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斗煥 전 대통령은 1989년 8월9일 낮 12시까지 金聲翊 공보비서관이 미국 연수를 떠나기 앞서 백담사로 인사를 갔을 때 백담사의 임시 거처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全 전 대통령: 미국은 인종 전시회라고 할 만큼 다인종 사회이고 나라는 있고 민족은 없다고 할 만큼 큰 나라라고 한다. 큰 바다를 모르면 큰 호수가 있는 줄 모른다. 사람이 큰 물에서 놀아보아야 한다. 미국과 달리 우리는 땅덩이가 좁고 인구도 과밀하고 경쟁이 치열해서 형제끼리도 싸운다.
朴○○은 권력의 정점으로서 시야가 너무 좁다. 권력 세계에 살다보면 국민을 우습게 보고 세상을 깔보게 된다. 사람은 세상을 배워야 한다. 나도 세상을 배우는 것이고…
安賢泰 실장도 마찬가지다. 경호실장 그만두고 권력 떨어지니 인심도 변하고 민심도 변하고… 이렇게 해서 사람이 크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를 돌아보고 정립해서 인내심과 용기를 가지고 할 말을 다 할 수 있는 대담성이 있어야 한다. 지금부터 참 용기가 필요하다. 참 인생을 사는 게 지금이다.
과거 내가 돌봐주고 한 사람이 어느날 아침 엉뚱한 짓을 한다. 그 때 사람이 도량과 인내심을 길러서 그걸 알고 죽을 수 있으면 후손들에게 그런 경험담도 얘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金載圭가 朴 대통령을 시해했을 때 선배 장성이 와서 얘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내가 이런 얘기를 한 일이 있다. 이제 우리 나라의 국민정신교육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장군이 설 자리가 없게 되었고 젊은 장교에게 어떤 식으로 교육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고 했어. 朋友有信(붕우유신)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친구란 자기 생명보다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게 인간적 신의다.
全 전 대통령: 金載圭는 朴 대통령이 신뢰하는 친구인데 가장 중요한 중책을 맡은 사람이 국가원수를 시해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朴 대통령이 부정부패하고 독재를 했기 때문에 정의감에서 그것을 제지해야겠다고 그랬다고 믿어준다 하더라도 꼭 죽여야 했나. 혁명을 해서 집권을 하려고 했다고 해도, 안 죽이고 재판을 해서 가택연금을 한다든지 했어야지. 그만큼 은혜를 입었으면…. 그런 것이 국민성을 순화시키고 아름답게 발전시켜 정신적 유산으로 남겨주는 좋은 길이다. 金載圭가 朴 대통령을 죽인 것은 탐심과 권력투쟁 때문이다. 車智澈과 권력 투쟁을 하느라 앙심을 품어서 죽여놓고 권력을 잡으려 한 것이다.
나중에 변호사들이 그를 가리켜 민주인사 운운 하는데, 장군들한테 전우애나 애국심 그리고 충성심이 없으면 그 나라가 망하는 거야. 장군이란 일반인에게도 존경받고 젊은이들에게 지표가 되어야 해. 그런데 金載圭는 私感 때문에, 朴 대통령 덕으로 6사단장, 6관구 사령관, 충주 비료사장을 거치고도 권력투쟁을 하다가 자기가 졌다고 朴 대통령을 죽였던 것이다. 그러면 그 자리를 그만두고 나왔어야지.
나도 장군인데 장군이 이 무슨 망신이냐, 부하에게 할 말이 없었다. 金載圭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자기가 모시는 국가원수를 시해하는 전통을 남겼다.
우리 민족의 정신적 유산이 신의다. 일본 사람들이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배신하는 게 하나의 나쁜 전통으로 되어버렸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민족정신적으로 볼 때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盧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시켜서 좋은 교훈을 남기면 金載圭가 저지른 것이 커버되어 金은 돌연변이의 蕩兒(탕아)가 되고 정식으로 사관학교 나온 사람은 권력도 잘 물려주고 전임자 잘 대우하고 오손도손 잘 해나간다는 것을 교훈으로 입증시킬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가 생각했었다.
全 전 대통령: 지금은 여기가 토담집에서 블록 집으로 바뀌어 많이 나아진 셈이다. 경호실 직원들과 탁구장을 고쳐 방을 하나 냈다. 처음에는 습기 때문에 꿉꿉해서 사람 살 집이 못 됐다. 절에는 일꾼이 없어서 경호관들이 블록을 쌓았다. 처음에는 문을 안 들이려 했는데 비가 쳐서 문을 넣었다(웃음).
여기는 첫겨울에 추위가 마이너스 25도로 내려가기 때문에 추운 지방을 기준으로 안 하면 다 얼어터져. 그래서 2중 문으로 했다. 여름에는 방충망을 해도 벌레가 한 쓰레받기로 나온다. 벌레한테 매일 물린다. 모기도 많다. 모기들이 어찌나 센지 옷 위를 찌른다. (李順子 여사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모기에 물리고 쇠파리에 물려 다리가 부어오르고 열이 오르고 해서 하루 온종일을 못 움직인 일도 있다. 나도 다리에 물려 염증이 생겨 아직도 흉터가 있다. 그때 열흘을 고생했다.
여름에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곤충이다. 겨울에는 샘물이 얼어터져서 도랑물을 먹어야 한다. 이곳 추위는 일반 시민이 살지 않으니 밖으로 안 알려져 있어서 그렇지, 하늘 아래 제일 추운 곳이다. 경호원들이 온도계를 달아놓았는데 마이너스 30도까지 내려간다.
이곳 음식에 적응하는 데에도 혼이 났다. 채식을 소량으로 하니 속이 쓰리고… 그래도 이만하면 내 나이에 건강이 좋은 거다. 안 보고 안 듣고 하니 마음이 편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좋다. 잘 되나 못 되나 내가 이곳에 머무르는 것도 나중에는 역사적 사실이 될 것이다.
우리가 처음에 왔을 때 보니 이 절은 아주 가난한 절이었다. 서까래가 다 썩어 있었다. 이 창고나마 없었으면 방 고칠 때 어디 머물 데가 있었겠나.>
이 때는 全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 간지 8개월이 넘었을 때였다. 그는 특별한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全 전 대통령은 89년 12월31일 국회 증언대에 섰으며 그 후 1년간을 더 백담사에서 지낸 후 90년 12월30일 은둔 769일만에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그는 우리 정치사상 처음으로 있었던 평화적 정부 이양은 아름다운 선례가 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全斗煥 증언, "金載圭의 패륜과 탐심"
- 金聲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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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8-01, 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