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만 보고 파내려 가라}
박 대통령이 연두 기자 회견에서 석유 발견 소문을 사실이라고 확인하기까지의 46일간 이 루머는 전국에 퍼져갔다. 전파의 주된 진원지는 대통령과 총리였던 것 같다. 대통령은 경제계 대표, 장관들, 그리고 박순천 여사 등 내방객들에게 기름을 보여 주며 자랑했다. 총리는 국회의원, 기자들에게 [도저히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는 이 소식]을 귀띔했다. 박근혜 양까지 연말 기자 회견에서 {새해엔 기름이 콸콸 쏟아졌으면……}하는 암시적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정부는 이때 석유 발견의 공표에 반대하는 건의를 대통령에게 했다고 한다.
석유 발견 직후 정부는 일본 도오꾜 대학의 석유개발 전문가 가와이(河井興三) 교수를 초청, 포항 시추의 중간 평가를 의뢰했다. 그는 포항엔 상업성 있는 천연가스, 석유, 지열 자원이 없다고 단정하는 보고서를 기름 발견 보름 뒤인 12월 17일 정부에 제출했다. 기름 발견, 박 대통령의 공표, 국민의 흥분은 커다란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박 대통령은 {차분히 기다리자}고 했지만 국민들은 {대통령이 발표할 정도라면 틀림없다}고 유전 가능론의 기대가 컸던지 정부는 석유 발표 6일 뒤 포항 석유에 대한 일체의 보도를 금하는 조처를 취했다.
정성엽 씨는 당국에 불려가 며칠간 조사를 받았다. 거의 모든 언론이 정장출씨와 성엽씨를 혼동, 정성엽씨가 석유 발견의 연출가였다고 오보를 했었다. 당국은 성엽씨가 그렇게 발설했다고 오해했던 듯 하다. 당시의 언론은 기름 발견에 대한 사실 검증에 완전히 실패했다. 보도 방향은 과장, 확대 해석으로 치달았다. 대통령 발표는 분명히 {아직은 미지수다}였으나 보도는 상업성 있는 유전이 틀림없다는 가정 아래에서 환상에 젖어들었다. 그런 보도에 의한 국민들의 흥분은 정부도 예측 못한 정도였다. 그 흥분이 근거가 약한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행정부?과열 분위기를 타게 되었다.
시추 종료론이 우세했던 포항 현장의 분위기는 일변했다. 고위인사들은 수시로 현장에 내려왔고 76년 3월엔 박 대통령이 처음으로 현장(B공)을 시찰했다. 그는 현장 감독에게 {앞도 뒤도 보지 말고 밑만 보고 파내려 가라}고 격려했다. 기름에 한이 맺힌 최고 통치자의 이런 관심과 격려를 관계자는 어떻게 받들었던가? 그들은 우선 미국에서 5천m까지 뚫을 수 있는 유전 시추기를 도입했다. 미국인 석유 기술자 20여 명, 미국 검층 회사인 엑스 로깅의 기술진 3명, 명인성·김연수 박사 등 해외에서 활동중인 한국인 석유개발 전문가 수명 등도 고용, 현대적 석유 시추 시스템을 갖추었다.
명 박사는 미국에서 직접 유전을 발견한 적도 있는 사람이었다. 정부는 여러 하청 회사를 거느린 본격적인 석유 개발 회사로 변모했다. 순식간에 이런 시스템이 갖추어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정부의 힘 덕분이었다. 미국 시추공들은 콜도라도주 덴버에 가스 개발 회사를 갖고 있었던 재일 동포 정건영씨(일본 이름 마찌이)의 주선으로 포항에 왔다고 한다. 박 대통령 등 공화당 정권의 고위층과 가까왔던 정건영씨는 {이제 조국을 위해 돈을 좀 써라}는 참여 권유도 받았으나 현장을 답사한 뒤엔 발을 뺐다는 미확인 소문도 있다.
76년 3월 정부는 기름이 나온 B공의 북서쪽 50m 위치에서 새 유전 시추기로 DS1호공을 뚫기 시작했다. B공 시추는 76년 1월에 1천6백27m 심도에서 끝났었다. DS1호공 시추는 석유가 나온 바위 층을 더 정밀하게 조사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석유가 나왔을 때의 B공은 굴착파이프의 지름이 불과 2·7cm였다. 그나마 함유암 층(含油岩層)의 코어시료 채취가 안 돼 기름 매장 상태에 대한 조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계속 헛탕에 오기로 밀어붙여
DS1호공의 굴진 심도는 1천m를 넘어 B공에서 기름이 나왔던 1천4백75m에 다가갔다. DS1호공 지하 1천3백94∼96m사이에서 나온 안산암 파편에 약간의 기름이 묻어 있는 게 형광 반응으로 확인됐으나 기름은 쏟아지지 않았다. 시추봉은 1천4백m를 넘어섰다. 회전 분쇄기는 메마르고 단단한 화강암층을 갈아서 부수며 조금씩조금씩 파고 들어갔다. 1천4백50, 1천4백70, 1천4백80m…… 구멍에선 아무 소식이 없었다. 1천5백, 1천5백10, 1천5백50m…… 그래도 기름은 나타나지 않았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50m밖에 떨어지지 않은 장소를 뚫었는데도 B공에서 기름이 나왔던 심도에선 기름 한 방울 비치지 않았다.
76년 6월 정부는 DS1호공 시추를 지하 2천1백76m에서 끝냈다. 심도 1천4배m에서부터 나타난 화강암층은 끝날 줄 몰랐다. 정씨 형제들이 예언했던 퇴적층은 나오지 않았다. 정부는 잇따라 B공 남동쪽 약 20m 떨어진 장소에서 DS2호공을 뚫기 시작했다. 목표는 역시 문제의 지하 1천4백75m였다. 세계 석유 개발 역사상 이런 시추는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마당만한 면적에 세 구멍을 찌른다는 건 이미 유전을 찾자는 게 아니었다. 외국이나 한국 대륙붕에선 수십 ㎢의 면적을 가진 퇴적층도 단 한 구멍의 시추로 평가를 끝내는 판인데…. 무엇을 증명해 보이려는 강박 관념이나 집착, 꽁꽁 숨어버린 기름이 안 나타난다면 쥐잡듯 이리저리 쑤셔서라도 잡아내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B공 근방에서 서리기 시작했다. 정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집념과 오기 앞에서 과학 정신은 맥을 못 추게 된다.
원유는 진짜였나?
DS2호공 시추도 DS1호공처럼 무미건조하게 진행되었다. 현장감독은 직통 전화로 굴진 상황을 매일 아침 두 군데에 보고했다. 청와대 비서실, 총리실. 박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온 적은 없었으나 오원철 비서관이 자주 {좋은 소식이 없느냐?}고 물어오곤 했다. 박 대통령이 포항 시추의 경과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는지는 멀리 떨어진 포항에서도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정부는 잇딴 시추 실패에 신경과민이 되어 있었다. 76년 6월 부산의 어느 기자는 포항 석유는 경제성이 없을 것 같다는 요지의 개인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를 일본의 산께이 신문이 외신면 머리 기사로 인용 보도했다. 포항 석유에 대한 최초의 의문 제기였다.
DS2호공 시추는 지하 1천8백23m에서 아무 소득 없이 끝났다. C공 시추도 지하 3천m에서 성과 없이 끝났다. C공 4백64m에서 약간의 원유질이 갱정 순환 흙물에 뒤섞여 올라왔다. 흙탕물에서 이를 분리할 수 있었으나 유전과는 아무 관계가 없음이 밝혀졌다. C공은 지하 1천2백∼3천m사이의 1천8백m 지층이 전부 화강암층이었다. 이 두꺼운 바위 층을 파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어느 미국인 기술자는 이희철 교수에게 {당신들은 차라리 금을 찾는 게 낫겠다}고 비꼬더라는 것이다. E, G, H, DS3호공 시추도 성과 없이 끝났다. 이희철 교수는 포항 퇴적암의 석유 생성 능력을 조사했는데 지층이 충분히 성숙되지 않거나 화산 활동에 의한 열을 너무 많이 받아 원유를 대량 배태하기엔 어려遲?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일이 이렇게 기울어지자 B공의 기름에 대한 의문이 지질학자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의문제기는 먼저 이 석유 발견이 학술 이론상으로는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데서 출발했다. 석유는 퇴적암 속에서 발견되는 게 원칙이지만 화강암 속에서도 드물게는 발견된다. 화강암 속의 석유는 그 자리에서 생성된 게 아니다. 근처의 퇴적암에서 만들어진 석유가 지층사이를 이동하여 화강암 속에 들어온 것이다.
지질학자들은 포항에는 그런 퇴적층이 없다고 했다. 기름이 나온 B공 1천4백75m의 상부에 제3기 퇴적층이 있긴 하지만 여기서 만들어진 원유가 밑으로는 이동할 수 없다. 아래 퇴적층에서 원유가 올라와야 하는데 그런 퇴적층은 없다는 것이었다. 의문 제기의 두 번째 논거(論據)는 분석표에 나타난 B공 기름이 원유로 보기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보통 원유보다는 경질분과 중(重)질분이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원유 확인 시험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이었다. 공교롭게도 기름이 B공에서 나올 때 현장 감독이나 지질조사소 지질 분석 책임자 곽영훈 씨는 서울 출장 중이어서 현장엔 없었다. 곽씨는 울산 정유와 KIST에서의 원유확인 시험엔 입회했다.
현재 동력자원 연구소 책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포항1차 시추 때부터 줄곧 현장생활을 했었다. 석유 지질 분석 분야에선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제일의 경험자다. 곽박사(석유 지화학 전공)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유나, 정제된 기름이냐를 판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당시 유공이나 KIST에서 시험한 것은 원유 여부의 확인이라기보다는 샘플 성분의 분석이었다. 당시엔 원유 확인 분석법이 국내에선 정립돼 있지 않았다. 원유 여부의 판정엔 분석 화학적 시험과 함께 석유 지질학적인 접근도 따라야 한다}
환상적 기대가 부른 무리한 시추
그러나 학술적으로 설명이 곤란하다고 해서 {원유가 아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학술 이론이란 것은 그 시점에서 알려진 지식의 총체일 뿐 절대적 진리는 아니다. B공의 기름은 분명히 학자들에겐 고민거리였다. 그들이 연거푸 {기름이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해 온 중생대 화강암층에서 기름이 나왔으니 말이다. 박 대통령의 기름 발표 뒤 일부 언론은 [정씨 형제의 승리, 학계의 패배]로 판정을 내리기도 했었다. B공의 기름이 원유라면 정성엽씨는 언제나 할말이 있다. {아무리 소량의 원유이지만 그것이 다른 퇴적층에서 만들어져 이동한 것은 틀림없다. 위에서 내려올 수는 없으니 아래 퇴적층에서 스며 올라 왔을 것이다. 화강암층을 뚫고 내려가면 바로 이 퇴적층과 만나게 되어 있단 말이다}
정성엽씨는 이 원유를 더 깊이, 더 깊이 뚫어야 한다는 자기 주장의 가장 강력한 논거로 활용했다. 일부 지질학자들은 이 원유가 밑에서 이동해 올라온 게 아니고 포항 근해의 해저 3기 퇴적층에서 옆으로 옮겨 온 것이라고 해석, 정시의 공격을 피하기도 했다. 어쨌든 B공의 기름이 유전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선 정씨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경험이 많은 외국 전문가들이 더욱 비관적이었다. B공의 기름은 아마도 화강암층 속의 파쇄된 바위틈 속에 작은 우물처럼 괴어 있었을 것이다. 이 기름 포키트를 적중시킨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그런 점에선 하나의 사고였다.
미국과 같은 산유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오일맨들은 눈도 깜박하지 않고 무시해버렸을 것이다. 시추에서 기름이 발견되는 건 구름이 끼면 비가 오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다. 한국 대륙붕 시추에서도 B공보다 훨씬 많은 기름이 다섯 구멍에서 발견됐다. 문제는 유전, 즉 상업성이 있을 만큼 석유가 모여 있느냐 하는 것이다. 시추엔 석유가 목표가 아니고 유전이 목표다.
포항 시추는 국가 원수의 결단과 집념, 이를 받든 행정부의 돌진적인 실천으로 해서 석유 개발의 원칙이 무시된 [정치적] 시추가 돼 버렸던 것이다. 박 대통령이나 국민들이나 석유 발견을 유전 발견으로 착각한 점에선 같았다. 석유에 대한 비원(悲願)이 뼈속까지 사무친 이들이었지만 석유의 실체에 대해선 무지했다. 환상과 실제의 그런 간격을 메우기 위해선 무리한 시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작은 없었다
포항 시추는 1977년 4월에 끝났다. 꼭 2년 걸린 작업이었다. 박 대통령은 {석유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통치자의 의무가 아니었겠느냐?}면서 담담하게 시추 종료 건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정부가 마지막으로 뚫은 것은 칠포해수욕장 남쪽 해안 언덕 위의 DS4호공이었다. 마지막을 의식해서인지 가장 깊게 뚫었다. 최종 심도는 3천1백17m. 역시 화강암층을 헤쳐 나오지 못하고 굴진은 끝났다. 포항에서 나온 자료는 모두 동력자원부 산하의 동력 자원 연구소로 이관되었다.
연 인원 약 4만명, 약 70억 원의 돈을 들여 12구멍, 연 2만5천m를 뚫은 흔적은 암석 파편과 분석치, 그리고 B, C공에서 나온 약간의 기름으로 만 남았다. 1·2차 시추를 합쳐 포항에선 19구멍이 뚫렸다. 포항 기름은 박 대통령, 김종필씨 이외에 정장출씨, 그리고 몇 사람의 현장 직원들이 기념으로 조금씩 가져갔다. 동력 자원 연구소엔 샘플로 보존돼 있다. 최근에 와서 일부 지질학자들이 포항 기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그것이 원유라는 증거는 없다}고 말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그 원유가 날조된 것이 아니란 건 확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때의 시추 현장 상황이나 분위기로 보아 조작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 관계자의 공통된 견해였다.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 정제된 기름을 원유로 오인했다는 가설이 남는다. 그 깊은 땅속까지 정유(精油)가 스며내려 갈 수는 없는 법이니 시추 구멍을 통해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 갱정 속을 순환하면서 암석 파편들을 감아 올리는 흙물에 디젤유를 섞는 일이 있는데 B공에서는 그것을 타지 않았다고 한다. 시추기의 동력원으로 쓰였던 경유가 잘못 들어갔다는 확증도 없다. 파이프에 묻은 기계유나 윤활유가 순환 흙물에 씻겨 원유처럼 나올 수는 있다. 이런 기름을 원유라고 오인한 일은 어느 시추장에서 실제로 있었다.
{원유가 아닌 듯하다}는 분석도
필자가 입수한 가장 구체적인 자료는 일본의 세계적인 석유 지질학자 기노시다(木下浩二)박사가 분석한 것이다. 정장출씨는 포항 B, C공에서 나온 기름을 5년 동안 유리병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가 지난 80년에 기노시다 박사에게 보내 분석을 의뢰했다. 기노시다 박사는 미쯔비시 석유 개발(주) 등 대 석유 회사의 지질부 책임자로 오래 일한 권위자다. 기노시다씨가 지난 81년 4월 14일 정장출씨에게 보낸 답신의 요지는 이렇다. [시간이 흘렀으나 원유의 경질 부분은 휘발했어도 중질분(中質分)은 남아 있을 것이다. 혹은 화강암이 들어와 열에 의한 변성을 받았다 해도 중질분은 남아 있어야 한다. 중질분의 존재 여부를 알아내는 최선의 방법은 FD-MS분석법이다. 이 분석법으로 시험해 본 결과 1번(B공 기름)과 2번(C공 기름) 샘플은 매우 특수 하지만 원유일 가능성은 있다.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가스크로마토그라피 증류 분석을 하기로 했다. 원유라면 칼럼엔 중질분이 남고 주로 경질분이 관측되게 되어 있다. 시험해 보니 경질분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휘발분이 원래부터 없었다는 얘기로서 두 가지 샘플이 원유일 가능성은 낮다는 게 분석자의 결론으로 됐다. 이상은 분석담당자의 결론이고 나의 견해를 덧붙여 둔다. 가벼운 휘발분도, 무거운 아스팔트 성분도 없으므로 두 샘플은 정제된 경유인 듯하다.
만약 원유라고 하면 극히 드문 타이프라고 할 수 있다. 가스크로마토그라피의 분석에 의하면 나프텐 성분이 많다. 이 점, 해성(海成) 유기물에서 생성된 원유의 특징인데, 한국의 퇴적 분지는 육성(陸成)이라고 생각하는데, 불가사의하다. 샘플분석으로 더 상세히 답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다른 자료로 원유의 가능성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원유라 해도 변질을 많이 받은 것은 확실하므로 양적으로는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노시다씨의 분석 평가를 요약하면 [정제된 경유일 가능성이 높으나 원유일 가능성도 있다. 원유라면 매우 특수한 타이프]란 것이다. 기록에 남길 만한 자료로서 기노시다의 분석치를 소개한다.
◇B공 기름―갈색, 불투명. 비중 0.8449 API 35.89, 유황분 0.93%, 파라핀 왁스 1.01%, 성분비는 파라핀 20, 나프텐 15.3, 방향족 64.7%.
◇C공 기름―갈색, 불투명. 비중 0.8381, API 37.25, 유황분 0.64%, 파라핀 왁스는 극소량. 성분비는 파라핀 21, 나프텐 39, 방향족 40%.
이희철 교수는 이 분석치에 대해 {샘플을 채취하고 오랜 시간이 흘렀으며 그 동안 어떤 상태로 보존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것이 원유임을 부정하는 자료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평했다. 이어서 그는 {오래 보관하면 유리병 벽에 중질 성분이 녹아 붙는다. 이걸 긁어내지 않고 액체만 떠내 분석하면 중질분이 적게 나타난다. B공 기름이 나온 그날 유공에서 분석했던 자료와 비교하면 경질분이 적은 점은 일치하지만 중질분은 그때보다도 더 줄어 든 것 같다. B공 원유의 타이프가 세계의 다른 원유와도 비교하기가 힘든 특이한 것임은 확실하다}고 했다.
동력자원연구소 곽영훈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체로 기노시다와 같은 의견이다. 수사에서 현장 보존과 초동수사가 중요한 것처럼 기름이 나왔을 때의 체계적인 현장 분석이 중요하다. 포항에선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이제 와서 9년 전의 기름이 과연 원유였던가를 밝힌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당시의 시추 현장인들은 지금도 그것이 원유였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들은 B공과 C공의 기름을 플라스틱 속에 넣어 밀폐, 기념패처럼 만들어 내방객들에게 자랑하고 있다. 그들의 밝고 맑은 표정엔 눈꼽 만큼의 의구심이나 거리낌도 없는 듯했다. 포항 기름의 출신성분에 대한 혐의점은 숱하다.
①나오지 않아야 할 데서 나왔고 바로 옆에선 나오지 않았으며 ②충분한 혈통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고 ③형태가 기형에 가까우며 ④출산과정이 일반에겐 극비에 붙여진 점 등이 의심을 살 만했다. 이번 취재 과정에서 나는, 그러나 원유가 아니라고 할 만한 물증을 발견할 순 없었다. 심증만으로 범인을 단정 못하듯 아무리 혐의점이 많다 해도, 아무리 기형이라 해도 가짜라고 말 못한다. 나는 B공 기름의 출산에 입회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것이 원유였다는 데 대한 확신을 모두가 갖고 있었다.
과학적 자료만큼 이들 현장인의 믿음도 참고해야 한다. 어떤 이는 {시추 종반에 가서는 그런 의심을 의식하여 폐쇄한 B공을 확 까뒤집어 결백 증명을 해보이고 싶다는 말까지도 나왔다}고 했다. 달리 확증이 없는 현 시점에선 [포항 석유 조작설]과 [포항 원유 부인설]을 일단 기각, 최종 판단은 보류하지 않을 수 없다. 포항 석유가 의심을 받을만했다는 것은 정부의 실수였다. 유전을 찾자는 시추가 끝에 가선 기름 몇 깡통의 해석 문제로 고민했다. 포항시추를 70년대와 유신 정권의 대표적 에피소드로 분류할 수 있는 것도 이런 결말에 있는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집착
정장출씨와 정성엽씨에게 포항 시추는 아직도 응어리로 남아 있다. 정장출씨는 행정부가 시추 작업에서 자신을 소외시켰다고 생각하고 있다. 정성엽씨는 법률상의 광주 대표인 자신이 이 작업에서 거의 완전히 무시됐다는 점에 한을 품고 있다. 정장출씨는 그러나 포항에서 석유가 있다 해도 크게 기대할 게 못된다는 점에 있어선 정부나 학계 쪽과 거의 의견을 같이하는 것 같다. 정성엽씨는 아직도 {더 깊이 뚫으면 유전 가능 지층(퇴적층)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지난 82년 초엔 청와대에 탄원서를 내어 포항시추의 재개를 요청했었다. 동자부는 관계 학자들을 불러 이 문제를 검토케 했는데 결론은 [불가]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정성엽씨가 아니다. 올해 들어 그는 더욱 바빠졌다. 정씨는 포항의 창고에서 고물처럼 보관돼 있는 유전 시추기를 활용, 5천m까지 뚫자고 호소하고 있다. 68년 이후 18년 동안 일정한 직업 없이 석유의 꿈에 매달려 온 관계로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다. 부인이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광화문의 은호 다방에 매일 나오는 그가 석유를 얘기할 땐 두 눈은 빛나고 얼굴은 홍조를 띄고 목소리는 높아진다.
정장출씨는 요즈음 서울 근교에서 온천 시추 작업을 크게 벌여 놓고 있다. 사업 수완이 뛰어난 그는 요즘도 밤 2시까지 지질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석유로부터는 멀어진 것 같은 장출씨지만 지금까지 쓴 수십 편의 석유 지질 관계 논문과 포항에서 나온 갖가지 자료들을 가보처럼 간직하고 있다. 두 사람의 설득력은 굉장하다. 자기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열띤 주장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그들의 무서운 집착에 소름이 돋을 정도이고 포항의 땅 밑 저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어마어마한 대 유전이 나를 손짓해 부르는 것 같은 환각에 빠질 지경이다.
현재의 결과만 놓고 본다면 4반세기 동안 포항석유에 모든 걸 걸었던 두 사람의 인생 도박은 실패한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결과로써만 평가할 수는 없다. 첫 번째 포항 시추는 또 석유 개발에 대해 전국민적 교육을 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두 번째 포항 시추는 학계와 업계에 시추 경험을 가진 많은 인력을 공급하는 계기가 됐다. 최근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등지로 민간인들이 진출, 해외 석유 개발을 꾀하고 국산 시추선을 우리가 운영하기까지 된 데는 석유 개발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진 것이 큰 용인이었고 이 점 두 정씨의 기여는 적다고 할 수 없다. 광업생산성 조사소 조성룡 소장은 정성엽씨를 {조선시대에 살았다면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가 됐을 것이다}고 평한다. 문제가 있다면 정성엽씨가 20세기에 태어났다는 점일 것이다.
포항석유 조작설의 진상(2)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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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7-08, 1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