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련과 가족들과도 절연한 오귀성의 '진실 투쟁'

(2)진실을 말하기 어려운 곳(국가, 단체, 개인)/맨몸뚱이로 가도 되는 낙원이라더니 초보적 필수품조차 귀하고 귀한 나라였다.
조총련은 진실을 말하는 오귀성을 배신자, 스파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오히려 왕따를 시킨다.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딸과 사위까지 절교를 선언한 것이다. 그 후과가 얼마나 큰지 뇌출혈이 올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양심을 속일 수 없어 한다. 책을 내기로 하고 기자회견도 준비한다. 이를 저지하려고 조총련도 음으로 양으로 강력히 대처한다. 이에 타협안으로 일체 방북소리 하지 않겠으니 나에게 씌운 스파이, 배신자 오명을 벗겨 달라고 한다. 한편 방북 갔다온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한다. 약속을 했지만 조총련은 그때뿐이다. 조총련도 사실은 사실대로가 무서운 것으로 무조건 피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귀국사업으로 챙기는 각종 이권을 위해서 더 그런 것이다.

북송사업이 주식의 폭등장처럼 된 것은 대외적으로 영향도 컸다. 1957년 사회주의 10월혁명을 기념하여 세계에서 처음 쏘아 올린 소련의 인공위성이다. 이는 소련 과학의 성공이자 공산주의의 희망을 북돋아 주었다. 북송선을 타기 위해 니가타 항으로 가는 철도에 우익청년 몇 십 명이 누워 시위를 할 때이다. 북송책임자가 나서 지금 인공위성이 하늘에 날아가는 판에 철길에 누워서 뭐하나? 하며 기를 눌러버릴 정도였다.

또하나의 북송 폭등장에 영향을 준 대외사건은 남한에서의 1960년 4·19 사건이다. 무자비한 숙청으로 조용한 북한보다 남한은 아사리판으로 희망보다는 절망적인 조국으로 보인 것이다.

오귀성의 딸은 성악을 한 예술가, 사위는 학구적인 교수였다. 특히 사위 이진희 교수는 유명한 역사학자이다. 그의 책에 보면 2차대전 후 일본에서도 공산주의 광풍이 불었다. 진취적인 학생들이 더욱 그랬다. 불평등과 억압이 없는 인류 최고의 사회발전 단계인 것은 공산주의라는 것이다. 한 집회에서 좌우익 청년들이 충돌이 있었다. 좌가 천이라면 우는 백 정도이니 싸움에서 우익학생 한 명이 맞아 죽을 정도였다고 한다.

똥을 금이라고 해도 우길 정도의 좌파 공산주의 열풍 속에서 재일교포들 대부분이 더욱 이에 휩싸인다. 조총련 세력이 민단보다 훨씬 센 이유이다. 본래 좌파, 공산주의는 세상만사를 증오로 보게 하는 것이기에 재일교포들에게 부채질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관습과 예의가 제일인 일본인임에도 민족적 학대와 차별을 받는다고 한다. 사실 사람이 살다보면 흔히 느끼는 차별이 민족차별로 확대 해석된다. 이진희 교수의 책에 보면 1950년대 재일교포들은 취직, 취학하기 어렵기에 이것을 깨끗이 해결해 줄 북조선으로 가자며 자기 학급에 여학생 절반이 북송선을 탈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은 지나친 부정적인 사고의 발현이라고 본다. 1950년대 일본은 6·25 조선전쟁 특수효과로 고도 성장기에 들어설 때로서 직업이 모자랄 수 없다. 통계자료에 보면 1950년대 실업률은 1- 2%이다. 취학도 마찬가지이다. 조총련 산하의 조선학교 수준이 일본학교 수준이라고 볼 수 없기에 인정이 안 되었을 뿐이다. 현재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받은 의사 면허가 남한에서 허용이 안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민족차별로 추동한 것이 좌파적 사상인 것이다. 그래서 평등하고 취업과 취학하기 좋은 북한으로 갔다. 가보니 확실히 실업은 없다. 일본에 비하면 강제노동과 같은 수준에서 모두 무조건 배치하기 때문이다. 맨몸뚱이로 가도 되는 낙원이라더니 초보적 생활 필수품조차 귀하고 귀한 나라이다.

취학 면에서 좀 나은 면이 있다. 하지만 대학생활이란 항상 굶주림과 군대 같은 규율 속이다. 그럼에도 이것 하나가 가장 좋은 귀국자들이 혜택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대학을 나와도 장(長) 자리는 절대 주지 말라고 되어있다.

일본인들에게서 받은 견디기 어려운 민족차별? 귀국자들이 북한에 가니 동족에게 받는 차별은 비교할 수 없게 끔찍했다. 항일국가 북한에서 교육한 대로 항일의 눈앞 대리자가 귀국자였다. 쪽빠리, 째포 등의 차별은 감정만이 아니라 출세라는 정치적 신분 차별까지 있어 외계인처럼 취급된다. 결혼상대로 잡아서는 절대 안될 정도였다. 북한에 살았던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학구열이 높았던 딱 친구로서 만났던 재일교포 문영철(오사카), 송명철(지바현)에게는 하나같이 이쁘고 착하고 교양된 여동생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결혼할 여자로 절대 생각지 않았을 정도였다.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중죄인이 된 오귀성 - 수십 년간 몸 담았던 조총련이란 조직과 자식에게까지 외면당하게 된 그였지만 분명 지옥을 확인했고 그곳으로 떠민 자책감, 비열한 총련의 모함 등에 반발하여 자비로 책을 낸다. 그게 <낙원의 꿈은 깨어지고>이다. 2차 방북은 1960년 8월인데 책은 2년 후인 1962년 8월에 나온다. 그동안 근 10만 귀국자의 70%가 지옥의 땅으로 향했다. 그는 진실을 말하느라 안팎으로 외로워졌다. 술로 날을 보내다가 뇌출혈로 쓰러지기도 한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혁명이라는 1930년대의 조지 오웰 좌파 작가의 말이 새롭다.

조지 오웰도 좌파들의 공격에 외롭게 살았다. 저서도 인기가 없었다. 그러다 결핵으로 46세에 쓸쓸히 죽는다. 하지만 그의 책의 진실가치가 갈수록 증폭된다. 그는 현재 세계적 반공주의 작가이다. 오귀성도 72세에 뇌출혈로 사망한다. 하지만 그가 남긴 책은 갈수록 진가치가 드러났다. 하지만 그간 진실을 말하는 것이 단명할 만큼 어려웠다. 북한 같은 공산국가에서는 처형되거나 온 생을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져야 했다. 다행이도 일본이란 자유국가 내에 조총련이기에 그 정도였다. 진실을 말하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나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쁜 곳이란 나라나 단체나 개인이 해당된다.

오귀성의 딸과 사위는 오귀성과 절연한 지 10년 만에야 다시 만난다. 1972년 즉 아버지의 책 발간 꼭 10년 만에야 조총련을 탈퇴한다. 가장 가까운 사위와 딸이 10년 만에 재회할 정도이니 다른 귀국자들이야 더 말할 것 없는 사정인 것이다. 가장 비극은 행동까지 한 귀국자들이다. 오귀성 책이 1962년 나왔어도 1984년까지 북송선은 청진항으로 향했다. 진실을 깨닫는 기간이 재일동포들은 22년 걸린 것이다.

한편 이 책을 보고 안 가려고 가출까지 했다가 불가피하게 북한으로 간 귀국자가 있다. 탈북자로서 첫 법무사인 임윤미 어머니 박영숙 여사이다. 여사가 겪은 생활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다. 열 형제 중에 여덟 형제와 부모님까지 모시고 귀국하였지만 그 <락원>의 땅은 둘째, 셋째 오빠와 여사의 아들 전부인 첫째와 둘째를 정치범으로 사망, 그 충격으로 남편도 병으로 사망 - 이 한을 무엇으로 풀어야 할까. 그럼에도 탈북이란 하느님의 손길로 자유의 남한에 오셔 86세로 돌아가신 지 오늘이 49재 날이다. 청명한 하늘처럼 하늘나라에 가셔서 평안하시길 기원드린다. 남은 우리가 할 일은 이러한 한들을 기록하여 영원히 남기는 것이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나지 않도록.

세상은 넓은 것 같지만 좁다. 스모 선수로 44년간 일본 사신 김기주님을 형 동생하는 사이인데 마침 오귀성의 딸 오문자를 안다며 연계해 준다. 딸이라고 해도 80대이다. 남편 이진희 교수는 술·담배를 좋아해 폐암으로 사망, 생존해 있는 따님 오문자 님과 인터뷰하고 싶어 일본에 가려다 문헌작업부터 했다. 목적은 아버지의 진실을 아는데 얼마나 걸렸는가였다.

책으로 보니 10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 엎드려 재회했다. 그 심정을 책에 담았는데 <아버님, 죄송합니다!> 제목의 요란함에 비해 내용은 매우 빈약하였다. 나머지 내용들은 아버지와 관련없는 산문집이었다. 오히려 남편인 이진희 교수 책 <해협>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오귀성 장인과의 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구체적인 것은 아니다. 장인의 책이 나온 지 10년 후에 조총련과 체질이 안 맞아 조선대학 교수직을 사임한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장인과 10년 동안 절연한 것이 그렇게 북한방문 실정을 인정하기 싫어서였을까. 아니면 직업을 잃을까봐였을까.

따님 오문자 책에 근거하여 유추할 수는 있었다. 역사학자로서 학문 연구를 더 발전적으로 하기 위해 남편이 북한으로 귀국하려고 했다. 1963년경. 그러자 장인 오귀성은 딸에게 남편과 귀국선 타면 할복 자살하겠다며 말린다. 남편이 기어코 북송선 탄다면 이혼하라고 했고 따님도 그럴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오문자는 아버지 책이 나온 지 1년 만에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남편도 결국은 북송선을 타지 않았다. 이런 것을 보면 장인의 북한방문기를 내심 부인하지는 않았다고 유추된다. 직업이 조총련쪽에 있으니 살기 위해 있다가 자꾸 충돌이 일어나니 10년 만에야 조총련을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누구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생존을 위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문제는 진실을 위해 오귀성만큼 나서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따님과 사위가 아쉬운 것은 형식은 절연해도 내적으로는 인정하면서 아버지이자 장인 어른께 힘과 건강을 지켜드려야 했다는 것이다. 딸과 사위에게 받은 절연 상처가 가장 커서 술로 살다 뇌출혈이 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쉬운 점은 오귀성이 저렇게 외롭고 괴로워할 때 민단이나 대한민국 정부는 무엇을 했나이다. 오귀성을 내세우고 전국 순회강연시키며 옹호했다면 저렇게 단명했을까. 오귀성의 책을 조직적으로 정책적으로 널리 전파했더라면 귀국사업은 1965년 이전에 중단됐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누가 자기 운명을 거는 북한으로 가는 곳의 방문기를 안 읽어볼 수 있단 말이다. 그만큼 우익쪽은 진실을 가지고도 싸울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오귀성 일가의 책들이 절판되어 일반 도서관에서조차 볼 수가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반공선전의 특효란 뿔달린 빨갱이라는 식이 아니라 진실의 문서 전파였다.

오귀성의 딸과 사위가 조총련과 결별한 1972년부터 그 이후 1984년까지 12년간 북송선은 지속되었다. 또 재일교포들이 북조선의 진실을 완전히 알게 된 것은 24년간 걸렸다. 1959년 북송선이 출발하여 아무도 가지 않아 멈추어선 1984년까지. 진실을 아는 것이 이렇게 오래 걸려야 할까.

좀 길어져도 정의란 뭘까 유튜브에서 본 사례를 하나든다. 미국에 한 교수가 한 여학생을 강의 전에 이유없이 내쫓는다. 그리고 남은 학생들에게 정의가 뭔가고 묻는다. 구구절절 맞는 소리들을 한다. 하지만 교수는 아니라고 한다. 왜 이유없이 학생을 내쫓는 것을 보고도 가만 있느냐고 한다. 남의 일이 되어서 그렇다면 언젠가는 그 화가 당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필자도 이 책들을 재판하려고 하는 것은 작지만 그런 의미로 시간과 내 돈을 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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