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900년대 초,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문명화하여 유럽 최강의 騎士(기사)집단이 된다. 해적질을 하던 이들이 騎馬(기마)전술을 발전시켜 보병 중심의 다른 군대를 눌렀다. 1066년 노르망디 공국의 월리엄 공은 잉글랜드로 쳐들어가 해스팅스 전투에서 해롤드 왕을 戰死(전사)시키고, 大勝(대승), 그해 성탄절에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였다. 윌리엄 정복왕과 노르만 후손들은 잉글랜드, 웨일즈, 스콧랜드, 아일랜드를 잇따라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영국을 유럽 최강의 국가로 만든다. 노르만의 영국 정복은 영어와 佛語(불어)를 결합시켜 오늘날 영어가 세계 최고의 언어가 되는 길도 열였다.
비슷한 시기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 오트빌의 탄크레드 家門(가문) 형제들은 노르만 기사들을 이끌고 남부 이탈리아를 공략하기 시작한다. 그 전 노르만 인들은 처음엔 순례자, 나중엔 용병이나 모험가로 이탈리아 남부에 진출, 활약하고 있었다. 오트빌 집안의 아들들은 이탈리아가 분열된 틈을 타 지방 도시를 차례로 점령, 영주가 되더니 교황과 비잔틴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커졌다.
11세기를 전후한 이탈리아 남부는 교황, 비잔틴, 신성로마제국, 롬바르디(이탈리아 북쪽), 아랍 세력이 각축하면서 여러 도시가 各自圖生(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었다. 전투엔 귀신인 노르만 戰士들은 소수 병력으로 다수를 지배하는 데도 도사들이었다. 이들은 처음엔 용병으로 봉사하다가 나중엔 권력을 찬탈하는 방식으로 야금야금 남부 이탈리아의 實權(실권)을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전투만큼 통치도 잘했다. 당시 시실리는 아랍 지배 하에 있었고 북부 롬바르디 지역은 독일에 본부를 둔 신성로마제국 영향권 아래 있었다. 교황 레오 9세는 독일 출신인데, 교회 개혁을 통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999년: 노르만 전사들이 나폴리 남쪽의 도시국가 살레르노를 사라센 해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용병으로 나타난 것이 100여 년에 걸친 남부 이탈리아 정복 사업의 시작이다.
*1016년, 이탈리아 동해안 몬테가르가노의 미카엘 천사 聖所를 노르만 순례자들이 참배할 때 바리의 영주 롬바르드 멜수스가 그들을 설득, 아풀리아를 다스리던 동로마제국(비잔틴)의 군대를 공격하도록 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노르만 戰士들은 남부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傭兵으로 고용되었으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탁월한 용맹성과 전략으로 스스로 이들 도시의 권력을 잡기 시작했다. 노르만 정복사업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이는 노르만 오트빌 家門의 여러 형제들이었다.
*1046년: 오트빌 家門의 로버트 지스카드가 남이탈리아로 와서 먼저 온 형제들과 함께 정복사업에 나서는데, 분열되었던 남이탈리아를 통일하는 주역이 된다. 당시 남이탈리아는 교황령, 북부 롬바르드 세력의 영지,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영지로 분열되어 서로 각축하고 있었다. 독일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도 남이탈리아 도시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시로 파병하거나 직접 군대를 인솔, 개입하였다. 당시 중동, 북아프리카, 스페인, 시실리를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도 남이탈리아를 공략하여 정세가 복잡하였다. 노르만 전사들은 소수였지만 탁월한 전투력과 조직력, 그리고 정치력으로 南이탈리아의 강자로 떠오른다.
利害(이해)가 상충하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1053년에 反노르만 연합전선이 생긴다. 서로 적대적이던 교황, 비잔틴, 롬바르드 세력, 신성로마제국은 일단 노르만의 得勢(득세)를 꺾어야 한다는 데는 共感(공감)한다.
1052년 교황 레오 9세는, 독일로 가서 자신의 친척이기도 한 하인리히 3세 황제에게 援軍(원군)을 요청, 약 700명의 스와비아 보병을 얻어 돌아왔다. 1053년 6월 교황 레오 9세는 직접 연합군을 이끌고 노르만 타도에 나선다. 교황 측 연합군은 약 6000명이었다. 보병이 다수고 기병이 보조 역할을 했다. 독일 및 이탈리아 인이 중심이었다. 남부 이탈리아에서 각자 정복 사업을 벌이던 탄크레드 가문 중 세 사람이 연합군을 편성했다.
탄크레드와 첫째 부인 사이에서 난 험프리(아풀리아 영주), 둘째 부인 사이에서 난 로브트 지스카드, 아벨사의 리처드 지휘하에 노르만 군은 약 3000명의 기병과 500명 정도의 보병을 편성했다. 이들은 교황 군대가 비잔틴 제국의 援軍과 만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조기 공격을 결단했다. 노르만 군은 식량이 부족하여 굶으면서 전투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교황에 반기를 든 적은 없으므로 협상을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부족한 군대와 식량으로 탈출구 없이 몰린 상태에서 결전에 임하게 된 것이 노르만 군이었다.
1053년 6월18일 양쪽 군대는 남부 이탈리아 시비타테(Civitate)라는 들판에서 마주 섰다.
노르만 군은 우익에 중무장 기병, 가운데는 말에선 내린 기병과 弓手(궁수), 왼쪽에 기병과 보병을 배치했다. 교황 연합군은 왼쪽에 이탈리아 인 부대, 오른쪽에 스와비아 보병을 배치하였다.
노르만이 先攻(선공)했다. 우익의 중무장 기병이 교황 측의 이탈리아 보병들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이탈리아 보병들은 압도적인 노르만 기병의 돌격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추격 섬멸전이 전개되었다.
노르만의 中軍은 교황군의 스와비아 보병과 격돌했다. 스와비아 보병들은 큰 칼을 잘 썼다. 사람을 세로로 兩斷(양단)할 정도였다고 한다. 노르만 중군은 스와비아 보병들의 철벽 같은 방어진을 돌파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공격을 당해 수세로 몰렸다. 노르만의 우익 기병과 보병이 달려와 중군을 엄호해야 하였다. 이때 결정적 사태가 전개된다. 이탈리아 보병들을 추적하던 노르만의 중무장 기병이 섬멸전을 끝내고 돌아온 것이다. 이들이 배후에서 스와비아 군을 쳤다. 스와비아 군은 兩面(양면) 공격으로 붕괴하고, 노르만은 대승을 거두었다.
노르만 군은 교황이 머물던 시비타테 城門(성문)에 도착, 최후통첩을 보냈다. 항복하면 봐주고 저항하면 주민들까지 몰살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그 뒤 일어난 사태에 대해선 두 가지 說(설)이 있다. 하나는 교황이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城을 나가 항복,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주민들이 살기 위하여 교황을 성문 바깥으로 내몰았다는 說이다.
노르만 군대는 교황을 베네벤토로 데리고 가서 아홉 달 동안 軟禁(연금)시켰다. 나중에 제1차 십자군 전쟁의 선봉이 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노르만은 교황에게 사과하고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도 붙들어두곤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구원군을 보내줄 것이라 믿고 버티었으나 그들은 오지 않았다. 교황은 마침내 굴복했다. 노르만이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자임을 승인한 것이다. 레오 9세는 풀려난 뒤 곧 죽었으나 1059년 다른 교황 니콜라스 2세와 로버트 지스카드는 멜피(Melfi) 조약을 맺고 노르만의 남부 이탈리아 지배권을 公認(공인)했다. 지스카드를 아풀리아 公, 카라비아 公, 시실리 伯(백)으로 임명한 것이다.
시비타테 전투는 1066년의 해이스팅스 전투처럼 세계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노르만의 남부 이탈리아 및 시실리 정복 사업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1130년 노르만의 루제로 2세는 교황으로부터 남부 이탈리아와 시실리를 통합한 시실리 왕국의 왕으로 공인받는다. 이 왕국은 나중에 지배자와 이름은 바뀌지만(마지막엔 나폴리 왕국), 700년간 존속된다.
시비타테 전투를 통해, 그동안 각개 약진하던 노르만의 남부 이탈리아 정복 사업은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운 로버트 지스카드로 통합된다. 그의 동생 루제로(영어론 로저)가 시실리까지 정복하고 그의 아들 루제로 2세가 왕이 되어 전성기를 연다.
당시 이탈리아는 노르만, 교황, 신성로마제국, 비잔틴, 아랍 세력이 각축하는 항구적인 전쟁터였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는 離合集散(이합집산)이 거듭되었다. 노르만도 레오 9세를 풀어준 뒤 교황청과 손을 잡는다.
11~12세기 신성로마 제국 황제는 교황과 늘 갈등하였다. 교황은 유럽 기독교 세계의 정신적, 종교적 수장인데, 세속 권력 면에서도 首長(수장) 노릇을 하기를 원하였다. 반면,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의 정신적 지도력을 인정하면서도 관할지 교회에 대한 통치권, 특히 인사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당시 교회, 수도회 등 유럽 全域(전역)에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던 교황 지휘하의 가톨릭 조직은 단순한 종교집단이 아니었다. 주교들은 영주처럼 땅을 소유하고 사법권 및 군대를 보유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교황에 복종할 뿐 世俗(세속)권력으로부터는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다.
초기의 神聖(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과 주교들을 멋대로 교체할 힘이 있었지만 11세기에 들어서면 교회 안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난다. 교회 입장에선 세속 권력이 성직자들을 임명하는 한 부패를 청산할 수 없다고 믿었다. 황제가 자격 없는 자들을 돈을 받고 主敎(주교) 등 성직자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황제 입장에선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는 고위 聖職(성직)에 측근들을 임명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야 자기 派(파) 사람들을 교회 기관에 취직시킬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의 가장 큰 행정조직은 가톨릭 교회였고, 일자리도 가장 많았다. 主敎 임명권은 수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인사권을 잡는 것을 뜻했다. 교황과 神聖로마제국 황제는 이 문제에서만은 타협이 어려웠다.
1059년 교황측은 종교회의를 열고, 교회법에다가 추기경 회의가 교황을 선출하도록 규정하여 황제의 영향력을 차단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뽑힌 교황은 황제의 측근이 아니라 가톨릭 세계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교황 측은 같은 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대결할 수 있는 장치를 더 만든다. 로버트(루제로) 지스카드가 지휘하는 노르만 戰士 집단이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한 것을 公認(공인)해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교황에 대한 충성 서약을 받았다. 프로 戰士집단인 노르만 기사단의 뒷받침으로 황제의 독일군과 대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073년 개혁정신에 불타는 그레고리우스 7세가 새 교황이 되었다. 1075년 그는 드디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상대로 대결을 선언한다. 종교회의를 소집, 세속권력, 즉 황제가 주교를 임명하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다.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하인리히 4세와 그 추종자를 파문하겠다고 경고하였다. 황제가 거부하자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고, 황제에 대한 영주들의 충성서약이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南독일의 親교황측 영주들이 들고 일어나, 파문이 해제되지 않으면 황제를 폐위시키겠다고 결의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일단 전략상 후퇴를 결심하였다. 1077년 그는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어와 교황이 묵고 있던 北이탈리아의 카노사 城(성)에 도착했다. 이때의 모습을 그레고리우스 7세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는 아무런 敵意(적의)도 불손한 마음을 보이지 않고서, 자진하여 수 명의 종들을 데리고 내가 묵고 있던 카노사에 왔다. 그는 왕의 복장을 다 벗고는 3일간 성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울면서 再考(재고)를 호소하였다.>
이를 보고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파문을 해제하고 하인리히를 황제로 복직시켰다.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알려진 이 에피소드는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승리를 상징하지만 그 후의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하인리히는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보복에 나선다. 그에 반기를 들었던 영주들을 처단하고 독일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한 것은 1080년이었다.
그는 독일에 있는 교회 성직자 회의를 소집,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폐위를 결의하게 하고, 이듬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황제는 그레고리우스를 쫓아내고 꼭두각시 교황을 세웠다. 3년간 이탈리아에선 교황군과 황제군이 死鬪(사투)를 벌였다. 황제군은 1084년에 수개월간 로마를 점령했고, 교황은 로마내의 요새인 상안젤로 성으로 피신, 저항하였다. 이때 남쪽에서 로버트 지스카드가 지휘하는 노르만 援軍(원군)이 도착, 황제군을 로마에서 몰아냈다. 로마를 탈환한 노르만군은 시내를 약탈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화가 나서 그레고리우스 교황을 미워하게 되었다. 노르만군이 물러나자 교황도 더 머물 수가 없게 되어 노르만이 지배하던 살레르노로 피신, 다음해(1085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이 위대한 개혁 교황은 죽은 뒤 살레르노 성당에 안치되었다. 이 성당은 1076년에 로버트 지스카드가 기공, 1084년에 그레고리우스 7세에 의하여 봉납되었다.
하인리히 4세도 勝者(승자)가 아니었다. 친교황측 영주들이 독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후임 교황들은 이들을 지원하였다. 황제는 이탈리아에서 얻은 성과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1106년 그는 파문 당한 상태에서 사망하였다.
1122년 독일의 보름스에서 교황과 황제측이 타협했다. 독일에서 성직자 선출은 교회법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다만, 황제나 황제의 대리인이 선출시 참석,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황제와 교황의 대결에서 일단 승리한 쪽은 교황이었다. 황제의 성직자 임명권을 제한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교황과 대립,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느라고 정작 본거지인 독일 내부의 통치는 소홀히 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영국에선 중앙집권적 王權이 강화되어 가는데도 독일은 여러 도시와 公國(공국)으로 분열되어 통일국가를 만들지 못하였다. 그런 사정은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정치적 후진국이 되는 길이 열린 셈이다.
이런 가운데 남부 이탈리아와 시실리를 정복, ‘시실리 왕국’을 만든 노르만 전사들은 유능한 행정가로 변신, 이 왕국을 당시 유럽에서 가장 번성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비잔틴과 아랍 사람들에게 종교와 通商(통상)의 자유를 허용하고, 문화와 예술 진흥의 후원자가 되었다. 이 지역에 남아 있는 수 많은 노르만-로마네스크 식 성당, 궁전, 성, 모자이크 등이 노르만의 수준을 보여준다. 서기 800년경에 시작된 바이킹의 해적질과 약탈은 서기 900년 경부터는 노르만 시대로 넘어간다. 노르망디에서 실력을 쌓은 노르만은 정복사업에 나서, 잉글랜드의 노르만 王朝와 시실리 왕국을 탄생시켰다. 문명파괴로 시작한 바이킹 시대는 노르만을 거치면서 문명건설로 마무리된다.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위대한 逆轉(역전)이었다.
바이킹의 후손들이 교황을 포로로 잡은 시비타테 전투 이야기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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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6, 1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