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浩然의生覺
- 2026.10.17 19:29 (조회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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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가을이다.
계절이란 참 신비로워서 때가 되면 군말 없이 제 옷을 바꿔 입는다. 여름내 뭉클거리며 게으름을 피던 아침 태양이 언제 그랬냐는 듯 비스듬히 올라오더니, 가을에 접어들자 높게 치솟아 거실 구석구석을 밝고 넉넉한 빛으로 채워준다.
창가를 타고 들어오는 그 따스한 햇살을 맞이하고 있으면, 괜스레 마음까지 몽글몽글해지며 기분 좋은 아침이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 집의 아침을 진짜로 깨우는 건 햇살보다 빠른 아내의 분주함이다. 아침 일찍부터 혼자 쌩쌩 달려가며 설레발을 치는 아내의 모습에 웃음이 난다.
오늘은 바로 손주가 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자주 보는 편인데도 아내에게 며느리는 언제나 ‘고마우면서도 조금은 어려운 손님’인가 보다. 집안 여기저기를 청소기로 밀고 닦으며 바쁘게 손을 움직인다. 생각해보면 이곳으로 이사를 온 지도 어느덧 17개월째 접어든다. 사실 평생을 나고 자란 고향 단독주택을 떠나 이 나이에 아파트라는 네모난 시멘트 상자로 터전을 옮기는 일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수록 익숙한 곳을 떠나는 게 두려운 법이지만, 어디 세상살이가 내 고집대로만 되겠는가. 기왕 이사를 결정하면서 나는 아내에게 딱 두 가지 조건을 제안했었다.
첫째는, 평생 쌓아둔 가재도구와 옷가지들을 과감히 두고 가자는 것이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이른바 ‘미니멀 라이프’를 즐겨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평생 땅을 밟고 살아온 단독주택 생활을 청산하고 아파트에 살 거라면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고층에서 살아보자는 요구였다.
짐을 대폭 줄여서 가볍게 오자는 첫 번째 제안에는 쉽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층수를 정하는 문제에서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고층을 원하는 나와 달리 아내는 한사코 2층을 고집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아내의 고집에 밀려 2층에 둥지를 틀게 되었는데, 17개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역시 아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2층에 살아보니 정말이지 이보다 더 좋은 층이 없다. 창문 밖으로 계절마다 바뀌는 정원의 나뭇잎이 눈높이에서 넘실거리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계단을 스르륵 내려가면 바로 땅을 밟는다. 이건 정말 나이 들어 아파트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을 모아 찬양하게 되는 ‘2층 예찬론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렇게 편안했던 것은 아니다. 평생을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처음 4개월 동안 아파트에서 생활할 때는 솔직히 참 많이 힘들었다. 머릿속 생각은 전혀 정리되지 않았고, 매일의 삶이 마치 아무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진 것처럼 삭막하게 느껴졌다. 익숙했던 풍경과 이웃들이 사라진 자리는 생각보다 컸고, 적응하는 데 꽤나 애를 먹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스스로 삶의 루틴을 정하기 시작했다. 이 낯선 환경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주변의 지리와 대중교통 노선부터 하나하나 익혀 나갔다. 동네를 산책하며 새로운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고, 매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습관을 만들어 갔다. 그렇게 나만의 생활 정원을 가꾸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에 안도감이 찾아왔다.
‘삑- 삑- 삑-’
오전 10시가 되자 현관 도어록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문이 열리더니 초딩 3학년짜리 손주 승현이가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 들어온다. 늠름하게 야구 유니폼을 차려입고, 왼손에는 야구 글러브를 꽉 끼고 있는 꼴이 제법 그럴듯하다. 알고 보니 ‘양천구 어린이 야구 대표선수’란다.
이 녀석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기가 막힌다. 요즘 드럼도 치고, 야구도 하고, 태권도 도장도 다닌단다. 거기다 학교에서는 학급 부회장까지 맡고 있단다. 5학년이 되면 전교 회장에 출마하는 게 목표라며 눈을 반짝이는데, 보고만 있어도 대견하고 웃음이 절로 나온다.
녀석은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와서도 잠시를 가만히 있지 않는다. 거실 한복판에서 폼을 잡으며 투구 연습을 하기 시작한다. 나도 평생 야구를 본 가락이 있는지라,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마음으로 한마디 거들었다.
“야, 승현아! 공을 던지고 나서 착지할 때 몸 균형을 딱 잡고 멋있게 마무리를 해야지!”
나름대로 원포인트 레슨을 해줬건만, 녀석은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에이,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래요!” 기가 차서 허허 웃고 말았다.
사실 나는 평생 ‘삼성 라이온즈’의 열혈 팬이었다. 하지만 이 조그만 손주 녀석 때문에 요즘은 괜히 ‘KT 위즈’ 경기를 유심히 보게 되고, 은근히 마음이 간다. 손주 귀여운 맛에 평생 지켜온 야구 지조마저 흔들리는 걸 보면, 내 피는 속여도 내 내력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승현이는 할머니가 정성스레 차려준 점심을 맛있게 먹더니, 오후에는 수원 야구장에 가야 한다며 바쁘게 짐을 챙긴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한편으로는 요즘 아비 노릇 하기도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 녀석도 자기 사업하느라 하루하루 피말리고 힘들 텐데,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제 자식 야구 시합 따라다니며 수발을 들고 있다.
‘에휴, 나 같으면 피곤해서 생각도 못 할 일이다.’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식을 위해 제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아들의 뒷모습에서 문득 예전 내 모습이 겹쳐 보인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은 어쩌면 저렇게 변함없이 이어지는 것일까.
그렇게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가 손주 녀석이 떠나간 주말 오후, 집 안에는 다시 그윽한 가을 정적과 함께 따스한 햇살이 깊게 깔린다.
2층 창가로 바라보는 가을 풍경이 오늘따라 유난히 푸근하다. 낯선 아파트 2층에서 맞이하는 17번째 달의 가을. 내 고집을 내려놓고 얻은 이 작은 거실 창가에서, 나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온기를 느끼며 또 한 번 가을이 익어가는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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