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키니 차림에 난투극, 애국한 여자들>

열 몇 살 때 ‘오데사 파일’이란 첩보 영화를 보았다 세계 명작이나 대작이 아니었음에도 오죽 영화가 재미있었으면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 제목을 기억할까? 우크라-러시아 전쟁 탓에 언론은 ‘오데사’란 지명을 자주 말한다. 이것이 저 영화에 대한 기억을 불러 깨웠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옛 기억도 더듬을 겸 그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져 내 나름으로 열심히 검색해 보았지만 찾기지 않아서 두 번 볼 수가 없다. 마음은 더욱 아쉽고 영화 제목은 더욱 간직된다.

어제(8.6)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 제목이 있었다.《"러시아 노래 왜 틀어?"…우크라 해변서 비키니 난투극》난투극이 벌어진 장소도 하필 ‘오데사’이다. 내용인즉 이렇다.

“우크라이나 해변에서 러시아 음악이 흘러나오자 수영복 차림을 한 피서객들끼리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6일 영국 매체 더선 등 외신에 따르면 지난 5일 우크라이나 흑해 연안에 위치한 오데사 골든비치에서 남녀 10여 명이 난투극을 벌였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러시아 음악을 트는 것이 금지돼 있다.”

우스운 것은 수영복 차림의 남녀가 서로의 머리를 지뜯고 싸우며 같이 뒹굴었다는 점이다. 웃으면서도 가슴 찡한 것은 저들의 애국심이다. 적국의 노래를 튼 데에 분개, 참지 않고 박전(搏戰)을 벌였으니 거룩한 애국심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렇긴 하나 약간 이상한 것은 적대국의 노래가 나왔는데도 싸움에 나선 사람이 겨우 저 정도뿐이다는 점이다.

한편, 저런 사소한 애국에 소홀한 사람은 위대한 애국에도 소홀한 법이다. 천리 길도 문 앞에서 출발한다(千里之行 始於足下)는 장자 말씀처럼 작은 노력이 모여 큰일을 이룬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애국에도 연습이 필요하고, 연습은 하찮은 일에 성내어 하는 것이며 이것을 안 해 본 사람은 위대한 애국을 하지도 못한다. 혹 기회가 오더라도 행동화하지 못한다.

미국 등 서양 사람은 툭 하면 떼싸움을 한다. 준법정신이 우리보다 못하지도 않을 텐데 주먹이 먼저고 법이 나중인 것이다. 영국, 독일 등은 축구 경기를 보다가도 패싸움을 한다. 작년이든가 언젠가는 축구 경기에 불만을 품은 젊은이들이 길거리 패싸움을 벌렸는데 대통령 아들도 참전했다고 신문에 났었다.

저런 모습을 보고 위태위태하면서도 젊은이들의 패기와 역동성이 부러운 것은 어째서일까? 그래서 우리가 법적 해결, 즉 점잖게 해결하는 것을 너무 우선하는 게 아닐까 여겨진다. 또 우리가 크고 작은 나랏일에 너무 무관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혹 행동력이 없어서 법적 해결에 기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또 겁이 많은 나머지 그냥 관조자(觀照者)로 사는 것에 만족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일고 이런 것들이 과연 잘하는 일일까 하는 회의감도 솟는다.

저런 역동성이 어찌 축구 경기에서만 나오겠는가. 생활 곳곳에, 사회 곳곳에 뿌리 박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물건을 만들면 불량품이 드물고, 노래를 하면 비틀즈 같은 이들이 나왔을 것이다. 포클랜드 전쟁이 터지자 영국 앤드루 왕자가 먼저 비행기를 몰고 참전한 것도 저런 역동성에서 나왔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젊은이들 개인의 역동성이 모여서 가족 역동성이 되고 나아가 국가 역동성이 될 것은 두번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 세대까지는 집집마다 눈에 띄게 장남(녀)은 어리숙하고 차남(녀)이나 막내는 영악했다. 왜 그럴까? 부모가 처음 갖는 자식인 맏이에게는 다른 자식보다 더 많은 기대를 걸고 키울 것은 당연하다. 그러다 보니 “안 된다” “하지 말라” 위주의 교육에 치중했을 것이다. 반면에 둘째 자식부터는 장남에 비해, 조금 풀어놓고 키웠다. 물론 장남을 키우면서 자식에 대한 애정을 다 쏟아부은 탓에 둘째 자식부터는 기대감이 좀 식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어느 부모이든 이런 현상을 다 알았다. 알면서도 자연히 저렇게 되고 만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는 조선시대의 공자왈 맹자왈 교육의 유습으로써 습속이 됐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인물 중에 장남이 드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클 때도 대개 집집마다 빠지지 않는 밥상머리 교육은 “나서지 말라.”였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였다. 보신주의를 제일의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이 민족성으로 굳어졌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회에서도 드물게 일을 크게 저지른 사람이 있었고 마침내 크게 성공했다. 정주영 회장이 가출하지 않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만 했다면 이름 없는 농사꾼으로 살다 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감히 생각하면 호승심(애국심)은 타고나는 것이며 본능에 속할 터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대전은 호전성이란 본능보다는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 때문에 더 터진다. 트럼프의 정치가 그렇다. 또 생각해보면 트럼프가 공격적 외교를 하는 것도 타고난 기질이 바탕 되지 않으면 하지 못할 일이니 호전적 본능이 먼저냐 이익이 먼저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래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의 논리로써는 옳다. 그르다 결의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천만 번 그렇더라도 역동성과 혈기와 패기는 국가를 보전하는 근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