한 국제감각 덕분이었다.>

신라가 통일한 것은 결국 동맹외교의 덕분이었다. 백제는 왜와, 고구려는 돌궐과, 신라는 당과 동맹했다. 신라만이 세계 최강국과 손을 잡았고 고구려, 백제는 2류 국가이든지 원병을 보낼 수 없는 국가와 손을 잡은 것이다. 동맹국을 잘못 선택하면 나라가 망한다. 羅唐동맹과 韓美동맹은 신라와 한국이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도록 해준 민족사의 2大 외교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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