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석유 조작설의 진상(1)

산유국의 환상을 몰고 왔다가 어느 날 갑자기 행방 불명된 [포항 석유]의 실체를 9년만에 최초로 밝힌다.

<1984년 5월 월간조선>



설명 없이 끝나버린 석유의 꿈

1975년 1월 15일 고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 회견에서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답변을 했다. 포항에서 질 좋은 석유가 나왔다는 항간의 소문은 사실이라고 박대통령은 확인했던 것이다. 그는 정부가 외국 전문가들을 불러 경제성 여부를 조사하고 있으니 국민들은 차분하게 기다려 달라고 당부했다. 이 발표가 국민들에게 준 충격은 가위 [역사적]이었다. 뉴스의 충격도로 따진다면 이 발표는 5·16, 대연각 화재, 7·4 성명 및 유신 발표, 10·26 등 우리 시대의 대사건과 버금가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큰 사건들이 변고나 비보(悲報)였던 데 대해 [포항 석유 발견]은 낭보였다.

박대통령의 기자 회견 이후 온 나라는 한 동안 석유 열기에 휩싸였다. 주식 시장은 과열 상태에 빠졌고 석유원년(石油元年)이란 말이 나왔다. 세금을 안내도 될 시대를 그리는 백일몽 같은 기사가 활개를 쳤다. 60억 배럴쯤 매장돼 있으리라는 환상적 추정도 상당한 실감을 갖고 국민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1주일쯤 지났을까, 갑자기 조용해졌다. 신문에서, 방송에서 원유 원(原)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국민들의 기대감을 활활 태워 놓았던 언론이 침묵하자 서민들의 입과 귀는 무성한 소문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76년 3월에 가면 포항에서 울산까지 송유관을 깔고 있다는 소문이 등장한다. 포항 제철을 포함한 포항시가지 전체가 유전 개발로 인해서 옮겨가야 할 것 같다는 [해설]도 나타났다. 5·16 기념일이 다가오자 [5·16 석유 축제설]이 새로 나왔다. 이 소문으로 주식 시장이 다시 뜨거워졌다. 정부와 언론이 [진화 작업]에 나서야만 했다. 76년 여름 박 대통령은 진해에서 기자들에게 {아직 경제성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해 하반기부터 포항 석유는 서서히 잊혀져 갔다. 그러면서 [보라빛 루머]는 [검은 루머]로 변색, 잠복하게 되었다.

포항 석유는 애당초 조작된 것이란 신설(新設)이 [검은 루머]의 정체였다. [석유 축제설]이 [석유 날조설]로 전락한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포항 시추가 극비리에 진행됐고 언론의 취재와 보도가 제한되었으며 국가 원수가 [발견]을 발표해 놓고도 [결과]를 책임 있게 확인해 주지 않았다는 점 등이 그런 요인들이다. 포항 시추에 관한 한 현장 접근이 불가능했던 당시 언론의 보도는 맞는 것보다는 틀린 것이 더 많은 형편이었다.

특히 석유 발견 발표에서 시추 중단가지의 1년 5개월은 [보도의 공백기]였고 여태까지도 완전히 장막에 가려져 있다. 정부의 공식 보고서 하나도 공개된 바 없다. 이 때문에 [포항 유전설]이란 용머리는 물거품 된지 오래지만 [석유 조작설]이란 꼬리는 아직도 달려 있다. 국민의 환상적 기대를 배신한 용두사미(龍頭蛇尾)식의 결말에 분노한 민중은 [석유 조작설]을 하나의 설명으로 내세움으로써 실망을 합리화하게 이른 것이었다. 따라서 이 글은 일단 {포항 석유는 진짜인가?}란 의문을 걸고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새벽에 오른 불길

1975년 12월 3일 새벽, 포항시추 현장의 당직실에서 숙직자 곽승진씨는 전화벨 소리에 깨어났다. 포항 종합 제철 앞에 있는 B공 시추장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지금, 이상한 게 나오고 있읍니다} 시추공의 다급한 설명이 계속되었지만 곽씨는 냉랭하게 말했다. {더 자세히 확인해 보고 다시 보고하시오} 먼동이 트고 있는 가운데 B공 시추장은 부산했다. 시험실 사람들은 이미 플라스틱 물통과 갖가지 기기들을 들고 나와 있었다.

송도동에 있었던 이 시험실은 광주(鑛主) 대표로(법률상의 대표는 아니었음) 시추작업에 관계하고 있었던 정장출씨(59)가 운영하고 있었다. 정씨는 시추공으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고 뛰쳐나온 것이었다. 그날 밤 정씨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잠을 못 이루고 있다가 그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정씨가 현장에 가 보니 구멍에서 나오는 물을 받아두는 큰 통에서 물이 넘쳐 배수로를 따라 논도랑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시추 구멍에서 샘솟듯 하는 지층수와 함께 나온 시커먼 액체가 수면 위에 확 번지고 있었다.

정씨는 논도랑을 따라 3백m쯤 걸어갔다. 시커먼 액체와 뒤섞인 물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시추공들의 설명을 들었다. {밤 2시쯤이었다. 1시간에 1cm 정도의 느릿느릿한 속도로 바위 층을 깨고 내려가던 시추봉이 지하 1천4백75m에서 푹 꺼지듯 쑥 들어갔다. 마치 공동을 통과하듯 약 2m를 그렇게 지나갔다. 우리는 무슨 사고인 줄 알고 굴진을 중단했다. 그랬더니 구멍에서 검은 액체가 섞여 올라오지 않는가? 그 액체를 떠서 불을 당기니 연기를 내며 탔다} 대충 이런 설명이었다.

정씨는 손가락으로 시커먼 액체를 묻혀서 옆에 있는 물통에 담구었다. 수면 위로 암갈색 막이 쫙 퍼졌다. 유리 막대로 감은 액체를 묻혀 불을 붙였다. 불길이 올랐다. 곽씨는 코를 대 보았다. 기름냄새가 확 풍겼다. 정씨는 이때 {사우디 기름보다 더 좋은 원유다}고 소리쳤다고 한다. 정씨는 문제의 액체를 채집하기 전에 먼저 시추 부장을 모셔 오라고 했다고 한다. 현장 감독은 서울로 출장 가 있었으므로 부장이 최상급자였다. 부장이 달려오자 정장출씨는 {원유가 틀림없으니 기록 사진부터 찍어 두자}고 졸랐다. 촬영이 끝나자 시험실직원들은 검은 액체를 통에 퍼 담기 시작했다.

<포항 2차 시추위치도 도표>

{이걸 그냥 마시고 싶다}

한편 인하 공대 화공과 이희철 교수는 이날 아침 8시30분께 인천에 있는 학교로 출근했다. 전갈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부에서 급한 전화가 곧 올터이니 자리를 뜨지 말라는 내용. 몇 분 뒤 전화가 왔다. 즉시 서울역으로 나와 대기하고 있는 승용차 편으로 포항 시추 현장으로 내려가라는 얘기였다. 이 교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포항 시추 자문위원이었던 이 교수는 다른 위원들과 함께 바로 전날 밤 11시께 포항에서 서울로 돌아왔던 것이다. 10여 명의 자문위원들은 포항에서 이틀 동안 B공 평가회의를 가졌었다.

학자들은 거의가 비관적인 견해를 보였다. 지하 9백m쯤에서 석유 부존이 기대되는 퇴적층이 끝나고 중생대 화강암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이젠 석유를 기대할 수 없고 시추를 끝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분위기였었다. {이것으로 B공은 끝장이다}고 생각하고 상경했는데 기름이 나왔다니? 이 교수를 태운 승용차는 날아가듯이 경부 고속도로를 달렸다. 포항 현장에 도착한 것은 정오 조금 지나서였다. 갱정(坑井)에서 샘솟듯 하던 암갈색 액체는 점점 양이 줄더니 오후 2시쯤 끊어졌다. 그러니 약 12시간 유출된 셈이었다.

그 시간에 암갈색 액체가 얼마나 나왔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많아야 한 드럼 정도였을 것이다. 현장에서는 여러 물통과 유리병에다가 지층수와 뒤섞인 채의 이 액체를 퍼 담아 놓았었다. 이희철 박사는 샘플 한 통을 받아 싣고 곧장 울산 정유 공장 시험실로 달려갔다. 시험실 기사들은 증류시험, 가스크로마토그라피 및 형광 분석 등을 몇 시간에 걸쳐 실시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분석자는 {경질의 원유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이 교수는 이날 밤 11시께 서울의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그는 과학 기술 연구소(KIST)에 가서 다시 기름 분석을 의뢰, 울산 정유에서와 같은 대답을 얻었다고 한다.

원유로 [판정된] 이 액체는 고위층에 전달됐다. 이 포항 시추의 단초(端初)를 연 정장출씨는 그날 아침 서울로 전화를 걸어 부인 김경희씨(51)를 급히 포항으로 내려오게 했다. 김경희씨는 남편으로부터 기름이 든 유리병을 받아 곧장 고속버스 편으로 서울로 향했다. {저절로 눈물이 나더라}고 김씨는 말했다. 서울에 닿자마자 김씨는 코리아 타코마 회장이며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씨의 형인 김종락씨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총리 비서실장의 보좌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보좌관에게 기름을 건네주면서 김경희씨는 또 한번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이 기름은 즉시 국무총리에게 전달됐다. B공 기름은 12월5일 박 대통령에게 바쳐졌다. 박 대통령은 탁자 위의 큼직한 재떨이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고 한다. {이걸 그냥 마시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고 전한다.

이론 투쟁으로 얼룩졌던 1차 시추

여기서 잠시 기름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밝혀보자. 포항 1차 시추는 1964년 3월∼68년 1월 사이에 이뤄졌다. 이 때의 주역은 정장출씨의 동생 정성엽씨(53·옛이름 정우진)였다. 정성엽씨는 언론과 정부를 움직여 일곱 구멍을 뚫었다. 두 구멍은 정성엽씨 등이 주식을 팔아 조직한 연일 유전 개발(주)이 제힘으로 시추했다. 나머지는 국립지질조사소(지금의 동력자원연구소의 전신)가 시추를 주관했다. 천연 가스는 몇 번 발견되었으나 경제성은 없는 것으로 판정되었다. 포항 1차 시추는 정씨와 학계(국립 지질 조사소 포함)의 이론투쟁으로 얼룩졌다.

논쟁의 핵심은 지질 층서(層序)문제였다. 지질 조사소와 학자들은 최대 두께가 약6백m인 신생대 제3기 퇴적층에서만 기름이 나올 수 있다고 주장, 이 퇴적층이 끝나고 화산암 층이 나타나면 굴진도 끝냈다. 이에 대해 정씨 쪽에선 제3기층에서만 석유가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선 학자들과 견해를 같이하면서도 제3기층이 화산암 층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즉 화산암 층을 뚫고 내려가면 제3기 퇴적층이 또다시 나타나고 여기에 유전이 있다는 것이었다.

양쪽의 대립은 68년 1월 3일에 열린 [포항 천연 가스 징후 지구 조사 결과 종합 공개 토론회]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지질 조사소와 지질학회에서 나온 20여 명의 학자들을 상대로 정성엽씨는 8시간 동안 처절한 토론을 벌였다. 10년 전 아마추어로 출발했던 정씨는 이때는 벌써 어려운 학술 이론과 용어를 마음대로 구사하는 전문가로 성장해 있었다.
{지질 조사소는 저의 유전에 개입한 이래 일방적 독선을 감행하였고……}
{가스가 없는 곳에 시추를 하고 조사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읍니까? 계란의 노른자위가 있는데 흰자위를 뚫어 놓고 노른자위를 볼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을 여러 사람이 병신 만들기는 쉬운 일입니다}

정성엽씨의 항변은 절규에 가까왔지만 메아리가 없었다. 지질조사소 박인규소장은 이렇게 말하며 토론을 종결지었다. {광주(鑛主)는 유사이래 어느 누구도 얻지 못했던 혜택을 정부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 광주라면 이런 혜택에 대해 매우 고맙게 여길 것이다. 지질 조사소는 정성엽이란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고 석유를 상대로 일했었다. 정씨에 대해선 아무런 적대감도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어지간히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회의를 끝으로 포항 석유는 세간에선 잊혀졌지만 정씨 형제들은 결코 기름을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맏형 정장출씨와 바로 아래 동생 정성엽씨의 가는 길은 달랐다. 정성엽씨는 어디까지나 학술 이론으로 학계의 기존 학설을 뒤엎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시추를 재개하려고 했다. 그는 관계 기관에 수많은 진정, 항의서를 냈다. 개인 논문도 여러 건을 썼고 포항의 지질 조사를 홀로 계속하며 기존 학설을 전복시킬 만한 실마리를 찾는 데 안간임을 다했다. [자연은 인간을 속이지 않는다]는 게 그의 구호였다. 정씨는 그러나 사회에서 공인된 학자가 아니었다. 학자들의 무대에서, 학자들의 무기로, 학자들과 싸워 그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지만 고지식한 정성엽씨는 외곬로만 매진했다.

김종필 총리를 설득하다

정장출씨는 다른 방법을 썼다. 60년대엔 동생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었던 그는 실은 대단한 추진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5·16전후 정당 간부 생활도 했고, 비록 낙선했지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도 해본 사람이었다. 장출씨는 이론 투쟁보다는 일이 되어지도록 꾸미는 데 전념했다. 그는 먼저 일본 자금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친구인 김모씨의 딸과 국제 결혼한 일본인 오시베씨(押部光男)를 알게 됐다. 작은 무역 회사의 사장이었던 30대의 이 사람은 처가가 있는 서울을 자주 들락거렸다.

오시베씨는 정씨의 뜻을 친구인 오꾸미(奧見半次)변호사에게 전했다. 오꾸미씨는 다시 자민당 중의원 의원 다나까 다쯔오(田中龍夫)와 참의원 의원 나까니시 이찌로씨(中西一郞)에게 정장출씨의 복안을 소개했다. 정장출씨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그들 쪽의 투자선으로 일본 석유(주)와 신일본 제철 석유 조사부를 거론했다고 한다. 75년 1월 12일 자민당 국회의원단 16명이 한국을 방문했다. 뒤에 문부상이 됐던 다나까 다쯔오는 그때 자민당 대외 경제 협력 위원장 자격으로 따라왔다. 나까니시도 동행했다.

다음날 두 사람은 정장출씨와 만나 한일 공동개발 문제를 구체적으로 의논했다. 그 다음날인 14일 일본 의원단은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두 의원은 포항 석유를 한일 양국이 공동 개발할 것을 제의했다. 대통령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튿날 김종필 총리를 방문한 자리에서도 두 사람은 그 계획을 털어놓았다. 김 총리도 듣기만 했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분위기 조성이 됐다고 생각했던지 정장출씨는 본격적인 공작에 들어갔다.

포항 1차 시추 때부터 석유에 관심을 많이 보여 친면이 있는 고려대 조동필 교수(경제학)의 소개로 김종락·정태성씨(당시 공화당의원·국회 상공분과 위원장)를 1월 21일에 만났다. 이 네 사람은 한일 민간 자본으로 포항 석유를 공동 개발하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네 사람은 드디어 2월 3일 김종필 총리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이 자리에서 정장출씨는 포항 시추의 경과와 유전 가능성을 설명했다. 정씨는 한 아름의 보고서와 1차 시추 때의 사진을 담은 앨범을 갖고 가 그 특유의 열성적인 말투로 석유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오후 4시15분부터 1시간 15분 동안 면담이 계속됐다.

김 총리는 국무회의 개최 시간을 연기해 가며 정씨의 말을 경청했다고 한다. 정씨에 의하면 김 총리는 듣기만 하다가 딱 한 마디를 했다고 한다. {역적인데…} 정씨는 이 말이 석유 매장 가능성을 부인해 온 학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설명을 다 듣고 나서 김 총리는 {대통령께 상의를 드린 뒤 곧 연락을 하겠읍니다}고 했다. 그 뒤의 경과를 보면 이날 정장출씨의 설명은 매우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그 어려운 석유 지질 이론을 소화하여 문외한에게 요령 있게 설명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동시에 문외한을 오도(誤導)할 위험도 있다.

3월5일께 정부는 석유 관계를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말했다. {하느님은 아마도 자원을 골고루 나눠주었을 것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기름이 어디엔가는 숨어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나라도 이만큼 컸으니 우리 손으로 기름을 한번 찾아보자} 여기서 박 대통령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정을 내렸다. {석유 시추는 정부에서 맡으라!} 정부가 맨 먼저 한 일은 학자들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한 것이었다.

3월 25일에 열린 1차 회의에 참석한 얼굴들은 다음과 같았다. ◇자문위원=김옥준(연세대 지질학과 교수) 김봉균(서울대 지질학과 교수) 이정환(국립지질조사소장) 김종수(국립지질조사소 부장) 현병구(서울공대·뒤에 자원개발연구소장) 이희철(인하공대 화공과 교수) 윤주억(동국대 화공과 교수) 정장출(광주측 대표). 몇 달 뒤에는 전남대 지질학과 유환수 교수가 추가됐다.

권력 앞에 무력해진 학설

이들 가운데 이정환씨를 비롯한 지질학자들은 거의가 과거에 포항 유전의 가능성을 완강히 부인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국가 원수의 의지 앞에서 그들의 이견(異見)은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석유가 있느냐, 없느냐}하는 과학적 논의는 {석유를 찾으라}는 정치적 결단 앞에서 침묵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시대 상황이었다. 자문위원들은 옛날처럼 {시추를 할거냐, 말 거냐}를 토론하도록 소집된 게 아니었다. {시추를 어떻게 할거냐}가 유일한 문제였다. [토론의 방법]을 추구했던 정성엽씨를 대신해서 [정치력의 활용]을 꾀했던 정장출씨가 시추의 재개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포항 2차 시추]는 당시의 사회상을 전형적으로 반영하고 있었다.

정성엽씨만 상대했던 많은 자문위원들에게 있어서 장출씨는 낯선 얼굴이었다. 자문 회의가 거듭되면서 위원들은 정장출씨도 무서운 집념과 많은 석유 지질 지식을 가진 어려운 상대임을 알게 되었다. 정부는 관계 기관에서 시추요원을 차출했다. 광업진흥공사에서 3대의 고체 광물용 시추기와 수십 명의 시추공, 국립지질 조사소에서 지질 분석 전문가, 산업 은행에서 석유 담당자 등들 뽑아내 약 50명의 시추 작업반을 조직했다. 이를 바탕으로 [×× 산업 공사]가 탄생했다. 정장출씨는 다섯 명의 요원을 거느리고 시험실을 송도동에 세웠다. 이 시험실은 시추 갱정에서 나오는 암석·지층수 등 지질 자료를 분석, 정리했다. 이와는 별도로 지질 조사소 요원들이 공식적인 지질 분석을 했으므로 정씨의 시험실은 개인적인 성향을 강하게 띄었다.

75년 5월 31일 ×× 산업은 A, B, D 3개 갱정의 시추 기공식을 올렸다. A, B공은 정장출씨, D공은 김모 자문위원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위치 선정이었다고 한다. 정부에선 일찍부터 국내엔 석유 개발의 경험을 가진 전문가가 없음을 알고 외국 전문가들을 수시로 초청, 의견을 들었다. 포항 시추가 진행 중이던 75년 6월에는 프랑스 국립 석유 연구소의 라뜨레이유 박사가 포항을 답사, 정부에 보고서를 냈다. {퇴적층이 너무 작다. 학술 목적의 시추라면 몰라도 경제적 목적의 시추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비관적 평가였다.

시추 작업도 비관적으로 진행됐다. 퇴적층이면 으례 나오는 천연 가스 발견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낭보 없이 가을로 접어들었다. 제3기층을 다 뚫고 화산암 층을 계속 굴진해도 정씨 형제들이 예언했던 퇴적층은 나타나지 않았다. A공의 지하 1천1백50m 부근에서부터는 단단한 화강암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퍼석한 퇴적암이라야 석유가 괼 수 있는데 강철같은 화강암층이 나오자 {그만 끝내자}는 소리가 자문 위원들 사이에서 대두되기 시작했다. 10월 28, 29일 정장출씨는 A, B공에서 나온 암석 파편에 용제를 떨구어 원유분을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지금도 {이 원유분 추출 성공으로 시추 종료 주장이 약해지고 작업이 계속 될 수 있었으며 마침내 B공의 석유 발견으로 이어졌다}고 회고하고 있다. 문제의 B공에선 지하 9백m쯤에서 화산암층이 나오다가 지하 1천4백m쯤에서부터 화강암층이 나타났다. {이제는 그만…}이라고 자문위원들의 의견이 거의 일치되었던 그 다음날 바로 그 화강암층 속에서 기름이 [하나의 사고처럼] 흘러나온 것이었다. 많은 학자들에게 그 기름은 경사가 아니라 곤혹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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