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기자의 짧은 회고록

22대 총선 예측

1971년 2월1일부터 기자생활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만 53년, 누가 "기자로서 전성기는 언제였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금"이라고 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지난 22대 총선을 전후한 석 달 간 나는 조갑제TV(유튜브)에 약 400건의 선거관련 영상을 올렸고 조갑제닷컴엔 약 100건의 기사를, 월간조선엔 두 건의 기사를 썼다. 사전 여론조사가 도입된 1987년 12월 대선 이후 치러진 거의 모든 선거에서 나는 결과예측을 상당히 정확하게 해왔는데 이번 총선도 제대로 흐름을 짚었다고 자부한다.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의 이른바 의료개혁 드라이브로 지난 2월, 대통령·한동훈·국민의힘 지지율이 동반 상승할 때 상당수 언론과 전문가들은 국민의힘이 제1당이 될 것이고 과반수 의석 확보도 유력하다고 했지만 나는 의료개혁이 의료대란으로 변질될 것이란 전망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 3월2일엔 단정적으로 국힘당 참패를 예언했고 총선 본투표 열흘 전엔 재미 삼아 의석수를 예측하는 영상을 올렸다. "국힘당 최다 110석(실제는 108석), 민주당 최다 170석(실제는 171석)"이었다.

나는 지난 해 12월 초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면서 "이준석(李俊錫)은 침몰하는 보수의 구명정 역할을 할 것이다. 보수를 견제,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고, 보수를 재해석, 재구성하는 자극제가 될 것이다. 젊을 때의 YS를 연상시킨다"고 했다가 조선닷컴 댓글판에서 뭇매를 맞았다. 2000개가 넘는 글의 90% 이상이 비방이었다. 지난 총선을 통하여 나의 이 예측도 적중했다.

22대 총선의 최대 이변이자 최고의 역전극은 경기도 화성을(華城乙)에서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가 30%p나 뒤진 상태에서 선거운동을 시작, 당일 출구조사의 예측도 뒤엎고 당선된 사건일 것이다. 연고가 없는, 민주당의 전통적인 표밭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보낸 자객공천의 칼을 맞고, 그리하여 보수표가 분열된 상태에서, 1 대 2로 싸워 민주당 공영운 후보를 이긴 것이다.

4월11일 새벽 0시35분, 이준석 캠프에서 보낸 "역전승할 것 같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고 동탄에 있는 이준석 후보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쉰 목소리로 "이겼습니다. 사전투표에서도 선전했고 저에게 유리한 당일 투표가 개함되니 확실히 이깁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한 시간 후 그는 개표가 진행중인데도 기자들 앞에서 승리를 선언했다.

그의 선거운동은 교재로 삼을 만했다. 동탄지역의 문제들을 철저히 연구하여 맞춤형 공약을 만들어 이를 정성 들여 설명했다. 그가 손글씨로 쓴 12쪽 선거공보물은 논설교재로 수집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국힘당 한정민 후보를 사퇴시켜 단일화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는 좌고우면 하지 않고 정면 돌파했다. 유권자들에게 표를 구걸하지도 않았다. "이준석 덕분에 이곳이 유명해졌으니 저를 뽑아주시면 이곳의 문제를 잘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식이었다. 늘 웃음을 몰고 다니는 그의 유세 영상을 보면 아이들이 웃고 박수 치는 소리가 들린다. 개혁신당 당선자 3명은 전과가 없다. 전과자가 없는 유일한 정당이고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는 유일한 정당이다. 2027년 대선이 "이재명 vs. 이준석" 구도로 가면 세대교체와 정치교체가 주제가 되어 한국역사상 세번째로 40대 대통령이 등장할지 모른다는 예측도 해본다.

국민의힘 대패는, 2022년 여름 윤석열 대통령이 자신을 당선시키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던 이준석 대표를 몰아내는 통에 젊은층, 중도층, 온건 보수층이 이탈,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지면서 이미 예약되었다. 총선 직전에 나온 의대 2000명 증원 카드는 2년간 계속된 윤석열 판 내부총질의 마침표로서 약 100만의 의사 표를 적으로 돌리는 자살골이었다.



특종 욕심



나는 요사이 유튜브 영상을 하루에 서너 개 올린다. 휴대전화로 촬영과 편집, 광고유치, 수금까지 다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올린다. 차중(車中)에서도 커피숍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올린다. 속전속결(速戰速決)과 박리다매(薄利多賣)는 기자 생활 반세기를 관통한 생리이기도 하다. 기사를 빨리 많이 써보자, 그러면 그 안에 특종이 있을 것이다. 1단짜리를 많이 쓰다가 보면 머리기사도 따라올 것이다. 특종이나 홈런만 노리지 말고 평소에 열심히 하자. 루틴 체크, 크로스 체크, 팔로우 체크를 습관화하자 등등.

2017년 유튜브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구독자수는 현재 49만 6000, 지난 4월 조회수는 141만이다. 광고수입은 영업비밀인데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이다.

나는 부산 국제신보(뒤에 국제신문으로 改名)에서 수습기자로 출발한 이후 문화부·사회부 기자, 월간지 기자(마당, 월간조선), 편집장, 그리고 대표이사를 지냈다. 1999년 조갑제닷컴이란 인터넷 신문(출판사 겸업)을 열었고 유튜브까지 다양한 언론경험을 하면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흥미진진한 구경 아닌 기행(紀行)을 하고 있다. 구경꾼은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 돈까지 벌면서 즐기니 나는 정말 행운아다.

기자로서 조갑제(趙甲濟)가 생산성이 매우 높다는 데 대해선 동의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지난 54년 간 기사형식의 글을 가장 많이 쓴 기자, 넌픽션 류의 책을 가장 많이 쓴 저자(著者), 지난 7년 간으로 한정하면 가장 많은 시사성 영상을 올린 유튜버일 것이다. 가장 여러 번 해직된 기자이기도 하다(세 번 해직되고 세 번 복귀). 나더러 특종을 많이 한 기자라고 하는 이도 있는데 이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쓴 기사와 발굴한 자료가 한국현대사를 학문적으로 연구할 때 많이 참고가 될 것임은 확실하다.

이런 생산성은 어디서 나왔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나는 "특종욕심, 그리고 호기심과 재미"라고 답한다. 아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에서, 좋아하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에서 더 많은 힘이 생긴다고 한다. 특종에서 오는 쾌감에 둔감해질 때 기자로서 생명이 끝날 것이다. 낙종(落種)의 스트레스를 면하기 위하여 악착같이 취재하다가 특종을 얻기도 하지만 나는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낙종을 한 적이 없다. 이는 실력이 아니라 행운이었다.

특종의 정의(定義)는 시대에 따라 다소 다르긴 하지만 "새로운 것"과 "처음"이란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신기한 이야기와 자료를 찾아내고, 사물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것에서 비상한 의미를 발견하는 자세, 무엇보다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는 것들이 다 특종이 아닌가?



포항석유 소동, 그리고 1차 해직



나는 1971년 부산의 국제신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특종을 하려면 이른바 ‘나와바리’(출입처를 뜻하는 일본어) 의식을 넘어서야 한다고 작심했다. 수습기자 교육을 받은 뒤 먼저 배치된 곳이 문화부였다. 편집국 중에서 가장 조용하고 고상한 곳이 문화부인데 나는 "문화"의 뜻을 넓게 해석했다. 청소년 마약 중독 문제를 학술적으로 취재하는 게 문화부식 접근법이라면 나는 사회부식으로 접근했다. 그러다가 부산 동부 경찰서 옆 골목의 대마초 밀매 노점상을 알아냈다. 내가 대마초를 사는 사진을 뒤에서 찍게 하여 사회면 머리 기사로 썼더니 그 경찰서 출입 기자가 기분 나빠 했다.

1972년부터 외국 석유개발 회사들이 부산과 진해에 기지를 두고 동해·서해에서 대륙붕 시추를 시작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세계를 뒤흔든 석유파동이 밀려오자 산유국의 꿈은 더욱 절실해졌다. "석유 발견"이란 특종보다 더 큰 기사가 있을까? 그때부터 나는 로열 더치 셀의 석유기지를 취재대상으로 삼아 어느새 "석유기자"로 불리게 되었다.

이 길의 연장선에서 1976년 포항 석유 소동이 있었다. 그해 1월15일 박정희 대통령은 포항에서 양질의 석유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는데 나는 회의적이었다. 석유시추 현장을 4년간 취재하여 상당한 전문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던 나는 포항의 그 지층, 그 깊이에선 유징(油徵) 정도면 모를까 경제성 있는 유전(油田)은 존재 불가능이라고 판단했다. 이를 기사로 쓰려고 했더니(당시는 사회부 기자) 위장회사를 만들어 포항 시추를 지휘하던 중앙정보부에서 언론사에 함구령(緘口令)을 내려놓고 있었다. 나만 아는 비밀을 안고 가자니 억울하기도 하고 아는 체하고 싶기도 하여 나는 사비(私費)로 "한국의 석유개발"이란 제목의 소책자를 만들어 주요 언론 및 정부기관에 보냈다.

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이 이 보고서를 인용, 외신면 머리 기사로 "포항 석유 경제성 의문"이란 요지의 기사를 실었다. 나는 정보부 부산 지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은 뒤 사표를 강요 받고 실직자가 되었다. 1976년 6월의 일이었다. 아내가 같은 신문사 조사부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부모님이 충격을 받을까 출근할 때는 같이 나와서 나는 천마총 발굴 취재로 정이 든 경주에 가서 놀다가 오곤 했다.

한 달 뒤부터는 원고료를 목표로 삼아 월간중앙에 긴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부산의 동족부락 연구, 포경(捕鯨) 이야기, 북양(北洋) 개척, 부산항 이야기 등을 쓰면서 잡지 글쓰기에 재미를 붙였다. 그러면서 동양통신의 경력기자 모집에 응시했더니 정보부가 취직을 가로 막았다.

그해 가을 부산 사상 지역에서 세계최대의 신발공장을 운영하던 국제상사 경력사원 모집시험에 합격, 기획실에서 약 10개월 근무했다. 기자들 이상으로 밤낮 없이 뛰는 수출전선의 대기업 엘리트들을 존경하게 되었고, 기자생활만 했으면 알 수 없는 종합상사의 내면도 들여다 볼 수 있어 그 뒤 언론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김재규(金載圭)가 정보부장으로 부임한 후 그쪽에서 연락이 왔다.

"부장도 바뀌었고 모른 척할 터이니 복직할려면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사회부로 복직했다. 포항 석유 대소동엔 후일담이 있다. 서울에 올라와 월간조선에서 근무하면서 친해졌던 오원철(吳源哲) 당시 중화학공업 담당 비서가 기막힌 비화를 털어놓는 것이었다. 정보부가 포항에서 유리 병에 담아와서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석유를 울산 정유 공장에 맡겨 분석을 시켰더니 "이건 땅속에서 나온 원유가 아니고 정유공장에서 나온 정유(精油)인데 아마도 땅속으로 스며든 것을 캐낸 것 같다"는 보고가 올라왔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 보고를 받고도 신년 기자회견에서 그런 발표를 했다. 그 발표에 의문을 가졌던 기자는 졸지에 실직자가 된 사건이지만 한 세대가 지난 "연착한 진실"엔 실소(失笑)할 수밖에 없었다. 이 건으로 나를 조사했던 정보부 부산 지부의 정보과장은 10·26 사건 때 궁정동에서 확인사살을 지휘했던 박선호(해병대 장교 출신, 정보부 의전과장)이었다. 1979년 10월27일 새벽 경찰서에 내려온 수배령에 낯익은 사진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문화재 발굴, 중금속 오염



1971~75년 사이의 문화부 기자 생활을 통하여 나는 문화재 전문 기자 "공해전문 기자"로도 불렸다. 1973년부터 경주에서 제155분(천마총) 및 제98호분(황남대총) 발굴이 시작되었다. 한국일보가 금관 발굴, 조선일보가 천마도 발굴 특종을 했는데 나는 155호분의 탄소연대 측정 결과 특종을 했다. 신라 고분은 태종무열왕능을 빼면 무덤의 주인공을 확정하기 어렵다. 원자력연구소가 목관(木棺) 파편을 분석했더니 서기 270~410년 사이로 나왔다. 목관에 쓴 나무의 나이를 감안하면 무덤이 조성된 것은 이 연도보다 뒤일 것이다. 학계는 新羅라는 국호를 만든 지증왕을 피장자(被葬者)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 팀은, 천마총에서 출토된 부장품들을 펼쳐 놓고 기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온통 황금 빛이었다. 금관은 일제 때 수습한 금관총 금관(金冠)과 다른 모습이었다. 금관과 관모(冠帽)가 일식(一式)이 아니고 분리된 채 발굴되었던 것이다. 이 모순점을 지적하는 기사를 맨 처음 썼는데, 나중에 분리형으로 확정되었다.

이 발굴을 계기로 나는 신라 탐구를 필생의 여흥(餘興)으로 삼게 되었다. 삼국 통일의 세 영웅(김춘추, 김유신, 김법민) 덕분에 한민족(韓民族)은 최초의 민족통일 국가를 세우고 약 300년간 세계 일류국가를 경험했다. 대당(對唐)결전을 통해서 보여준 무서운 주체성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저수지였다.

서기 전 4~6세기의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는 西로마 지역에서 만들었던 유리잔 등이 많이 발굴되었다. 신라 지배층이 한족(漢族)을 우습게 알았던 북방 기마민족(흉노) 출신이란 점을 뒷받침한다. 20년 전 일본에서 "다나카의 금맥과 인맥"이란 기사로 현직 수상을 몰락시킨 평론가 다치바나(故人) 씨를 만났는데 나에게 "로마문화왕국신라"라는 책을 권하는 것이었다. 유명 유리 공예가 요시미즈 츠네오 씨가 쓴 책인데 초원의 길을 통한 로마와 신라의 문물 교류를 추적한 역작이었다. 그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보여준 놀라운 자주성의 근원을, 신라 지배 민족이 북방 초원을 누비던 기마민족이란 점에서 찾고 있었다.

1974년 나는 "중금속 오염 시리즈 보도"로 한국 기자협회 제정 제7회 한국 기자상(취재부문)을 받았다. 스물아홉에 4년 차 지방지 기자가 상을 받았으니 그야말로 가문(家門)의 영광이었다. 덕분에 이듬해 봄 최초의 해외여행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일본어는 고등학교 때 읽는 것을 배웠고, 말하는 것은 공군에 근무하면서 자위대와 연락할 때, 영어 독해(讀解)는 메이저 야구 잡지 난독(亂讀)을 통하여, 듣기는 미군의 야구 중계방송을 들으며, 말하기는 같이 근무하는 미군을 상대로 하여 배웠다. 군대에서 많은 것을 배운 경우라 나에겐 군대(軍大)이다. 중금속 오염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부산 수산대 원종훈 교수의 근해 오염도 조사 논문을 인용, 보도했는데 문교부에서 이를 문제 삼아 원 교수 징계를 요구하고 양재목 학장이 대신 그만두는 사단도 벌어졌다.



토막 살인



부산은 정보가 부족한 곳이라 매일 관보(官報)를 읽고 대학 도서관에 자주 들러 새로 나온 논문에서 기사 거리를 찾곤 했다. 1979년 5월 관보(官報) 특종을 한 적이 있다. 수산청 고시가 나왔는데 마산만에서 어패류 채취를 금지한다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사유는 없었다. 오전 11시 쯤이었다. 가판 마감 시작 직전이라 전화로 기사부터 먼저 부르면서 수질오염 때문이라고 단정했는데 신문이 나온 뒤 확인하니 맞았다.

나는 부산의 서부경찰서와 부산진 경찰서를 출입했다. 1979년 초 나의 관내(서구)에서 그 뒤 유행이 되는 토막살인 사건이 났다. 토막 낸 시신(屍身)을 비닐 포대에 넣어 길가에 버린 것을 발견한 경찰이 파출소에 갖다 놓았다. 내가 맨 먼저 현장에 도착, 시신 토막을 손으로 확인했는데 지문을 없애려고 열 손가락 마디를 깎은 채였다. 그때 사회부 기자들은 시신 상태나 범행 수법을 자세히 묘사하는 것이 충실한 기사쓰기인 것처럼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썼다. 그 몇 달 뒤 동래경찰서 관내에서 토막 난 여성 시신이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현장에 달려가니 시신(屍身)을 싸 버린 신문지에 내가 쓴 기사가 보였다.

1979년 10월16일 내가 출입하던 부산진 경찰서에 비상이 걸렸다. 부산대학교 안에서 발생한 시위가 교정 바깥으로 확산,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병력이 출동하는 것이었다. 유신체제에 길들여진 기자들은 이런 시위는 취재해도 쓸 수 없다고 체념, 스스로 구경꾼 자세를 취했다. 부산대학생들은 부가가치세 신고기간이라 상인들의 불만이 쌓이고 있던 번화가 광복동 남포동으로 진출, 시위를 이어갔다. 시민들이 박수 치고 음료수를 사주는 등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그 열흘 전 부산 출신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총재가 뉴욕타임스 회견 발언으로 국회에서 제명된 것이 민심을 자극해놓은 상태였다. 오후 늦게 회사로 들어가니 내근 기자들은 시민들의 항의전화 받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왜 기사를 쓰지 않는가"란 독자들의 불평에 할 말이 없었다. 그날 밤 시위는 격화되었다.



부마사태의 현장에서



밤 9시경, 남포동 거리에서는 내가 출입하던 부산진 경찰서 진압차량 행렬이 교통체증에 걸려 멈춰 있는데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다. 군중이 몰려오자 경찰관들이 차를 버리고 달아났다. 시위대는 기동순찰차(포니)를 뒤집고 새어나온 기름에 불을 붙였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부산 1가 1163호 포니는 불길에 휩싸였다. 이무영 경비과장(뒤에 경찰청장 역임)은 이 불길이 뒤에 서 있는 두 대의 작전차에 옮겨 붙을 것 같아 부하 서른 명을 향해서 "나를 따르라"고 외치면서 차를 향해 뛰었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그가 혼자 운전석에 올라 차를 빼려고 하는데 시위대에 포위되었다. 그들은 운전석 유리창을 깨고 각목으로 들쑤셔 댔다. 흥분한 군중이 작전차를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뒤집을 것 같았다. 한 마흔 된 듯한 남자가 유리창을 두드리면서 "내가 책임질 테니 나오시오"라고 했다.

"정말 나를 살려주시겠습니까."

"안심하고 빨리 나와요. 차가 넘어갑니다."

이(李) 경정은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남자가 그를 품으로 안다시피하여 구석으로 끌고 갔다. 모자와 웃옷을 벗겼다. 러닝 셔츠 바람이 된 이 경정은 길 건너편으로 뛰면서 어깨 너머로 작전차가 "펑" 소리와 함께 불타오르는 것을 봐야 했다.

부산진경찰서 소속 부산 7가 1335호 작전차가 불타는 그 순간 나는 가까운 육교 밑에 있었다. 그 장면을 기사로 쓰지는 못했고 그 8년 뒤인 1987년에 펴낸 책 "有故"에 이렇게 기록했다.

<불길은 30m쯤 올라갔다. 사방이 환해졌다. 최루탄 쏘는 폭음이 빵빵 울렸다.

"우-" 데모 군중이 몰려가는 소리,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 비명, 폭음, 불길이 한데 엉켰다. 한 폭 역사화의 민중봉기 장면이었다. 암흑의 도심지에서 치솟은 불길은 극적인 효과를 몰고 왔다. 그것은 몇 시간 전만 해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태였다. 부산대학의 데모, 울타리를 뛰어넘은 데모, 중심 시가지로 데모 확산, 야간 데모… 모두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으며 구경꾼이나 참여자들을 다 같이 놀라게 한 잇따른 사태 전개는 이 순간에 와서 클라이맥스를 연출한 것이다.

"이란의 시가전이 이랬을 거다."

나와 함께 데모 현장을 쫓아다니고 있던 국제신문 이철호 부국장이 말했다. 4·19를 취재했던 그는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하다. 적어도 내일은 위수령이다"고 했다. 이 불길이 데모대에 미친 심리적 효과는 컸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잊게 되었다. 조금은 신들린 기분에 휩싸였고 난폭해졌다.>



사진이 없는 부마사태



한국의 현대사는 이 순간을 기점(基点)으로 하여 격동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든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쇄작용이 일어난다. 10월18일 부산지역 비상계엄령, 20일 마산에 위수령, 그리고 10월26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해, 권력의 진공을 메우면서 정규 육사 출신들이 밀고들어온 12·12 사건, 짧았던 "서울의 봄",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가 공식화된 5·17 계엄전국확대, 그리고 5·18 광주사태. 부마사태에서 광주사태까지의 숨막히는 7개월의 현대사는 내가 쓰고 발굴한 자료 없이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210여일의 이 드라마는 한국 현대사 30년을 결정했다. 18년의 박정희 통치를 끝내고 13년의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시대를 열었으며 그 여진(餘震)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이 기간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역할도 했다. 부마사태를 취재하던 기자는 광주사태 뒤엔 실직자가 되어 있었다. 역사적 사건이 개인의 생애를 바꿔놓는 좋은 사례이다. 부마사태가 없었더라면 나는 부산에서 기자생활을 계속했을지도 모른다.

한국 언론사에서 부마사태는 시위현장 보도사진이 거의 없는 유일한 경우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학생들이 찍었고 내가 월간조선에서 공개한 두 장의 시위사진 외엔 사진기자가 찍은 시위 사진은 없다. 당시 부산의 기자들은 취재해봐야 기사를 쓸 수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하여 초동대응을 거의 하지 않았다. 사진부 기자들은 밤에 현장에 나갔으나 플래시를 터트렸다간 군중 속에서 봉변을 당할 처지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시위대는 기자들에게 적대적이었다.





역사적 實錄에 대한 확신



부마사태의 역사적 의미를 깨달은 것은 1979년 10월27일 새벽이었다. 나는 살인사건 현장에서 경찰로부터 비상발령과 대통령 유고 소식을 접했다. 부마사태가 이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원인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때는 김재규가 18일 새벽 부산에 와서 시위현장을 둘러보고 "이건 민란이다"고 판단, 서울에 돌아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사실, 부마사태의 원인과 대책을 놓고 권력 심장부에서 갈등이 커졌다는 사실, 궁정동 만찬에서도 부마사태를 놓고 차지철이 김재규를 자극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10일 전 시위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감은 확실히 왔다. 그래서 나의 부마사태 취재는 시작되었다. 광주사태 현장 취재 직후 신문사에서 밀려난 1980년 5월 말까지 집중적인 취재가 이뤄졌다.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이 "서울의 봄"을 경쟁하고 있을 무렵, 계엄 하이지만 언론의 자유가 상당히 허용되고 있을 무렵이라 취재도 수월해졌다. 부마사태에 참여한 학생, 운동가들도 적극적으로 응해주었다. 경찰을 출입하고 있었으니 시위 진압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었다. 관훈클럽 신영기금의 저술 지원도 받았다. 12·12 사건 이후 군부의 동향은 불투명해졌지만 민주화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신나는 취재가 쌓여갔다. 시위는 넓은 지역에서 이뤄지므로 다른 기자들의 취재 노트도 많이 들여다 봐야 했다. 시위에 이른 과정과 주동자의 인맥과 조건의 성숙, 그리고 시위 현장을 다각도로, 입체적으로 구성하기 시작했다. 역사적 실록(實錄)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광주에 갔다 와서 두번째 해직



광주사태가 났을 때 광주의 한 신문사에 전화를 거니 기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마사태 있잖아요. 여기도 똑같습니다. 공수부대가 잔인하게…"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출동한 공수여단이 시위대가 아닌 일반시민과 경찰관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것이 퍼뜩 생각 났다. 나는 회사엔 병가(病暇)를 신청해놓곤 광주로 갔다. 시민군이 광주를 장악한 이후인 5월23일부터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탈환한 27일까지 5일간 머물면서 취재한 몇 안 되는 경상도 기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 경험은 광주와 관련된 거짓과 진실을 수집하고 판별하는 데 기초적인 현장감을 제공했다. 그 후 월간조선에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등 여러 편의 기사와 책을 쓰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광주사태를 취재하고 회사로 돌아온 직후 나는 사표를 썼다. 의원해임 형식이었다. 회사는 병가(病暇)를 냈으면 병원에 가야지 왜 광주에 갔느냐는 이유를 댔다. 국보위가 주도하는 살벌한 시국(時局)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해 가을 언론통폐합으로 국제신문은 부산일보에 합병되었고 해직기자 명단이 내려왔다. 퇴직한 내 이름도 있었다. 일종의 확인 사살이었다. 포항 석유 보도로 해직된 이후 두 번째로 받은 언론사 취업금지령인 셈이었다. 1976년 때처럼 나는 생계를 위하여 글을 써야 했다. 내가 자주 글을 썼던 월간중앙은 신군부 등장과 함께 폐간되었고, 월간조선과 신동아에 긴 기사를 써 원고료를 받았다. 취재해둔 부마사태 자료를 정리하여 책 분량으로 만들고, 이를 관훈클럽신영기금에 제출, 저술 지원금도 받았으나 출판은 당분간 단념해야 했다(1987년 6·29 선언 직후 한길사에서 "有故"란 제목으로 출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이듬해, 월간중앙에 글을 쓸 때부터 알고 지낸 허술(許鉥) 씨가 전화를 걸어 와 새 잡지를 만드는 데 참여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도 해직된 상태였다. "마당"은 1981년 9월호가 창간호인데 나는 취재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편집인은 허술, 편집부장은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 이종욱(李鍾郁), 이 잡지에 고정적으로 긴 글을 썼던 오효진(吳効鎭) 씨는 MBC에서 해직된 기자였다. 해직 기자들에게 신문 방송 통신사 복귀는 허용하지 않았지만 잡지사 근무는 눈감아 주던 시절이었다. 그 2년 뒤 나는 월간조선 부장으로 옮긴 허술 씨의 권유로 월간조선 기자가 되었다.

"마당" 잡지는 판형이 여성지 만큼 넓고 사진을 크게 썼다. 미술부장은 나중에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는 안상수(홍익대학 교수 역임)·조의환(조선일보 아트디렉터)씨였다. "뿌리깊은나무" 등 여러 잡지가 폐간된 뒤에 창간된 잡지라 관심을 끌었다. 요사이 40년 전 "마당"을 다시 펼쳐 보면서 세련된 편집방향에 감탄하기도 한다. 한국 잡지 역사를 쓸 때 꼭 기억해야 할 名편집장 허술 씨의 안목이 스며 있는 독창적인 잡지였다. 치밀한 심층 기사, 사진은 크게, 시원한 디자인, 표기는 한글전용이었다(나중에 나는 한글전용 반대론자로 바뀐다).

취재와 집필에 시간과 지면이 많이 주어지는 잡지는 내 취향과 딱 맞았다. 그런 장점을 살려 나는 부산에서 사회부 기자로 있을 때부터 벼르고 있었던 소재를 연재했다.

시리즈 제목은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1967년 부산에서 있었던 김근하 군 살해사건의 공소시효(15년)가 끝나가는 것에 맞춰 쓴 글이었다. 한 번은 경찰에 의하여, 두 번째는 검사에 의하여 범인 체포가 발표되었으나 모두 무혐의와 무죄로 끝났고 그 과정에서 무지막지한 고문과 조작이 자행되었는데 그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는 취재였다. 살인범으로 몰려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2심에서 무죄선고로 풀려났으나 망가진 몸에다가 "그래도 수상하다"는 주위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폐인이 되어 일찍 죽은 김기철 씨가 주인공이었다. 이 기사는 1982년에 극작가 윤대성 씨에 의하여 "신화 1900"이란 연극(극장 실험극장)이 되었고 백상예술대상을 받았다. MBC의 실화 드라마로도 상영되었다. 나는 연재 기사를 보완하여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라는 책으로도 냈다. 후배 기자들에게는 이 기사를,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말하곤 한다.

1980년대에 들어 고문과 조작은 내가 물고 늘어지는 주제가 되었다. 1970년대 경찰서에선 기자들이 드나드는 데도 용의자들을 공공연하게 고문하곤 했다. 형사들이 물주전자를 들고 다니는 걸 보고도 기자들은 절도범이나 소매치기 등이니 눈감아 주자는 분위기였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 민주화 흐름과 함께 수사기관의 고문 풍조에 언론이 집중조명을 하게 된다. 1987년에 대폭발하는 민주화의 에너지는 상당 부분 고문에 대한 국민적 분노였다. 고문은 오판(誤判)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사형장에서 "나는 억울하게 죽는다. 원혼이 되어서라도 원수를 갚겠다"는 유언을 남긴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를 취재하여 기사도 쓰고 책으로도 냈다. 1986년에 나온 이 책은 지금까지도 법학도들의 관심을 모은다. 10여 년 전 이수근 관련 사건의 재심 법정에 증인으로 나간 적이 있는데 재판장이 본안 질문을 미루고 내 책에 대하여 이모저모 묻기도 하였다. 1989년 3월호 월간조선에 쓴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가 계기가 되어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재심을 권고했고,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수근은 이미 사형되었고 종범으로 징역 20년을 살고 나온 조카 배경옥 씨의 무죄가 확정된 것이었다.

지금도 70대 이상에선 이수근 하면 "가짜 수염 달고 탈출했다가 붙잡혀 온 2중 간첩"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1986년, 월남에 억류되었다가 5년만에 돌아온 이대용 전 월남대사관 공사를 만나 다른 취재를 할 때 그가 불쑥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조 기자는 이수근이 간첩이라고 생각하죠?"

"물론이지요. 나쁜 놈 아닙니까?"

"그래요? 여기에 써 둔 게 있는데 언젠가는 내가…"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



1987년을 계기로 언론자유가 만개할 때 나는 이대용 장군을 다시 찾아갔고 그는 일기장을 들고 나와 자신이 사이공 공항에 착륙한 여객기로 들어가 직접 끌어내린 이수근과 나눈 대화 기록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1967~69년 무렵 이수근을 관리했던 정보부 요원들을 두루 만나고 황장엽 등 고위 탈북자들을 취재하여 내린 결론도 "간첩이 아니었다"였다. 10여 년 전 국정원에 갔더니 이수근을 간첩으로 기록한 전시관이 있어 지적한 적도 있다. 당시 정보부는 언론인 특유의 활달하고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 이수근을 가혹하게 다루었고 이것이 그의 탈출로 이어졌는데, 김형욱 정보부장은 자신의 실수를 덮기 위하여 위장간첩 사건으로 조작했던 것이다. 나는 이수근 사건의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벌어진 불법을 폭로했고, 종범 배경옥 씨가 20년 수감 생활을 끝내고 출소하면서 취재는 더욱 입체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수근 사건이 재심에서 무죄로 확정된 것은 40년이 흐른 뒤였고 지금도 그를 이중간첩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일단 경찰 검찰 법원 언론에 의하여 범인으로 찍혔던 이들은 무고함이 밝혀져도 평생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난 직후 나는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라는 책을 한길사에서 급히 펴냈다. 그 동안 쓴 기사와 모아둔 자료를 후다닥 합친 책인데 여기에 "조선인 출신 고등계 형사와 헌병들의 그후"란 장(章)이 있다. 독립운동가나 사상범을 전담했다가 해방된 뒤에도 경찰과 정보부 등에서 근무한 고문 기술자들의 인맥을 정리한 자료이다. 살아 있는 친일 경찰관들을 두루 만나 조사한 보고서로는 유일한 기록일 것이다. 1960년 4·19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게 되는 데는 마산 앞 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신(屍身) 사진(부산일보 특종)이 준 충격이 컸다. 마산 경찰서장의 지시를 받아,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죽은 소년을 바다에 던진 경비주임은 일본 헌병 출신이었다.

우리 시대 기자들의 가장 위대한 집단적 성취 중 하나는, 불과 20년 만에, 수사기관에서 수백년 이상 이어져오던 고문의 전통을 끊어버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점이 아닐까?

1984년 나는 항공기 및 자동차 안전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룬 기사를 월간조선에 썼다. 대항항공의 잇딴 사고를 심층취재한 "KAL에 칼을 댄다"와 "한국 자동차, 알고는 못 탄다"였다. 공군 레이더 사이트에서 요격관제병으로 근무한 경험이 비행기 사고 취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조종사들과 기술적 소통이 가능했던 덕분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자동차 운전은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자동차 부품과 작동에 대하여 아는 체하는 글을 썼더니 운수부에서 가끔 전화를 걸어 왔다.

"취재차가 고장 났는데 좀 봐주시겠어요?"





KAL 007편 점보는 INS를 끄고 나침반 비행을 했다!





지금도 대한항공에선 나를 항공사고 전문 기자 비슷하게 여긴다. 1983년 9월1일 새벽 소련령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요격기에 의하여 격추된 KAL 007편 점보기엔 269명의 승객 및 승무원이 타고 있었고 항로를 크게 이탈한 상태였다. 미국인들도 수십 명이 사망하여 미소(美蘇) 간에 일촉즉발의 긴장이 조성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 요격기 조종사가 관제사와 주고 받는 대화를 일본 자위대가 녹음한 것을 공개하도록 하여 고의적으로 민항기를 격추했다고 규탄했고 소련은 KAL기가 스파이 임무를 띠고 침투했다고 선전했다.

가장 큰 쟁점은 왜 KAL기가 항로를 이렇게나 크게 이탈했느냐는 것이었다. 1986년 12월호 월간조선 "KAL 007, 최후의 목격자"에서 나는 대담한 추론을 냈다. 007편의 조종사 천병인 기장은 관성항법 장치(INS)를 끄고 나침반에 의존하는 비행을 하였다. 기상 레이더에 비친 섬과 해안선 위치가 정상항로에서 잡히는 것과 거의 비슷하여 격추될 때까지 자신이 정상비행을 하고 있다고 착각했다는 요지였다. 이런 생각은 007편보다 14분 뒤에 앵커리지 공항을 이륙, 김포로 비행하면서 천 기장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던 015편 박용만 기장의 추론이기도 했다. 이 기사는 국제적으로 주목 받았는데 1993년에 사실로 확인되었다. 소련이 해저에서 회수한 007편의 블랙 박스를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분석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007편은 INS를 끄고 나침반으로 비행하였고, 격추될 때까지 조종실의 3명은 아무런 동요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대한항공은 부품을 아끼려고 비행기가 순항 고도에 들어가면 로고가 그려져 있는 뒷날개 조명등을 끄고 운영하도록 했었다. 만약 조명등을 켜놓았더라면 소련 전투기 조종사는 지상 관제사에 "대한항공기다"라고 보고하여 격추명령이 내리지 않도록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2003년 11월호 월간조선엔 정병선(鄭昺善)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이 KAL기를 격추했던 소련 공군 조종사 겐나디 오시포비치를 인터뷰한 장문의 기사가 실렸다. 내가 궁금하게 생각했던 부분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KAL기에 접근하였을 때 점멸등이 깜박거리는 게 보였다. 주위는 어두웠고 비행기 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점멸등은 여객기나 화물기에 붙어 있는 것이지만 당시엔 미군 정찰기가 수도 없이 출몰하던 때라서 여객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조명탄을 250발이나 쏘았는데도 비행기는 반응하지 않았다."

로고 스폿 라이트라고 불리는 조명등이 켜져 있었으면 KAL기의 태극 마크가 환하게 비쳐졌을 것이다. 그래도 쏘았을까, 하는 의문은 지금도 남는다.

이 무렵 한국 언론엔 "탐사 보도"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나는 "Investigative Reporting"이란 원어(原語)에 충실하게 "수사식 보도"라고 하는 게 맞다고 본다. 사실이나 의견의 단순 전달자에 머물지 않고 단편적 사실들을 입체적으로 구성, 진실을 파악하겠다는 접근법은 범인을 추적하는 수사관의 자세이기도 하다. "마당"의 모토는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아는 잡지"였다.



무대가 바뀌니 역사를 만나다



1981년부터 서울에서 기자생활을 하게 되어 활동무대가 바뀜에 따라 나는 역사와 만나게 되었다. 부산은 정보가 부족한데 서울은 정보가 넘치고, 1983년부터는 조선일보 기자라는 간판까지 갖게 됨으로 그야말로 날개를 단 셈이 되었다. 뒤돌아보면 지방기자에서 중앙기자로, 신문기자에서 잡지기자로 변신한 것이 이상적인 경력 쌓기란 생각도 한다. 정보와 지면과 마감시간의 소중함을 먼저 알게 되면 이를 아끼게 되니까.

나는 국민학교 때부터 신문을 정독했고(저절로 漢字를 읽게 되었다), 헌 책방에서 매일 역사소설을 빌어 읽으면서 재미를 느꼈다. 어떻게 하여 역사의 기록자인 기자가 되다가 보니 천직(天職)이란 생각이 들었다. "직장은 바꿀지 몰라도 직업은 안 바꾼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월간조선의 광고문안은 "역사를 기록하며 역사를 만들어 가는 잡지(기자)"인데, 그렇게 현대사의 대사건과 만나고 이를 깊게 들여다 보는 데는 700페이지나 되는 월간지가 딱이었다. 나는 기자라는 특혜를 누리며 한국 드라마의 가장 좋은 관중석을 차지했고, 비싼 입장료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흥미진진한 구경을 한 대가로 월급까지 받고 살았으니 이런 행운이 없다. 조선조적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가 사회 여러 분야에서 살아 있는 덕분에, 기자는, 검사, 판사, 학자, 지식인과 더불어 현대판 사(士)에 속하는데 그래서 내 능력에 비해서 과분한 대우를 받기도 했다.

취재를 하고 글을 쓰면서 늘 역사성을 의식한 면도 있지만 역사의 흐름을 읽고 변화를 감지하고 결정적 순간에 그 자리에 있게 되는 행운이 따라주었다. 부마사태, 광주사태, 2·12 총선, 1987년 6월 사태, 서울올림픽, 1987년 대통령 선거, 김현희와 대한항공 폭파사건, 전두환 격하, 5공 청문회, 탈북자 사태, 북한 강제수용소, 북핵문제, 라빈 수상 암살 사건(암살 하루 전 최후의 인터뷰), 외환위기, 김대중 정권의 대북(對北)불법 송금 사건, 아스팔트 우파의 등장, 이명박과 BBK 사건, 세월호 사고와 해경해체,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박근혜 탄핵, 문재인 정권의 국정원 수사, 현재 진행중인 의료대란 등은 리얼타임에 취재, 기사화한 경우이다. 10·26 사건, 12·12 사건, 전두환 집권과정, 6·29 선언의 진짜 내막, 김영삼, 김대중 비자금, 박정희 생애의 비밀, 맥아더의 음모, 미국의 이승만 제거계획, KAL 007 격추 사건 등은 사후 취재로 비화를 발굴하거나 재구성한 사건들이다.





정치秘話로 판매부수 폭증



1983년 내가 월간조선에 들어갔을 때 한국 잡지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모색되고 있었다. 중앙일보 해직 기자 출신으로 "마당"(월간지)의 편집인이었던 허술(許鉥) 씨가 월간조선 부장이 된 뒤 제작과정을 전산사식(寫植) 시스템으로 바꿔 원고마감과 인쇄 사이 시간을 단축시킨 데 이어 박정희 시절의 흥미진진한 비화(秘話)를 발굴, 기사화하기 시작하면서 판매부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신문과 방송은,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제로 김영삼의 목숨 건 단식조차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있던 때라 월간조선이 개척한 박정희 시절 정치 비화(秘話)는 일종의 대리 만족이 되어 대중의 관심을 끌고 판매부수의 폭증을 불렀다. 1983년 11월호에 실린 "숙명의 라이벌 JP와 HR(필자 이영석)"이 효시였다. 허술 부장은 나와 오효진 씨를 영입하여 심층취재를 맡겼다. 조선일보 김대중(金大中) 정치부장이 출판국장으로 온 이후엔 모든 월간조선 기자는 적어도 월(月) 한 건 이상의 기사를 쓰도록 했다. 일본 ‘문예춘추’(文藝春秋)를 모델로 삼은 한국의 월간잡지 기자들의 주 임무는 기획과 원고청탁이었고 태반의 기사가 기고문과 평론이었다. 월간지 기자가 직접 취재에 나서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이 체제를 부순 이가 허술, 김대중 씨였다. 그런 변혁으로 판매부수가 늘어나니 다른 시사잡지들도 따라왔다.

이승만 박정희 시절의 정치비화도 시국의 추이에 따라 점점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김창룡 암살 사건"이나 "안두희 인터뷰" "미국의 이승만 제거계획" 같은 과거완료형의 기사는 안기부나 문공부 홍보조정실의 개입으로부터 멀리 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나 군부, 정보부, 김형욱 실종 사건으로 다가가면 언론통제 부서에선 예민하게 반응했고 부마사태나 10·26은 금지선이었으며 12·12 사건은 전두환 정권 성립의 계기였으므로 엄두도 못 낼 때였다.



1984년에 나의 숙원사업 중 하나인 포항 석유의 비밀을 기사화 했더니 안기부가 개입, 몇 줄을 뺐다. 당시 월간조선 기자들에겐 기사 편집을 다 끝내고 인쇄소로 넘긴 뒤 책이 인쇄되어 나올 때까지의 2, 3일간이 초조하였다. 아무리 보안을 해도 거의 어김 없이 안기부의 조선일보 담당관이 문제 기사의 복사본을 들고 나타나는 것이었다. 월간조선 측과 안기부 직원이 머리를 맞대고 "기사를 빼라" "못 뺀다" "그렇다면 이 대목은 빼자" "이 정도는 살려야 한다" 식으로 줄다리기를 하는가 하면 아예 기자나 편집 책임자를 연행하고, 인쇄를 막기도 했다. 인쇄되어 나온 지면엔 몇 줄이 빠진 곳에 쪽 광고가 임시 변통으로 채워진 경우가 있고 아예 표지 제목에 먹칠 인쇄를 입힌 적도 있다.

1985년 2·12 총선은 월간조선의 취재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혔다. 강경 야당 신민당의 등장과 김영삼 김대중의 정치재개, 그리고 학생시위의 격화로 민주화의 대세가 형성되고 있는 것을 감지한 월간조선은 선거 직후부터 부마사태, 10·26사건, 드디어 광주사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판매부수가 10만 대로 뛰더니 광주사태 특집호는 20만 부를 찍었다. 판매부수 1~2만 시대의 잡지는 교양이었지만 수십 만 부 시대의 월간지는 폭탄이었다. 내가 살던 강동구 길동 아파트 앞 노점상도 월간조선을 펴 놓은 채 읽고 있었다.

부마사태와 10·26 사건은 내가 평소에 취재해 놓은 자료가 있어 기사 작성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기사가 안기부 눈을 피해 실릴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정가(政街), 대학, 거리에서 벌어지는 격동을 매달 긴 기사로 담아 서점에 내어 놓고 판매조사 보고서가 올라오면 신동아와 비교하여 울고 웃고 하면서 들뜬 기분으로 지내던 1985년 이후의 80년대 후반기는 한국 역사상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한국내의 美 CIA"로 세 번째 해직



나는 미국 CIA의 한국내 활동을 심층취재의 대상으로 삼은 첫 기자이다. 1986년 2월호 월간조선에 <한국내의 美 CIA - 韓國現代史의 뒤안길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歷代 지부장 12명의 이력서>란 긴 기사(30여 페이지)는 안기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조선일보에서 해직(의원면직 형식)되도록 만든 기사이다. 당시 주한미국 워커 대사가 장세동(張世東) 안기부장에게 이 기사에 대하여 항의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기사엔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이 없어 나를 조사한 수사관들도 적대적이진 않고 오히려 취재원에 대하여 궁금해 했다. 나는 이틀 간 신문에서 취재원을 보호하는 데 진땀을 뺐다. 조사 책임자는 그 뒤 정치인으로 유명해진 정형근(鄭亨根) 수사단장이었다.

이 기사 중 CIA 측을 자극한 부분은 조직의 노출이었다.

<제임스 E. 딜래니(James E Delaney)란 56세의 미국인은 용산의 미 8군 내 사우스 포스트 관사에 살고 있다. 그는 크라운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 "외교 01-004"란 차 번호는 그가 주한 미 대사관에서 서열이 대사, 부대사, 문화원장에 이어 네 번째란 표시다. 그의 사무실은 미국대사관 8층, 워커 대사의 바로 옆방이다. 대외적 직함은 대사특별보좌관(Special Assistant to Ambassador)이다. SAA로 약칭되는 딜래니씨는 그러나 파티에서 만난 한국인에게 서슴없이 말한다고 한다. "나는 CIA에서 왔습니다"(I came from CIA). 그는 미국 CIA 한국지부의 제12대 지부장이다. 미 대사관의 7층은 무전실이다. 한때 청와대를 도청하는 곳이란 의심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미국 대사관에서 가장 보안이 엄중한 곳이다. 지정된 사람만 출입할 수 있다. 암호로 본국과 교신하는 장소이니까, 24시간 계속 근무한다. 5층엔 RU(Research Unit)란 부서가 있다. 84년 5월에 발행된 미 대사관의 전화번호부에는, 조사부란 뜻의 이 RU에 근무하는 미국인의 이름이 실려있다. 딜래니, 플레이어씨 이외에 김진악, 필립 선우, 제임스 D 쉘던, 브리짓드 모로우, 캐더린 다이아먼드 씨 등 모두 일곱 명이다. 이 RU부서는 물론 CIA 서울지부의 본부다. 미국인과 한국인 운전기사, 사무원까지 합치면 20명 안팎의 인원이다.>

중편 소설 분량의 이 기사는 한 달 간의 취재로 쓰여졌다. 역대 CIA 한국 지부장의 명단이 공개된 것은 이 기사가 처음이었다. 공개자료인 미국 대사관의 전화번호부가 중요한 소스였다는 정도만 밝혀둔다. 안기부 남산 분실에 연행되어 3일간 조사를 받고 나와 사표를 썼다. 필화(筆禍)의 여파로 김대중 출판국장은 한직(閑職)으로 옮겼다. 넉 달 정도의 강제 휴직 상태가 나에겐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모아 두었던 자료를 보완하여 두 권의 책을 썼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와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1986년이 다 가기 전에 나는 조선일보의 사내 연구소 연구원으로 복직했다가 곧 월간조선으로 돌아와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해인 1987년을 맞았다.

1980년대에 월간조선이 판매와 영향력 면에서 폭발적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은 민주화이고 이를 이용한 편집진의 주체적 대응, 그리고 회사 차원의 지원이었다. 무엇보다도 민주화의 열기에 뜨거워진 국민들의 호기심과 의분심(義憤心)이 월간조선의 저돌적 보도를 가능하게 한 동력이었다. 1987년 초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특종으로 정치판을 뒤흔들더니 6월의 대시위로 진행되고 이에 대응한 전두환 노태우 합작의 6·29 선언이 나오면서 직선제 개헌과 대선 국면으로 옮겨갔다.



6·29 선언은 누구 작품인가?



1987년 6월29일 오전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직선제 수용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을 발표한 직후 나는 무교동 민추협 사무실로 달려갔다.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는 기자들에게 둘러 싸였다. 그는 "중대한 결단으로 이를 환영한다"고 했다. 통역을 맡은 김정원(金正源) 보좌역이 "위대한 결단"(Great determination)이라고 번역하자 김 총재가 버럭 소리쳤다.

"위대한이라고 하면 안돼!"

뉴욕 타임스의 해버먼 기자가 "그러면 스몰 디터미네이션입니까"라고 물어 폭소가 터졌다. 그날 오후에는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의 동교동 자택으로 갔다. 그는 오전에 "인간에 대한 신뢰심이 떠올랐다"는 논평을 낸 뒤였다. 오후엔 외신기자 회견이었다. 김 의장은 영어로 답했다. 발음은 한국식이었지만 정확하게 어휘를 선택했다.

"나는 민주화에 관심이 있을 뿐 대통령직엔 관심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김영삼 총재를 대통령으로 밀겠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시 민추협 사무실로 오니 믿기지 않는 장면이 전개되고 있었다. 김 총재가 KBS 및 MBC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두 방송을 정권의 선전기관으로 규정, 시청료 안내기 안보기 운동을 벌이던 당의 총재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날은 누구든지 용서 받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노태우 정부 시절의 가장 큰 비밀은 "누가 6·29 선언의 진짜 주인공이냐"였다. 월간조선 1989년 6월호는 "6·29 선언, 全斗煥의 작품이다"는 기사를 실었다. 내가 쓴 이 기사가 실린 월간조선은 5월20일 경에 시중에 발매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하루 전 여야 중진회담에서 백담사에 가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국회에 불러 증언을 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정권 핵심부는 전두환 측이 정보를 흘렸다고 오인한 듯하다. 2005년에 나온 박철언(朴哲言) 당시 청와대 정책보좌관 회고록("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은 "노 대통령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고 썼다. 기사 요지는, <6·29 선언을 전두환 대통령이 먼저 제안했고 1987년 대선 때는 20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 1500억 원을 노태우 후보 측에 건넸으며, 남은 돈 550억 원은 퇴임 때 넘겼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가기 전 반납하겠다고 한 139억 중 50억은 노태우 측에서 보태준 것 등>이었다. 5월22일 청와대 서재에서 홍성철 비서실장과 박철언을 앞에 두고 화를 냈던 노 대통령은 곧 평정심을 되찾고 6·29 선언의 내막을 설명한 뒤 "당시 정국의 주역은 나였다"고 하소연하듯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튿날에도 노 대통령이 주재하는 월간조선 폭로 기사 대책회의가 집무실에서 열렸는데 <방우영 사장이 월간조선 부장과 조갑제 기자에게 엄중 경고하고 재판은 발매 정지하거나 대폭 수정해서 내는 것으로 하며 조선일보에 이번 파문을 잘 마무리한 후 대통령 이미지 업 홍보를 요청하기로 했다>고 적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경영진이 이런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당시(월간조선 부장대우였다)는 몰랐고 이 회고록을 읽고 처음 알았다. 나는 질책은커녕 특종상을 받았을 뿐이다. 박세직 안기부장이 모 호텔에서 만나자고 하여 한 30분 동안 잡담한 뒤 헤어졌다. 사람 좋은 박 부장은 차마 기자에게 "누가 그러더냐"고 물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권력과 언론 사이 힘의 관계가 바로 그 6·29 선언을 계기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991년부터 나는 월간조선 편집장 책임을 맡았다. 1992년 1월호가 6·29선언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5공 청와대의 통치기록 담당 비서관이었던 김성익(金聲翊) 씨의 비망록을 입수, "전두환, 역사를 위한 육성증언"으로 공개한 것이다(이 기사 덕분에 20만 부 이상을 찍었다). 6·29 선언 이틀 전 전(全) 대통령은 김 비서관을 불러 담화 준비를 지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노 대표 의견도 그렇고 직선제로 가야겠어. 내 소신은 정권이 민정당에서 떠나도 올림픽은 성공시켜야겠다는 거야. 그게 나라가 잘 되는 길이다. 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 직선제를 받는 것은 야당과 언론의 급소를 찌르는 거야. 노 대표가 부각되도록 하는 것이 제일의 목표다. 노 대표 이름으로 해야 돼. 당이 내가 시키는대로 꼬박꼬박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부각시켜 주어야 민정당도 산다."

김성익 씨는 "(6·29선언의) 구체적인 내용을 듣는 순간 나는 역사가 큰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듯한 충격과 흥분으로 잠시 멍멍해지는 기분이었다"고 썼다.

전두환-노태우의 도박이 성공한 것은 김대중-김영삼 분열 덕분이었다. 노태우 후보는 6·29 선언을 자신의 작품으로 발표하면서 전두환 대통령이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는 비장한 모습을 보였다. 요사이 말로 하면 "약속 대련"이었다는 이야기이다. 6·29 선언은 한국정치사상 가장 성공적인 게임으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선언문 한 장이 대치 국면을 풀고 피를 흘리지 않는 민주화로 가는 길을 연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 작품인가? 나는 전두환·노태우 공동작품이라고 본다. 6·29 선언을 실천한 사람은 노 대통령이었으므로 그의 역할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대단원



1980년대를 뒤흔들었던 민주화 시위의 대단원은 최루탄을 맞아 죽은 연세대 학생 이한열 장례식이었다. 1987년 7월9일 나의 메모장엔 이렇게 적혀 있다.

<서울시청 조기게양의 성공으로 고무된 시민, 학생들은 오후 2시30분께부터 "청와대로 가자!"면서 광화문으로 방향을 돌렸다. 동아일보 앞을 가로질러 수천 명의 전경들이 네 대의 페퍼포그 차의 엄호를 받으며 시위대열을 막았다. 수천과 수만의 팽팽한 대치. 고층 건물 위에서 내려다 보던 어느 시민은 "이 인파에는 최루탄이 아니라 기관총을 쏘아도 별 수 없겠다"고 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다닥… 다연발 최루탄의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자욱한 연기, 흩어져 달아나는 시위군중, 비명, 욕설… 2분도 안돼 인파로 뒤덮였던 태평로 거리는 무인지경으로 변했다. 페퍼포그 차가 신발, 안경이 흩어진 거리를 돌면서 소독약을 뿌리듯 최루가스를 내뿜었다. 태평로 일대는 거대한 가스실로 변했다.

"오늘 당장 이 정권을 끝장냅시다"고 외쳤던 시위대는 권력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또 민중의 열정이 단호한 물리력 앞에서는 허무할 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터이다.

그날 저녁 동숭동 흥사단 건물 앞에는 추도회 행사에 참여하러 온 3000여 명의 학생들이 광화문에서의 참패를 설욕하려고 보도블록을 깨고 있었다. 길이 500m에 걸친 거리가 순식간에 돌밭으로 변했다. 현명하게도 경찰은 접근하지 않았다. 밤 8시50분쯤 정보과 형사 3명이 탄 스텔라 승용차가 학생들 속으로 들어왔다가 붙들렸다. 형사 3명은 학생들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고 스텔라는 돌세례로 박살이 났다. 흥분한 학생들은 차를 뒤집어 놓고 기름을 끼얹었다. 불을 당기려 하는데 서울지역 대학생 대표자협의회 회장 이인영(李仁榮. 22·고려대 국문과 4년)이 핸드 마이크를 들고 나타나 "불을 질러서 안 될 이유 다섯 가지를 설명드리겠다"고 했다.

"불을 지르자" "안 된다"로 시민·학생들은 한 30분간 매우 민주적인 노상 토론회를 가졌다. 결론은 안 지르는 것으로 났다.>

아슬아슬하게 "불 지르기"를 피해간 이 장면은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의 상징으로 오래 기억에 남았다.



대선 판을 살벌하게 만든 鄭昇和 전 계엄사령관 인터뷰



6·29 선언 뒤에도 안기부의 언론통제는 한동안 힘 없이 계속되었다. 그해 10월 호 월간조선과 신동아는 다 같이 "이후락(李厚洛) 인터뷰"를 실었다. 대선 출마가 확실해진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이후락 전 정보부장의 증언은 외교문제로 번질 가능성도 있었다. 안기부는 두 잡지의 인쇄를 막았고 이게 정치문제가 되자 며칠 뒤 풀었다. 안기부의 개입이 광고 역할을 하면서 두 잡지는 기록적 판매부수를 보였다. 월간조선은 인쇄부수 40만 부를 훌쩍 넘겨 한국 잡지 사상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이정표를 세웠다. 참고로 일본의 문예춘추는 1972년 "타나카의 금맥과 인맥" 기사로 현직 수상을 실각시킨 적이 있는데 이때 100만 부 이상을 찍었다고 한다. 인구 비례로 계산하면 1987년 10월호(9월호도 정승화 인터뷰로 40만 부 돌파) 월간조선 판매 기록은 문예춘추를 능가한다. 한강 이남(以南)의 어떤 신문보다도 많은 부수였다. 현재의 문예춘추 판매부수는 약 37만.

1987년 정국에 끼친 영향 면에선 월간조선 9월호에 실린 정승화(鄭昇和) 계엄사령관 인터뷰가 컸다. 이 기사가 계기가 되어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정 장군을 부총재로 영입했다. 군사변란이 12월 대통령 선거의 가장 큰 쟁점이 되면서 살벌해졌다. 노태우 캠프는 김영삼을 주적으로 삼아 공격했고 김영삼은 "군정종식" 구호로 대응했다.

전두환 정권이 가장 큰 취약점으로 알고 숨겨 왔던 12·12 사건을 처음으로 공론화시킨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정승화 장군 인터뷰는 월간조선 유정현(劉正顯) 부장이 나에게 지시하여 이뤄졌다. 12·12 사건으로 고초를 겪고 나와 서울 강남 대치동 아파트에서 칩거중이던 정 장군의 친구가 유 부장에게 인터뷰의 뜻을 알려와 내가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인터뷰가 계기가 되어 나는 정승화 장군이 2002년에 향년 73세로 별세할 때까지 친하게 지냈다.

나는 사흘 동안 그의 아파트로 출근하면서 집중 인터뷰를 했다. 대화를 이어가면서 어떤 예감이 생겼다. 현직 계엄사령관에게 가한 전두환 그룹의 행위에 대한 역사의 보복이 있을 것이란 생각.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 소장) 측은 자신들이 먼저 쏘아 놓고는 정승화 측 경비병의 선제 사격이 12·12의 발단이 되었다고 주장해왔었다. 그날 밤 정 장군을 연행한 합동수사본부 요원들은 현직 계엄 사령관이고 육군 대장인 그를 물 고문했다. 정 장군은 칩거 생활중 자신이 겪을 일들을 차분히 녹음해두었다. 그는 헤어질 때 수십 개의 녹음 테이프를 나에게 건네주었고 나는 이를 풀어 대선 기간 중 "12·12 사건-정승화는 말한다"(까치 출판사)란 책으로 펴냈다. 이 테이프에서 정승화 장군은 물고문 당하는 장면을 설명하다가 "내가 6·25 때 죽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고 울먹였다.



12·12 사건이 녹음되었다!



그 인터뷰로부터 8년이 흘러 1995년 9월호 월간조선은 결정적 특종을 했다. "12·12 사건, 장군들의 현장 육성 녹음 테이프". 12·12 사건 당시 정승화 장군 편에 섰던 이건영(李建榮) 3군 사령관 전화를 보안사가 감청한 90분짜리 테이프였다. 국방부 장관과 계엄사령관이 무력화된 혼돈 속에서 육군본부와 합수부로 갈라져 피 말리는 긴장 상태의 장성들 사이에서 오고간 긴박한 통화가 현장중계처럼 녹음된 희귀한 자료였다. 나는 우종창·김기철 기자가 구해 온 이 테이프를 듣고는 독자들이 직접 육성에 접할 수 있게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한국 잡지 사상 처음으로 녹음 테이프를 부록으로 내어 놓았고 20만 부를 찍었다. "전두환이 하고 이놈아들, 다 죽이든 해버릴테니"라고 외치는 장태완 당시 수경사령관은 영웅이 되었다.

이 테이프는 한국 군부 지도부의 적나라한 인간상을 드러내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누가 눈치를 보는지, 누가 버티는지 실시간으로 드러난 것이다. 테이프의 마지막엔 신원불상의 두 장교가 상황이 끝난 뒤 나누는 잡담성 통화가 녹음되어 있었다.



-하소곤이 총 맞았지.

-복부 관통돼 가지고.

-원로들 싹 바뀌더군, 엘리트들로.

-우리 박형 어디 한 자리 없는가.

-사양을 하고 있습니다.

-참 불행한 일이야. 정승화, 참 걔, 그 3군 사령관도 그렇고, 참 높은 게 좋은 거 아니에요.

-그저 편하게...

-심부름이나 열심히 하고.

-은하식당에서 만두에다 소주 한 잔 하는 팔자가 제일 좋지.

-변동이 있으면 좀 알려줘요. 요즘 말이야 귀가 멀어서.

-알았습니다.

-오케이, 고맙습니다.



12·12 사건 녹음 테이프 발견 두 달 뒤 박계동 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 비자금의 존재를 폭로했다. 1992년 12월 대선 때 민자당 후보로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거액의 선거자금을 받았던 김영삼 대통령이 곤혹스러워진 상황에서 김대중 총재가 "나도 노태우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먼저 치고 나오니 YS는 탈출로를 뚫기 위하여 "5·18 특별법"을 소급 입법으로 던졌다. 그때까지 12·12 사건과 5·18을 역사의 장으로 넘기기로 했던 것이 정치권의 합의였고, 김영삼 대통령도 같은 입장이었는데 12·12 사건 녹음 테이프와 노태우 비자금 폭로로 조성된 새로운 상황을 맞아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12·12, 5·18을 다룬 역사 재판정에선 증거로 제출된 "12·12 사건 녹음 테이프"를 주제가처럼 수시로 틀었다.

김영삼의 이른바 역사바로세우기 드라이브는 전두환 노태우 구속기소로 진행되어 결국은 보수층을 분열시켰고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는 길을 열었다.

조지 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한다. 그런데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는 명언(名言)을 남겼다. 현재의 권력을 가진 김영삼이 과거를 지배했으나 미래는 그렇게 하지 못한 셈이다.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광주사태와 12·12 사건에 관해서는 월간조선의 일련의 보도가 가장 정확하였고 역사를 기록하면서 역사를 만들었다고.



가장 위대한 이야기



1988년 9월17일은 많은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서울올림픽 개막일, 날씨가 좋았다. 전날 소낙비 퍼부은 뒤의 화창한 가을 하늘, 나는 텔레비전으로 개막식을 구경하고 벅찬 감격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잠실로 달려가 그 멋진 날의 쾌감을 만끽했다. 서울을 세계로 알린 개막식은 군인 출신 박세직(朴世直) 조직위원장의 치밀한 리더십과 문학가 이어령(李御寧) 선생의 유쾌한 상상력이 어우러진, 그야말로 문무(文武)합일의 미학(美學)이었다. 나는 올림픽 기간 중 경기장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밴 존슨이 100m 경주에서 우승할 때(뒤에 약물중독으로 실격 처리), 터키 역도 선수가 몸무게의 세 배를 들어 올릴 때, 칼 루이스가 멀리 뛰기에서 금 메달을 딸 때도 거기에 있었다.

서울올림픽이 끝난 뒤 나는 이 행사가 세계사를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신비한 느낌을 받았다. 서울올림픽의 모토인 "벽을 넘어서"는 불멸의 주제가 "손에 손 잡고"의 가사 "breaking down the wall"로 승화 되었고 다음 해 동구 공산권 체제가 차례로 무너지면서 하나의 예언이 되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열릴 때 동서독 젊은이들은 "손에 손 잡고"를 합창했다. 서울올림픽은 국내적으론 민주화의 충격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민주화 세력이나 집권세력이나 너무 나가면 민족적 행사를 망치게 된다는 자체 견제 심리가 발동, 1987년 6·29 선언이란 대타협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동구와 소련 사람들의 비판의식을 일깨우는 데 서울올림픽 중계가 큰 영향을 끼쳤다는 말을, 나는 동구권을 취재하면서 많이 들었다. "전란과 착취의 후진국으로 알려진 한국이 저렇게 잘 사는데 우리는 뭐냐?"는 자각이 1989~1991년에 걸친 반공(反共)봉기의 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박종규 전 경호실장이, 서울올림픽 개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안할 때부터 이를 국가발전의 대전략으로 이용한다는 계산이 있었다. 이 꿈을 전두환 대통령이 다시 살려내고 유치작전을 지휘한 노태우 장관이 조직위원장이 되어 이를 이어 받고 박세직 씨가 완결 짓는 과정에서 한국의 수많은 인재들이 참여하였다. 북한 정권은 아웅산 테러, 대한항공 폭파로 대응했으나 두 사건에서 범인이 모두 기적적으로 잡혀 그들을 고립시켰다. 체면치레로 유치한 세계청년 축전에 너무 많은 돈을 써 1990년대의 경제파탄으로 직행했다. 6·25 공산군 남침 때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도움을 우리는 서울올림픽을 통해서 갚은 셈이다.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세 악당의 공격을 받았던 한국이 그 40년 뒤 서울올림픽을 전략적으로 활용, 국제공산주의 붕괴의 단초를 제공한 것 이상의 위대한 드라마가 있을까? 해방동이인 나는 입 버릇처럼 한국 현대사를 "가장 위대한 이야기"(The greatest story ever told))라고 말하곤 한다. 기자로서 그 이야기의 한 공동저자(著者)였다는 생각도 한다.

서울올림픽 성공의 가장 큰 공적자는 10·26 사건으로 잊혀졌던 올림픽 유치 계획을 다시 살려낸 전두환이었지만 그는 개회식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서울올림픽 유치 때 구축한 외교 인프라를 이용, 헝가리 등 동구 및 소련 중국과 잇따라 국교를 수립하고 퇴임 직전에는 베트남과도 수교했다. 1975년 4월 부산항, 월남 사이공 함락 직전 빠져나온 한국해군 철수선이 입항하는 것을 유양수 전 월남대사와 함께 부두에서 착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던 나는 1996년엔 하노이 근교에서 월남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지압 장군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세계사적 전환기가 만들어준 기회를 살려 한국인의 활동공간을 지구촌 전체로 확장시키고 경제의 활로를 연 분으로 역사에 굵게 기록되어야 하는데 과소평가를 받고 있다. 나는 그가 건강할 때 장시간 인터뷰를 하여 2007년 "노태우 육성 회고록"으로 낸 적이 있다. 민주화의 충격을 흡수하고 견디어 낸 그의 지도력은 그의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이 주도한 1980년대는 결코 "암울한 시절"이 아니었다. 10년간 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0.1%로서 세계 1등이었다. "내가 중산층이다"는 국민들이 70%에 이르렀고 이 저력이 민주화의 혼란을 완충시켰으며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다. 1980년대는 역사가 굉음을 울리며 질주한 그런 시절이었다. 전두환 노태우와 함께 재평가 되어야 할 1980년대는 각자의 가치를 위해 싸웠던 “순수의 연대”(年代)였다.



북한, 그 충격의 실상



나는 월간조선에서만 22년을 근무했다. 1983년부터 기자, 1991년부터 2005년까지(1996~1997년은 하버드 대학 니말 팰로우 유학)는 편집장(2001~2005년 사이 대표 겸직)이었다. 1989년 무렵부터 나의 새로운 관심은 북한이었다. 대한항공 폭파범 김현희를 세계최초로 1주일간 인터뷰한 기사가 계기였다. 김현희는 "고참 기자라면서 어떻게 북한을 그렇게 모릅니까"라고 했다. 내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도 모르고 베토벤이 빵집 이름인 줄 알았다는 그녀를 놀리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남쪽에 와서 깨달았습니다. 여기서는 히스토리(history)를 가르치고 북쪽에선 히즈 스토리(his story)를 가르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무렵 북한을 탈출, 미국에서 보호를 받다가 귀국한 신상옥(申相玉) 감독을 만나 맨 먼저 물어본 것은 "김정일이 파티에서 남한 유행가를 부른다는데?"였다.

"남한이 부러워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 자들은 마을을 약탈한 뒤 지들끼리 호화판으로 마시고 노는 마적단입니다. 언젠가는 남한도 그렇게 하겠다는 심정으로 부르는 노래이지요."

"12·12 사건 녹음 테이프"로 재미를 본 월간조선은 그 다음호엔 신상옥 감독이 몰래 녹음해 가지고 온 김정일과의 대화를 부록 테이프로 냈다. 김정일 육성이 세계에 알려진 것은 신상옥 감독이 녹음한 대화가 처음이었다.

중국이 개방되면서 서울엔 조선족 사람들이 시청 지하도 등에서 노점상을 펴곤 했다. 그들 중 한 아줌마는 북한을 드나들면서 보따리 장수를 하던 이였다. 그를 집중 인터뷰하여 정리한 "목탄차로 달리는 공화국"은 북한에 대한 그 어떤 환상도 거부하는 충격이었다. 1991년 1월호 월간조선 신년호 부록은 "북한, 그 충격의 실상"이었다. 나와 김동현(金東鉉) 기자가 두 달 만에 만든 이 책의 부제(副題)는 "살아본 사람과 가 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월간조선은 내재적 접근 식의 공허한 논리를 거부하고 북한사람들의 삶을 통한 접근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 부록은 일본 출판사 고단샤(講談社)에 의하여 번역 출판되었는데 일본인들에겐 가장 유명한 북한 입문서가 되었다.

1994년 3월호 월간조선은 "러시아를 유랑하는 탈북 벌목공"을 실었다. 나중에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이 되는 황성준(黃晟準)씨가 쓴 기사인데 이는 두 가지 일을 만들었다. "탈북자"라는 말의 확산, 그리고 탈북자 거부에서 수용으로의 정책 전환. 1994년 월간조선은 북한 인권 문제 보도로 관훈클럽 상을 받기도 했다. 북한에 대한 관심을 지속한 월간조선에 돌아온 것은 두 건의 큰 특종이었다. 1997년 황장엽 비서 망명 특종은 김용삼(金容三) 기자의 작품이다. 그는 황장엽 탈출을 돕던 민간인을 통하여 몇 달 전부터 준비 과정을 파악, 나에게 보고했고 황 씨가 북경 주재 한국 공사관으로 들어간 직후 조선일보에 기사를 썼다(이때 나는 하버드 대학교 니만 팰로우 연수중이었고, 편집장은 서희건). 월간조선은 황장엽 선생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좌파정권과 고독한 싸움을 할 때도 그의 곁에 있었다. 그는 수많은 명언들을 남겼는데 "무산자 독재는 무식자 독재이다. 그러니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당시 안기부 차장으로서 황장엽 망명 사건을 관리했던 이병호(李炳浩) 전 국가정보원장은 최근 나온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민족적 양심에 따른 탈북이라는 그의 설명은 거짓 없는 진정한 탈북동기였다. 정의와 양심에 따라 자신을 희생하면서 행동하는 보기 드문 선비형 인물이었다. 가족에겐 참으로 못할 짓이었다. 그의 부인 아들 손자 손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저자는 <황장엽은 북한정보의 보고 그 자체였다>고 했다. 그의 탈출을 계기로 북한 지배층 안에서 양심적 각성이 일어날 수 있다는 기대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말년에는 그가 지닌 정보와 지혜도 모두 무시되었다. 4억5000만 달러가 제공되면서 시작된 햇볕정책은 깊은 수렁에 빠진 김정일에겐 구원이었다. 저자는 <만일 이 구원이 없었더라면 김정일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우리는 역사의 기회를 날려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고 했다.

2002년 5월호 월간조선(김성동 기자)은 미국 의회 보고서를 인용, 김대중 정부가 "김대중-김정일 회담"전에 현대그룹을 통하여 북한정권에 거액의 현금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그해 가을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이 국회에서 이 기사에 근거하여 산업은행 총재를 지낸 엄낙용 씨에게 현대상선에 제공된 대출금의 성격에 대해서 물었고, 엄 전 총재는 사실대로 털어놓음으로써 대북(對北)불법 송금 사건이 터졌다.

원세훈 국정원장이 재직중일 때 조사팀이 구성되어 국세청과 FBI와 공조하면서 미국 내 김대중 비자금 의혹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1억 달러 수표 사본까지 입수한 경위를 파고든 시리즈 기사는 나와 조성호 기자가 같이 쓴 것인데 12·12 사건 녹음 테이프처럼 훗날 결정적 특종이 나타나 종지부를 찍을지도 모르겠다.

월간조선과 나는 역대 대통령의 비자금 관련 취재를 많이 해 왔는데 이 부분이 가장 고난도의 취재여서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딸이 관계된, 현금 13억 원이 든 돈 상자 사건은, 내가 2012년에 월간조선에 기고한 기사로 인하여 수사 및 재판으로 이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부른 비자금 사건에 대한 사실관계는 2023년 조갑제닷컴이 출판한 당시 수사 책임자 이인규(李仁圭) 변호사의 회고록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로 확정된 것이나 다름 없다. 나는 박정희 전기 13권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김대중과 관련한 책도 두 권을 썼다.



보수적 자유주의자



2005년 월간조선에서 퇴직한 이후엔 조갑제닷컴과 월간조선 기고, 그리고 유튜브가 나의 주된 매체이다. 2003년부터는 보수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 비서실장을 지냈던 이병완 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2007년 대통령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의 두 주역은 ‘양갑(兩甲)’이란 말도 남겼다. 아스팔트 우파의 핵심인 국민행동본부 서정갑(徐貞甲), 그리고 조갑제(趙甲濟)였다. 기자가 운동가가 될 수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 조건에 따라선 충분히 가능하고 나는 모순을 느끼지 못했다. 사실을 확인하고 전달하는 데는 객관적 입장, 그 사실을 해석하고 활용할 때는 정치적 입장이 되는 것은 언론에 대한 배신이 아니고 언론의 적극적 활용일 것이다. 조지 오웰도 "정치적 견해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은 글쓰기"의 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고, 일본 통치 시절 한국 기자들이 그렇게 살았으며 동구 공산권의 언론인들도 마찬가지였고, 지금의 러시아 기자들도 그렇다.

기자들이 나에게 보수 또는 극우라는 구분을 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사실에 관한 한 늘 나의 입장은 중앙선이었다. 1987년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차선(車線)이 왼쪽으로 휘어버리니 내가 오른 쪽에 서 있게 된 것 뿐이다. 나는 보수적 자유주의자(conservative liberalist)이다. 사실에 관해선 자유주의자요, 정치성향은 보수다."

이런 입장을 견지하다가 보니 어느 새 나의 주요 직무가 좌우 양쪽에서 만들어내는 거짓과 선동과 왜곡에 맞서는 게 되고 말았다. 취재의 방향성은 좌우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월간조선에는 광주사태를 현장에서 취재한 기자가 세 사람 있었다. 사건 당시 국제신문 기자 조갑제, MBC 기자 오효진(吳効鎭), 조선일보 국방부 출입 기자 조남준(趙南俊). 1980년 무렵엔 광주사태 사망자를 둘러싸고 재야에서 주장하는 2000명說이 난무했다. 우리는 현장 취재의 경험을 살려 계엄당국에서 발표한 수치가 크게 틀리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 반발을 불렀지만 이제는 사실로 확정되었다. 헬기 기총 소사에 의한 살상도 없었다(문재인 정부 시절 국방부 산하 특조위가, 있었다는 보고서를 냈지만 헬기 조종사도 사망자도 특정하지 못한 부실 조사였고 법원에서도 "살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와서 탈북자 몇 명이 광주사태 때 북한군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말을 퍼뜨렸다. 최초의 발설자를 만나 물어 보고 나는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지만 이 낭설은 순식간에 보수진영에 퍼졌다. 내가 종편 채널에 나가 북한군 개입설을 논리적으로 반박했더니 이른바 우파 진영에서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주장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비판은 당시 합참의장으로 한국 방어의 최고위 작전 책임자였던 유병현(柳炳賢) 장군이었다. 그와 가진 장시간의 인터뷰를 소개해도 소용이 없었다. 희극적인 것은 예비역 대장 등 장성들까지 음모론에 합세하는 모습이었다.

이때부터 이른바 보수 지도층의 영혼이 음모론에 병들기 시작했고 2020년 4월 총선 이후엔 황당무계한 부정선거론에 휩쓸려 도덕적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아들이 가짜 신체검사로 병역을 면제 받았다는 선동에도 나는 텔레비전 토론 등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우파 쪽에서 생산한 거짓말을 덮는 것은 적어도 지식인이 할 짓은 아니란 생각에서였지만 늘 가까이 만나는 사람들을 면전(面前)에서 공격하는 데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부족한 재주를 가지고 태어나 기자를 한 덕분에 흥미진진한 대한민국 현대사 기행(紀行)을 54년째 계속하고 있는 나는 한국언론의 미래를 비관하는 편이다. 우리 시대 언론의 가장 큰 실수는 한글전용(專用)으로서 한국어를 암호나 소리로 전락시켜 고급정보와 교양의 토대를 무너뜨린 것이다. 한국어로 먹고사는 직업인이 그 존재근거를 망가뜨린 대가를 비싸게 치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휘력의 쇠퇴와 고급정보 소통의 단절, 국민교양의 붕괴에 따른 분별력의 약화, 그리고 국가엘리트의 실종이란 연쇄반응. 언어의 중요성을 몰랐던 이승만 박정희, 알면서도 편한 쪽을 선택했던 기자들이 몰고온 한국어의 위기는 체제위기를 넘어서는 중차대한 문명적 위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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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aidn 2025-02-17 오전 11:11

    패륜아, 범죄자 이재명이가 우리사회에 그리고 우리 어린이 우리 청소년들에 끼치는 폐악을 무슨 일보다 먼저 우리사회는 물론 전세계에 알리는 일을 해야한다
    윤석열의 하야니 뭐니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삶의 근본을 바로잡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또 있겠나?
    공자님께서 말씀하셨다 "회사후소" 흰바탕이 마련된 후에 그림을 그려라 "기본이 기초가 마련된뒤에 집을 지어야 된다"
    삶믜 기본을 기초를 허무는 이재명을 먼저 제거한 후에야 그 위에서 일을 하든지 집을 지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조갑제 군은 근본을 기본을 모르고 날뛰는 이준석이 보다 조금도 나은 점이 없다

    조갑제 군아, 자네는 애국을 알기나 하는 가 ?

  • 북한산 2025-02-14 오전 1:49

    기자들에게 부탁할 말은 '예견된 인재'란 말은 쓰지말아라이다. 예견되었으면 미리 막아야지 지도 모르고 있다가 꼭 사건 터진후에 사실은 예견되었던 일이라고 하면 사건 당사자들 뒤통수치는 비겁하고 무책임한 언사다. 미리 막는 것이 입법,사법,행정과 함께 제 4부이고 목탁역할하는 기자의 몫이다.

  • 북한산 2025-02-12 오전 9:26

    조갑제대표님 기자활동을 읽으니 기자로서 훌륭하다. 하지만 뭔가 아쉬운 면이 있다. 그것은 조대표님이 윤석렬, 한동훈이를 '법기술자'라고 비판한 것처럼 조대표님도 '기자 기술자', 특종 기술자라는 생각이 든다. 특종이 일반 시민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게 그리 자랑스러운가? 이해안된다. 정치인이 아닌 기자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미리 막고 선도하는 역할보다는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사실파악에 몰두했다는 느낌이다.물론 그 사실파악이 다음 일의 바른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하지만 과거발굴에 치우친 느낌이다. 전에 중앙일보에서 기초생활수급자에서 제외된 차상위계층의 어려움을 심층보도해서 결국 정부에서 차상위계층으로 복지혜택을 넓혀준 적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방향제시하는 통찰력이 부족하고 인문학적,휴머니즘적 관점이 약하다고 본다. 즉 사람을 사랑하고 약자를 보듬는 역할은 약하다고 본다. 미리 경고하여 예방하는 역할과 약자보듬기가 약한 점 이 두가지가 조갑제기자에게 아쉬운 점이다.

  • 이중건 2025-02-11 오전 7:47

    남은 한 건의 특종도 평생하기 힘든데 ... 그만큼 기자 정신이 뼈속같이 무장되어있다는 것이다. 과히 언론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54년의 기자 답은 기자 인생 만수무강하여 인생 멋 있는 마무리를 하시리라 믿는다.

  • 소월하인 2025-02-10 오후 8:33

    장편 서사시를 보는 감동입니다. 이 세상에 대표님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장)는 말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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